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계홍

 


성명
용계홍(龍桂洪)
이명
용계홍(龍桂弘)
생몰
1856년 11월 2일 ~ ?
출생지
황해도 수안군 대천면 상대동
(현 황해북도 연산군 대평리)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용계홍은 1856년 11월 2일 황해도 수안군 대천면 상대동(현 황해북도 연산군 대평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일, 곡산(谷山)의 천도교인인 이경섭(李景燮)이 수안읍 천도교구장인 안봉하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자, 이날 안봉하는 김영만(金永萬)·나찬홍·최용식·이영철(李永喆)·홍석정·한청일 등 천도교 관계자들과 회합하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이튿날인 3월 2일, 천도교 시일집회(侍日集會 ; 일요일집회)를 이용하여, 위의 인사를 비롯한 김동선(金洞宣)·이달하(李達河)·나용일(羅龍一)·장성도(張聖道)·안창식(安昌植)·홍길재·이윤식(李潤植)·홍두익(洪斗益)[1]·이응호(李應浩) 등이 천도교 교구실에서 비밀집회를 가졌다. 이들은 이 비밀회의에서 다음날인 3월 3일에 수안군내 각 면의 천도교인들을 동원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고, 헌병의 퇴거를 요구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만세시위의 연락·준비·진행을 담당한 한청일과 홍석정은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고, 한편으로는 대천면·오동면·연암면·공포면 등 각 면의 신도들에게 연락하였다. 이 과정에서 만세운동 계획을 미리 눈치챈 헌병대에 의해 안봉하·김영만·나찬홍 등 주동급 인사들의 대부분이 체포되었으나, 한청일·홍석정·이영철을 중심으로 수안의 만세운동은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3월 3일 새벽 6시 그를 비롯해 수안면내 천도교 교구실 앞에 모인 시위군중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했다. 그리고 헌병분대로 가서 퇴거를 요구하였다. 또 오전 11시에는 각 면으로부터 천도교인들을 중심으로 한 시위군중이 계속 몰려들어, 다시 헌병분대로 몰려가 헌병의 퇴거를 요구하였다.
용계홍도 이들과 함께 수안 헌병분대 앞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이 일로 체포되어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내란 혐의로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그해 8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소요·저택침입 등의 혐의로 징역 1년 3개월형을 언도받았다.# 그는 이에 공소하였으나, 그해 1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 혐의로 징역 1년 3개월형(미결 구류일수 중 450일 산입)을 언도받아# 결국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행적 및 최후는 자료가 미비하여 알 수 없다.
200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홍두익과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