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름 전투
1. 개요
2. 상세
오스트리아의 마크 장군(Karl Mack von Leiberich))은 라인강 전선 유지의 관건은 독일의 슈바르츠발트의 간극을 메우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독일 중부를 중립지대로 간주했고, 그의 계획에서 가장 중요했던 지역은 바로 바이에른과 뷔르템베르크의 접경지대에 자리한 울름이었다. 울름을 장악하고 지켜냄으로써 러시아군이 합류할 때까지 버티고 나폴레옹의 군대를 격멸하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울름의 시가지에는 요새화된 고지대 미헬스베르크가 있었고, 마크 장군은 이를 이용하여 나폴레옹군에게서 도시를 지킬 수 있으리라 믿었다.
마크 장군의 첫 계획은 바이레른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와 바이에른 연합군을 결성하고 울름 일대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프란츠는 바이에른의 선제후를 포섭하고자 했으나, 나폴레옹의 원조 약속에 넘어간 바이에른군은 뷔르츠부르크로 물러나 프랑스 쪽에 가담했다.
오스트리아군이 바이에른 국경을 넘는 순간에 나폴레옹 역시 움직임을 취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이미 오스트리아의 전략을 간파하고 있었고, 오스트리아의 예상대로 움직임으로써 오스트리아군을 기만하려 했다. 마크의 오스트리군이 울름에 진을 치는 동안 기만작전을 펼치기로 한 프랑스 대육군은 우회 기동을 실시해 오스트리아군의 북쪽에서 측면을 칠 계획이었다. 그렇게 될 경우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군과 뮌헨을 지나는 보급선을 가로막을 수 있었다.
1805년 9월 25일, 프랑스군의 3군단과 6군단이 슈투트가르트로 향했으나 마크의 군대는 10월 3일에야 프랑스군이 자신의 측면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에 따라 도나우 강을 따라 경계를 강화하고 주력은 울름에서 대기하며 경계했다.
10월 8일, 전날 도나우 강을 건넌 5군단과 뮈라의 기병 예비대가 프랑스군을 저지하기 위해 달려온 프란츠 아우펜베르크 장군의 군과 마주치면서 전투가 개시되었고, 아우펜베르크의 부대는 베르팅엔에서 괴멸되었다.
이튿날 네의 군단이 군츠부르크 다리의 수비대에게 돌진했고, 오스트리아군은 분전했으나 패퇴했다. 이때 나폴레옹은 마크가 남쪽으로 탈출을 계획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남쪽에는 오스트리아의 요한 대공이 티롤 수비대를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전군을 남쪽으로 돌려 추격했고, 뮈라 원수만을 남겨 잔적을 소탕하게 하였다. 그러나 네 원수에게는 적이 북쪽에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첩보가 입수되었고, 이에 네 원수는 피에르 뒤퐁의 사단을 파견하여 북쪽 기슭을 따라 고립된 적을 소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네 원수는 6군단 전체를 이동시켜 뒤퐁의 사단을 지원하려 하였으나 뮈라 원수의 반대로 지원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10월 11일 울름의 교외에서 뒤퐁은 마크의 오스트리아 군이 울름에 아직 진을 친 것을 확인하고 경악했으나 과감한 판단과 공격적인 지휘로 울름 교외의 융잉엔 시가지를 장악했다. 이미 물이 오를대로 오른 프랑스 대육군은 오스트리아군의 진격을 시가전으로 격퇴했으며, 뒤퐁은 수적 열세 상황에서도 보병 전력으로 간신히 왼쪽 측면을 지켜냈다. 기병대는 오스트리아 기병에게 패배했지만, 우익의 붕괴를 막아내며 상대의 시선을 분산 시켰다. 4대 1의 수적 열세의 상황에서 뒤퐁은 1대 1 수준의 교전비를 내는 경이로운 전투력을 보였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이미 지쳤고 피해가 컸으며 오스트리아군의 추가병력이 충원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밤새 빠르게 퇴각했다.
10월 12일 이제 나폴레옹은 예상과 달리 마크의 오스트리아군이 함정에 갇혀 여전히 울름에 있었고, 탈출의 기미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마크는 오히려 프랑스군의 도나우 강 북쪽 보급선을 노리고 있었다. 13일 오후 울름 밖으로 오스트리아군 2개 부대가 출격했다. 요한 리쉬 장군이 이끄는 1개 부대는 엘힝엔으로 향했다. 목적은 그곳의 다리를 장악하여 프랑스군의 도강을 막는 것이었다. 베르넥 장군이 이끈 다른 부대는 중포를 가지고 북으로 향했다.
리쉬는 엘힝엔 시가지에서 프랑스군 소규모 부대를 몰아냈고 방어태세를 견고하게 하였다. 오스트리아군의 계산대로라면 프랑스군이 엘힝엔에 있을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나폴레옹과 네는 뒤퐁과의 연결을 목표로 하고 있었고, 이를 위한 최단 경로는 엘힝엔의 다리를 건너는 것이었다. 10월 14일 휘하 병력을 이끈 네는 도나우 강 남쪽으로 이동하여 엘힝엔 근처에 다다랐다. 엘힝엔은 평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마을이 있는 언덕이 있고, 이 언덕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포병을 이용해 오스트리아군의 경계 병력을 몰아낸 네 원수는 다리를 건너 진군했다. 1개 연대가 시가지를 뚫고 총검돌격으로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 사원을 점령했다. 사단의 나머지 병력은 평야를 가로질러 오스트리아 기병과 격돌했고, 리쉬의 보병대를 붕괴시겼다. 이 전투에서 승리를 얻은 공으로 네 원수는 엘힝엔 공작의 작위를 받았다. 전투 당일 저녁 무렵 네는 10킬로미터 떨어진 울름을 향해 전진했다.
이 패배로 페르디난트 대공은 엘힝엔 전역을 포기해야 했고, 야심을 틈타 기병의 대부분을 이끌고 북쪽으로 탈출하여 보헤미아까지 도망칠 수 있었다. 베르넥 장군도 그 뒤를 따랐는데, 나폴레옹은 뮈라 원수를 투입하여 뒤를 쫓았고, 이틀 간의 추격 끝에 네레스하임에서 베르넥의 뒤를 잡았다.
네와 란 휘하 군단은 나폴레옹의 적의 숨통을 끊으라는 명령 하에 15일 오후 미헬스베르크의 오스트리아군에게 포격을 가했다. 대부분의 중포를 베르넥이 북쪽으로 가져가버렸기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은 이에 대응할 수 없었고, 울름을 지키던 미헬스베르크의 강화진지는 포격을 고스란히 얻어맞았다. 말레 장군이 있는 네 군단의 3사단은 진흙밭 경사를 뚫고 질주하여 강화진지를 공격했다. 처절한 백병전이 이어졌지만 마크의 '믿는 구석'이었던 미헬스베르크는 단 한번의 공격으로 프랑스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결국 마크의 나머지 군대는 울름 시가지에 완전히 갇힌 신세가 되었고, 절망만이 남아있었다. 나폴레옹은 고지에서 울름을 향해 마음껏 포격을 퍼부었다.
10월 18일 뮈라의 추격에 고전하던 베르넥이 트로히텔핑엔에서 항복했다. 마크 장군은 이제 유일하게 남은 러시아의 지원 병력만을 기다렸지만, 러시아군은 아직 보헤미아에 있었기 때문에 남은 선택지는 항복뿐이었다.
10월 20일, 바이에른 진공을 개시하며 이끌고 온 7만의 병력 중 6만 이상을 잃은 마크는 3일간의 교섭 끝에 드디어 항복했다. 이 전투의 참패로 동맹국 전력을 상실한 러시아군은 홀로 나폴레옹을 상대해야 했고, 그 결과는 아우스터리츠 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