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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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에서 기원전 206년 유방이 세운 고대 국가로 초한대전(楚漢大戰)에서 서초의 항우를 상대로 승리한 기원전 3세기부터 삼국시대(三國時代)에 들어서기 직전 후한이 멸망한 3세기 전반까지 존재했던 왕조. 진(秦)의 뒤를 이어 통일된 중국의 기반을 자리잡게 한 왕조다. 그래서 진과 한을 묶어 진한제국이라고도 한다.
초대인 고조 유방(劉邦)이 진승·오광의 난으로 시작된 진(秦)나라 말기에 초패왕(楚覇王) 항우와의 결전 중인 기원전 206년 한중(漢中) 땅에서 건국했다. 한(漢)이란 국명은 바로 이 한중에서 유래한 것. 이후 서기 220년 위왕 조조의 아들 조비가 한나라 제29대이자 마지막 황제인 헌제로부터 강제 선양을 받아 사실상 제위를 찬탈할 때까지 426년간[13] 지속되었다.
통일 국가로서는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랜 통치 기간을 지닌 왕조이다. 중간에 왕망이 건국한 '''신'''이라는 듣보잡 왕조가 잠깐 들어섰다가 망하고 유씨가 중흥한 현한(중한)의 계통이 광무제에게 갈리면서, 그때를 경계로 '''전한(서한)'''과 '''후한(동한)'''[14] 으로 나뉜다.
400년이라는 긴 통치 기간을 지닌 왕조로서 '''중국 문화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 베트남을 아우르는 동아시아 문화권 전반의 기틀을 이룩한 왕조'''로 평가되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의 토착 민족은 한족(漢族)이라고 한다. 또한 중국의 전통적 글자를 한자(漢字)라고 부른다. 한자가 진나라 시대의 동글동글한 전서(篆書)의 형태를 벗어나 예서(隸書)로 변해 지금의 형태를 정립한 것이 한나라 시대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동아시아 문화권의 핵심인 인의(仁義)를 바탕에 둔 통치 이념인 유교와 그 시행 법령인 율령이 정비된 시점이 바로 한나라 시대이며 다른 제자백가 사상들도 유교와 상호 영향을 주면서 발전하여 오늘날 동양철학의 기반이 되었다. 그 밖에도 한나라의 대표 상품으로 채륜이 발명하였다고 하여 채후지(蔡侯紙)로도 불리는 종이를 들 수 있겠다.
양한(兩漢)[15] 의 경제는 장안과 낙양을 중심으로 한 관중과 중원 지역이 가장 발달했고 그 다음이 파촉, 회북 - 회남, 한수 유역과 장강 하류 이남의 단양, 오, 회의 순이다. 양한 시기에는 토지 겸병과 더불어 소농민의 노비, 유민으로의 전락이 큰 사회 문제였다.
전한과 후한은 수도의 위치 때문에 장안(長安)에 도읍했던 서한(西漢)과 낙양(洛陽)에 도읍했던 동한(東漢)이라고도 한다. 이는 오대 십국 때 유지원이 세운 한나라를 후한(後漢)으로 부르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후한 멸망 이후 한나라 유씨 황족으로서 황제에 즉위 한 소열제 유비가 파촉 지방과 한중에서 세운 촉한이 있다. 보통 삼국지의 촉(蜀)이라고 불리는 이 나라는 이게 본래의 국명이 아니며, 한나라의 정통성을 이어 찬탈 왕조 위와 맞선다는 뜻으로 엄연히 한(漢)을 국명으로 지었다. 후세에 이를 혼합하여 촉 지방의 한나라라고 해서 촉한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촉한의 정통성을 인정할 경우 마지막 한나라란 뜻에서 계한(季漢)이라 부른다.
2. 역사
2.1. 전한 치세
2.2. 후한 치세
2.2.1. 부흥과 쇠퇴
한나라 재건군의 준동으로 신나라가 멸망하고 후한이 나오기 전에 현한이 있지만 기간이 너무 짧아서 그런지 잘 언급이 되지 않고 있으나, 사실상 신나라가 23년에 멸망한 다음에 한나라가 다시 재건이 되었기 때문에 재건이 25년이 아닌 23년이라 봐도 무방하다.
현한 경시제 유현의 밑에 있었던 유수는 유현 휘하에서 세력을 키우다 하북 지방에 정착하며 세력을 넓혔고, 25년 6월에는 국가를 건국해 도읍을 낙양으로 하고 연호는 건무(建武)라 하였다. 그 뒤 유분자를 황제로 옹립하고 유현을 살해한 적미군을 격파하여 관중을 평정하고, 36년에는 촉 지방에서 할거하던 공손술을 토벌하여 중국을 재통일한다. 통일 후 유수는 백성들을 위해 노비를 해방하고, 죄인들을 석방하고, 수리 사업을 일으키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유수는 한경제의 6대손이었지만 독자적인 세력이 약하다보니 자신의 근거지였던 남양 인근의 호족들과 연합 정권을 세웠다. 이는 전한이 건국된 직후에 공신 세력을 숙청해서 강력한 황권을 확립한 것과[16] 달리 호족 세력이 공신으로서 정치에 간여하는 바탕이 되었고[17] , 아울러 이들과 혼인 관계를 맺어 이들이 강성한 외척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원인이 된다.[18]
한나라는 환관인 채륜이 초기 형태의 종이를 실용성 있게 대폭 개선한 채후지를 만들었고, 장형이 혼천의와 지동의를 만드는 등 문화가 매우 번창했다. 또한 반초가 서역 여러 나라와의 교역길을 열어서 실크로드를 다시금 개척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19대 황제인 화제부터는 외척과 환관의 세력 다툼이 심해지면서 정치는 점점 혼란해졌으며 사회 전반의 침체가 뒤따랐다. 화제 이후로는 어린 황제가 즉위했다가 일찍 붕어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정치적 권위가 불안정해진다. 이 같은 '''어린 황제''' 현상의 시작은 상제 유융이었는데, 그는 '''태어난 지 몇달 만에''' 황제가 되었다가 '''즉위한 지 몇달 만에''' 사망하였다.
이처럼 황제가 자주 바뀌는 와중으로 황태후가 정치를 장악하면서 환관과 외척이 권력을 잡다가, 결국 환관이 위세를 얻으면서 정치는 더욱 타락하고, 당고의 금 등으로 유학자들에게 신망을 잃으며, 게다가 암군인 영제가 국고를 채우기 위해 군주가 스스로 매관매직을 하는 등 망조가 보이니까 민심이 피폐해지고, 마침내 장각이 황건적의 난을 일으켜서 멸망으로 이어졌다.
황건적의 난을 시작으로 민란이 자주 일어났는데, 한 조정이 직접 진압할 능력이 없다보니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지방관들의 자율성을 크게 인정해 줄 수밖에 없었고 이들은 각지에서 독자적인 권력을 쌓으면서 사실상 군벌화가 이루어졌다. 광역 행정 단위인 주의 장관으로서 감찰의 업무를 업무를 맡은 주자사가 임명되었던 초기와 달리 이 시기에는 행정, 군사 등 전권을 행사하는 주목이 설치되어 이러한 군벌화가 더욱 가속화되었고, 중앙 조정의 영향력은 미미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십상시의 난으로 중앙 정치가 혼란스러워지자, 조정의 분란을 명분으로 하여 거의 모든 '''지방관들의 이반으로 국가가 공중 분해되는 대참사가 터지고 만다.'''
이 같은 한나라 말기의 상황이 삼국지연의의 초반부 배경이기도 하다.
2.2.2. 멸망
십상시의 난 이후로 양주 지역에서 이민족인 강족과 한족이 결합된 강력한 군세를 이끌던 동탁이 일전에 하진의 입경(入京) 요구에 호응하여 낙양 인근에 와있다가 난을 틈타 낙양에 입성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동탁은 오래지않아 정원을 죽여 그의 병사를 흡수하여 군권을 장악하였고, 조정에서도 사공이 되었다가 태위로 관직을 옮겼다. 그리고나서 소제 유변과 하태후를 살해하였고, 왕미인 소생의 헌제를 옹립하여 명실공히 정권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이에 반발한 세력이 반동탁연합을 결성하여 그와 대적하였고, 이에 낙양을 불태우고 장안으로 천도하기에 이른다.
장안 천도 이후 동탁이 살해되자 그 부곡이었던 이각과 곽사가 잠깐 정권을 잡았다가, 마침내 조조가 정권을 잡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미 동탁이 정권을 휘두를 때부터 한 황실은 그저 명목상의 존재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나타내는 말이 협천자이령제후(挾天子以令諸侯 = 천자를 끼고 그를 명분으로 삼아 제후들을 호령한다)이다.
조조는 천자를 명분으로 삼아 각지의 군벌들을 차례차례 토벌하였지만, 각지의 군벌들은 오히려 조조가 천자를 위협하는 역적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대항하였다. 결국 조조가 지배한 북중국, 유비가 지배한 사천성 일대, 손권이 지배한 강남 일대 등 지배 영역이 셋으로 나뉜 상태로 고착되었다.
조조 지배 지역에서 식물 인간 상태에서 유지되는 한 조정은 이 상황에서 전혀 영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허수아비 신세가 되었다. 결국 220년, 헌제가 조조의 아들인 조비에게 제위를 선양으로 위장한 찬탈을 당하면서 붕괴되었다.[19]
3. 영향
3.1. 하나의 중국
사실상 '''하나의 중국'''을 가능하게 한 나라다. 그전까지의 중국은 지역에 따라 언어, 문자, 단위가 다 제각각이었으며, 따라서 수많은 여러 국가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러한 차이점은 사람들의 생각에도 강하게 뿌리내려져 있었으므로, 서로 간에도 민족적 동질 의식보다는 서로 다른 나라 사람들일 뿐이라는 인식이 강했으나, 한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후 전한과 후한에 이르며 장장 400여 년간 같은 나라 사람으로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는 하나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중국을 대표하는 민족인 한족이 사실상 하나의 민족이라고 보기 어려운 외관과 혈연 그리고 문화적으로 차이가 나는 많은 지역의 수많은 민족을 통합하여 이룩한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중국이라는 하나의 테두리 안에 있을 수 있게 한 점은 한나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중국의 민족을 한나라의 한(漢)자를 따서 한(漢)족이라 부르는지 가만히 생각해보자. 그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중화(中華)가 시작된 뿌리라 봐도 무방하다.
오늘날 중화주의는 단순히 '중국의 민족주의'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근대 이전 동양의 국가질서를 고찰해보면 여기서 내세우는 중화의 의미는 현대 중국이 내세우는 근대적 민족주의적 사고 방식과 다르다. 이는 서양의 로마 제국과 비슷한 의미의 '동양의 보편적인 질서'라고 할 수 있다. 중화제국들은 '중화가 중심이 되는, 중화가 곧 천하'로 대표되는 자신들의 규범을 만들고, 자신의 세력권에 속하는 국가들에게 규범에 대한 준수와 자신에 대한 존중을 요구한다. 중원의 제국들은 주변국에게 책봉과 조공이라는 자신들의 질서를 강요하고 이에 따르지 아니하면 징벌하며 주변국들이 칭신하고 조공을 바치면 막대한 하사품을 내려 이들을 복종시켰다. 그리고 이를 따를 경우, 제국은 조공국들에게 안정과 번영을 제공할 것임을 약속한다. 제국은 이 질서를 유지하는 것 자체에서 이득을 거두며, 질서가 도전받는 경우를 제외하면 별도의 무력행위나 제재를 통해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기틀의 기반 사상을 형성한 유교를 선택한 첫 번째 중화제국이 바로 한나라이며 이 중화 의식이 동양 각국의 세계 인식에 영향을 주었으며 후대엔 이런 보편적인 질서를 내제적으로 적용시킨 소중화 사상이 나오는 등 동양사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수많은 시대에 수많은 영웅 호걸들이 즐비하는 중국사에서도 대단히 중요하게 취급받으며 상당한 입지를 가지고 있다. 단순히 하나의 중국이 시작되었다는 것만도 아닌데, 일단 동아시아 문화권의 핵심인 유교가 국학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고[20] , 또 다른 핵심인 율령(律令) 역시 BCE 130년 장탕(張湯)과 조우(趙禹) 등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3.2. 행정 제도
군현제의 기틀이 잡힌 것도 이 시대. 시작은 이사의 건의에 따라 진나라가 먼저 시행했지만 순식간에 나라가 멸망했다. 이후 진나라를 멸망시킨 항우는 천하를 다시 제후들이 나누어 통치하는 봉건제(封建制)로 부활시켰지만, 반대로 유방은 장량의 건의에 따라 천하를 분열케하는 봉건제 대신 군국제(郡國制)를 실시하였고[21] 이후 오초7국의 난과 무제 시기를 걸쳐 중국 전체에 군현제가 완전히 확립되었다. 이 군현제는 이후 장장 2000년간 중국 통치 시스템의 기본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광대한 지역에 중앙 집권의 영향력을 완전히 확립할 수 있었다. [22]
또한 한무제 대부터 지방관이 각지의 인재를 천거하여 중앙에 등용하는 향거리선제가 시작되었다. 지방의 인재들을 유교 정신에 따라 천거하면서 지방세력이 중앙의 유교 원리를 받아들이고 또한 지방의 호족들이 중앙에 진출할 기회를 활발히 얻게되어, 지방 출신 중앙관료들과 외척과 환관 중심의 황제 세력이 균형을 이루었다. 이 정책은 후한 말까지 계속되었는데, 한나라 말기에 가서는 환관과 외척간의 정쟁이 심해지고 호족들이 중앙의 정쟁에 말려드는 식으로 변했으며, 환관 세력이 지방 사대부를 집단으로 감금하는 당고의 금과 같은 사건으로 향거리선제는 무너지고 지방과 중앙간의 결속이 사라지게 된다.
3.3. 대외관계
또한 무제 시기의 군사 작전으로 이후 중국 주변국의 역사에 어마어마한 파장을 미쳐오기도 했다. 한고조 유방을 굴복시키고 미녀 왕소군을 조공으로 받을 정도로 엄청난 힘을 자랑하던 동아시아최초의 유목 제국 흉노에 대한 미칠듯한 공세로 인해 흉노는 큰 타격을 입어 이전 같은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베트남과도 전쟁을 벌였는데 이때 남월은 순식간에 멸망당하고 대신 9군이 세워지게 되면서 베트남은 이후 수백, 수천 년간 이어지는 중국과의 지리한 대립을 시작하게 되었다.
한국의 역사에도 큰 비중을 가지고 있다. 이는 바로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것이 전한이기 때문이다. 다만 위만조선은 이전의 남월에 비하면 그 한나라도 꽤나 고생을 해서 멸망시켰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한사군을 설치하였으나, 전한의 통치에 반발하는 한인 유민들의 저항과 고구려의 성장과 반격, 한사군 자체의 통제력 문제로 얼마 못 가 낙랑군을 제외하고는 거의 통제력을 상실하고, 이때 부여와의 관계도 다소 서먹해졌다.
가만히 보면 전한의 위업이라는게 죄다 한무제 때 이루어졌는데, 이에 따른 엄청난 지출이 있었고 그것은 고스란히 전한에게 막대한 피해로 되돌아왔다. 단 한무제 이후로 전한이 그 정도의 넘치는 포스를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선제라는 명군의 활약으로 어느 정도 후유증을 회복했고, 나라의 인구가 6000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 나이가 어리거나 황제가 되기에는 부적절한 인물이 계속 제위에 오르면서 결국 왕망에게 나라가 멸망했다.[24] 전한의 6000만에 가까웠다는 인구수가 조사된 시기가 AD 2년이었는데, 왕망 시기의 실정과 신나라와 후한 교체기에 벌어진 군웅들의 할거로 인해 대량의 유랑민이 발생했고, 인구도 줄어가면서 광무제가 죽은 AD 57년의 인구수는 그 반도 되지 않는 '''2800만이었다.''' 이후 후한은 멸망할 때까지도 전한 시기의 최대인구에 도달하지 못했다.
사실 초한 전쟁 시기, 신-한 교체기, 후한 말 군웅할거 시기에 유독 인구가 적은 이유는 설사 사람 자체는 더 늘어났다고 해도, 집계할 능력이 더 떨어졌을 수도 있다. 난세가 되면 유랑민이나 대호족의 예속민이 누락되기 일쑤였다. 난세에는 국가의 행정체계와 통제력의 붕괴로 인해 제대로 된 호구 조사와 이에 따른 합당한 파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25]
어쨌든 저 세 시기에는 중국 대륙의 인구 총합은 수백만 명에 불과했고,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난이 일어나 사람들이 계속 죽어나가서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깎이던 시절이며 '''40살만 넘겨도 오래 산 것'''으로 인정될 정도로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어나갔다.[26] 중국 대륙이 전한 시기의 인구 숫자를 회복한 때는 무려 600년이 지난 수문제 시대였다.
여하튼 '''고대 동아시아의 압도적 패권국가.''' 막말로 다른 나라들은 이제 나라라는 모양새를 좀 갖추어가고 있는데 '''인구 6000만'''에 '''초원으로 10만 명 이상의 기병을 진격''' 시키는 등 말도 안 되는 규모의 초강대국이었다.
그런데 2004년 MBC TV에서 방영된 드라마 주몽에서는 이 전한 왕조의 군대가 철기병이었다고 묘사했으나, 역사적 사실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사람과 말이 모두 갑옷을 입은 철기병은 아무리 빨리 잡아도 그 등장 시기가 후한 말기인 삼국지 시대에 의장용으로 약간 존재했던 정도고[27] , 본격적으로 쓰이는 시기는 북방 유목민족들이 대거 남하하는 5호 16국 시대에 들어와서야 가능했다. 사실 전한 왕조의 진짜 군사들은 대부분 갑옷을 안 입었거나 입었어도 상체만 가리는 가벼운 정도였고, 정예 기병들도 대부분 가죽 갑옷을 입은 경기병 차림이었지 중무장 기병이 아니었다. 다만 경무장을 했다고 전한 왕조의 군대가 형편없는 전투력을 지녔다고 얕볼 수는 없는데, 경무장을 하게 되면 그만큼 병사 개개인에게 들어가는 비용이 낮아지기 때문에 더 많은 수의 병력을 편성하는 것이 가능해지며, 무엇보다 몸이 가벼워서 중무장을 한 것보다 더 빨리 움직이고 쉽게 지치지 않기 때문에 장기전에 유리하다.흉노족에게 사로잡힌 한나라 군사들, 한나라 중무장 기병대의 돌격, 전한 왕조의 보병들
4. 역대 황제
5. 계보
6. 여담
- 후한의 역사를 다룬 사서인 후한서가 2018년 3월 23일, 국내에서 총 10권으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 역덕들 사이에서 널리 퍼진 If 놀이 중 하나로 로마 VS 중국이 있는데, 원수정 로마 제국과 한나라가 시기상 겹치기 때문. 다만 세부적으로 파고들면 두 제국의 최전성기가 미묘하게 어긋나있어서 비교하기 힘들다.[32]
7. 같이보기
[1] 후한 때에 명목상 영토는 중국 대륙 전역이었으나, 후한 때는 전한 때에 비해 화남 지역에 대한 행정력을 많이 잃었다.[2] 220년은 조위정통론의 관점에서 헌제의 선양으로 한조가 끝났다고 보는 것이고, 263년은 유비의 촉한이 한조를 그대로 이어받았다는 촉한정통론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현대에는 대체적으로 220년이라는 조위정통론에 무게가 실린다.[3] 일부 지역 포함[4] 초한쟁패기 시기의 근거지[5] 전한의 수도. 왕망과 후한 교체기의 전란으로 피폐해져서 전각과 민호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반(反)동탁 연합에 대항하기 위해 동탁이 강제로 천도하였다.[6] 동탁의 장안 천도로 약탈 및 방화가 벌어지고 전란의 영향으로 낙양이 피폐해지자, 협천자이령제후를 목적으로 헌제를 옹립한 조조가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허(許)로 천도하였다.[7] 기원전 202년부터[8] 엄밀히는 섭정이라 보긴 어렵고 영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권세를 부린 환관들이다.[9] 그 밖에도 1세기 말부터는 외척과 환관, 권신의 발호로 인해 실권을 가진 황제가 거의 없다.[10] 이 시대의 언어는 중고한어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었다. 상고한어에 속하는 시대긴 하지만 후한 중국어(Eastern Han Chinese)라는 용어로 따로 분류하기도 한다.[11] 한무제 때 동중서의 "파출백가, 독존유술'로 대표되는 헌책에 따라 세계 최초로 유학을 관학으로 지정했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과 연구가 있어서 한무제 때의 일을 상징적인 조치로 보고, 실질적으로 유학이 정치, 사회, 문화, 학술 등 국가 전반에 침윤하여 영향을 발휘하게 된 것은 후한 장제 이후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는 백호통의의 성서(成書)와도 관련이 있다.[12] 후한 초기에 서역을 통해 전래되었고, 후한 후기에 중원에 유입되어 불경의 번역이 이루어졌다.[13] 신나라 15년을 빼면 전후 합해 411년.[14] 오늘날 대한민국과 일본에서는 전한과 후한이 일반적으로 쓰이지만 중화권에서는 서한과 동한이 일반적으로 쓰인다. 이유는 당연히 전한의 수도였던 장안은 서쪽, 후한의 수도였던 낙양은 동쪽에 있기 때문. 사실 후한(後漢)이라는 표현은 오대십국시대에 존재한 국가를 가리키는 이름이기도 해서 혼란의 여지가 있다.[15] 전한과 후한을 통틀어 이르는 말.[16] 특히 오초7국의 난에서 황실이 반란을 일으킨 제후국들을 상대로 승리함에 따라 황권이 더욱 강화되었다.[17] 이 때문에 후한은 강력한 황권을 가진 전한 때보다 황권이 더 약했다.[18] 음씨, 등씨 등[19] 사실상 동탁 집권때부터 한나라는 국가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한나라가 겨우겨우 국가로서의 명맥을 이어나가던걸 조비가 깨뜨려버린것.[20] 다만 전한은 도가적 사상과 도교가 강세여서, 한무제가 유교를 국교화하면서도 할머니인 효문황후 두씨의 눈치를 보느라 고생을 했고, 국학이 된 다음에도 도가적 사상과 도교는 여전히 강력했다. 후한은 다르다. 광무제 유수는 '''태학(太學)에서 공부'''했던 사람으로, 유교의 세는 후한 때 훨씬 강해진다. 그런데 여담으로 광무제는 참위와 도참에 꽤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21] 역이기는 이때 봉건제를 주장하다가, 장량에게 논파당하고 유방에게 욕을 얻어 먹는다.[22] 다만 타지역 보다 일찍 중앙 집권형 제국을 이루었다는 서술은 완전히 틀린 말이다. 서양에서는 이미 아시리아 제국 시절에 막강한 중앙 집권 제도를 확립했고, 이후에도 아케메네스 왕조, 셀레우코스 제국, 로마 제국, 우마이야 왕조, 아바스 왕조, 티무르 제국 같이 막강한 중앙 집권을 이룬 제국들이 그 뒤를 이었다. 이들의 국력은 동시대 중국과 동등하거나 강력했다. 오히려 기원전 2세기에 와서야 안정적인 중앙 집권을 이룬 중국이 타지역 보다 늦은 것이었다.[23] 2000년도 더 된 유물이 이렇게 발굴된 것도 기적이라 할 수 있다. 무덤이 완전 밀봉된 구조에다가 세월이 흐른 뒤에 잊혀져 70년대에야 방공호를 짓다 발견된 것이기에 보존상태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24] 왕망의 신급의 정보조작 능력이 큰 힘을 발휘했다. 왕망은 자신을 꾸미는데 엄청난 재주를 지녔는데, 후대에는 별생각 없이 시행되었던 선양도 왕망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졌다.[25] 그래서 난세가 되면 인구 통계의 경우 호적에 모든 인구가 잡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이건 사람이 실제로 그만큼 죽어나갔다기 보다는 행정력의 한계로 인한 인구 누락이 맞다고 봐야한다는 주장이 있다.[26] 그런데 저게 난세가 아닌 치세에도 그랬고 그때 당시 세계적으로 공통으로 가진 평균적인 수명이었다.[27] 가령 조조와 원소가 격전을 벌였던 관도대전 당시, 조조군에 중장기병이 약 2명 있었고 원소군에는 10명이 있었는데, 이 정도 숫자라면 아무리 봐도 도저히 전투용은 아니고 그저 고급 지휘관을 경호하는 식의 의장용에 불과하다고 봐야 한다.[28] 사기나 한서에는 태공(太公)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건 이름이 아니라 존칭이다.[29] 사실 선제가 올린 시호는 도황고(悼皇考)다. 그런데 황고란 말은 황제의 죽은 아버지를 의미하기 때문에, 그를 제외한 전한과 후한의 추존 황제들의 시호가 '황(皇)'으로 끝난다는 걸 생각해보면 추존 황제로서는 '도황'이라고 불러야 하는 게 맞다.[30] 안제의 황후 염씨가 옹립시켰는데, 염씨 일족이 몰살당한 후 북향후로 격하되었다. 재위 기간 200일.[31] 촉한에서는 효민황제(孝愍皇帝)라는 시호를 올렸다.[32] 원수정 로마제국의 최전성기인 트라야누스 시절은 한나라의 제21대 황제인 안제 시절이었고, 이미 상당 부분 침체와 쇠퇴가 진행된 상황이었다. 한편 한나라 최전성기인 한무제 시절은 로마에게는 술라의 시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