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

 




'''프랑스 공화국 임시 정부'''
'''gouvernement provisoire de la République frança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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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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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 1946년
표어
Liberté, Égalité, Fraternité
(자유, 평등, 형제애)
국가
라 마르세예즈
위치
오늘날의 프랑스알제리
전세계 일부 식민지
수도
파리
정치체제
의회공화제
국가원수
국민의회 의장
주요 의장
샤를 드골
언어
프랑스어
종교
가톨릭
민족
프랑스인
주요사건
1944년 건국
1946년 해체
통화
프랑
성립 이전
비시 프랑스
자유 프랑스
프랑스 군정청
해체 이후
프랑스 제4공화국
1. 개요
2. 역사
3.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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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는 나치 독일이 프랑스 본토를 점령하고 있던 1944년 6월 3일 알제리에서 성립된 임시 정부이다. 1944년 8월에 파리가 해방되자 파리로 이동하고 1946년 프랑스 제4공화국 수립 전까지 헌법 제정과 국가 통치를 맡았다. 당시 국민의회 의장은 샤를 드골 대통령. 사실상 자유 프랑스가 이름만 바꾼 수준이었다.

2. 역사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의 모태는 샤를 드골 대통령과 앙리 지로 장군이 함께 이끌던 프랑스 국민 해방 위원회(Comité français de Libération nationale, 약칭 CFLN)라는 단체였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임박한 시점에서 탄생한 임시정부의 주된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상륙 작전 이후 연합군이 프랑스를 재탈환했을 때, 프랑스의 주권을 보존하는 것[1]이었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 침공 이후 공중분해된 프랑스군을 빠르게 재건하여 독일 본토로 진격해 들어가는 것. 대전기간 내내 한게 없으니, 이거라도 기여해야지 그나마 종전 후 프랑스가 국제사회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게 당시 임시정부 지도자들의 공통된 판단이었다.
그리고 임시정부는 상기한 두가지 목적을 모두 성취하게 되는데, 수복된 프랑스 영토에서 주권을 발휘한 것은 물론이고, 재빠르게 프랑스군을 재건하는데도 성공한다. 필리프 르클레르가 이끄는 자유 프랑스군을 주축으로 프랑스군은 종전 무렵에는 150만에 가까운 병력을 보유하게 된다. 이는 소련, 미국, 영국에 이어 연합군에서 네 번째로 많은 병력이었다. 물론 전쟁으로 파탄난 프랑스의 힘으로는 이 군사를 뒷바라지할 수는 없었고 천조국무기대여법이 재건된 프랑스군의 보급과 장비를 책임져 줬다.
당당하게 전승국으로 이름을 올린 임시정부의 다음 목표는 패전한 독일 내에 자신들의 점령구를 세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연히 다른 연합국은 '한 것도 없으면서 웬 꼽사리....?' 정도의 반응. 실제로 처음 독일을 배분하는 계획에서 프랑스의 몫은 없었지만, 드골이 워낙 강하게 주장을 펼친 탓도 있고, 자유 프랑스와 같이 전쟁 중에 프랑스가 한 공적이 어느 정도 인정되어서 불쌍한데 자존심이라도 좀 챙겨주자는 식으로 연합군은 라인강 서부 일대에 자르 보호령을 비롯한 프랑스 점령 지역 설치를 허용한다.
한편 같은 시기에 내부적으로는 한국에서도 나름 유명한 비시 프랑스 치하에서 나치 독일에 부역한 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진행됐다. 피에르 라발 총리와 필리프 페탱 장군과 같은 고위 인사들이 사형을 선고받은 것은 물론이거니와[2], 이러한 단죄는 단순히 부역자 뿐만 아니라 '비시 프랑스'라는 정권 자체에도 마찬가지여서 비시 프랑스의 정통성은 부인됐고[3] 비시 프랑스 행정부에 의해 행해진 모든 법령과 행정은 무효화됐다.
종전 이후 열린 국민투표에서 프랑스 국민들은 96%라는 압도적인 지지율로 프랑스 제3공화국을 종식시키는데 찬성하였고, 새로 프랑스를 통치할 공식 정부를 만들기 위한 의회 선거가 1945년 10월에 열렸다. 재미있는건 여기서 의장이었던 드골을 눌러버리고 공산당 계열이 압승을 거둔 것.[4] 공산당이 중심이 된 제헌의회는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를 꿈꾸던 드골의 임시정부와 필연적으로 마찰을 빚을 수 밖에 없었고, 제헌의회가 임시정부가 헌법의 초안을 만드는 데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자 드골은 의장직에서 사퇴한다. 허나 그렇게 공산주의 계열이 주도해 작성한 헌법은 1946년 1월에 다시 국민투표에 붙여졌지만, 국민투표에서 반대로 결론이 난다.(...) 그렇게 프랑스 헌법이 절충안을 찾는 과정에서 내각책임제양원제로 특징지어지는 헌법안이 최종 통과되고, 1946년 10월 프랑스 제4공화국이 출범한다.

3. 정치


이 시기 프랑스의 정국을 이끈 세력은 크게 세 갈래였다. 흔히 사회당이라고 불리는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SFIO), 공산당(PCF), 그리고 대중공화운동(MRP)이 그것.[5] 종전 직후 가장 지지도가 높았던 당은 2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 내 레지스탕스 운동에서 중심을 맡았던 공산당이었다. 이에 비해 제3공화국 시기 정국에서 강력한 영향을 발휘하던 사회당은 그 기세가 많이 죽어서, 공산당 2중대 정도의 이미지로 추락한 상태였다.[6] 대중공화운동은 '대중공화연합'이라는 명칭으로 기독교 민주주의 계열 레지스탕스 지도자들에 의해 창설되었다.[7] 지지 기반이 가톨릭 교회였던 대중공화운동은 드골 계열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지만, 그래도 보수계로 간주되어 세간의 인식은 '그 놈이 그 놈이지' 정도.[8]
[1] 거의 5년 가까이 독일의 치하에 있었으니 사실 연합군이 프랑스 점령 후 군정을 실시해도 의아할 것은 없었다. 그리고 이걸 막으려고 대전기간 내내 드골은 루즈벨트와 처칠을 상대로 실갱이를 벌어야 했다.[2] 라발 총리는 곧바로 총살됐고 페탱 장군은 고령과 베르됭 전투의 영웅이었던 점을 고려해 임시정부 의장이었던 드골이 사형 집행을 막았다. 그나마 이런 고위인사들은 정식 재판이라도 받고 사형됐지, 다수의 부역자들은 약식재판으로 처형됐다.[3] 처음 비시 프랑스가 수립됐을 땐 다수의 국가들이 비시 프랑스를 정통으로 인정하고 자유 프랑스를 부정했다. 심지어 미국조차도.. 실질적인 대표성이 없으니 외교하려면 어찌보면 당연한 일. 물론 말로만 정통을 인정해주고 뒤에선 자유 프랑스를 알게 모르게 지원해주긴 했다. (지금의 서방이 중국과 대만 관계에서 취하는 포지션과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4] 사실 당시 프랑스인들 눈엔, BC 프랑스에서 부역한 라발 총리와 페탱 대통령 모두 우파 계열 인물이었으니 '우파=매국노'로 안찍힌게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찌보면 대대적인 숙청 역시 드골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던 것.[5] 그래서 이 시기 프랑스의 정국을 이른바 '3당 체제(tripartisme)'라고 부른다.[6] 이는 아무래도 전쟁을 거친 극단적인 시기에 중도적인 목소리가 급진적인 목소리에 압도당한 탓이 크다. 그래도 사회당 역시 다시 살아나긴 한다.[7] 1967년 민주중도로 개칭되어 사라진다.[8] 허나 여차저차해서 대중공화운동은 드골계와 연을 끊고, 사회당 세력 역시 공산당과 연을 끊으면서 제4공화국에서는 사회당과 급진사회당, 대중공화운동의 온건 연합으로 대개 정권이 구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