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망디 상륙작전
1. 개요
세계의 눈이 여러분에게 주목되어 있다.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희망과 기도가 어디서든지 여러분을 반길 것이다.
(...)
역전의 시간이다! 세계의 모든 자유인들이 승리를 위해 제군들과 함께 할 것이다. 나는 제군들의 용맹함, 헌신적인 복무, 그리고 제군들의 노련함을 믿는다. 우리는 오로지 완전한 승리를 위해 싸울 것이다. 행운을 빈다! 또한 전능하신 신께서 이 위대하고 고결한 작전을 위해 우리를 굽어살피시길.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연설 중.
연설 전문
번역 전문
2차 세계 대전 시기 연합군이 1944년 6월 6일 나치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 노르망디에 감행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상륙작전'''이자 유럽 탈환에 발동을 거는 최초의 작전이었다. 원래 작전명은 '''해왕성 작전(Operation Neptune)'''이지만 내용이 노르망디에 상륙하는 것이므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많이 부른다.
몇몇 사람들은 오버로드 작전, 노르망디 상륙작전, 노르망디 상륙(넵튠 작전)[2] 을 구분해서 사용하지 않으나, 실제로 공식적인 분류에서는 각각 'Battle of Normandy', 'Invasion of Normandy', 'Normandy Landings(Operation Neptune)'으로 구분하고 있다. 각각 오버로드 작전은 북부 프랑스에 상륙하여 파리까지 진격, 팔레즈 포위전을 마치는 8월 말~9월까지의 모든 작전을 통틀어서 말하는 작전이며,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이 오버로드 작전의 하위 작전으로 7월 말 캉까지 진출하는 노르망디 지역의 작전이다. 노르망디 상륙 또는 해왕성 작전은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하는 1일차 작전만으로 한정해서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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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 상륙작전인 허스키 작전에 동원된 사단이 2개 더 많긴 하였으나, 연합군의 해군 및 공군의 상당수가 이 작전에 참가했고, 연합군의 서부전선 주공은 이날 노르망디에 상륙한 군인들이었다. 존 키건에 따르면 이탈리아 전역 등이 사실상 이 서부전선을 보조하기 위한 조공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훗날 서부전선을 이끌 군인들을 이 해안에 다 투입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2. 초기 상황
소련은 이미 동부전선에서 큰 피해를 보고 있었고, 유럽에서의 제2전선의 구축을 영미 연합군에게 계속해서 요구하고 있었다.
1942년, 이러한 요구로 인해 결국 정치적인 입장과 국민의 사기 진작, 그리고 독일군의 해안 방어 능력을 시험해 볼 겸 윈스턴 처칠 경이 야심차게 준비한 디에프 상륙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특히 주력이었던 영국군과 캐나다군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물론 이 작전으로 인해 상륙작전의 기본이 뭔지를 깨닫는 성과도 있었지만, 준비가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상륙하면 망한다는 게 분명해졌므로 연합군의 제2전선 형성은 계속 연기된다.
그러자 연합군은 영국의 전략적 이점을 고려, 처칠 경이 아돌프 히틀러의 '부드러운 아랫배'라고 주장한 이탈리아와 남부 유럽에 상륙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1943년, 연합군은 시칠리아 상륙을 위해서 허스키 작전을 실행에 옮긴다. 연합군이 시칠리아, 그리고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하자 이탈리아 정부는 겉으로는 히틀러의 편에서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선언을 했지만, 동시에 몰래 연합군과 교섭하고 있었다.[3] 결국 이탈리아는 연합군에 항복했고, 이탈리아 주둔 독일군(케셀링의 G집단군)과 연합군이 이탈리아에서 전투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독일군은 이탈리아의 험한 지형을 이용해 저항에 들어갔고, 연합군은 로마를 점령하기 전까지는 독일군의 강한 저항에 휘말려 거의 진격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1943년 1월, 연합국 수뇌부가 만난 카사블랑카 회담 뒤 영미 연합군은 프랑스에서 주공을 감행할 연합군의 침공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2달 뒤 트라이단트 회담에서 '오버로드' 라는 암호명의 상륙작전을 1944년 5월 1일에 실시하기로 결정하고, 계획 수립은 연합군 최고사령부 참모장 모건 장군이 맡기로 하였으며, 며칠 뒤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오버로드 작전의 세부 계획 수립에 착수했다.
모건의 첫 임무는 침공 장소를 선점하는 일이었는데, 처음에는 프랑스의 파드칼레, 노르망디, 브르타뉴가 제시되었다. 결국 노르망디가 선정되었는데, 파드칼레는 영국과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상륙작전을 펼치기에 이상적인 지형이 아닌 데다가 독일군이 이미 요새화를 마친 곳이었으며, 탱크와 중장비가 상륙하기 어려운 지점으로 생각되어 보류되었다. 브르타뉴는 다른 지점에 비해 상륙하기 좋은 해안가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곳으로 상륙하면 연합군의 보급선이 지나치게 길어지고 너무 서쪽에 있어서 독일로 진격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보류되었다.
결국 노르망디가 최적의 장소로 뽑혔는데, 이유는 확실한 장점은 없지만 특출난 단점도 없는 무난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상륙지를 노르망디로 결정한 이후에 연합군은 본격적인 작전 계획 수립과 병력 증원, 필요한 물자 생산 등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동시에 보디가드 작전, 포티튜드 작전 등 전체적인 병력 규모와 상륙지를 속이기 위한 각종 기만 작전들이 시행된다. 독일군이 매우 두려워한 패튼이 지휘하는 가상의 1군을 만들어 심리전을 거는 등 독일군을 계속해서 오판하게 만들었다.[4] 이렇게 양동작전과 군사물품 생산이 완료되어 언제든지 작전에 착수할 수 있게 된 연합군은 D-Day를 기다리게 된다.
그러나, D데이(D-day)로 처음 계획된 6월 4일은 파도가 심해 상륙할 수 없었고, 6월 6일 날씨가 잠깐 갠다는 소식을 들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는 상륙일을 6월 6일로 결정했다. 이것도 어떻게 보면 천운인데, 당시 병력과 물자의 배치, 상륙작전의 여건(야간 공수부대 투하작전 당시 달빛 조명, 상륙 전에 영향을 끼칠 조수 간만의 차)을 고려해 볼 때 6월 초가 아니면 2개가 모두 최적인 날이 9월 이후에는 없었고, 만약 더 이상 지체할 경우 보안을 위해 2주나 격리되어있던 몇십 만에 달하는 병사들에게 더 이상의 보안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아이젠하워 본인도 이날로 결정하기 전 "총사령관 한 명의 선택에 너무 많은 것의 운명이 걸려 있다"며 고뇌했을 지경이다.[5]
3. 과정
3.1. 양측의 부대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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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연합군
연합군은 미군, 캐나다군, 영국군, 자유 프랑스군, 자유 폴란드군, 기타 영연방 소속 연합군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D-Day 하루 동안에 병력 8만 7천여 명이 상륙하여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이후 3주 동안 노르망디를 통하여 연합군 병력 156만 명과 차량 33만 3천 대가 프랑스로 쏟아져 들어왔으며, 프랑스를 해방시키고 독일의 숨통을 죄기 시작하였다. 당시 상륙부대의 자세한 배치는 아래와 같다.
아래를 보면 미군 병력은 상륙작전이 주 임무인 해병대가 없이 모두 육군 소속인 것을 알 수 있다.[6] 당시 미합중국 해병대는 대부분 태평양 전선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육군이 상륙작전을 맡아야 했다. 해병대는 본래 규모가 큰 조직이 아니다 보니,[7] 상륙작전이 잦은 태평양에서만 싸우기도 벅찼다. 태평양에서조차 실제 투입된 병력 숫자는 육군이 더 많았다. 영국에 주둔 중인 미 해병대는 모두 영국에 설치된 미 해군기지 경계 병력 및 함정 승조원 등이었다.
- 영국 육군 및 해병대
- 미국 육군
3.1.2. 독일군
B집단군의 사령관 겸 대서양 방벽의 책임자를 맡고 있었던 육군 원수 에르빈 롬멜은 북아프리카 전역에서의 경험을 살려, 1943년 말 서부전선에 부임하면서부터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연합군 상륙부대를 저지할 방법을 모색했다. 그 결과 대규모의 지뢰 지대와 해안 장애물, 벙커, 육해군 해안포[13] 및 야포 진지 및 공수부대의 강하와 공수를 방해하는 장비들을 설치했다. 롬멜의 방침에 따라 프랑스 해안 등지에 설치하게 될 지뢰는 약 2천만 개 정도가 될 것이며, 프랑스 내 여러 방어선을 구축하며서 매설할 양은 계획상 총 2억 개에 달하였다.[14] 실제로 1944년 5월 20일까지 해안에 설치한 지뢰의 수는 4,193,167개에 달하였으며, 이 중 2,672,000개가 롬멜의 지휘하에 매설되었다. 이외에도 일부 지뢰는 공수부대를 우려해 후방에 매설했다. 또한 5월 13일까지 총 517,000개의 수중 장애물이 프랑스 해안에 설치되었으며 그 중 31,000개는 기뢰였다.
이외에도 롬멜은 수도 없이 많은 장애물을 해안에 깔아두었는데, 해안 장애물의 목적은 연합군의 상륙주정들을 파괴시키는 목적이며, 썰물시에는 상륙하는 적의 전차를 저지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 방해물들 중에는 기뢰나 폭탄이 장착되어 강한 충격을 받으면 폭발하도록 설치된 장애물도 있었으며, 이들은 상륙 작전 당시 톡톡히 제 몫을 다했다.
그러나 실제로 장애물을 설치하기로 한 해변의 4개 구역 중 2개 구역만 상륙 개시일까지 완료되었고, 나머지 공사중이던 구간도 상륙 당일날 상륙부대보다 앞서 출발한 영국 해군 코만도들에 의해 폭파되었다. 이 외에도 공수부대를 막을 목적으로 롬멜은 공수부대의 글라이더가 착지할 만한 지점에 30m 간격으로 높이 3m의 말뚝을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말뚝만으로는 글러이더에 타격을 줄 수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말뚝과 말뚝에 전기가 통하는 선을 설치해 글라이더에 큰 타격을 줄 수 있게 했다. 또한 말뚝 위에 달아놓아 글라이더를 폭파시킬 폭탄 100만 개를 준비했지만, 정작 상륙 당일까지 말뚝 설치가 완료된 곳은 거의 드물었다. 당시 독일군 방어부대의 배치는 아래와 같다.
- 유타 해변 - 육군 제709보병사단
- 오마하 해변 - 육군 제352보병사단,[15] 제726척탄병연대의 일부
- 골드 해변 - 육군 제716보병사단,[16] 제352보병사단
- 주노 해변 - 육군 제716보병사단
- 소드 해변 - 육군 제716 보병사단, 제711보병사단
3.2. D-day
3.2.1. 공수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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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ay의 서막을 알린 것은 공수부대였다. 6월 6일 새벽에 미합중국 육군 제82공수사단과 101공수사단, 영국 육군 제6공수사단은 해안포 진지나 교량 등을 점령하기 위해 가장 먼저 노르망디에 강하했는데, 0시 15분에 본대에 착지 지점을 표시할 선도 부대(패스파인더)들이 강하됐고, 뒤이어 새벽 2시에 본대가 강하한다. 폭발물이 든 인형을 매단 낙하산을 대량 투하해 독일군의 주의를 일부 다른 곳으로 돌렸지만 대공포로 인해 피해를 입는다.
또한 이들이 오기 전에 롬멜이 일부 지역을 강을 이용해 늪이나 호수로 만들어놓았는데, 비록 이 늪들의 깊이는 채 50~60cm밖에 되지 않았지만 몇 십 kg에 달하는 무거운 군장과 강한 바람에 낙하산에 끌려다녀서 상당히 꽤 많은 수의 인원이 강하 후 낙하 장비를 풀다가 익사했다고 한다. 이때 미군 공수부대의 군장은 벨트를 3개나 풀어야 하는 복잡한 구조 때문에 버튼 하나로 한 번에 장비 해제가 가능한 영국 공수부대보다 사상자가 많았다고 한다.[17] 그리고 당시 노르망디에는 강한 바람과 대공포의 저항으로 인해 수송기가 제대로 된 지역에 병사들을 떨구지 못해 거의 제대로 집결하지 못했다. 그래서 공수부대원들이 제대로 부대를 정식 편성하지 못하고, 중간에 만나는 장병들끼리 모인 뒤 소부대를 임의 편성해서 임무를 수행한 경우가 많았다. 이 중에는 아예 소속 사단이 다른, 그러니까 101사단 소속 대원과 82사단 대원이 합류해서 소부대를 편성하는 사례나 영국 제 2공수사단과 미국 101사단 소속 대원이 합류해서 소부대를 편성하는 사례까지 있었다. 또한 강습용 글라이더[18] 또한 많은 사고를 낳는다.
3.2.2. 피의 오마하 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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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하를 수비하던 독일군 352사단은 원래 태생이 동부전선에 투입될 보병사단으로 창설되었다가 임시로 방어임무를 맡은 것이었던 만큼 전력 면에서 정예라고 할 수 있었다. 또한 이탈리아에서 연합군이 상륙한 지형과 노르망디의 지형이 비슷한 것을 알아본 롬멜의 혜안으로 인해 해안 방벽이 그나마 제대로 설치된 곳에서 방어를 하고 있었다. 상륙 당시 미군 병사들이 처한 상황을 묘사하자면, 몇 백 미터를 넘는 거리에 각종 장애물들인 체코 헤지호그나 벨기안 게이트, 철망에 1700개의 대인지뢰까지 설치된 해안을 수천의 병력이 복닥거리면서 MG42와 105mm포 사격 등 무차별적인 사격을 뒤집어쓰고 지나가야 했던, 그야말로 헬게이트였다. 썰물 시 상륙을 진행한 것은 독일군이 상륙주정에게 피해를 주기 위해 밀물 시 딱 수면 높이까지 오는 위치의 나무말뚝이나 체코 헤지호그를 심고 그 위에 지뢰를 설치해놓았기에 이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이는 독일군 해안벙커가 무력화되었을 시를 가정한 것이었다. 실제로 연합군이 상륙 전에 해안 거점을 포격, 폭격하였으나, 지원 포격이 대부분 빗나가 효과가 없었기에 도리어 상륙 병력들의 돌파거리만 늘어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연합군의 전략이 동일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전차 상륙에 실패했고, 캐나다군은 성공했다. 골드 해변에 상륙한 영국군은 한 시간 늦게 밀물 때 상륙한 덕에 오마하 해변의 1/10도 안 되는 피해로 상륙에 성공할 수 있었다. 오마하의 경우 썰물에 상륙했음에도 수많은 보병과 전차가 해변에 수장된 건 덤이다. 덕분에 화력 지원이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보병들이 큰 피해를 봤다. 그나마 보병과 동시에 상륙할 능력이 있었던 퍼니전차(DD 전차) 서른 대도, 전차 양륙함들이 포격을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해안에서 먼 곳에서 전차들을 보낸 바람에 스물일곱 대의 DD전차들이 상륙도 못하고 가라앉아버렸다.[19]'''이 해안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이미 죽은 자와 곧 죽을 자이다.'''
- 미군 제1보병사단 16연대장, 조지 테일러
미군 지휘부는 오마하[20] 해변을 서쪽부터 동쪽으로 에이블, 베이커, 찰리, 도그 그린, 도그 화이트, 도그 레드, 이지 그린, 이지 레드, 폭스 그린, 폭스 레드로 구성된 총 10개 구역으로 구분하여 병력을 상륙시켰는데, 이 중 폭스 그린과 이지 레드 구역에 상륙했던 부대가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일단 상륙 전에 아침식사로 각종 고기, 소시지, 계란 등 사기를 높이려고 제공한 아침 식사가 안 그래도 잔뜩 긴장감에 찌들어있던[21] 병사들에게 파도가 심한 바다에서 당연히 심각한 멀미를 유도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상륙 직전 장면에서 몇몇 병사들이 토하는 장면의 원인이다. 그러다 상륙주정의 문이 열리자마자 엄청난 기관총 세례를 버티지 못하고 옆의 바다로 뛰어내린 병사들은 멀미에 체력이 바닥이 난 데다가 무거운 군장을 매고 있었기에 익사한 사례가 많았다. MG42[22] 의 화력을 참고한다면 많은 병력이 한 번에 돌격해도 돌파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특히 독일군 토치카 정면에 상륙하는 불운을 떠안았던 미 29보병사단 116연대는 상륙주정의 문이 열리자마자 기관총 세례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어떤 중대는 중대원 198명 중 상륙 개시 5분 뒤 단 2명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여기서 활약한 괴물이 바로 하인리히 제페를로. 해당 문서 참고.
실제로는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최초 상륙주정의 인원들은 문이 열리고 내려서 어느 정도 걸을 때까지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그건 독일군이 최대한 적절한 사정거리 내에 올 때까지 기다렸던 것이고, 이윽고 사정거리에 도달하는 순간 수많은 소총과 기관총, 그리고 방어선 양단에 각각 설치된 단 2문의 8,8cm 포의 일제사격에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이에 깜짝 놀란 1차 상륙주정은 부상자 몇 명을 태우고 다시 상륙함으로 돌아가버렸다. 곧이어 바로 후속 상륙주정들을 보내는데, 그때부터 위의 사례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나오는 지옥이 펼쳐졌다. 상륙 직전 함포의 지원사격과 폭격기의 폭격이 전부 빗나가는 바람에[23] 독일군에게 거의 피해를 주지 못했고 진지의 피해도 거의 없었지만, 미군이 이 사실을 전혀 몰랐던 바람에 이런 일이 생겨버린 것. 사실 알았어도 별 도리가 없었다. 무조건 정시에 정해진 인원을 상륙시켜 점령하는 것이 작전의 주안점이었으니까. 이날 미군은 오마하 해변에서만 약 3,000여 명의 사상자(전사, 부상, 실종)를 내고 말았다. 엄청난 전사자를 낸 미군은 정말로 어찌어찌하여 도달한 독일군 벙커 앞에서 포기 직전까지 몰리고 있었으나, 마지막에 제16보병연대의 연대장이었던 조지 테일러(George A. Taylor) 대령이 선두로 돌격을 감행하면서 방어선 돌파에 성공했다. 이때 상륙작전의 지휘를 맡은 오마 브래들리는 오마하 해변에서의 엄청난 피해로 인해 이곳을 포기하고 유타 해변 등에 상륙을 집중시키는 것을 검토하기도 했다.
아무튼 주노, 유타, 소드 등 다른 해변에서는 먼저 투입된 공수부대가 독일군의 포 진지를 잘 차단하였고, 별다른 저항도 없어서 대부분이 큰 피해 없이 상륙할 수 있었다. 심지어 주노 해변에서는 캐나다군이 독일군의 저항을 단 15분 만에 분쇄한 뒤 다른 해변의 독일군을 우회하여 공격하기까지 하였다.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는 유타 해변의 후방에 강하한 101 공수사단 이지 중대가 본대의 원활한 상륙을 위해 독일군의 포 진지를 공격하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3.2.3. 푸앙트 뒤 오크(Pointe du Hoc)의 전투
한편 수만의 병력이 물밀듯이 상륙하는 동안 오마하 해변의 도그 그린에서는 225명의 미군 2 레인저 대대[24] 소속 병사들이 절벽에 도착한다. 이들은 오마하 상륙 부대를 위해 이 절벽 부근에 배치된 독일군의 직/곡사포들을 제거하는 임무를 부여받고, 절벽 위로 특수한 박격포를 쏘아 로프를 걸친 뒤 상륙했다.[25] 그러나 바닷물에 젖은 로프 상당수가 절벽 위에 걸쳐지지를 못했고, 29개의 로프를 겨우 연결하고 20명 남짓 되는 사상자를 내면서 절벽 위로 올라간 그들은 독일군이 이미 진짜 포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가짜 포를 설치한 것을 발견했다. 그 와중에도 해변의 미군은 포격에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있었다.
사실 지휘부 입장에서는 투입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상륙작전 직전에 기상이 안 좋아지는 바람에 추가 정찰을 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마지막에 가진 정보를 기반으로 작전을 진행해야 했기 때문에 그 시점에 가진 정보들 상으로는 작전을 속행할 수밖에 없던 면이 있다.
어쨌든 다행히 정확히 이곳 지역에 있어야 했던 포들은 저어기 후방에 떨어진 공수부대가 발견하고, 포신에 폭탄을 주입하여 모조리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관광지에서 안내로 해주는 얘기에 따르면, 상륙부대의 한 장교가 소수의 부대만을 데리고 전방으로 정찰을 갔는데, 우연히 포들이 숨겨진 지역을 찾았다고 한다. 이때 독일군이 기막힌 우연으로 포들을 지키지 않고 잠시 철수해있었다고 한다. 이때 본대로 복귀하여 소정의 폭약을 갖고 포들을 무용지물로 만들고서 안전하게 철수했다. 돌아온 독일군들은 잠시의 시간 동안 고철이 되어버린 포들을 발견했을 것이다. 이 일화의 경우 아래에서 언급되는 콜 오브 듀티 2 미션에서 포를 파괴하는 것까지 아주 충실히 재현되어 있다.
푸앙트 뒤 오크에는 독일군 사령부 건물 등이 있었던지라, 연합군 입장에서는 이들의 공격이 그리 큰 헛수고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상륙작전이 급했던 연합군은 반격한 독일군에게 포위된 이들을 제때 구원해 주지 못했고, 결국 이들은 81명의 전사자와 55명의 부상자 등 부대원의 절반 가까이를 잃고 나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해당 지역은 현재 관광지로 사용되고 있는데, 엄청난 수의 포탄 구멍과 그 사이사이의 콘크리트 벙커가 있는 풍경이 밀덕, 역덕이라면 둘러볼 가치가 있다.
3.2.4. 유타 해변의 미군
오마하 해변의 미군들이 피와 살점을 깔아가며 겨우겨우 상륙에 성공한 것과 달리, 유타 해변에 상륙한 미군들이 맞닥뜨린 저항은 훨씬 덜했다.
이곳을 방어하고 있던 독일군 제709보병사단은 오마하 해변의 제352보병사단이 동부전선에서 돌아온 정예부대였던 것과 달리 상당수가 투항한 소련군 포로들로 구성된 동방부대 출신자들로 구성되어 있어 사기도 낮고 부대원 간 의사소통 문제가 심각하였다. 노르망디의 한국인으로 잘 알려진 동양계 독일 병사도 여기서 미군 포로가 되었다. 게다가 이곳에 상륙한 미 육군 제4보병사단은 해류에 밀려 원래 상륙지점보다 남쪽에 상륙하게 되었는데, 운 좋게도 이곳의 독일군 방어거점은 사전폭격에 제대로 당해서 매우 허술한 상태에 있었다. 또한 상륙부대를 지원할 전차들도 상당수 제대로 상륙할 수 있었다.
독일군은 원격조종 주행지뢰 골리아트까지 사용하며 방어에 나섰지만, 미군은 이 해변에서 197명이라는 비교적 소수의 사상자를 내면서 해변을 점령했다. 이때 독일군이 사용한 골리아트들은 죄다 미군의 훌륭한 장난감 신세로 전락하였다.
3.2.5. 골드 해변의 영국군
오마하 해변에서의 참혹한 전투에 가려 별달리 주목받지는 못하였지만, 골드 해변에 상륙한 영국군 역시 꽤나 거센 독일군의 저항에 직면하였다. 영국군은 골드 해변을 킹, 지그, 아이템으로 구성된 세 개의 섹터로 구분하여 병력을 상륙시켰는데, 기상 때문에 전차를 바로 상륙시키지 못하여 초반에는 독일군의 반격에 꽤나 고전하였다. 그러나 코만도 부대의 활약 및 전차들의 상륙[26] 에 힘입어 독일군의 저항을 분쇄하고 교두보를 확보하였으며, 15분 만에 주노 해변을 확보한 캐나다군이 곧장 우회하여 달려와 독일군을 소탕해 준 덕분에 오히려 한 시간 일찍 상륙한 옆 해변의 미군보다 더 빨리 주변을 장악할 수 있었다.
골드 해변에서의 영국군은 약 400여 명의 사상자를 냈고, 주노 해변의 캐나다군은 359명의 전사자와 574명의 부상자를 기록하였다. 소드 해변의 영국군 및 자유 프랑스군은 683명의 사상자를 기록하였으며, 유타 해변에서는 고작 200여 명의 사상자만이 나온 것을 보면 오마하 해변의 참혹함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미 1군이 오마하 해변에서만 기록한 사상자 수가 3천여 명이고, 다른 해변의 사상자 수를 모두 합해 보았자 2천 명이 조금 넘을 정도다.
3.2.6. 주노 해변의 캐나다군
미군이 담당한 오마하 해변보다는 덜 유명하지만, 주노 해변에 상륙한 캐나다군은 '''상륙한 지 불과 15분 만에 독일군의 저항을 분쇄하여 해변을 점령하고, 더 나아가 우회기동하여 영국군이 고전하고 있던 골드 해변의 후방을 차단하고 조여들어가 독일군을 포위 섬멸하였다.''' 이 덕분에 영국군은 1시간이나 먼저 상륙을 시작한 미군보다 더 빨리 해변을 장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주노 해변의 캐나다군 전사자가 위에 서술한 대로 359명에 부상자가 574명이었고, 이는 오마하 해변 다음으로 많은 사상자 수인 걸 감안하면, 캐나다군이 상륙한 주노 해변의 방어가 운 좋게 허술해서 15분만에 장악한 게 아니라 적의 거센 저항을 제때 지원된 중장비들과 캐나다 병사들의 악과 깡으로 뚫어낸 거라고 봐야 할 것이다.
3.3. D-day 이후
3.3.1. 멀베리항 건설
상륙작전 성공 후 3일 뒤인 6월 9일에는 '멀베리(Mulberry)'라는 이름의 조립식 인공항구가 노르망디 앞바다에 가설된다.
연합군이 상륙작전을 계획할 때 직면한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상륙 이후 군수물자를 공급할 항구를 얼마나 빨리 점령하느냐였다. 노르망디 해안에 직접 선박을 정박시키고 물자를 하역하는 작업은 속도가 너무 느렸다. 더군다나 노르망디는 날씨가 험하기로 유명한 만큼 악천후로 물자 상륙이 중단될 가능성도 컸다. 그렇다고 노르망디 인근의 다른 항구를 점령하는 안을 채택할 경우 엄중한 독일군의 방어를 격파하고 기뢰를 제거해 안전을 확보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상륙작전 이후 유럽 본토 내부로의 신속하고 효과적인 진공을 위해서는 군수물자의 원활한 보급이 필수였다. 결국 연합군 수뇌부는 여러 가지 변수와 불확실성을 고려할 때 노르망디에 인공 항구를 건설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1942년 초 처칠은 연합작전본부장인 해군원수 루이 마운트배튼 제독에게 편지를 보낸다. 내용인 즉 바다 위에 떠 있을 수 있는 부두 시설을 개발하라는 것이었다. 처칠은 "가능성 여부를 두고 논쟁하지 말고 어려움은 스스로 풀어나가라"고 하면서 부두 개발에 대한 단호한 의지를 밝힌다. 명령을 받은 마운트배튼 중장과 예하 참모진은 그런 시설을 만드는 방법을 찾아내는 데만 1년 이상을 보냈다. 당시 마운트배튼 제독의 참모였던 존 휴즈-할렛 해군대령이 노르망디 해안 밖에 블록십(blockship, 항구 등을 막기 위해 침몰시키는 폐색선)들을 이용해 인공항을 만들자고 제안하면서 인공항 건설은 실마리를 찾는다. 우선 12척의 낡은 수송선을 썰물 때 해변에서 가까운 4.5m 깊이의 바다에 일렬로 가라앉혀 1.5km에 이르는 방파제를 만들었다. 또 암호명 '피닉스'로 명명된 거대한 콘크리트 상자를 썰물 때 바다에 빠트려 방파제를 조성했고, 암호명 '봄바르돈'인 물에 뜨는 방파제를 항구의 또 다른 보호막으로 삼았다.
상륙직후 연합군은 노르망디에 2개의 정박지를 건설하였다. 오마하 해변에는 미군이 건설한 멀베리 A, 그리고 골든 해변에는 영국군이 건설한 멀베리 B를 각각 미국과 영국이 관리하였다. 그리고 '웨일'이라는 암호명으로 불린 25톤 중량의 잔교들을 배열해 잔교마다 한 척의 전차상륙함을 접안시키거나 40톤짜리 처칠 전차를 올려놓을 수 있게 했다. 멀베리 항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된 후 6월 9일 건설되었는데, 2주도 안 지난 6월 19일에 노르망디에 심한 폭풍이 불어서 멀베리 A가 부서져 버렸다. 그래도 멀베리 B는 살아남아서 약 6달 뒤 안트베르펀 항구를 점령할 때까지 연합군의 거의 유일한 항구였고, 안트베르펀 점령 이후에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10개월 동안 약 250만 명의 장병과 50만 대의 차량, 400만 톤의 물자를 하역시킴으로써 연합군 승리의 초석을 마련한다.
3.3.2. 독일군의 반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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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랑탕에서 연합군의 M7 프리스트 자주포.
일단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은 상륙작전의 초기 목표인 셰르부르 항구로 미군이, 영국군은 노르망디의 중심 도시인 캉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독일군의 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서부전선 독일군의 지휘를 육군 B집단군사령관 롬멜과 서부방면사령관 육군 원수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두 사람이 함께 맡고 있었고,[27] 또한 연합군 공군의 폭격으로 대부분의 도로가 파괴되어 독일군의 이동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D-데이 오후까지도 OKW는 상륙 지점을 놓고 설왕설래가 오가고 있었다. 게다가 프랑스 레지스탕스가 상륙 작전 얼마 전에 각종 통신 장비와 철로를 파괴하기도 했는데, 물론 이들은 가차 없이 처형당하긴 했지만 이는 작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결국 독일군이 첫 반격에 나선 것은 12시간이나 지난 뒤였다.
세밀하게 계획되지 않은 명령, 실타래처럼 엉킨 지휘권으로 인해 휘하 사단들은 자기가 B집단군인지, 서부방면군인지 소속도 제대로 확인하기 힘들었고, 당연히 명령권자가 없으니 사단들은 그 자리에 발이 묶여 있었다. 결국 D-데이 첫날 반격에 나선 부대는 캉으로 출동한 육군 제21기갑사단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반격도 단 하루 만에 보유전차 146대가 76대로 줄어드는 막심한 피해를 보곤 캉에 틀어박혀야 했다.
D+1일 서부전선의 최정예 부대 중 하나인 무장 SS 제12기갑사단 히틀러 유겐트[28] 가 캉으로 증원되었다. 그리고 D-Day+2일 캉 주변지인 바이외가 영국군에 함락되면서 캉을 중심으로 한 공방전이 벌어진다. 한편, D-데이 당일 서부전선 최강의 부대였던 육군 기갑교도사단이 노르망디를 향해 출발했다. 하지만 무려 160km 밖에 주둔하고 있던 기갑교도사단은 연합군 공군의 폭격에 벌벌 떨면서 야밤에 전차가 자력주행으로 노르망디까지 이동해야 했다. 결국 이들이 노르망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독일군 병력은 내륙에 밀려나 지연전을 벌이고 있었고, 기갑교도사단도 그쪽에 합류해야 했다.
하지만 독일군의 분전도 있었다. 6월 13일 캉으로 가는 시골마을 빌레르보카쥬를 통과하던 영국 육군 제7기갑사단이 빌레르보카쥬 전투에서 미하엘 비트만 SS기갑중위가 이끄는 101전차대대 소속의 전차 9대에게 기습을 받아 28대의 전차를 잃어버렸다. 덕분에 연합군의 캉 진격은 또 다시 늦춰지게 되었다.
한편 D-Day 당일 및 그 이후 상륙 교두보가 만들어질 당시, 교두보에 대한 독일 공군의 공격은 거의 없었다. 독일 본토 항공전에서 논쟁 작전 등을 통해 독일 공군의 항공기 생산력은 크게 떨어진 데다 연합군 공군의 압도적인 물량으로 인해 독일 공군은 교두보 공격은커녕 당장 동부전선과 서부 점령지에 배치된 항공기 및 기지의 방어에도 허덕일 지경이었다. 그나마 알려진 사례로 D-Day 당일, 단 2대의 Fw190이 기총 소사를 한 적이 있는데, 이 Fw190 중 1대를 조종한 사람이 독일 공군의 에이스인 요제프 프릴러 소령이었다. 노르망디 상공을 꽉 채운 연합군 항공기들을 피해서 살아 돌아온 건 프릴러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정말 천운에 가까웠고, 그 천운 덕인지 프뢸러 소령은 종전시까지 살아남았다. 프릴러 외에도 제10 고속폭격비행단 등의 소규모 공격이 있었지만 프릴러의 예와 마찬가지로 거의 의미없는 출격이었다.
3.3.3. 연합군의 진격
그리고 상륙작전시에는 고려하지 못한 노르망디 특유의 지형이 연합군의 발목을 단단히 잡았다. 당장 연합군은 시가지도 아닌 곳에서 시가전을 벌여야 했다. 보카주라고 불리는 1m에서 4m 정도의, 노르망디 농민들이 자신들의 밭과 밭의 경계로 삼기 위해 심어둔 키 작은 과일나무가 빽빽히 밀집한 벽으로 가득한 노르망디의 지형으로 인해 독일군이 이곳저곳에 저격수나 대전차포를 매복시켜 뒀다가 한두 발 쏘고 튀는 짓을 반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연합군에게는 압도적인 항공 전력과 포병이 있었기 때문에 화력을 앞세워 독일군의 출혈을 강요했다. 또한 보카쥬도 미 육군 공병들이 처음에는 '''가방에 폭탄을 가득 넣어 뿌리째 날리는''' 방법을 쓰다가 위험하기도 하고 폭탄 낭비도 심해서 해안가에 버려진 대전차장애물(노르망디 하면 떠오르는 철골로 이루어진 그것)을 날카롭게 잘라 전차 앞에 용접, 말 그대로 '''과일 나무를 수확'''하면서 돌파할 수 있었다. 덕분에 독일 전차들이 길로 다닐 때 미군 전차들은 나무를 해치며 자유롭게 움직였다.
6월 22일 미 육군 선발대가 셰르부르에 도착했고, 25일에는 치열한 시가전 끝에 셰르부르 수비대 사령부가 함락되고 사령관인 육군중장 카를-빌헬름 폰 쉴리펜(Karl-Wilhelm von Schlieben) 장군과 해군소장 발터 헤네케(Walter Hennecke) 제독이 항복, 30일에는 잔여 병력의 저항이 중지되어 셰르부르가 완전히 연합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다만 항복 전에 헤네케 제독의 명령에 따라 해군 폭파반들이 항구를 개박살내놓아서 항구 복구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특히 해군 폭파반이 숨겨둔 부비트랩은 부설한 포로들을 직접 동원해 해체했음에도 끝내 발견 못한 것들이 수시로 폭발하며 연합군을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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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을 위해 미 육군 지휘소에 나타난 쉴리펜 장군(앞, 철모 착용자)과 헤네케 제독(바로 뒤, 정모 착용자). 높으신 분들임에도 코트가 진흙에 절어있는 것이 이들이 항복 직전 얼마나 열악한 상황에 처했는지 알려준다.
6월 25일부터는 캉을 노리는 영국군의 공세가 개시되었다. 중간에 독일군이 히틀러의 재촉에 못 이겨 반격에 나서기도 했지만, 영국 육군 대신 해군의 함포 사격과 공군의 폭격을 신나게 맞고 후퇴해야 했다. 덤으로 방어 태세로 전환할 것을 요청하러 베를린으로 날아간 롬멜과 룬트슈테트는 히틀러의 헛소리만 듣고 왔고, 룬트슈테트는 서부방면군 사령관에서 짤렸다.
7월 11일, 히틀러 유겐트 사단을 중심으로 완강하게 버티던 독일군에 대해 영국 공군은 500여 대의 폭격기를 동원해 아예 캉을 들어엎는 대폭격을 감행해 먼지구덩이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지금도 캉에는 70년 넘는 건물이 거의 없을 정도로 폭격의 피해가 심했으며, 결국 폭격을 참지 못하고 히틀러 유겐트 사단은 캉을 버리고 튀었고, 캉은 영국군의 손에 들어왔다.
한편, 셰르부르를 점령한 미군은 셰르부르 남부의 생로를 점령하기 위해 또다시 악전고투를 벌여야 했고, 7월 18일 결국 생로를 점령해 노르망디 지역을 빠져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 시점까지 연합군이 낸 사상자는 무려 12만 2,000명[29] 에 달했다. 사실상 상륙시 별로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을 그동안의 전투에서 날려먹은 셈으로, 연합군의 주요 수뇌부를 긴장타게 만들었다.
3.3.4. 굿우드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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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점에서 연합군은 심하면 몇 미터를 전진하기 위해 엄청난 피를 쏟아내는 상황이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독일군도 계속 증원돼서 노르망디 교두보를 완전포위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연합군은 슬슬 조급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입안된 것이 '굿우드 작전'이었다. 영국군이 캉 인근의 독일군 부대를 물고 늘어지는 사이에 미군이 생로 남쪽으로 진격해 돌파구를 마련한다는 것이 계획의 일환이었다. 동원된 병력도 무려 3개 완편 기갑사단에 첫날 4,500대의 항공기가 8천 톤에 달하는 폭탄을 쏟아부을 예정이었다.
7월 18일 영국군이 굿우드 작전에 나섰다. 그러나 영국군의 조급증이 병크를 불러왔다. 딱 3km짜리 진격로에 3개 사단을 밀어넣은 탓에 '''교통 정체'''가 발생해 진격로가 꽉 막혀버렸고, 폭격에서 살아남은 독일군이 대전차포의 파도로 정면의 영국군을 물고 늘어지자 진격이 완전히 막혀버렸다. 이런 상황은 20일까지 전혀 개선되지 않았고, 결국 20일 폭우가 쏟아져 진격로가 진창이 되면서 딱 3일만에 작전이 취소되고 말았다. 그동안 영국군은 300~500대의 전차와 4,000여명의 병력을 잃는 손실을 입었고, 독일군은 100여대의 전차를 손실했고 2000명 이상이 포로로 잡혔다.
그나마 굿우드 작전은 독일군이 영국군 지역으로 병력을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덕분에 미군은 2대 1의 우세를 코브라 작전에서 누릴 수 있었다.
3.3.5. 독일군의 퇴각
7월 24일, 굿우드 작전 다음에 개시될 예정이었던 미군의 코브라 작전이 개시되었다. 그런데 하필 작전 개시일에 짙은 구름이 껴 오폭의 위험이 있다고 여긴 리 말로리 장군이 공군의 폭격을 중지시켰다. 그러나 이 명령을 전달받지 못한 일부 폭격기가 그대로 폭격을 가해서 레슬리 맥네어 장군 같은 일부 오폭 사상자가 나왔다. 육군 쪽에서도 폭격이 이루어진 것을 보고 작전이 예정대로 진행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나와서 소규모의 혼란스러운 공격을 하다가 소득 없이 물러나기도 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오히려 독일군 쪽에서 발생했다. 당시까지 부대건제를 유지하고 있던 육군 기갑교도사단은 이 실수가 작전개시 신호인 줄 착각했고, 폭격에도 불구하고 부대의 피해가 경미한 데다가 이어진 육군의 공격 역시 대단치 않은 수준이었기 때문에 잘못된 판단, 잘못된 자신감을 갖고 반격에 나섰던 것이다. 미군의 폭격이 약하다고 판단한 독일군은 전차들을 공격개시선에 배치해버렸고 7월 25일, 진짜 폭격이 개시되면서 기갑교도사단은 90%나 되는 병력이 싸그리 녹아내렸다... 는 것이 통설이었으나, 90년대 이후 당시 문서를 검토한 결과 8월 1일 기갑교도사단에는 수리 중인 것을 포함해 67대의 전차와 적어도 10대의 돌격포가 있었다. 기동가능한 전차 수량도 7월 23일 31대에서 8월 1일에는 27대로 단 4대 줄었을 뿐이다. 어쨌든 미 육군은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교두보 돌파에 성공한다.
결국 패잔병들만 남은 독일군은 이 날을 기점으로 노르망디 지역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린다. 하지만 히틀러는 현지 사수 및 오히려 반격을 통해 돌파한 미군을 차단하고 다시 연합군을 노르망디 교두보에 묶으라는 현실성 없는 명령을 내려서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다.
4. 결과
연합군은 노르망디 지역에서 무려 두 달을 묶여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 두 달간의 혈전 끝에 서부전선 독일군의 정예 병력이 녹아버림과 동시에 '''전투 경험이 전무하던''' 수만에서 수십만에 이르는 미 육군, 공수부대, 캐나다군을 비롯한 영연방군, 자유 프랑스군 장병들이 '''정예병으로 거듭났으며''', 히틀러의 사수 명령으로 인해 현지에 묶인 서부전선의 독일군 잔존 전력을 팔레즈에 몰아넣어 섬멸하였다. 이를 팔레즈 포켓이라고 부른다.
이후 프랑스 해방까지 독일군은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패주를 거듭하게 되었다. 하지만 드라군 작전으로 남부 프랑스에서도 전선이 열렸음을 감안할 때, 각개격파당하는 것보다는 대규모 후퇴를 감행해서 방어선을 구축하는 게 나음을 알고 후퇴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실제로 1944년 8월에 안트베르펜과 로렌 인근까지 진격한 연합군은 발터 모델 장군의 완강한 방어로 인해, 아르덴에서 독일군이 서부전선 주력을 날려먹을 때까지 서부방벽에서 고전했다.
5. 실패 시나리오
일단 '노르망디 상륙은 실패할 수 있었을까'라고들 흔히 생각하는데, 실제로 실패할 뻔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만약 독일이 연합군의 기만전술에 속지 않았더라면, 채널 제도를 요새화하는 대신 해안선의 방어를 굳히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면, 또는 독일군의 방어 시설이 일찍 완공되었더라면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디데이에 독일군이 제대로 반격을 감행했다면 충분히 가능하기도 하고.
진짜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실패했다면 어떠했을까?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원작자 스티븐 앰브로스의 가정''' - 1945년 8월에 독일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독일이 항복, 소련군이 서진을 계속해서 프랑스까지 먹는다.
'''반론''' - 당시 소련군의 역량 및 보급 문제까지 감안하면은 불가능한 시나리오다. 설령 베를린을 점령하고 그대로 서진을 한다치더라도, 아직 프랑스와 서부지역 주둔 독일군 등 방해 요소까지 다분한 데다가, 미영프 지도자들이 이런 소련군의 서진을 그대로 묵인했을 리가 없다
'''Greenhill's Alternate Decisions''' - 노르망디에서 대패한 후 처칠과 아이젠하워가 자리에서 물러나고, 루즈벨트도 재선에서 떨어지는 등 연합군 수뇌부가 대거 교체되고 더불어 언합국 군민들의 사기가 떨어져서 전쟁 수행에 악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상륙을 막은 독일로선 귀중한 시간과 더불어 서부전선에서 소모되었을 병력들을 고스란히 동부전선에 투입할 수 있게 됨으로 소련군의 진격을 어느 정도 늦추는 데 성공했었을 테고[30]
더불어 종전 당시까지도 독일이 계획 중이던 로켓 기술 등을 실용화시켜서 전선에 배치, 영국에 더 큰 타격을 입히고 소련과의 강화를 물색했을 것이다.'''반론''' - 위에서 언급했지만 미국에겐 '''핵이 있다.''' 소련도 더 큰 희생을 치룰지언정 독일과 강화할 가능성은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노르망디 상륙이 실패하더라도 기간이 최대 2, 3년 미루어질지언정 독일은 끝내 패전했을 것이다. 기껏해야 그 기간 동안 연합군에게 조금 더 피해를 입힐 수 있을 뿐. 실제 역사와 동일하게 독일 공군의 등뼈가 부러지고 나면 결국은 대도시가 하나씩 지워지다가 베를린에 핵이 떨어질 뿐이다.
당신들의 조국의 영화판에선 상륙이 실패하여 병력을 말아먹은 뒤 아이젠하워와 처칠이 실각해 독일이 영국군과 평화조약을 맺고 소련군을 막아낸 것으로 나온다. 물론 이게 가장 실현 가능성이 '''없다.'''[32]'''가장 현실적인 시나리오''' - 위에서 나온 것처럼 연합군에게 적잖은 타격을 주고 전쟁을 더 오래 끄는 만큼 연구 중이던 무기들도 전선에 배치하여 영미로 하여금 피를 더 쏟게 했겠지만, 사실상 원폭 투하 후 항복하지 않은 일본과 진행될 몰락 작전이 유럽에서 비슷하게 진행된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물론 총도 없어서 죽창이나 활 따위로 무장한 일본과는 달리 그 독일이니 시간은 더 끌었을 테고, 실제 미 수뇌부의 계획으론 몰락 작전이 1945년 11월에 진행되어 최소 1947년에 마무리지을 예정이었으니[31]
독일의 경우 못해도 1948년에는 끝났을 것이다.
이런 류의 시나리오에서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실패했어도 핵폭탄느님이 다 해결해 주셨을 거야' 등의 분석들이 많으나, 핵폭탄은 1945년 7월에나 완성되었고, 상륙작전이 실패했으면 처칠은 실각하고 루즈벨트도 재선에 실패하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렇게 되면 핵 개발도 상당히 늦어지게 된다.[33] 그렇게 되었다면 이후의 분석은 그 자체가 무의미한 수준이 되었을 것이다.[34]
총력적 체제로 들어간다면 실제 역사에서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연합국의 교리가 개선되고 병사의 훈련도가 늘어나 독일군이 우위에 있던 질적 우세가 뒤집힐 수밖에 없다. 미완성 무기 이야기를 해도 연합국이 우위인 게 당장 6개월만 베를린이 버텼어도 독일군은 서쪽에선 T34와 센츄리온, 동쪽에선 T-54와 IS-3을 만났을 것이다. 연합국이 여러 국가의 연합이라는 점과 서방국가에서 반전 여론이 강해질 수도 있다는 변수에 기대야 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진행된 시점에서는 전쟁 흐름이 연합군이 우위에 있었다. 울펜슈타인: 더 뉴 오더 같이 독일군이 연합군을 능가할 수준의 엄청난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지 않는 한, 전세를 역전시키거나 연합군을 독일 내륙에 못 들어오게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독일군에게 가장 좋은 희망은 아예 노르망디 상륙 작전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6. 기타
- D-Day의 어원은 departed, decision, 여러 가지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모두 틀린 것이다. 1944년 6월에 침공을 하려는 중, 6월의 기상 상황이 좋지 않아 날짜가 정해지지 않았다. 당시 종군 기자의 말에 의하면 (정해지지 않은) Day-(정해진 침공 날짜) Day가 합쳐져 D-Day가 된 것이다. 관련 서적만 읽어봐도 결행이니 결정이니 뭐니 하는 거 증언해준 영국, 프랑스, 캐나다 병사들부터 지휘관 입에서도 그런 말은 안 나온다. Day-Day가 맞는 표현이다. 같은 의미로 날짜가 아닌 특정 일의 개시 예정 시각은 시각을 뜻하는 Hour에서 따와 H-Hour라고 한다.
-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유일하게 격전이 벌어졌던 오마하 해변의 상황을 처절할 정도로 실감나게 연출해놨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대히트를 친 이후로 배틀필드 1942, 메달 오브 아너 [36] ,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등 2차 대전을 다룬 게임에서는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 <밴드 오브 브라더스> 2화에도 이지 중대의 첫 전투로 등장한다. 이쪽은 공수부대를 초점으로 맞추고 있기 때문에 강하작전을 묘사하고 있다.
-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전적지 여러 곳을 여행할 수 있다. 노르망디 여행에 관심 있다면 여행기 링크를 참고하자.
-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의 마켓 가든 작전을 제외한 5개의 캠페인은 모두 노르망디 상륙부터 팔레즈 포켓까지의 시점을 다룬다. 문서 참조.
- 노르망디에서 미군에 포로로 잡힌 한국인의 사진인 노르망디의 한국인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기도 했다.
- 상륙작전을 실시하기 직전인 1944년 5월에 발생한 에피소드. 영국 신문인 데일리 텔레그래프 지에 십자말풀이 문제가 올라왔는데, 여기에는 '유타', '오마하', '오버로드' 등의 용어가 등장했다. 이는 상륙작전 및 주요 상륙지 등의 암호명이었다. 연합군 사령부는 발칵 뒤집혔고, 문제의 출제자인 학교 교사 레너드 다우와 신문 편집 담당자를 MI5가 잡아가 심문했지만 결과는 무혐의였다. 기밀 유출과는 무관한 우연의 일치였던 것. 훗날 1984년에 이사건의 진상이 밝혀졌는데, 당시 그교사의 학생 중 한명이 근처의 군기지를 돌아다니다가 군인들이 주고받는 대화에서 이 의미심장한 단어들을 들었었고, 그 교사가 십자말 풀이에 쓸만한 단어를 찾을때마다 이 단어들을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2015년 6월 14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 2007년 3명만으로 오마하 비치를 재현한 용자들이 화제가 되었다. CG의 힘은 위대했다. 정확히는 BBC 역사 다큐멘터리 시리즈인 <타임워치(Timewatch)> 시리즈 제작진의 용자짓. 노르망디 상륙작전 특집편 <피의 오마하> 촬영 때의 일이다. 이 때 해설자는 탑기어 호스트인 리처드 해먼드. #
- 히틀러는 연합군의 상륙 작전이 계획되기 전에는 노르망디가 연합군의 상륙 지점이 될 것이란 걸 예측했다고 한다. 물론 옛날에도 노르망디는 영국군의 주요 상륙지였다. 하지만 노르망디가 칼레보다 전략적으로 떨어지는 위치였던 데다 히틀러는 전략 전술과 관련된 군 관련 지식은 전무했기 때문에 독일군 수뇌부는 그럴 일이 일어날 수가 없다고 생각했고, 나중에는 히틀러 자신도 노르망디에 연합군이 상륙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 2011년 11월 29일 이란 시위대가 테헤란 주재 영국 대사관을 습격했을 때, 영국 대사관은 빅토리아 여왕과 에드워드 8세의 유화 초상화 같은 역사적 유물이 파손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노르망디 상륙 작전 문서가 도난당했다. 이 문서의 도난에 대해 영국 외교관들은 "혁명수비대의 번역사들이 충분히 오랜 시간을 들여 이것이 70년 전 프랑스에서 있었던 침공 작전임을 깨닫기를 바란다"고 가디언 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혔고, 다른 이들은 혁명수비대가 이 문서들과 다른 문서들로 인해 혼란을 겪길 원한다고 대꾸했다. 출처: 서방의 대규모 침략계획, 유출되다.
- 20세기 최고의 사진 작가로 유명한 로버트 카파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상륙정에 직접 타서 다른 현역 병사들과 함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오마하 해변의 지옥도를 생생히 촬영했다. 하지만 운이 없게도 촬영 이후 필름을 현상, 인화하는 과정에서 기술자가 실수로 온도를 너무 높게 맞추는 바람에 대부분의 필름이 녹아 버렸고, 남아 있는 사진은 10장에 불과하다. 하지만 카파의 이 사진들은 오마하 해변의 참상을 생생하게 기록해 주었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중요한 자료로 남아 있다.
- 노인과 바다,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로 유명한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또한 종군 기자로 이 전투에 직접 참전하였는데,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골 때리게 하는 일화가 여럿 있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실시되기 전 5월 25일, 런던에서 등화관제 중에 차를 몰다가 물탱크를 들이받아 뇌진탕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나흘 뒤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하고자 병원에서 몰래 빠져나왔다. 그 뒤에 작전을 준비하는 연합군을 동행 취재하면서 그가 소속되어있는 소대가 가장 먼저 노르망디 땅을 밟아야 한다고 부추겨 소대장을 곤란하게 만들었으며, 종군 기자는 총을 휴대할 수 없음에도 작전 때 총을 들고 독일군 몇몇을 직접 사살하기도. 그 이후로도 건물 안에서 포격을 당하는 와중에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몸을 웅크려 몸을 보호했는데, 헤밍웨이 혼자서 아무렇지 않게 포격을 당하는 건물 내부를 돌아다녀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연실색시킨 등, 무모하고 객기 어린 행동을 자주 했다고 한다.
- 노르망디 상륙작전 66주년 기념 다큐멘터리에서 당시 오마하에 상륙한 보병, 유타 해안에 상륙한 보병, 그리고 해변 방어에 참전한 독일군 생존자들이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방송 후반에 이 셋이 만나자 '우리가 그날 같은 곳에 있었다는 것에 놀랐다'고 한다.
- 울펜슈타인 시리즈 세계관에서는 나치가 시대를 벗어나는 오버 테크놀러지로 무장하고 있기에, 반대로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패배한 것으로 나온다. 그것도 연합군 측에서 156,000명이 전사한 반면, 독일군 측에서는 겨우 89명만 전사하는 참패로! 이 사상자수 때문에 이 세계관에선 D-day에서 D가 dead를 뜻하며, 이후 독일은 1946년 3월 15일 이 전승을 기념하는 박물관을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투입된 연합군 포로들을 동원해 파리에 건립함으로써 당시 아직 남아 있었던 연합군에게 빅엿을 선사한다. 소련도 독일의 오버 테크놀로지 덕분에[37] 쿠르스크 전투에서 참패한 탓인지 바그라티온 작전은 딱히 언급이 안 되었다. 물론 9개월 뒤 모스크바는 함락된다.
- 스웨덴의 파워메탈밴드 Sabaton의 'Primo victoria'가 이것을 배경으로 한 노래다.
- 전함소녀의 사상최대 작전 이벤트의 모티브이다. 이벤트 예고부터 아이젠하워의 D-DAY 연설문 패러디였다.
- <발리언트>는 이 작전을 성공시킨 부분을 다룬 내용이다.
- 출처에 따르면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독일군 병사들이 받은 충격도 상당히 컸던 것으로 보인다. 당장에 해안선 벙커에서 연합군 함대를 목격한 독일군 병사가 "그것은 독일의 종말이었다."라고 말했을 정도. 사실 당시 독일군 병사들에게 서부전선은 비록 상륙작전을 대비해야 하긴 했지만, 소련과 섬멸전을 벌이던 동부전선에 비하면 꽤 널널했고 파리로 휴가를 가서 프랑스 아가씨랑 놀 수도 있는 꿀 빠는 곳으로 취급받았다. 그런데 그런 곳이 갑자기 전쟁터가 되었으니... 상륙한 연합군을 막기 위해 출동한 전차부대 장교도 한 손엔 프랑스 아가씨를, 다른 손엔 술병을 들고 취한 채 군가를 고래고래 부르며 퇴각하는 병사들을 보고 "이제 독일은 끝났다."고 절망했을 정도. 사족으로 이 전차부대는 연합군 부대를 막으려 진격했다가 영국군의 대전차포 세례를 맞고 후퇴해야만 했다.
- 테일즈런너의 개발자 감사제 이벤트에서 해당 사건이 배경이 된 것으로 추측되는 노르망디 맵이 공개되었는데, 해골이 총을 쏘며 유저의 진로를 방해해 한낱 방해물에 지나지 않게 설계되는 등, 해당 사건을 비하하는 게 아니냐며 논란이 짙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