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네스 블라스코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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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66> 이름
'''Johannes Albrecht Blaskowitz'''
요하네스 알브레히트 블라스코비츠
출생
1883년 7월 10일
독일 제국 동프로이센
사망
1948년 2월 5일
연합군 점령하 독일 뉘른베르크
복무
독일 제국군
독일 국가방위군
독일 국방군
최종 계급
상급대장
주요 참전
제 1차 세계대전
제 2차 세계대전
{{{-1 폴란드 침공
안톤 작전·라일라 작전
서부전선}}}
주요 서훈
곡엽검 기사십자 철십자장
1. 개요
2. 생애
2.1. 폴란드 침공
2.2. 프랑스 점령
2.3. 네덜란드 전선
2.4. 이야깃거리
3. 등장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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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치 독일의 군인. 최종계급은 상급대장.
다만 히틀러의 지시와 나치의 전쟁범죄에 대항하여 한번도 아니고 여러번이나 비판 문서를 올리고 항명했다가 해임되는 것을 반복한 국방군에서 흔치 않은 개념인이었다. 보통의 국방군 장성들이 명령이라는 명목으로 포로 학대와 민간인 학살 등에 어느 정도는 관여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깨끗하기 그지없는 블라스코비츠의 경력이 대단해보일 지경. 자세한 것은 후술한다.

2. 생애


아버지가 루터교 목사여서 본인도 독실한 루터교 신자였고, 나치의 종교와 군에 대한 간섭을 혐오하여 드레스덴의 3집단군 사령관에 재직할 당시 이미 드레스덴 관구장과 상당히 갈등을 빚었다.

2.1. 폴란드 침공


실력을 인정받아 폴란드 침공 이전에 이미 보병대장으로 진급했고, 독일 국방군이 급속히 확장되면서 제8군과 제9군의 초대 사령관으로 폴란드 침공에서 상급대장까지 고속으로 진급했지만, 점령지에서 친위대와 군 소속이 아닌 나치 경찰이 저지른 강간, 살인, 유대인과 폴란드인 상점의 약탈 사례를 상세히 기록하여 그들의 행동이 국방군의 권한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로서는 단속할 방도가 없다고 호소하는 2개의 진술서를 총사령부로 보냈다. 히틀러는 그러한 진술서에 격분하여 블라스코비츠의 지위를 해임시켰고, 결국 블라스코비츠는 한직에만 머물며 원수로 진급하지 못했다.

2.2. 프랑스 점령


프랑스 점령 이후에도 약간의 좌천성 인사를 당했지만 1940년 9월에 1군 사령관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1942년, 연합군이 횃불 작전을 성공하면서 비시 프랑스군 및 프랑수아 다를랑 제독이 항복하자 나치 독일은 비시 프랑스가 점유하고 있는 남부 프랑스의 점령 및 잔여 병력의 제압에 목적을 둔 안톤 작전을 시행하였으며, 이에 따라 블라스코비츠가 이끄는 1군은 프랑스 남부를 점령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툴롱의 비시 프랑스 해군의 군함들을 확보하려고 하였으나 비시 프랑스 해군이 자신들의 전함을 자침시키면서 일련의 비시 프랑스 해군 제압작전은 실패로 끝나게 된다.
1944년, 북부 아프리카 및 지중해 연안의 제해권을 잃고 프랑스 남부에 연합군의 상륙이 예상되는 상황이 되면서 프랑스 남부를 수비하는 G집단군이 신설되었고 블라스코비츠는 초대 사령관으로 부임하게 된다. 연합군이 용기병 작전을 개시하면서 남부 프랑스에 고립되었으나, G군집단을 무사히 서부방벽으로 퇴각시키면서 서부전선의 기적에 일익을 담당했지만, 이번에도 히틀러와 독일군 최대 권력자로 떠오른 하인리히 힘러의 노여움을 사서 또다시 사령관 지위에서 해임당한다.

2.3. 네덜란드 전선


1945년 1월에 쿠르트 슈투덴트의 후임으로 1944년에 신설된 네덜란드 지역의 방어임무를 맡은 H집단군의 사령관으로 다시 부임하였으며, 그해 말부터 이듬해까지 있었던 대기근으로 연합군과 네덜란드 주민들에 대한 식량지원 협약을 체결하기도 했다.[1] 결국 1945년 5월 5일에 몽고메리가 이끄는 연합군에 항복한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처음에는 풀려났지만, 1948년 뉘른베르크 최고사령부 재판에 기소됐을 때 수감된 장소의 발코니에서 투신, 추락사한다. 그의 죽음에는 의문점이 많아서 자살인지, 아니면 떠밀려 죽은 것인지 해석이 분분하고 있다. 그는 전술했듯이 민간인이나 포로 학살 등 전범 행위에 전혀 관여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후 판결에서 모든 혐의에서 무죄를 받았고, 재판관들이 재판 중에도 그가 무죄판결을 받을 것을 알렸기 때문. 이 때문에 당시 현지에서는 블라스코비츠를 증오하던 전직 SS대원이 그를 살해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2.4. 이야깃거리


전쟁범죄에 전면적으로 항의한 그의 전적 때문에 나치에 저항하는 많은 레지스탕스들이 그를 영입할 것을 고려하였고 실제로 울리히 폰 하셀은 그를 만나며 히틀러 암살계획에 영입하려고도 했었다. 그러나 블라스코비츠는 철저한 군인이었고 군인으로써 군법, 심하면 기사도에 비견될 만큼의 엄격한 규정을 지키는 대신 히틀러와 정권을 상관으로 여기고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지 않았다. 그는 나치즘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는 비정치적 군인이었지만, 오히려 그 비정치적인 태도 때문에 나치즘에 전면적으로 대항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학계에서는 블라스코비츠가 전쟁범죄에 항의한 것이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였는지, 군인정신에 맞지 않다고 느껴서였는지, 혹은 나치의 팽창주의 정책에 협조하여 더 수월한 지배와 통치를 위했던 것이었는지는 논란이 분분하다. 물론 블라스코비츠는 생전에 폴란드에서든, 프랑스에서든, 네덜란드에서든 일관적인 태도를 유지하였고 학살 명령을 내리지 않거나, 꼭 내려야만 할때는 아예 권한을 넘기는 식으로 행동해 재판에서도 무죄를 선고받았다. 뉘른베르크 재판의 판사들은 최고사령부의 군인들을 상대로 재판을 진행하면서 블라스코비츠를 '이렇게 행동했어야 하는 모범'으로 삼았었다고 전해진다.

3. 등장 매체


서든 스트라이크 4에서 나치 독일 국방군의 세 장군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나머지 장군은 하인츠 구데리안페도어 폰 보크.


[1] 협약에서 지원품을 전달할 영국, 미국 폭격기에 대해 공격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였으나, 1기의 항공기는 독일군의 대공사격으로 추락하였다. 다만 대대적인 대공사격은 아니였으며, 명령의 혼선으로 소규모 대공포대가 실수로 격추시킨 것으로 결론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