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전선

 

1.1. 발단
1.2. 전개
1.3. 결과
2.1. 개요
2.2. 발단
2.3. 전개
2.4. 지체
2.5. 종말
2.6. 연관 항목


1. 제1차 세계 대전


협상국으로 갈아탄 이탈리아 왕국동맹국의 일원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대결한 전선이자 참호전. 이탈리아 왕국은 1915년부터 제1차 세계 대전에 참가하였으며 알프스 산맥에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게임 배틀필드 1의 캠페인 미션 중 하나인 '''사보이아에 영광이 있으라!! 가 이 전선을 다룬다.'''

1.1. 발단


원래 이탈리아 왕국삼국 동맹의 일원이었으나, 대전 때 중립을 선언하여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황을 지켜보던 중 협상국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고, 또한 이미 프랑스와 비밀리에 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1915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선전포고를 날리며 전쟁에 참여한다.

1.2. 전개


1915년부터 1917년 초 까지 대략 11차 이손초 전투를 벌어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진다. 이러한 전투로 인해 전선은 더욱 고착화되고 양 진영 모두 좋은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러던 191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저번 1916년에 일어난 '''브루실로프 공세'''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어 동부전선을 더 이상 유지하기 힘들어 독일한테 동부 전선을 전부 맡아달라고 요청을 보냈고 이에 독일은 제안을 거부하는 대신 이탈리아 전선에 증원병을 보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최초로 독일 제국군이 이탈리아 전선에 참여한 전투인 '''카포레토 전투'''가 발발하게 된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독일군의 참전'''과, 이전과 다른 대규모 독가스 공격은 이탈리아군에게 엄청난 치명타를 입히게 된다. 결국 이탈리아군은 베네치아까지 후퇴하여 자칫 잘못하면 파국을 맞이할 뻔했지만 다행이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탈리아군을 내 쫒는것에 만족하여 공격을 멈춘다. 그리고 오스트리아군 자력으로 피아베 강에 공세를 가했지만 이탈리아군도 재정비를 하여 결국 실패한다.
그리고 1918년, 말... 카포레토 전투로 인한 굴욕적인 패배를 갚기 위해 이탈리아군은 비토리오 베네토로 진격하여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를 벌인다. 이탈리아군은 승전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제대로 한방을 먹였다. 이는 이탈리아군 최대의 승리이다.

1.3. 결과


이탈리아 왕국비토리오 베네토 전투 승리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항복하게 되고 제국도 '''멸망'''하게 된다.

2. 제2차 세계 대전



2.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중기에 이탈리아 왕국을 통해 나치 독일 본토를 침공하기 위해 안치오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해변에 상륙한 연합군과 이 지역에 구스타프 선을 설치하고 필사적인 방어전을 벌인 독일군이 형성한 전선. 김영옥 대령이 활약한 전선이기도 하며, 독일의 공수부대가 전설을 만들어낸 전선, 그리고 터스키기 에어맨이 활약한 전선이기도 하다.

2.2. 발단


이탈리아 전선의 시작은 북아프리카 전역 전선의 종말에서 시작한다.
북아프리카를 완전히 장악하여 횃불 작전을 끝낸 연합군은 다음 목표를 두고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미국이나 소련 등은 늦어도 1943년 이내에 프랑스독일 본토와 가까운 곳에 상륙해서 제2전선을 만들자고 주장한 반면, 영국의 경우에는 전후 지중해 패권 유지와 소련의 동유럽 진출등을 저지하기 위해 일단 '''추축국의 부드러운 아랫배'''인 이탈리아를 공격해서 독일을 남쪽으로부터 공격하자는 안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연합군의 물량을 책임지는 미국과, 독일군의 주력과 피터지는 싸움을 계속 벌이는 소련의 의향을 거부할 수 없던 영국은 일단 원칙적으로는 미국과 소련의 제안대로 나가지만, 북아프리카의 확실한 확보를 위해 시칠리아 정도는 점령하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제시하였다. 이에 미국과 소련은 시칠리아 정도는 점령해도 제2전선을 만드는 것에는 무리가 없다는 판단을 내리면서 영국의 안으로 최종결정을 하게 된다. 그러나 시칠리아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 연합군은 영국낚시에 걸리고 말았다.
시칠리아를 공격하면서 미국이 슬슬 정확한 계산을 때리기 시작하자, 1943년 안에는 제2전선을 형성하는 데 쓸 충분한 물자를 보유할 수 없다는 결과가 나오고, 태평양 전선의 요구수량도 급증한데다가, 막상 시칠리아에 발을 올려놓고 보니, 이탈리아 왕국군을 도와주러 온 독일 국방군의 저항이 심해서 쉽사리 이 방면의 군대를 빼서 영국에 보낸 후, 제2전선을 형성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며, 이럴 경우, 물자뿐 아니라 병력도 모자라서 더 이상 제2전선을 형성하기 힘들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사실상 1943년 내 제2전선 형성은 불가능해졌고, 곧 이어 시칠리아에서 연합군이 승리하자 바로 옆에 이탈리아 반도도 있으니 몇 개월동안 병력을 놀리느니 차라리 이탈리아도 공격하자는 제안이 나오게 된다.
결국 시칠리아 전투의 승리로 인해 '''내친 김에''' 이탈리아 본토를 공격하는 것이 이탈리아 전선의 시작이 되었다.

2.3. 전개


일단 시작은 좋았다. 살레르노 상륙 작전을 통해 남부 이탈리아에 연합군이 상륙하고 1주일 동안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미군이 격전을 벌이긴 했지만 곧 영국군과의 협공으로 인해 독일군은 교두보 일소를 포기하고 후퇴했다. 베니토 무솔리니를 중심으로 한 파시스트 정부는 내분을 일으켜 결국 붕괴되고 이탈리아는 연합군에 항복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연합군의 계산이 먹혀들었다.
그러나, 좋았던 것은 여기서 끝.[1] 당시 이 지역을 책임지고 있던 독일 국방군 지휘관 알베르트 케셀링 공군 원수는 즉시 이탈리아 주둔 독일군을 움직여 근처의 이탈리아군 병력을 장악, 상당수의 병력과 장비를 독일군의 지휘하에 두는데 성공했고, 독일 친위대 SS는 연금된 무솔리니를 구출하여 그를 수반으로 하는 괴뢰 정부 살로 공화국을 발족시켜 독일군을 돕게 했다. 결국 빠른 승리는 물건너갔다.
또한 이 과정에서 연합군에게 대참사가 벌어질 뻔한 일도 있었다. 당시 연합군이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하기 직전, 무솔리니가 실각한 이탈리아는 연합군 측에게 '공수부대로마에 직접 투입하고 이탈리아군이 이와 협력해서 독일군을 몰아낼 수 있다'라고 제안했다. '''성공만 한다면'''단숨에 독일군을 로마 이북의 북이탈리아 지역으로 몰아낼 수 있는 기회여서 상층부는 이 제안에 매혹되었다. 그래서 실제로 82공수사단을 주력으로 한 공수부대를 투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작전의 가능성에 대해 의구심을 가진 소수가 있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매튜 리지웨이였다. 리지웨이는 로마에 주둔한 독일군을 이탈리아군과 공수부대 병력만으로 몰아낼 수 있는지에 대해 상당한 의심을 했다. 이 때문에 리지웨이는 맥스웰 테일러에게 로마 인근을 정찰해서 이탈리아군과 독일군의 상황을 알아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정찰 결과는 리지웨이의 우려 그대로였다. 당시 이탈리아군은 독일군과 교전할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작전은 취소되었다. [2] 만약 저게 진짜로 실행되었다면 마켓 가든 작전 못지않은 대참사가 벌어질 뻔했다.
연합군은 독일군과 살로 공화국군이 만든 방어선과 험준한 이탈리아의 산악지형에 전진이 지지부진해지자 로마 근교인 안치오에 상륙작전을 벌였으나, 안치오에 상륙한 연합군 부대는 8일간의 전투동안 전진하기는 커녕 오히려 해변에서 포위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공권의 상실과 물량의 우세가 명암을 갈랐다. 독일군의 치밀한 방어선에 직면한 연합군은 공군의 근접항공지원을 총동원해 이탈리아의 독일군을 서서히 북쪽으로 몰아냈고, 결국 이탈리아 신설 파시스트 정부 살로 공화국은 무너지게 된다. 무솔리니는 스위스로 달아내려 했으나 공산당 계열의 반독게릴라에게 붙잡혀 처형되고, 그의 시체는 거꾸로 매달려 분노한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구타당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3]
하지만 살로 공화국의 붕괴는 나치 독일의 붕괴에서 불과 1-2달 전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종전 때까지 연합군 병사들은 이탈리아 본토마저 완전히 점령하지 못했다. 이는 이탈리아 반도의 특성상 반도를 가로지르는 방어선을 형성하기 딱 좋았으며, 이 방어선을 넘고 북쪽으로 가면 험준한 '''알프스 산맥'''이 반갑게 맞이한다. 게다가 로마 점령 이후에는 목표물이 될만한 가치 있는 표적이 없었기 때문에 굳이 저 멀리 진격할 이유가 별로 없었다.
또한 로마 점령도 이래저래 좋은 말을 듣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연합군이 로마를 점령한지 딱 2일 뒤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벌어지면서 일반 시민들에겐 묻혀버렸다. 여기에다 로마 점령을 명령한 마크 클라크는 오히려 독일군에게 후퇴의 기회를 제공해버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로마 점령 전 미군의 전략은 안치오 교두보에 고립된 병력을 구출하고 구스타프 라인을 우회해 독일군을 포위해서 섬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클라크가 포위 기동 대신 로마 점령을 선택해 버렸고, 그 틈에 독일군 주력이 북쪽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는 것. 때문에 마크 클라크는 로마를 점령한다는 명예욕 때문에 전략 전체를 망쳤다는 큰 비판을 받아야 했다.
한편 1943년 12월 2일에는 심각한 화학무기 누출 사고가 발생했다. 아드리아해 연안에 있는 바리 항구에 정박한 연합군 함선들을 독일 공군이 공격한 적이 있었는데, 하필이면 공격받은 수송선 중 한 척이 미군 당국이 만약의 상황이 닥칠 경우 사용하기 위해 가져온 대량의 겨자 가스를 싣고 있었다. 이 누출된 겨자 가스가 항구를 덮치는 바람에 연합군 장병만 7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항구에 있던 민간인 사상자를 합치면 1000명 이상으로 추정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2.4. 지체


전쟁 말기로 갈수록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형성된 서부전선동부전선의 급박한 상황과, 서부전선이나 동부전선에서 독일 본토로 진격하는 것이 더 빠르다는 점 때문에 이탈리아 전선은 병력을 차출당해서 공격자와 방어자 비율이 1:1이 되어버려 더 이상의 공세가 불가능해지는 등 점점 잊혀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전선의 변화가 별로 없는 매우 느긋한 전장이 되어버렸다. 덕분에 이탈리아 전선의 연합군 병사들이 사고를 치거나 탈영하는 사례가 상당수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런 에피소드도 있다. 공세가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연합군이 뭔가 화끈하게 할 수 있는 거라곤 항공 폭격포병 사격 정도였다. 하루는 어느 미군 포병대가 휴식시간 중 심심해서 다음과 같은 계산을 했다. 화포와 포탄의 값과 운송 비용, 포병대 자신들의 식비와 봉급 등등을 계산해서 이 포격만으로 저 독일군을 모두 죽인다면 얼마나 비용이 들지 계산한 것. 그러자 독일군 1명당 수만 달러의 거금이 든다는 계산이 나왔다. 이러자 포병대원들은 '차라리 그 돈을 독일군에게 주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는게 낫겠다!'라고 말했다는 야사.
1944년 말에 나폴리 부근의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했는데,[4] 사고 현장을 조사하러 산 미 육군 헌병들이 아직 뜨거운 용암식빵을 구워 먹었다는 기록도 있다.
반면 독일군은 비록 2선급 병력이지만 총 20개 사단에 달하는 병력이 이곳에 묶여있었는데, 당사자들은 예상도 못했지만 베를린 함락을 목전에 두고 소련군의 포로가 되기 전에 서쪽으로 도망쳐야 했던 수많은 독일군과 달리 이들은 온전히 서방 연합군의 포로가 되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이지만)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독일군의 20개 사단을 묶어두기 위해서는 연합군이 이탈리아 전선에서도 진격을 멈추면 안되기 때문에 이따금 의미없는 전투를 벌이며 의미없이 많은 목숨이 사라져 갔고[5], 심지어 이 시기에는 영국 의회에서 여성 정치인 레이디 애스터가 "프랑스에서 진짜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편하고 조용한 이탈리아에 나와있는 D-day 기피자들"이라는 발언을 할 정도로 이탈리아 전선 자체의 가치가 의심받을 지경이었다.[6]
이런 상황에서 죽어나는건 이탈리아의 민간인들이었다. 이탈리아 전선의 남부 지역은 어느 영국군 아일랜드 근위대원의 말처럼 "1943년의 추운 겨울을 나기에는 빈말로도 행복하지 않은 곳"이었다. 풍요로운 미국에서 나폴리 항으로 쏟아져 들어온 각종 물품들이 희희낙락하게 한 건 암시장의 마피아들뿐이었던 반면 평범한 이탈리아인들은 거의 아사 직전이었다. 파시스트들이 이미 한 달 150g의 빵(독일에게 대놓고 노예 취급받던 폴란드인들과 비교해도 별로 나을 게 없었다)까지 줄였던 시민들의 배급 식량이 그나마도 죄다 독일군에게 장악되었던 것이다. 독일군들이 손을 대지 않아 이탈리아인들이 먹을 수 있었던 거라고는 예전에는 돼지 여물 취급받았던 속의 야생 밤뿐이었다.
밀가루를 빼앗긴 이탈리아인들은 밤을 갈아 가루로 만들었다. 가장 부족한 것은 소금이었기에, 큰 맘을 먹고 돼지를 잡아도 고기를 보존할 수가 없었다. 물론 독일군이 쓸고 간 뒤에 한 마리라도 남은 돼지가 있었을 때의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독일 군정당국은 제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해달라는 이탈리아 공무원들의 애원을 철저히 무시했다. 독일군이 이탈리아 병사들을 강제 노역장으로 끌고 가면서, 밭에서 일할 수 있는 남자의 씨가 말랐던 것이다. 영양실조가 만연하고, 비누와 더운 물을 거의 사용할 수 없어 이가 들끓으면서 발진티푸스로 인한 대재앙이 눈앞에 닥쳐왔다. 미군이 다급히 DDT를 공수해와 주민들에게 퍼부은 후에야 간신히 최악의 사태는 막을 수 있었다.
이탈리아인들은 미군들이 버린 음식찌꺼기나 담배꽁초조차 주워모았고,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했다. 나폴리에서는 풋내기 창녀로 전락한 여성들이 단돈 25센트나 레이션 하나에 몸을 팔았고 남이탈리아 끝 바리에서는 담배 다섯 개비면 여자를 살 수 있었다. 이탈리아 전선의 연합군 10명 중 1명이 성병에 걸리면서, 1944년 에 성병 치료를 위한 페니실린 사용이 허용되었다.[7]
이렇듯 이탈리아의 민간인들, 특히 이탈리아 북부의 민간인들은 워낙에 살로 공화국과 독일 군정청에게 크게 시달렸다 보니 반독 감정이 매우 심했고, 이는 1946년 이탈리아 왕국 존립투표에서 왕당파가 패하는 원인이 된다.[8][9]

2.5. 종말


지지부진하긴 했지만 꾸준한 진격 끝에 전쟁 말기 이탈리아 전선은 드디어 독일군의 최종 방어라인인 '''고딕라인'''만 남았고, 베를린을 동부전선의 소련군에게 담당하도록 한 결정으로 인해 남아도는 무기와 장비, 군대가 집결해서 마지막으로 포격지원과 항공지원을 총 동원해 '''호쾌한 진격'''을 시작했다. 이 시점의 독일군은 본국과의 연락과 보급이 끊어진데다가 누가 봐도 독일이 패전한 것이 명백했기 때문에 일단 고딕라인이 무너지자 더 이상의 조직적인 저항을 하지 못했다. 게다가 고딕라인을 돌파한 뒤엔 포(Po) 강 유역인데 이 곳은 이탈리아에서 몇 안되는 평야 지대였고, 이는 연합군의 쾌진격에 더욱 도움이 되었다. 이 시기가 바로 살로 공화국이 붕괴되고, 무솔리니가 도주중 잡혀서 처형당한 때다.
결국 독일의 패전소식이 전해질 때, 연합군의 선두는 이탈리아 국경선까지 진격해서 스위스로 통하는 통로를 봉쇄하여 독일군이 중립국인 스위스로 튀지 못하도록 했으며, 이로서 간신히 전쟁이 끝나기 전에 이탈리아 전역을 점령하게 된다.

2.6. 연관 항목


[1] 꼭 그런건 아니다. 이탈리아의 항복으로 인한 나비효과로 독일 국방군이 이 시점부터 공격 대신 수비 위주로 전략을 변경하면서 점점 후퇴하기 시작했다.[2] 출처- 앤서니 비버, '제2차 세계대전'[3] 이 소식을 접한 히틀러는 자신도 그렇게 될것이 두려워 베를린 전투 막바지에 자살하면서 그의 운전수에게 자기 시체를 태워줄 것을 당부한다.[4] 화산재가 엔진에 들어가면서 주위에 주둔한 B-25 편대가 몽땅 못쓰게 되긴 했지만 천만다행으로 인명피해는 거의 없었다.[5] 어느 정도였냐면 연합군 측에서만 30만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당연히 서부전선보다는 적은 사상자 수 지만 무시할 수 없는 수준.[6] 후일 레이디 애스터는 이 발언을 한 사실을 부정한다. 하지만 당대에는 거의 망언 정도로 전선에 퍼졌으며 일부에서는 풍자로 디데이 기피자의 발라드라는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 레이디 애스터의 발언의 진위는 접어두고라도 레이디 애스터가 2차 대전 내내 비난을 받았던 건 전쟁전에 친독일/반공 노선의 정치가였다는 점이다. 어느정도냐면 뮌헨 협정이후 나치를 피해 영국으로 온 체코슬로바키아 난민들보고 "당신들이 빨갱이라면 영국이 아니라 소련에 가야하는게 아닌가?" 라고 하고, 안슐루스에 대해서 반대 의사를 내비친 교황 비오 11세를 비난하는등 도를 넘은 모습을 보여줘 당시 영국 노동당의 대표적 친소파인 스탭포드 크립스 경이 "그녀는 베를린멤버다." 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체임벌린과 처칠의 반독 노선에 비판적이라 미운 털이 박힌 것도 있다. 레이디 애스터는 인도-미얀마 전역의 영국군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해서 물의를 일으켰고 소문에 의하면 미얀마 전선에서 온 장교와 딸의 문제 때문에 더 앙심을 품었다는 이야기까지도 돌았다. 거의 흑색선전급. 그 외에도 '''"흑인들은 노예제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 덕분에 기독교를 접했으니까요."'''라는 인종차별+인권침해적 망언이나 로디지아의 백인 정치인들 앞에서 '''"나는 흑인 노예 소유주의 딸입니다"'''라고 자랑스럽게 지껄이는 등 후안무치한 모습을 보였다.[7] 앤터니 비버 "제 2차 세계대전"中[8] 연합군에게 일찍 해방되서 그나마 독일군에게 덜 시달린 이탈리안 남부 및 시찰리아는 왕정 존속을 주장했고, 살로 공화국을 비롯해 독일군에게 더 오래 시달렸던 북부는 왕정 완전 페지를 주장했다. 결과는 전술했듯이 반왕당파가 승리했고, 국왕 일가는 해외로 추방되었다.[9] 다만 왕정 존속투표 자체는 굉장히 치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