오카다 아야카

 

'''오카다 아야카''' (岡田 彩花)
[image]
'''출생일'''
1998년 11월 6일(26세)
'''출신지'''
도쿄
'''신체'''
키 160cm
'''혈액형'''
A형
'''별명'''
'''아야카'''
'''소속 그룹'''
AKB48 팀 4
'''그룹 경력'''
'''AKB48 13기생'''
AKB48 팀 4 (2013~2017)
'''소속사'''
쇼치쿠게이노
'''링크'''

[image]
[image]
1. 개요
2. 특징 및 대인관계
2.1. 자세한 활동 내용
2.2. 여담
2.3. 호구(...) 언니
3. 활동


1. 개요


AKB48의 13기생 출신이다.
캐치프레이즈는 '''겉보기에는 쿨한 여자, 속은 바보 같은 신기한 아이!''' (見た目はクールな女の子!中身はおバカな不思議ちゃん!)
지금은 캐치프레이즈를 쓰고 있지 않다.

2. 특징 및 대인관계


AKB48 오디션에 지원한 이유는 아버지의 권유 때문이라고 한다.
존경하는 선배 멤버는 오오시마 유코야마우치 스즈란이며, 현재는 시마자키 하루카이다.
동기인 무라야마 유이리, 키타자와 사키와 사이가 좋다.
후배는 니시노 미키. 졸업한 마에다 미츠키츠치야스 미즈키와도 사이가 좋다.
벽, 천장, 바닥 등을 좋아하는 4차원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제일 좋아하는 벽은 요코하마 퍼시피코의 벽. 평행선이 마음에 든다고.
아사히 신문 취재를 통해서 부친의 부고를 냈다. [1][2]
아야카의 팬이 아니라도 눈물이 쏙 빠지는 내용인데 앞서가는 동기들을 보며 AKB활동에 대해 고민을 하던 중 AKB오디션을 권유하고 아낌없이 응원하셨던 아버지가 도쿄돔 공연을 앞두고 병으로 돌아가신 것. 콘서트를 기대하셨던 아버지를 위해 특별히 센터를 맡아 벚나무가 되자를 불렀다. 영상을 보면 멤버들 얼굴에 눈물이 그렁그렁한데 단지 감동적인 가사나 도쿄돔에 섰다는 북받침 때문은 아니었던 것.
아직까지도 동기인 삿호의 캐치프레이즈를 보면 기겁을 한다. 하지만 그런 모습 때문인지 오히려 멤버와 오타들로부터 삿호의 캐치프레이즈를 따라하도록 종용받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대부분 정중하게 거절하는 편. 그러다 등쌀에 못 이겨 가끔 해줄 때 극장 분위기는 그야 말로 축제분위기.
참고로 오디션을 권유했던 오카다의 아버지는 2014년 돌아가셨다. 당시 콘서트가 있었던 오카다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킬수 없었다. (이 사실은 유이리와 미네기시한테만 알렸다고 한다.)

2.1. 자세한 활동 내용


2011년 9월 13기 오디션을 통해 AKB48에 가입하였다. 오디션 내용을 전해들은 아버지가 아야카에게 권유하였다.
당시 나이는 중학교 1학년으로 13기 중에서도 상당히 어린편이었다.
가입전에 댄스를 조금 배웠다고 한다. 그래서 토가사키도 '13기 중에서 댄스 표현력이 좋은아이' 라고 칭찬해주었다.
초등학교 때는 당시 아이돌에게 큰 흥미는 없었지만 AKB라는 존재는 당시에 엄청 유명했기에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2011년 AKB는 최전성기를 달릴때였고 아직 마에다,오오시마 구도가 확실할 때였으니 모르는게 이상하긴 했다. 물론 그 때문에 당시 오디션은 상당히 경쟁이 치열했다고 전해진다. (호시노 미나미 , 미야마에 아미 , 오카다 나나 , 니시노 미키 등 이후 46,48 가입할 멤버들이 다수 응모한 오디션이었다.)
어쨌거나 합격 후 어린나이임에도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연구생들과 13기 동기들을 쫒아갈려고 노력했다.
2011년 연말즈음해서 6주년 특별기념 공연이 있었고 이 공연에서 13기는 [아이타캇타]를 피로했는데, 아야카는 프런트 멤버에 들어가진 못했다. 어찌보면 이 때 부터 불운은 시작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2012년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된다.
2012년 13기생가 추가되면서 새롭게 '연구생 RESET 공연'이 이 시작되었다. 아야카는 이 공연의 프런트 멤버로 선발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지만 아쉽게도 프런트에는 선택되진 못했다.
당시 13기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재능은 아이가사 모에 , 오오시마 료카 였다. 특히나 발군의 댄스실력을 자랑한 모에의 실력이 워낙에 후덜덜했기 때문에 다른 멤버는 춤에 춤자도 못낼 정도로 레벨이 달랐다. 거기에 미디어 담당 미츠무네 카오루가 있어서 거의 모든 푸쉬를 몰빵받았으니 다른 멤버는 뭐 제대로된 기회도 못받았다고 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아야카는 13기에선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나마 유일한 캐릭터는 울보라는 점 뿐일 정도로 안습상황.
13기 자체도 문제인게 역대 가장 많은 인원수를 뽑은 오디션이었던게 문제였다. 당시 AKB는 선배들이 전혀 졸업을 안하고 연구생 숫자만 비정상적으로 많아지는 이상한 상황이었다. 거기에 9기,10기,11기,12기 선배도 아직 못큰 상황이라 기회를 나눠줄 여유가 없었던것도 컸다.
어쨌거나 2012년 한해 이와타테 사호 , 무라야마 유이리 등이 극장과 악수회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조금씩 성장하기 시작하는 반면 아직 어렸던 아야카는 성장하기에 시간이 많이 필요했는데 문제는 동년도 7월에 괴물 연구생 세명이 가입하는 시기였다.
13기에 줘야할 푸쉬의 대부분을 14기 삼총사에게 너무 일찍 넘겨버리면서 아야카는 연구생 프런트에 설 기회조차 잡지 못한다. 14기 삼총사가 미츠무네는 기억도 안날정도로 역대급 광푸쉬를 받으면서 아야카는 운영의 도움없이 자력으로 생존할 수 밖에 없었다.
일단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극장공연에서 매일 최선을 다해서 하나 하나의 일들을 클리어 해나가는 것 부터 시작한다. 댄스는 기초가 있었던 지라 하는 만큼 늘었다. 그리고 언더도 나가면서 경험도 서서히 쌓이기 시작한다. 1년이 지나자 언더에 나가도 욕안 먹을 정도는 되어서 슬슬 빛을 보나 싶었으나... 2013년이 되면서 15기생 오디션이 시작되면서 역대급 재능 오오와다 나나 , 무카이치 미온 등이 들어오면서 기회의 순번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쉽게도 AKB라는 곳은 초기에 기회를 못잡으면 다시 그 기회를 잡을 가능성은 거의 없는 곳이었다.
2013년은 14기 삼총사의 한해라고 할정도로 광푸쉬가 있었던 한 해였고, 이 후 이어진 신 팀4 승격상황에서도 아야카의 포지션은 좋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AKBINGO에 나와서 '어리광쟁이에요~' 라는 단편 소개만 남기고 빙고에서도 이렇다할 족적도 남기지 못했다.
2014년 들어서 팀4 멤버들의 약진이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팀4의 기세가 급 상승하기 시작한다. 2014년 팀4는 밸런스가 좋은 팀이라서 유명멤버가 졸업하는 A,K,B에 비해서 탄탄한 팬층을 갖고 있는 것도 있었다. 이미 2013년 최초의 미네기시 팀4 시절부터 오오바 팀4와 달리 공연 자체의 완성도가 높다라고 들을 정도로 평가는 좋았다.
이 시기 아야카는 팀4 멤버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잇몸 미소를 보여주는일이 많아진다. 자신들의 팀에서 성장해 나가면서 아야카는 미네기시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이 시기 많은 성장을 보여준다.
2014년 대조각으로 1st 미네기시 팀4가 깨졌지만, 아야카는 다행히 대조각에서 SKE 이적등이 발표나진 않았다. 다만 2014년 선거에서 팀4 멤버들이 분전했지만 아야카는 권외로 끝이 났다. 간단히 말해서 팀4에서 푸쉬멤버도, 악수회 인기멤버도 아닌 그녀가 총선거 권내로 올라가기엔 좀 힘들었다.
총선거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2014년 여름,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아버지가 병으로 입원하시기 된것이다. 그 동안에 몇번이나 쓰러진적 있었던 아버지가 입원하게 된것. 병문안을 가서 아버지는 '수술이 성공했으면 좋겠구나.' 라고 말하셨지만 몇일 후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당일 아야카는 라이브를 하고 있어서 이 사실을 듣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어머니가 공연에 집중하지 못할까봐 알리지 못했다고...심야에 뛰어서 병원 까지 도착했지만 이미 아버지는 숨을 거두었다. 본인이 인터뷰에서 직접 언급하길 친한 '유이리'와 '미이짱' 에게만 연락했다고 한다. 어린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울고 있던 아야카에게 미네기시 미나미는 장례식장에 찾와서 울어주고 도와주었다.
미네기시 미나미가 스탭들에게 이 사실을 전하고, 생전에 아야카의 무대를 꼭 보고 싶었다는 아버지의 소망을 들어주어 센터로써 [벚꽃나무가 되자] 라는 곡을 부르게된다. (이것이 현재까지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센터에 서본 곡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것이 그녀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벌써 2년. 그동안 저도 성장했다고 생각합니다. 여태까지는 쉽게 마음이 부러졌지만 지금은 끈기가 생겼습니다. 후배들들도 돌볼수있게 되고, 악수회에서도 이전에는 이야기를 잘 못했지만, 팬분들과 즐길수 있게 되었습니다."
라고 인터뷰에서 언급하였다. 실제로 2014년 이 후에 후배들도 들어오면서 그녀의 할일은 더 많아졌고 팀4에서의 역할도 늘어났다. 거기에 미모가 어른스럽게 되면서 재발견되기도 했다. 악수회 마인드가 달라지면서 확실히 전보다 대응이 좋아졌다는 평가도 있다.
이 시기에 그녀의 인생에 꽤나 중요한 인물인 SKE48키자키 유리아가 팀4의 부캡틴으로써 들어오게된다. 미네기시 팀4에 들어온 유리아는 후배들을 잘 챙기고 팀4에 대한것만 생각하는 좋은 캡틴이었다. 유리아는 당시 사춘기에 아버지까지 돌아가시면서 방황하던 아야카를 보고 많은 부분을 도와주게 된다.

2.2. 여담


  • 통신제 고등학교를 다녔다.[3] 그 덕분인지 본인이 느끼기엔 학창시절이 빨리지나갔다고 느꼈다.
  • 2016년 총선거에서 권내를 했는데, 발표 때 자기인줄 몰랐다고 한다. 우선 2015년 총선거에서 속보에 들어가고 탈락한게 마음에 남아있었다. 그래서 2016년에 속보에 들어갔음에도 불안했다고. 그런 와중에 오카다라고 불리자 "AKB팀 4에 오카다는 둘뿐인데 나아짱은 더 높을테니깐.. 그럼 누가 또 있지?" 생각하다가 총맞은것처럼 어벙한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트로피 받은것만 기억하고 스피치 내용은 모를 정도로 놀랐다.

2.3. 호구(...) 언니


드래프트 2기생들에게 격한 사랑을 받고 있다.
[image]
이렇게
혹은 이렇게[4] 영상

3. 활동


2011년 9월 24일 'AKB48 13기 연구생 오디션'에 합격했다.
2011년 12월 8일 AKB48 6주년 기념 공연에서 데뷔했다.
2012년 8월 4일 셀렉션 심사가 진행되었고, 8월 5일 셀렉션 심사에 합격한 것이 발표되었다.
2013년 8월 24일 AKB48의 돔투어 'AKB48 2013년 한여름의 돔 투어 ~아직, 하지않으면 안될 것이 있어~' 도쿄돔 콘서트 3일차에서 팀 4로 승격되는게 발표되었다.
미디어 노출이 졸업한 14기 후배 마에다 미츠키, 그리고 같이 13기 동기 중 미푸쉬 멤버 키타자와 사키와 더블어 거의 없다.
출연하는거라곤 AKB48의 너, 누구?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회 총선 속보에 순위를 올려놓은것만 해도 대단하다.
AKB48 45th 싱글 선발 총선거에서 18,524표로 57위에 첫 입성했다.
2016년 8월 28일, 제2회 레낫치 선발 총선거에서 14위로 뽑혔다!
2017년 3월 3일, 극장 공연에서 졸업을 발표하였다. 졸업이유는 활동을 하면서 무언가 실적을 남기지 못 했다고 생각해서, 고로 졸업하고 다른 길을 개척해나가고 싶어서 졸업을 생각했다고 한다. 마지막 악수회는 6월 11일이며, 졸업 공연은 6월 22일 예정.
2017년 6월 22일, 극장에서 졸업공연을 끝으로 AKB48 활동을 마쳤다.
2017년 10월 13일,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소속사가 결정 되었다는 소식을 알렸다.
2019년 6월 11일에 방영되는 TV 아사히 런던하츠 AKB48 졸업생 비공인 운동회 방송에 25명 중 한명으로 참석했다.기수별 명단

[1] 원문, 번역[2] 원문을 보려면 로그인을 해야 한다[3] AKB48멤버는 한달에 2~3번만 등교하는 통신제 고교를 다니는 경우가 많다[4] 모자를 씌운 건 15기 타츠야 마키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