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거
'''優居'''
생몰년 미상
고구려의 신대왕 때의 장수.
대가(大加)의 지위에 있던 인물이었다.
169년, 한나라의 현도 태수였던 공손도이 부산적(富山賊)[1] 을 토벌할 때에 주부(主簿) 벼슬을 지내던 연인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나가 이를 도왔다. 한나라군과 고구려군의 협공을 받은 부산적들은 완전히 정벌되었다.
그러나 이 기록의 시간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많다. 삼국지와 삼국사기에서는 우거와 연인이 공손탁을 도와 도벌을 정벌한 일이 신대왕의 즉위 시기(165~179)에 있었던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공손도가 요동에서 세력을 떨치기 시작한 일은 고국천왕이 즉위하던 시기인 184년에 있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경향신문의 1987년 9월 11일자 기사에서 위만의 손자인 우거의 명칭이 고유명사가 아닌 우두머리를 지창한다는 조승복 교수의 주장에서 언급되고 우거가 고유명사라 한 안사고의 주장은 잘못되었으며, 우거에 대한 음운변이를 고구려의 우거, 부여왕 간위거, 위구태 등을 언급하면서 씨족의 생활공동체를 다스리는 우두머리 또는 우두머리직을 가리키는 보통 명사라 했다.
생몰년 미상
고구려의 신대왕 때의 장수.
대가(大加)의 지위에 있던 인물이었다.
169년, 한나라의 현도 태수였던 공손도이 부산적(富山賊)[1] 을 토벌할 때에 주부(主簿) 벼슬을 지내던 연인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나가 이를 도왔다. 한나라군과 고구려군의 협공을 받은 부산적들은 완전히 정벌되었다.
그러나 이 기록의 시간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많다. 삼국지와 삼국사기에서는 우거와 연인이 공손탁을 도와 도벌을 정벌한 일이 신대왕의 즉위 시기(165~179)에 있었던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공손도가 요동에서 세력을 떨치기 시작한 일은 고국천왕이 즉위하던 시기인 184년에 있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경향신문의 1987년 9월 11일자 기사에서 위만의 손자인 우거의 명칭이 고유명사가 아닌 우두머리를 지창한다는 조승복 교수의 주장에서 언급되고 우거가 고유명사라 한 안사고의 주장은 잘못되었으며, 우거에 대한 음운변이를 고구려의 우거, 부여왕 간위거, 위구태 등을 언급하면서 씨족의 생활공동체를 다스리는 우두머리 또는 우두머리직을 가리키는 보통 명사라 했다.
[1] 부산의 도적무리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부산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광개토왕비문과 요사에도 이 지명이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