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병 작전

 

'''용기병 작전'''
'''날짜'''
1944년 8월 15일
'''장소'''
남부 프랑스

'''교전국1'''
'''교전국2'''
'''교전국'''
미국
영국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
나치 독일
'''지휘관'''
'''미국'''
제이콥 L. 디버스
알렉산더 패치
헨리 켄트 휴잇
루시안 트루스캇

'''자유 프랑스'''
장 드라트르 드타시니
요하네스 블라스코비츠
프리드리히 비어스
벤트 폰 비에터샤임
'''병력'''
175,000–200,000
85,000–100,000(교전지역 한정)
285,000–300,000(남부 프랑스 주둔군 전체)
'''피해 규모'''
'''미국'''
사상자 15000명
'''자유 프랑스'''
1만 명 이상 사상
27000명 사상
13만 명 이상 남부 프랑스에 고립, 후에 생포
'''결과'''
연합군 승리, '''남부 프랑스를 통한 안정적인 보급로의 개통'''
1. 개요
2. 경과
3. 결과
4. 그 외


1. 개요


1944년 8월 15일 남부 프랑스에서 전개된 연합군의 공세. 본래 명칭은 앤빌(Anvil)로, 모루라는 뜻이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원래 명칭이 망치 작전이어서 그에 맞게 모루 작전으로 정했던 것이었으나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정식 명칭이 '''대군주 작전(Operation Overlord)으로 확정됨에 따라 이 작전의 이름도 용기병 작전(Operation Dragoon)이 되었다.''' 이 이름으로 정하자고 우긴 사람이 한때 윈스턴 처칠 수상으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이는 오류로 밝혀졌다. 처칠 수상은 차라리 남부 프랑스를 때리느니 그 전력으로 동유럽의 유전지역을 확보하는 편이 더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작전의 개요는 자유프랑스군과 미군으로 이루어진 혼성부대가 툴롱과 마르세유의 두 항구도시와 남부 프랑스의 생 트로페까지 점령하는 것이었다. 1944년 내내 작전이 재검토 되었는데 영국군 수뇌부는 계속 이탈리아로 연합군을 투입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미군은 남부 프랑스를 공격할 것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전 자체는 결국 실행이 되는데 1944년 6월 초 로마가 함락되고 6월 말에 노르망디 교두보로부터 코브라 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탄력을 받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물주인 미국이 하자는데 별 수 있나. 결국 용기병 작전의 D-Day는 1944년 8월 15일로 확정되었다.

2. 경과


제이콥 L. 디버스 중장의 미 육군 제6군은 1944년 8월 1일 코르시카 섬에서 발진했는데 이는 자유프랑스군과 미군의 연합작전을 위해서였다. 용기병작전은 휴잇 제독 지휘 하의 제88기동부대 소속 전함 USS 아칸소, USS 텍사스, HMS 라밀리즈, 프랑스 전함 로레인과 20척의 순양함의 함포사격, 그리고 9척의 호위항모의 공중지원을 받았다. 알렉산더 페치 중장 지휘 하의 미 육군 제7군이 주요 상륙작전을 실시할 예정이었고 뒤이어 장 드 라뜨르 드 타시니의 프랑스 B군이 상륙 예정이었다. B군은 연합군 전차, 구축전차, 기계화 보병으로 구성된 기갑부대 "버틀러 기동부대"를 대동할 예정이었고. 또한 프랑스 레지탕스가 독일군의 상당수를 위협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용기병작전은 처음에 지중해 전역 연합군 사령관 헨리 메이틀랜드 윌슨 경이 담당했으나 작전개시 한 달 뒤 연합군 총사령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의 연합군 총사령부로 관할권이 넘어갔다.
상륙작전과 함께 미군과 영국군이 연합한 공수부대의 공수작전이 실행되었는데 이는 제1공수기동부대의 몫이었다. 제1공수기동부대는 영국군 제2독립공수여단, 미군 제517공수연대와 509독립공수대대, 제550글라이더 독립공수대대 및 제1대대, 제 551공수독립연대로 구성된 글라이더 공수연대에 의해 지원을 받았다. 이들은 시트카 작전에 의해 확보된 교두보의 보호를 위해 해안 근처의 두 섬을 점거했다.
공격부대는 미 육군 제6군단 예하 3개 사단으로 구성되었으며 자유프랑스군의 기갑사단의 지원이 따랐다. 3사단은 알파 해안(카발레어 수르 메르)에, 45사단은 델타 해안(생 트로페), 36사단은 카멜 해안(생 라파엘) 우측으로 각각 상륙했으며 제93야전병원이 생 맥심에 상륙했다.
'로미오' 작전에 따라 상당수의 자유프랑스군이 주공의 서쪽 측면에 있던 니그레 곶에 배치된 독일군 포대를 제압하기 위해 상륙했고 이들은 상기 언급한 제1공수기동부대의 지원을 받았다. 추가로 기만작전의 일환으로 경간작전이 실시되어 주공을 엄호했다.
9만4천 명 이상의 병력과 만천 대 이상의 차량이 첫 날 상륙했으며 당시 프랑스에 주둔중이던 상당수의 독일군 병력들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맛깔나게 후려맞은 뒤 북부 프랑스에서 연합군을 상대로 고전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OSS에서 파견된 애런 뱅크 대위의 조언을 받던 프랑스 레지스탕스는 독일군의 후방을 지속적으로 위협했다. 연합군이 내륙으로 진공하면서 레지스탕스와 연합군의 합류가 이루어졌고 24시간 안에 20마일을 진격하는 기염을 토하면서 파리에서 레지스탕스가 대대적으로 봉기를 일으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연합군을 저지하던 독일군 제9군은 신속하게 후퇴했는데 이는 곧 '''연합군의 신속한 진격'''을 의미했다. 심지어 지휘부는 '''독일군이 저항하는 것보다 진격 중인 부대의 연료공급이 더 걱정인''' 상황이었으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연료가 문제가 되어 연합군의 진격이 잠시 둔화된 사이 여러 독일군 부대가 보주 산맥, 심지어는 독일 본토로 퇴각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래도 13만 명가량은 남부 프랑스에 고립되긴 했지만.

3. 결과


9월 중순에는 드디어 망치와 모루가 만나 오버로드 작전에 참가한 부대 중 남부로 진출한 부대와 용기병 작전에 참가한 부대가 디종에서 만났다. 용기병 작전의 예상효과는 마르세유 항의 사용이었는데 코브라 작전과 용기병 작전 이후 연합군의 신속한 진격은 보급의 부족으로 인해 9월부터 상당히 둔화되었다. 오버로드 작전과 각종 전투를 거치며 프랑스 북부의 항만이 상당수 파괴되어 제대로 해상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인데 마르세유 항을 점거하게 되면서 지브롤터 해협을 거쳐 마르세유로 들어가는 남부 프랑스 보급로가 열렸다. 이후 전쟁 내내 마르세유 항은 연합군 보급물자의 3분의 1을 담당하는 주요한 항구로 부상했다.

4. 그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