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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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04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오스트리아의 대공이었던 프란츠 2세가 나폴레옹한테 영혼까지 털린 다음에 칼을 갈면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 아래에 동군연합 상태에 있던 오스트리아 대공국,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부코비나 공국 등의 남아있는 영역들을 싸그리 긁어모아서 하나로 합쳐서 세운 제국이다.
오스트리아 제국이 세워지기 이전에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를 합친 국가는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여러 국가들의 군주를 겸하고 있는 동군연합이 있었을 뿐이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지배 아래에 있는 영토를 통칭하여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불렀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성립 이전에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 대공국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대 지배자들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신성 로마 제국 내 제후국들에 대한 통제권을 사실상 상실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보다는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등의 직할 동방 영토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지는 신성 로마 제국에 포함되는 부분도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제국이 세워진 뒤 신성 로마 제국에도 속하고 오스트리아 제국에도 속하는 지역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본거지인 오스트리아 대공국도 오스트리아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 모두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다만 신성 로마 제국은 오스트리아 제국이 생겨나고 금방 사라져 버렸다.
신성 로마 제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의 제국은 독일어로 다르게 표기한다. 전자는 Reich(라이히)[3] 라고 하는 데 반해 후자는 Kaiserthum(카이저툼, 현재의 철자법으로는 Kaisertum)이라고 했다. Oesterreich(외스터라이히, 현재의 철자는 Österreich)라는 단어에 이미 Reich가 들어 있기 때문에 반복을 피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과도 구분하려고 Kaisert(h)um이라는 다른 단어를 사용한다.
실질적으로는 둘 다 세습이었지만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명목상으로는 선제후에 의해 선출되는 황제였고[4] 오스트리아의 황제는 세습되는 황제였다.
2. 역사
19세기 초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등장으로 거의 명목상으로 지속되던 신성 로마 제국은 결정적인 위기에 처하게 된다. 캄포포르미오 조약(1797)과 뤼네빌 평화 조약(1801)의 결과로 라인 강 서쪽에 위치하던 모든 제국령은 프랑스에 합병되고 영토를 잃어버린 기존의 제후들은 라인 강 동안의 영토에서 황제가 알아서 보상한다는 합의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란츠 2세가 승인한다. 황제의 체면은 크게 떨어졌고 교회령, 제국 기사령 등의 황제가 지금까지 영향력을 행사한 제국 내 영토들은 모두 사라지고 남은 제후들마저 전부 프랑스 편에 붙어 버렸다.
더군다나 이것으로 인해 황제의 선거권이 있는 9명의 선제후 중에 친합스부르크 파인 마인츠, 트리어, 쾰른의 3개 선제후[5] 가 없어지고 나폴레옹이 사실상 독일의 지배자 행세를 하며 오스트리아 바로 앞에 있는 제국 도시 레겐스부르크에서 독일 제국 대표자 회의를 열어서 기존의 없어진 선제후 5개 자리[6] 를 대신하여 자신을 따르는 국가들을 멋대로 선제후로 삼아버렸다.
새롭게 선정한 선제후 중에서 오스트리아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방계에 속하는 토스카나 대공국이 나폴레옹에게 합병당하는 대가로 잘츠부르크 대주교령의 선제후 겸 대공이 되는 것에 그쳤고, 나머지 4개 선제후들인 대공국으로 승격된 바덴[7] , 뷔르템베르크, 작센, 헤센-카셀은 모두 프랑스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바이에른, 작센도 프랑스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선제후 자리 중 과반수가 프랑스의 영향력이 미쳤다. 프로이센은 하노버를 합병한 후 가만히 있었으며 합스부르크의 세력은 프란츠가 가지고 있는 보헤미아 국왕과 그 동생이 재위 중인 잘츠부르크 선제후 2명밖에 없었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제직 승계는 이미 불가능해졌다.
이는 기본적으로 신성로마제국이 선거군주국이었기 때문이다. 명목상 선거로 황제를 뽑는데, 선제후A[8] 에 불과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이 언제부턴가 당선, 당선, 당선...되면서 얼렁뚱당 신성 로마 황실이 된 것이다. 실제로는 세습이지만 일단 선제후 투표를 하면 과반표를 얻었으니 문제는 없었다. 만약 다른 선제후가 황제 경합에 나선다면 뚝배기를 깨버리면 그만이었으니까.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에서 오스트리아의 뚝배기가 깨지고, 각 선제후국이 점령당하며, 오스트리아는 다음 투표에서는 과반표를 얻을 수도, 그를 무력으로 저지할 수도 없게 되었다. 결국 합스부르크 가문은 그들을 손절하고 처음부터 합스부르크 혈연세습 국가인 오스트리아 제국을 건국한 것이다.[9]
그래서 프란츠 2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대표 작위인 오스트리아가 기존의 신성 로마 제국 내의 대공국으로 격하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를 대체할 수 있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를 대표할 만한 직위인 오스트리아 황제에 등극했다. 1806년에 나폴레옹에게 패배하면서 결국 신성 로마 제국은 해체되었다.
하지만 프란츠 2세와 오스트리아 제국은 끝내 나폴레옹을 거꾸러트리는데 성공하였고 1815년 빈 회의의 결과 결성된 빈 체제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은 유럽의 균형을 위해 열강끼리 맺은 신성동맹의 일원이 되어 유럽 대륙의 현상 유지에 주력하였으나 1840년대 유럽 각국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1848년 프랑스에서 2월 혁명으로 7월 왕정이 없어지자 그 영향으로 오스트리아 빈에서도 대규모의 혁명이 일어났고 빈 체제는 붕괴되었다. 황제 페르디난트 1세는 퇴위해야 했으며 제국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나고 헝가리는 아예 독립을 선포하는 등 제국이 공중분해되기 일보직전까지 갔으나 페르디난트의 조카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즉위하여 러시아의 도움으로 혁명을 무력으로 진압한 다음 권위주의적인 통치로 제국을 지배해 갔지만 이미 제국의 분열조짐은 벌써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2.1. 오스트리아 제국의 분할안
1848년 9월 중순부터 빈(Wien) 정부는 헝가리에서 발생한 민족적 분쟁을 가능한 한 빨리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을 구체화시키기 위한 방안도 강구하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인해 헝가리에 대한 군사작전이 곧 펼쳐지리라는 소문이 제국 내에서 급속히 확산되었으며 반정부적 세력을 빈으로 집결시키는 요인으로도 작용했다. 그러다가 10월 6일 빈 정부의 계획, 즉 헝가리에서 발생한 민족적 분쟁을 군사적으로, 즉 오스트리아 군을 투입시켜 해결한다는 방침이 밝혀짐에 따라 반정부적인 소요가 도시의 여러 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했다.
이 당시 제국 내에서 반정부 세력을 주도하던 인물들은 빈 정부의 지나친 간섭에 대항하는 헝가리인들에게 공감내지는 지지를 표명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는데 그러한 것은 이들이 빈 정부에 대한 헝가리인 들의 저항이 분쇄될 경우 제국 내에서 자신들의 입지 역시 크게 위축될 수 있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소요에는 기존의 질서체제를 부정하던 사회주의자들과 그들을 추종하던 노동자들과 학생들도 대거 참여했다. 이 소요로 인해 페르디난트 1세는 10월 7일 다시 제국의 수도를 떠나 모라비아 변경백국의 올로모우츠(Olomouc)로 가야만 했고, 자신의 조카 프란츠 요제프 1세에 황제의 자리를 양위한다.
그러나 빈의 소요가 10월 31일 빈디쉬그래츠(Windischgrätz)와 J.옐라치치(J.Jellačić)에 의해 진압됨에 따라 빈 정부는 오스트리아 제국을 3월 혁명 이전의 체제로 환원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도 가지게 되었다.[10] 실제적으로 빈에서 발생한 10월 소요가 진압된 이후 제국 내에서 반혁명 세력은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고,[11] 그것에 따라 당시 빈 정부를 주도한 펠릭스 추 슈바르첸베르크 후작(Felix Fürst zu Schwarzenberg0)에 의해 빈의 제국의회는 11월 22일 모라비아 변경백국의 소도시인 크렘지어(Kremsier; Kroměřížz)[12] 로 옮겨졌다.
의회의 기능과 효용성을 부정하던 슈바르첸베르크는 당시 자유주의의 상징으로 간주되던 제국의회를 가능한 한 빨리 해산시키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이러한 입장을 제국의회의 재개원 석상에서 명백히 밝혔다.[13] 이 당시 슈바르첸베르크는 오스트리아 제국이 독일권에서 주도권을 다시 장악해야 하고 그러한 것 역시 가능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슈바르첸베르크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입지를 약화시킬 수 있는 대독일주의나 소독일주의 원칙에 따른 독일 통합과 슬라브 정치가들의 요구였던 연방체제의 도입에 대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러한 그의 의도가 알려짐에 따라 제국의회의 의원들은 그들 나름대로 자구책을 강구하게 되었고 거기서 독일계 의원들과 비독일계 의원들은 의견적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 우선 비독일계 의원들, 특히 슬라브계 의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표, 즉 연방체제의 도입을 통한 제 민족의 정치적·사회적 평등 구현을 향후 어떻게 실천시켜야 하는 가를 심사숙고하게 되었고, 이들은 현실정치(realpolitika)의 필요성도 인지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기존의 질서체제가 인정할 수 있는 헌법제정에 주력하게 되었다.
이에 반해 F.슈셀카(F.Schuselka)[14] 를 비롯한 독일계 의원들은 슈바르첸베르크의 의도에 대해 이율배반적인 입장을 보였다. 즉 이들은 권력분립을 지향한 시민 계층이었기 때문에 혁명 이전의 체제로 무조건 복귀하려는 정부 의도에는 반대했지만 빈 정부가 그 동안 독일계가 누렸던 법적·사회적 지위 등을 위협할 연방체제의 도입을 저지한 것에 대해서는 전폭적인 지지를 보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독일계가 오스트리아 제국 내에서 우위권을 계속 견지해야 할 뿐만 아니라 비독일계 민족들 역시 독일의 문화적 및 정치적 지도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방했던 것이다.
아울러 이들은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Frankfurter Nationalversammlung)의 독일 통합 방안을 처음부터 반대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제국이 독일권에서 주도권을 다시 차지해야 한다는 슈바르첸베르크의 주장에 대해서도 전폭적인 지지를 보였다. 이후 독일계 의원들은 크렘지어에서 권력분립을 법적으로 인정한 중앙체제의 근간만을 지향하게 되었고, 그들의 정치 활동 역시 그러한 것에 국한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15] 그러나 이들은 점차적으로 슬라브 정치가들과의 협력도 모색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빈 정부가 기존의 질서체제로 회귀하려는 의지를 강력히 밝히고 그것을 가능한 한 빨리 실천시키려 한 데서 비롯된 것 같다.
크렘지어 제국의회에 제출된 정치가들의 헌법 초안중에 특히 이에 따라 제국의회 내에서 슬라브 의원들을 주도했던 프란티셰크 팔라츠키(F.Palacký)와 K.마이어(K.Mayer)[16] 의 헌법초안 내용이 대표적인데, 팔라츠키는 1849년 1월 24일 ‘30인 헌법 준비위원회’에서 기존의 역사적·지방군을 제국의 구성요소로 채택하는 것을 포기하고 민족단위체 원칙에 따른 지방군 편성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2.1.1. 팔라츠키의 제국 분할안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반혁명정책이 실효를 거둠에 따라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한 제국 내 슬라브 정치가들은 독일 정치가들과는 달리 자신들이 지금까지 펼친 정책의 당위성을 부각시켜야 하는 긴박한 과제도 부여받았다. 이에 따라 이들은 팔라츠키, L.리게르(L.Rieger), 그리고 A.트로얀(A. Trojan) 의원을 법무장관인 알렉산더 폰 바흐(A. von Bach) 남작[17] 에게 보내어 제국 내에서 확산되고 있던 복고주의적 성향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시하게 했다. 여기서 이들 정치가들은 빈 정부가 계속하여 그러한 경향을 방치할 경우 제국 내 슬라브 민족들은 자신들의 민족성 보존과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해 제국을 이탈할 수도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또한 이들은 3월 혁명 이후 그들이 견지한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Austroslavism)의 공과를 부각시켰다.[18] 그것은 이 주의의 도움을 받은 빈 정부가 슬라브 정치가들에게 반대급부(protivýkon)를 제시하지 않고 혁명 이전의 절대왕정체제로 복귀하려는 것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19]
이러한 슬라브 정치가들의 경고성 발언에 대해 알렉산더 폰 바흐를 비롯한 빈 정부의 각료들은 혁명 초기처럼 우려를 표명하지 않았는데 그러한 것은 제국의 슬라브 정치가들이 제국을 이탈하여 러시아 제국이 주도하던 범슬라브주의 운동에 참여하지 않으리라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 같다. 실제적으로 슬라브 정치가들은 러시아 제국이 범슬라브주의의 기치 아래 슬라브 민족들을 그들의 지배 하에 놓이게 하려는 의도를 잘 알고 있었고 그들 민족이 러시아의 지배체제 하에 놓이는 것보다는 절대왕정체제 하의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사는 것이 여러 측면에서 유리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20] 이후 슬라브 정치가들, 특히 제국의회에 참석한 정치가들은 향후 자신들이 취해야 할 방안을 강구하게 되었고 거기서 빈 정부가 수렴할 수 있는 헌법안제시의 필요성도 인지하게 되었다.
빈 제국의회와 마찬가지로 크렘지어 제국의회에서도 30인 헌법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3인 위원회(Dreierausschuß)와 5인 위원회(Fünfterausschuß)가 하부 조직으로 운영되었다. '''3인 위원회'''는 기본법 논의를 위해 구성되었고, '''5인 위원회'''는 헌법제정에 필요한 절차 마련을 위해 결성된 조직이라 하겠다.
특히 5인 위원회에 참석한 의원들 모두는 헌법초안을 제출할 의무도 부여받았는데, 이들 중에서 팔라츠키와 이탈리아 트리에스트(Triest) 출신의 고비(Gobbi)만이 헌법초안을 제출했다. 이 당시 고비는 제국을 분할시키는 과정에서 슬라브 의원들의 관점을 부분적으로 반영시키고자 했다. 따라서 그는 역사적 또는 민족적 원칙을 각 지역 상황에 맞게끔 탄력적으로 적용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슬라브 의원들은 고비가 1849년 1월 24일에 제출한 헌법초안이 당시 헝가리 왕국에 포함된 지방들, 즉 슬로바키아, 루테니아[21] , 크로아티아, 세르비아의 보이보디나, 그리고 루마니아의 트란실바니아를 이 왕국에 공식적으로 합병시키는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고비의 안에 동조하지 않았다.
팔라츠키는 빈 제국의회에 제출한 헌법초안에서 연방체제의 통치단위가 될 지방군에 대해 언급했는데 거기서는 역사적이고, 전통적인 원칙이 강조되었다. 또한 그는 크렘지어 제국의회에 제출한 초안과는 달리 제국의회에 대표자를 파견하지 않은 헝가리 왕국과 북부 이탈리아 지역을 지방군 분할과정에서 배제시켰다. 그리고 각 지방(또는 지방군)은 독일적 요소가 강한 중앙 정부로부터의 지나친 감독과 지시를 배제하고 자신들에게 부여된 통치권을 그들의 통제 하에 두며 그것의 시행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에 대해서도 스스로 책임쳐야 한다는 것이 팔라츠키의 관점이었다.
팔라츠키가 빈 제국의회에서 초반에 제시한 지방군들은 다음과 같다.
- 1) 폴란드 지방군:갈리치아 지방과 부코비나 지방이 여기에 속하고 렘베르크(Lemberg)가 이 지방군의 수도가 된다.
- 3) 독일-오스트리아 지방군:하오스트리아, 상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지방, 티롤 지방, 포어아를베르크 지방, 슈타이어마르크 지방 등이 이 지방군에 속하고, 각 지방은 다른 지방군과는 달리 빈,린츠, 인스부르크, 그라츠와 같은 독자적인 수도를 가질 수 있다.
- 4) 일리리아 지방군:케른텐 지방과 크라인 지방, 해안 지방과 달마티아 지방이 이 지방군의 구성 지역이 되며 라이바흐와 트리에스테 제국직할 도시가 이 지방군의 수도가 될 수 있다.
- 1) 독일 민족 단위체:슈타이어마르크(Steiermark), 크라인(Krain), 티롤(Tirol), 뵈멘(Böhmen), 메렌(Mähren), 슐레지엔(Schlesien)의 독일 민족거주 지역이 이에 포함된다
- 3) 폴란드 민족 단위체:갈리치아(Galizien), 부코비나(Bukowina), 카르파초우크라이네(Karpatoukraine)지역이 이 민족 단위체에 포함된다.
- 4) 일리리아 민족 단위체:슬라보니아(Slawonien) 지방과 아드리아 해안지역이 이에 포함된다.
- 5) 이탈리아 민족 단위체:롬바르도(Lombardo), 베네치엔(Venetien), 티롤의 이탈리아 민족 거주지역이 이 민족 단위체에 속한다.
- 6) 남슬라브 민족 단위체:크로아티아(Kroatien), 달마티아(Dalmatien), 보이보디나(Wojwodina)가 여기에 속한다.
- 7) 헝가리 민족 단위체:웅가른(Ungarn)과 지벤뷔어겐(Siebenbürgen)의 헝가리 민족 거주지역이 이에 포함된다.
- 8) 루마니아 민족 단위체:웅가른, 지벤뷔어겐, 부코비나의 루마니아 민족 거주지역이 이에 속한다.
첫째, 팔라츠키는 각 민족 단위체에 거주하던 소수 민족에 대한 정책적인 배려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둘째, 팔라츠키는 폴란드, 루마니아, 세르비아(Serbien)의 완전한 민족통합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제국의 분할과정에서 외톨이로 남게 된 루테니아(Ruthnien)인도 임의적으로 처리했다. 즉슨, 팔라츠키는 루테니아인을 폴란드 민족의 지배하에 놓이게 했던 것이다.
셋째, 보헤미아 지방과 같이 한 지역에 둘 이상의 민족들이 혼거 할 때 어떠한 방법으로 이들을 나눌 것인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24] 이 당시 팔라츠키는 크렘지어 제국의회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체코 의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국 분할안에 대해 슬라브 의원들, 특히 체코 의원들은 그리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팔라츠키가 체코 정치가들의 정치적 보루였던 ‘보헤미아 국법(das böhmische Staatsrecht)'를 등한시한 데서 비롯된 것 같다.[25] 팔라츠키는 자신의 제국 분할안이 공포된 이후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자신에 대한 비우호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제국의회에서 자신이 지향한 연방체제를 다시금 언급하면서 이 체제에 대한 기존의 인식과 거기서 비롯되는 문제점을 거론하는 적극성도 보였다.
우선 팔라츠키는 연방체제의 적용이 독립국가들 사이에서나 가능하다는 기존의 인식과 거기서 비롯된 연방체제의 도입 불가능성을 제국 내 대다수의 정치가들, 특히 독일 정치가들이 계속 견지하고 있음을 언급했다. 이어 그는 비록 오스트리아 제국 내 지방들이 독립 국가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는 않지만 도나우 제국에 연방 체제를 도입시켜야 하는 당위성을 다시금 부각시켰는데 그것은 이 제국을 구성하는 지방들에 각기 다른 민족들이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러한 것이 각 지방을 독립국가적인 형태로 변형시켰다는 데서 비롯된 것 같다.
이러한 구조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의원들이 오스트리아 제국에 연방 체제를 도입시킬 경우 이 제국의 붕괴가 필연적이라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에 단순히 그것의 저지에 앞장서고 있다는 것이 팔라츠키의 분석이었다. 팔라츠키는 독일 정치가들의 그러한 우려가 단지 기우에 불과하다는 것을 입증시키기 위해 구체적인 사례도 아울러 제시했다. 즉, 그는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 지방에서 이탈리아인들이 자신들의 민족적 지위향상을 위해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지만 슬라브 민족들이 사는 대다수의 지방에서는 오스트리아 제국과의 관계를 그대로 유지 하면서 민족적 지위향상만을 모색했다는 점을 지적했던 것이다.
여기서 팔라츠키는 역사발전이라는 측면에서 하나의 원칙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몇 년 전부터 오스트리아의 역사에서 부각되던 ‘민족간의 동등성(die Gleichheit der Nationalitäten)’이었다. 그러나 그는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원칙이 이론적 단계 및 실천적 단계부터 부정되어 왔음을 지적했다. 그 일례로 팔라츠키는 제국의 슬라브인들과 왈라키아인들이 민족적 지위 향상을 모색했지만 그러한 것이 아직까지 실천되지 못했음을 지적했다.팔라츠키는 제국 내 민족들이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산다는 것에 대해 기쁨과 희망을 가질 수 있게끔 오스트리아 제국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역사적 소명을 부각시켰다. 또한 그는 역사와 민족체를 고려하고 거기서 적합한편의적 경계를 발견할 경우 자신의 헌법초안은 충분히 그러한 취지를충족시킬수 있음을 거론했다.
그러나 팔라츠키는 대 지방을 갑자기 소 지방으로 변형시킬 수 없음을 지적 하면서 보헤미아 지방의 분리를 그 대표적인 일례로 제시했다. 그리고 그는 지방군 편성에서 독자적 또는 같이 행동해야 하는 민족체의 입장도 고려해야 한다는 점도 부각시켰다. 따라서 그는 원칙적으로 보헤미아 지방을 독일 보헤미아 지방과 체코 보헤미아 지방으로 분리하는 것에 대해 찬성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에 따를 경우 보헤미아 지방은 하나의 가마솥과 같은 지방이기 때문에 이러한 가마솥을 이론상 나눌 수는 있지만 그것은 이 솥을 부순 후에나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팔라츠키는 자신의 헌법초안을 통해 빈 정부에게 새로운 과제를 부여했는데, 그것은 이 정부가 제국 내에서 민족적 장래를 추구하던 소수 민족들에게 희망과 밝은 미래를 부여하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즉, 빈 정부는 이미 오래 전에 의미가 퇴색된 오스만 제국의 위협으로부터 중부 유럽을 보호하는 의무나 그들이 지속적으로 추진하던 제국의 독일화 정책을 대신하여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현안문제로 부각된 민족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어느 민족도 제국 내에서 다른 민족들보다 특권을 가질 수 없고 그러한 것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행사할 수 도 없다는 관점을 피력했다.
그러나 팔라츠키의 이러한 민족적 동등성은 제국의 정부가 슬라브적 우위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도 내포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팔라츠키는 중부 유럽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살펴볼 때 제국의 소수 민족들이 민족주의를 부각시키면서 독립을 모색하는 것 자체가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언급하면서 이들은 주어진 체제의 협조 및 지원 아래 자신들의 민족성을 유지하거나 지위권 향상을 도모하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하다 하여 3월 혁명 이후부터 강조한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의 기본적 입장을 다시금 천명했다.
이러한 입장표명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에 연방 체제를 도입시키기 위해서는 빈 정부의 묵시적인 승인이 필요하다는 것을 팔라츠키가 인지했음을 알 수 있다. 팔라츠키의 이러한 입장 표명에도 불구하고 이 당시 연방체제의 도입에 대해 긍정적이었던 제국의회의 의원들마저 팔라츠키의 제국 분할안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표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우선 연방주의자들의 입장을 대변했던 핀카스(Pinkas)는 팔라츠키가 제시한 민족단위체 원칙에 따른 지방군 편성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명했는데, 그것은 그가 역사적 지방군을 토대로 오스트리아 제국을 변형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는 제국의회에 참석 한 민족들과 직접적으로 연계된 안건들만 다루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 팔라츠키의 지방군 분할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A.폰 헬페르트(A.von Helfert) 역시 팔라츠키의 제국 분할안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팔라츠키 안을 시행할 경우 제국을 매우 소규모 단위로 나누어야 할 뿐만 아니라 민족적 단일화를 위해 제국내 대다수의 민족들이 자신들이 살던 지역을 포기해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라는 언급도 했다.
그리고 중앙체제를 옹호했던 E.바카노(E.Vacano)와 브레스텔(Brestel)도 팔라츠키의 제국 분할안은 실현 불가능한 구상에 불과하다고 혹평했다. 이들은 그것을 대신하여 중앙주의적인 행정구획을 기초로 지방군과 오스트리아 제국의 재구성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26] 이렇게 팔라츠키의 제국 분할안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이 크게 대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슬로베니아 출신의 카우치치(Kaučić) 의원을 비롯한 일부 의원들은 팔라츠키의 제국 분할안에 동조하는 자세를 보였다.
2.1.2. 마이어의 제국 분할안
크렘지어 제국의회가 활동을 개시한 이후부터 대다수의 독일계 의원들과 마찬가지로 마이어 역시 기존 질서체제의 근간을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유지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마이어 역시 3월 혁명 이후 부각된 민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연방체제의 도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마이어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연방체제를 도입시킨다 하더라도 중앙집권체제의 근간이 유지될 경우 독일계는 계속하여 제국 내에서 법적·사회적 특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제국 내 비독일계 민족의 이익을 다소나마 반영시킬 수 있는 연방주의적 중앙주의체제(föderalistisch-zentralistisches System)를 대안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여기서 그는 제국 내에서 제기되던 민족문제들이 민족적 압박보다는 정치적 압박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피력했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적 발전을 통해 그러한 것들을 해소시킬 수 있다는 입장도 표명했다.[27] 또한 마이어는 민족주의 원칙에 따라 제국을 분할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관점도 피력했는데 그것에 대한 의원들의 반응 역시 매우 호의적이었다.
그는 보헤미아 왕국을 비롯한 일련의 왕국들은 중세적 산물이라고 했다. 여기서 그는 비록 중세의 왕국들이 인위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약점을 가졌지만 거기서 자족적인 사회조직체가 구축되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라 했다. 또 그러한 사회조직체에서 민족 간의 불화현상이 야기된다고 해서 그것을 일순간에 파괴시킬 수도 없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28] 이 당시 마이어는 빈 정부 역시 민족주의적 원칙에 따라 제국을 분할시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각 지방군에서 제기되고 있는 민족문제를 각 지방군에 여러 개의 최소행정단위인 읍이나 면(Gemeinde)을 설치하여 해결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구상한 읍이나 면에 가능한 한 같은 민족을 거주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아울러 그는 이러한 행정 단위에 보다 많은 자치권을 부여할 경우 슬라브 정치가들뿐만 아니라 독일 정치가들의 협조를 얻어낼 수 있다는 판단도 했던 것이다.
이 당시 마이어가 구상한 자치권은 각 읍이나 면이 자신들의 대표나 대리인을 외부 간섭 없이 독자적으로 선출할 수 있다는 것과 각 읍이나 면이 새로운 이주민들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결정권도 가진다는 것을 명시했다. 그리고 각 읍이나 면이 지역민들과 직접적으로 연계되는 문제점들을 독자적으로 처리하거나 또는 지역경찰서를 자발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것과 각 읍이나 면에서 운영하는 지역의회가 지역민들에게 예산안을 공개하고 공개적으로 회의를 운영할수 있다는 것 역시 마이어가 구상한 자치권에 포함되었다. 이렇게 할 경우 중앙집권화정책의 강화로 제 민족의 자치권이 박탈될 수 있다는 슬라브 정치가들의 우려와 연방체제의 도입으로 제국 내 독일 민족의 위상이 격하될 수 있다는 독일 정치가들의 우려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는 판단을 마이어가 했던 것이다.
마이어는 자신의 헌법초안에서 역사적·전통적 지방군을 제국의 구성요소로 채택해야 하다는 입장을 표방했는데 이것은 앞서 팔라츠키가 제시한 민족단위체의 원칙에 따를 지방군 편성과는 정면으로 대치된다고 하겠다. 마이어는 자신 이 제시한 지방군들 사이의 동등권 보장을 언급했을 뿐만 아니라 각 지방군은 헌법에서 명시한 자치권도 행사할 수 있다고 했다. 마이어가 자신의 헌법안에서 제시한 지방군 구성은 다음과 같다.
- 4) 도시의 행정구역이 포함되지 않은 엔스 강 북단의 오스트리아 대공국(Das Erzherzogtum Österreich ob der Enns ohne dem Innviertel)
- 5) 도시의 행정구역이 포함된 잘츠부르크 공국(Das Herzogtum Salzburg samt dem Innviertel)
첫째, 마이어는 각 지방군에 거주하던 민족들의 불평등한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해 제시한 읍이나 면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았다.
둘째, 제국 내에서 독일계가 향유했던 법적·사회적 위상을 계속 견지해야 한다는 관점이 지방군 분할과정에서 우회적으로 표출되었다는 것이다.
2.1.3. 문제점
팔라츠키와 마이어는 자신들의 헌법초안에서 황제의 권한, 중앙 정부와 지방군 정부의 권한에 대해 언급했다. 이어 이들은 제국의회와 지방군의회의 구성, 운영방법, 그리고 권한 등에 대해서도 거론했다. 여기서 팔라츠키와 마이어는 원칙적으로 권력분립을 지향했는데 그것은 이들이 기존의 절대왕정 체제보다는 입헌세습군주정 체제(Konstitutionelle Erbmonarchie)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팔라츠키와 마이어는 자신들의 헌법초안에서 황제의 권한을 비중 있게 다루었는데 거기서 확인되는 것은 이들이 황제의 기존 권한들을 대체적으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즉 황제는 자신이 펼친 정책 또는 거기서 파생된 문제점들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과 제국의회를 개회하거나 폐회시킬 수 있는 권한을 계속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황제가 전쟁선포, 평화체결, 동맹 및 통상협정체결권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국가에게 부담을 주거나 또는 신민에게 책임을 부과할 경우 제국의회로 부터 사전동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헌법초안에 명시하여 제국의회의 권한을 다소나마 증대시키려고 했다. 또한 이들은 황제가 임명한 장관들이 자신들의 정책에 대해 책임을 지는 장관책임제의 도입도 거론했다. 그리고 이들은 ‘황제의 직계성원이나 오스트리아 제국의 국적을 가지지 않은 인물들을 장관으로 임명하지 않는다’라는 항목을 제시하여 장관의 독립적 지위나 국가에 대한 장관의 책무를 우회적으로 부각시키려고 했다.
이어 팔라츠키와 마이어는 그들의 안에서 중앙 정부의 권한 일부만을 축소시켰는데 그것은 이들이 혁명 이전의 질서체제를 인정해야 한다는 현실적 상황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특히 팔라츠키가 자신의 기존 입장을 부분적으로 철회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가 연방체제라는 원칙 하에서 중앙주의적 요소를 강조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에서 비롯된 것 같다. 이제 팔라츠키는 각 민족 단위체가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자치권을 빈 정부로부터 보장받는 선에서 연방체제의 의미를 찾고자 했다. 따라서 그는 지방자치와 관련된 부분 이외의 모든 권한을 앙정부의 권한으로 인정하려고 했다.
마이어 역시 직접적으로 지방통치와 관련된 안건들 이외의 모든 권한을 중앙 정부에 넘겨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팔라츠키와 마이어는 제국의회의 권한 및 구성에 대해서도 언급했는데 여기서는 양원제도의 도입, 제국의회 의원들의 임기와 그들의 권한 및 특권, 제국의회와 황제와의 관계 등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었다. 팔라츠키와 마이어는 양원제도, 즉 민의원(Volkskammer)과 참의원(Länderkammer)으로 제국의회를 구성해야 한다는데 동의했다. 아울러 이들은 제국의회의 정례화에 대해서 언급했을뿐만 아니라 제국의회 의원들의 선출방식도 거론했다. 이들의 관점에 따를 경우 제국의회의 의원들은 지방군의회에서 선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거주 인구에 따라 각 지방군의회에 할당된 제국의회의 의원들을 지방군의회에서 선출하는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제국의 국적을 가졌거나, 국가시민권을 완전히 부여받은 30세 이상의 성인남자, 그리고 제국 내에서 정식 거주지에서 1년 이상 살 경우에만 선거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 마이어의 입장이었다. 여기서 그는 1년에 5 굴덴(Gulden) 이상의 직접세를 내는 사람들에게만 선거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입장도 피력했다. 이렇게 할 경우 이전보다 훨씬 많은 슬라브 인들이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 마이어의 분석이었다.[29] 이에 반해 팔라츠키는 선거권 부여조건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 자신이 일반-보통 선거제의 도입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팔라츠키와 마이어는 회기 중에 제국의회 의원들이 의회에서 행한 발언에 대해 면책특권을 주어야 한다는데는 의견을 같이했다. 그리고 제국의회는 의원 규칙을 독자적으로 제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집행부도 자율적으로 선출․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 양인의 헌법초안에서 거론되었다.
또한 팔라츠키와 마이어는 자신들의 초안에서 제국의회의 의원들이 투표권을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다는 것과 재적 의원의 과반수이상이 찬성해야만 법률적 안건들이 제국의회에서 통과될 수는 있다는 것도 명문화시켰다. 그리고 제국의 회에서 통과된 법률안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황제의 추인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들의 초안에서 거론되었다. 그러나 팔라츠키와 마이어는 제국의회에서 통과된 법률안에 대한 황제의 절대적 거부권행사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 했다. 우선 팔라츠키의 관점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는 법률안에 대한 추인이 황제로부터 거절되거나 지연될 때 이 안은 동일회기 중에 다시 제국의회에 상정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 회기에 이 법률안이 의회에 재차 상정, 통과되었지만 황제로부터 승인이 다시금 거부될 때 제국의회는 자동적으로 해산되고 새로이 구성된 제국의회에서 동일한 법률안이 다시 통과되었을 때 황제는 그것에 대한 추인권행사를 더 이상 할 수 없고 추인 조치를 즉각적으로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점에 대한 마이어의 입장을 살펴보도록 한다. 우선 그는 법률안에 대한 추인이 황제로부터 거절되거나 지연될 때 이 안은 동일 회기 중에 다시 제국의회에 상정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혀 팔라츠키와 견해를 같이했다. 또한 그는 다음 회기에 이 법률안이 의회에 재차 상정, 통과되었지만 황제로부터 승인이 다시금 거부될 때 제국의회는 자동적으로 해산되고 90일 이내에 새로운 제국의회를 구성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새로이 구성된 제국의회에서 동일한 법률안이 통과되기 위해서는 사안에 따라 전체 의석의 2/3 또는 3/4 의 동의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황제는 그것에 대한 추인권도 계속 행사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혀 팔라츠키와 입장을 달리했다.
이어 팔라츠키와 마이어는 지방군의회의 권한에 대해 언급했는데 이 부분에 대한 양인의 의견은 일치되었다. 즉 이들은 ‘지방군의회에 책임을 지는 ‘장관총독(Ministergouverneur)’ 을 주축으로 내무, 교육-문화를 전담할 행정부를 각 지방군이 구성한다.’는데 동의했던 것이다. 이 당시 마이어는 지방군의회의 권한으로 지방군 세출을 위한 조세승인권, 병원 및 빈민구호시설물 건설, 지방기금과 재산 처분권, 지방 신용기관의 운영 및 감독권, 지방예산 확인권, 농업관련 법률제정권, 지방회계에 대한 감정 및 조사권 등을 제시했다. 팔라츠키 역시 거의 유사한 권한들을 지방군의회에 부여하려고 했다. 팔라츠키와 마이어는 자신 들의 헌법초안에서 지방군의회 의원들의 선출 방법과 활동에 대해서도 거론했다. 이들은 보통선거에 따라 지방군의회 의원들을 직접 선출해야 한다고 했고 지방군의회는 매년 가을 각 지방군의 수도에서 개원하고 제국의회처럼 자신들의 의원규칙을 독자적으로 제정하고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을 헌법초안에서 명시했다.
그리고 이들은 3년마다 지방군의회를 새로이 구성하고 제국의회가 해산될 경우 지방군의회 역시 자동적으로 해산되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지방군의회에서 통과된 법안은 황제의 승인을 얻어야만 법적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총론에 대해서는 양인이 동의했다. 그러나 황제의 승인을 받지 못할 경우 지방군의회는 통과된 법안을 제국의회에 상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 팔라츠키의 관점에 대해 마이어는 자신의 헌법초안에서 그것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지방군 선거에서 보통선거제도의 도입이 채택되기 전에 독일계 의원들은 재산평가에 따른 차등선거제도(Zensuswahlrecht)의 도입을 요구했다. 그리고 다른 맥락에서 선거권을 제한해야 한다는 견해가 브레스텔(Brestel)로부터 나왔다. 그는 문맹자들이 선거권을 부여받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렇게 할 경우 비독일계 민족들에 대한 선거권부여가 자연스럽게 제한될 것이며 그것은 제국의회 내에서 독일 의원들의 우위권도 자동적으로 보장될 수 있다는 것이 브레스텔의 관점이었다. 이에 대해 피시호프(Fischhof)는 이의를 제기했는데 그것은 선거권부여대상에서 제외된 비독일계 민족들이 소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에서 비롯된 것 같다. 따라서 제국의회는 문맹자들에게 선거권을 제한해야 한다는 발의를 수용하지 않았고 팔라츠키와 마이어 역시 이를 자신들의 헌법초안에서 거론하지 않았다.
이 당시 제국의회의 의원들은 제국 내에서 복고주의적 성향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고 그것은 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작업을 가능한 한 빨리 마무리시켜야 한다는 생각도 가지게 했다. 따라서 이들은 점차적으로 마이어 헌법초안에 대해 관심을 보였고 그것을 토대로 한 헌법안 제정에 주력했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마이어의 안은 팔라츠키의 안보다 중앙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따라서 마이어는 자신의 안에서 중앙정부의 권한을 증대시키고 지방정부의 권한을 축소시켜 빈 정부로부터 긍정적인 반응도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제국의회는 빈 정부가 마이어의 안을 수용하지 않으리라는 판단을 했기 때문에 마이어의 안에서 지방 정부 및 의회의 권한을 더욱 축소시키는 융통성도보였다. 아울러 제국의회는 민족문제의 해결방안을 빈 정부에게 위임시키는 추가적인 양보안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빈 정부는 크렘지어 제국의회의 양보안을 처음부터 수용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러한 것은 프란츠 요제프 1세[30] 가 제국의회에서 헌법안이 채택되기 이틀 전, 즉 3월 4일에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슈타디온(Station)이 비밀리에 준비한 헌법안을 재가한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정부가 제정한 헌법에서는 황제의 절대적 거부권 및 긴급 법률제정권 등이 언급되었지만 현안 문제로 부각되던 민족문제에 대한 대책이라든지 신민의 기본권보장 등은 들어 있지 않았다. 아울러 여기서는 중앙정부의통제를 받는 기존의 행정구역을 그대로 둔다는 것이 거론되었다.[31]
같은 날 슈타디온은 팔라츠키를 비롯한 제국의회 의원들 일부를 소환하여 정부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통고했다. 여기서 슈타디온은 헝가리 소요진압을 위해 제국 구성원들 간의 결속이 우선적으로 요구되기 때문에 정부가 그동안 마련한 헌법안을 공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러한 자세는 빈 정부가 더 이상 제국의회의 활동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실제적으로 슈바르첸베르크는 1849년 3월 7일 크렘지어 제국의회에서 통과된 헌법안을 무효화시켰다. 아울러 그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의사당 출입구 모두를 봉쇄하여 의원들의 의사당 출입을 저지했을 뿐만 아니라 저항하는 의원들 모두를 체포, 구금했다.
정부의 이러한 조치에 대해 크렘지어 제국의회의 의원들, 특히 비독일계 의원들은 심한 반발을 보였다. 이들은 공동 명의로 발표한 성명서에서 정부의 조치가 재앙과 혼란만을 가져다 줄 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들은 앞으로 더 이상 정부정책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겠다는 자세도 보였다. 실제적으로 리게르는 제국의회가 빈 정부에 의해 강제로 해산된 직후 체코 민족의 민족적 염원을 오스트리아 제국이 아닌 제3국에서 실현시키고자 했다. 따라서 그는 파리에서 체코 민족의 상황을 부각시키고 그것에 대한 지지세력도 확보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고 그러한 시도는 빈 정부에게 체코 정치가들을 임의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동인만을 제공했을 뿐이었다.
2.1.4. 무효화 이후
크렘지어 제국의회가 해산된 이후 알렉산더 폰 바흐가 주장한 신절대주의(Neoabsolutismus) 시대가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시작되었고 그것은 제국의회의 활동도 불가능하게 했다. 이에 따라 제국 내 정치가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러나 슬라브 정치가들은 독일 정치가들과는 달리 자신들이 지향한 정치적 목표를 다시금 부각시키는 적극성을 보였다. 비록 이들은 연방체제의 도입이 어렵다는 사실을 인지했지만 이들 중의 일부는 언론을 통해 빈 정부의 정책에서 확인되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과감성도 보였다. 그 일례로 팔라츠키는 1849년 12월 21일 ‘나로디니 노비니(Národní Noviny:국민일보)’에 ‘오스트리아 제국의 중앙집권화와 민족적 동등권(O centralisaci a národní rovnoprávnosti v Rakousku)’이란 기사를 투고했는데[32] 거기서 그는 절대왕정체제의 부당성을 다시금 언급했을 뿐만 아니라 빈 정부의 각성도 촉구했다.
그에 따를 경우 절대왕정체제는 제 민족의 평등과 그들 사이의 화해를 가져다 줄 수 없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체제는 비독일계 민족들의 반발을 야기 시켜 그들의 제국이탈만을 부추긴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그는 이러한 이탈시도로 오스트리아 제국이 결국 해체될것이라는 예견도 했다. 여기서 그는 빈 정부가 연방체제를 도입할 경우 그러한 비극적 상황은 초래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을 펼쳐 빈 정부의 각성을 우회적으로 촉구하기도 했다.
팔라츠키는 자신의 투고문에서 상당 부분을 연방체제 논의에 할애했다. 여기서 그는 빈 제국의회에서 제시했던 것들을 다시금 강조했는데 그것은 그가 크렘지어에서 보였던 정부와의 타협 가능성을 완전히 포기했기 때문이다.[33] 이러한 팔라츠키의 입장을 통해 한 가지 의문점을 제시할 수 있는데, 그것은 왜 그가 절대왕정체제로 복귀한 빈 정부에게 연방체제의 도입을 다시금 거론했는 가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팔라츠키의 행위는 무모하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러한 것은 어디서 기인되었을까. 그것은 제국 내 슬라브 민족들이 빈 정부를 대신하여 그들의 민족성 유지와 사회적 지위 향상을 가져다 줄 기존의 다른 질서체제를 찾을 수 없었다는 것과 슈바르첸베르크의 빈 정부가 민족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한다면 체제변경도 고려할 수 있다는 일말의 기대에서 행위(činnost)의 당위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1.5. 결론
팔라츠키의 안은 의회 내에서 그리 큰 지지를 받지 못했고 그것에 따라 마이어(Mayer)는 연방주의적 중앙주의체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했고 그것에 따른 헌법초안도 제국의회에 제출했다.
이 당시 그는 제국 내에서 제기되던 민족문제들이 민족적 압박보다는 정치적 압박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는점을 피력했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적 발전을 통해 그러한 것들을 해소시킬 수있다는 입장도 표명했다. 마이어는 자신의 헌법초안에서 역사적·전통적 지방군을 제국의 구성요소로 채택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방했는데 이것은 앞서 팔라츠키가 제시한 민족단위체의 원칙에 따를 지방군편성과는 정면으로 대치된다고 하겠다. 지방군 분할에서 의견을 달리했던 팔라츠키와 마이어는 자신들의 헌법초안에서 황제의 권한, 중앙 정부와 지방군 정부의 행정조직 및 권한, 제국의회와 지방군의회의 구성 및 운영방법 그리고 권한 등에 대해 언급했는데 일부분을 제외한 모든 항목에서 양 인은 유사한 관점을보였다. 그러나 팔라츠키는 자신의 헌법초안과 미이어의 헌법초안에서 확인되는 차이점들을 해소시킬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의 실책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복잡한 제 상황, 특히 민족문제를 원만히 해결하여 줄 헌법은 중앙주의적인 체제를 강조해서도 안 되고, 연방체제나 역사적 권리 또는 민족적 요소를 지나치게 부각시켜서도 안 될 것이다. 이 당시 제국 내에서 부각된 문제들은 민족 문제와 무관한 경우도 허다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도식적 모형이 아닌 타협적 모색이 필요했는데, 그러한 가능성은 팔라츠키의 헌법초안보다는 마이어의 헌법초안에서 확인되었다. 따라서 제국의회의 의원들은 마이어의 헌법초안을 토대로 빈 정부가 수용할 수 있는 헌법안을 제시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슈바르첸베르크는 1849년 3월 7일 크렘지어 제국의회에서 통과된 헌법안을 무효화시켰다. 결국 여전히 제국 내의 민족문제는 해결되지 못했고 그것은 제국의 존속을 지속적으로 위협하는 요소로 남게 되었다.
2.2. 대타협
1867년 오스트리아 지역의 인구는 4,500,000명으로 전체에 비하면 일부에 불과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력이 떨어지고 여러 소수 민족들[34] 이 점차 합스부르크에서 벗어나려는 분리 운동을 시작했다.[35] 결국 민족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여전히 내비둔채로 황실은 오직 독일 연방에서의 주도권을 잡는것에만 몰두하였으나 1861년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서의 패배와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의 패배는 독일 연방에서 축출이라는 결과물을 남기고 말았다. 이로 인해 황실의 영향력은 전반적으로 크게 감소되었다.
이 틈을 타 제국 안에서 독일민족 다음으로 규모가 큰 헝가리[36] 에서는 각종 소요가 빈발하여 황제까지 습격당할 뻔하고 더 이상 헝가리를 억누를 수 없게 되었고, 헝가리의 분리 주장이 강해지는 원인이 되었다. 이로써 오스트리아 제국 내 독일인들은 그들 제국이 더 이상 강대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또한 이들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의 패배로 인해 오스트리아 제국이 독일 연방에서 강제로 축출되었고 이것으로 인해 제국 내 제 민족의 관계설정에도 큰 변화가 있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당시 제국 내 독일 자치주의자들은 당시의 위기적 상황과 거기서 파생된 불합리성을 인지했고 그것은 이들로 하여금 현실적 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제국의 초민족주의적 특징은 독일 자치주의자들로 하여금 제국 내 독일인들에게 그들 민족의 우위권을 견지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게 했는데 그것은 이전의 영역보다 제한되거나 축소된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우위권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후부터 제국 내 독일 자치주의자들은 주어진 상황 하에서 가장 적합한 정치체제를 찾는데 주력했다. 그 결과 이들은 독일 민족과 헝가리 민족이 주도하는 이중체제를 도입시켜야한다는 것을 인지했을 뿐만 아니라 제국의 공동 관심사를 공동 의회에서 해결하는 형태, 정합국(realunion)이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도 내렸다. 그리하여 오스트리아 황실과 헝가리 귀족들은 '대타협'(Ausgleich)을 맺고 대타협을 통해 헝가리를 사실상 독립시키는 대신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독립 내각이 따로 존재하는 이중제국 체제인 동군연합을 수립하기로 결정했다.
3. 영토
[image]
1850년의 오스트리아 제국의 민족 분포 그림이다.
- 빨간색이 오스트리아의 중심지이자 독일계들의 거주 지역인 오스트리아 대공국, 잘츠부르크 공국, 티롤 제후백국,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케른텐 공국, 포어아를베르크 주
- 초록색이 헝가리계의 거주 지역인 헝가리 왕국
- 파란색이 체코계와 슬로바키아계 거주 지역인 보헤미아 왕국, 모라비아 변경백국이며 보라색과 접하는 곳은 폴란드계가 거주하는 오스트리아령 실레시아가 포함된 보헤미아 왕관령
- 어두운 파란색은 슬로베니아계의 거주 지역인 카르니올라 공국과 이탈리아계의 거주 지역인 오스트리아 연안 지대가 속했던 일리리아 왕국
- 하늘색은 크로아티아계의 거주 지역인 크로아티아 왕국, 슬라보니아 왕국, 달마티아 왕국
- 보라색은 폴란드계, 우크라이나계, 루신계의 거주 지역인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 갈색은 세르비아계가 거주하는 보이보디나-바나트
- 주황색은 루마니아계가 거주하는 트란실바니아 대공국
- 연두색은 이탈리아계의 거주 지역인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으로 이 지역은 후에 이탈리아 왕국이 차지하게 된다.
- 연한 노란색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방계가 다스리는 제국의 종속국들이다.
빈 회의 이후 1848년 혁명과 1860년 10월 학위이후로 개편된 오스트리아 제국 지방 조직 구성도이다.
4. 황제
5. 시스라이타니아
시스라이타니아(Cisleithania)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중 오스트리아 제국이 지배하던 지역을 의미한다. 시스라이타니아라는 이름은 라이타 강의 안쪽(동쪽)을 흐른다고 하여 명명되었다. 공식 명칭은 '''제국협의회에 대표된 왕국들과 영토들(Die im Reichsrat vertretenen Königreiche und Länder)'''이다. 원래는 오스트리아 제국이 헝가리 왕국까지 지배하였지만, 대타협의 결과로 헝가리 왕국과 동군연합을 형성하게 되면서 본토 면적이 대타협 이전보다 절반 넘게 줄어든 300,005km²이었다.[43]
5.1. 황제
6. 언어별 명칭
- 독일어: Kaisertum Österreich
- 오스트리아 독일어: Kaiserthum Oesterreich
- 바이에른어: Kaisertum Östareich
- 영어: Austrian Empire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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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15년 제정된 문장이다.[2] 각민족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서 사실상 여러 언어들이 사용되었다고 한다.[3] 독일어에서 Reich는 제국이 아니라 국가라는 의미로 쓰인다. 신성 로마 제국 heiliges römisches Reich의 황제는 황제 대관식을 통해 서로마 제국의 황제의 후계자로 인식되었지만, 당시의 신성 로마 황제는 신성 로마 제국의 국가 연합체의 대표자에 불과했고 세습제가 아니라 제후들 사이에서 선출되는 것이었기에 신성 로마 황제의 권력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각지의 영주들이 자신의 영지에선 황제보다 더욱 강한 권한을 지니고 있었을 정도.[4] 그래도 1273년 루돌프 1세가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에 올랐고 1452년 프리드리히 3세가 제위에 오른 이후부터는 카를 7세를 빼고 전부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었다. 이마저도 카를 7세는 사실상의 대립황제로 재위기간 내내 오스트리아의 공격을 받으며 도망치면서 지냈다(...)[5] 이 셋은 카톨릭 대주교였기에 합스부르크가와 친했다.[6] 프랑스 혁명 전쟁으로 소멸된 3개 선제후를 포함해서 팔츠 선제후는 나폴레옹 등장 이전인 18세기 말 대가 이어지지 않아서 같은 비텔스바흐 가문인 바이에른 선제후의 영지에 흡수되어 소멸하였고 (영국과 동군 연합인) 하노버 선제후는 1795년 바젤 조약으로 프랑스에게 굴복한 프로이센이 프랑스로부터 하노버의 점령을 인정받은 후 하노버를 침공해 합병하면서 사실상 없어진다.[7] 라인 강변 안쪽의 영토를 바치고 과거 지배를 받있던 오스트리아의 영토들을 포함하여 라인 강 바깥쪽의 기존의 영토보다 몇 배나 많은 땅을 받았다.[8] 이는 보헤미아 왕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데 보헤미아 왕국 역시 명목상으론 선거군주국이었다.[9] 기업을 예로 들면 이해하기 쉽다. 기업의 지분 12%를 가진 총수는 11%, 11%, 11%...등을 가진 이사들의 지지를 받아 회사를 지배하고 있었지만, 이사들이 배신하자 회장 자리에서 쫓겨나 대주주A로 격하될 위기가 왔다. 그렇다면 앉아서 쫓겨나느니, 주식을 처분해 만든 돈으로 새 기업을 만들고 비상장하여, 작지만 확실하게 지배하는 것이다.[10] 이 당시 빈의 소요를 주도한 세력은 헝가리 군으로부터의 지원도 기대했다. 그러나 헝가리군은 슈베하드(Schwechat) 근처에서 옐라치치와 그의 크로아티아 지원병에 의해 섬멸되었다. 10월 28일부터 시작된 빈 탈환 작전은 10월 31일에 종료되었다. 이 작전에서 1,198명에 달하는 정부군이 희생되었지만 혁명군의 피해는 이보다 훨씬 컸다. 실제적으로 적게는 4,000 명, 많게는 6,000 명에 달하는 혁명군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했다. 빈의 소요를 진압시킨 빈디쉬그래츠와 옐라치치는 오스트리아 제국뿐만 아니라 독일권에서도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로 평가받고 있었다.[11]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의원으로서 빈 소요에 참여했던 J.프뢰벨(J.Fröbel)과 브룸(R.Blum)은 이미 8월 말부터 빈에서의 상황이 독일 및 유럽에서 진행되던 혁명의 성공여부를 좌우할 것이라는 예견도 했다. 특히 브룸은 자신의 부인에게 보낸 서신에서 빈에서의 소요가 지니는 의미를 나름대로 분석하기도 했다. 그에 따를 경우 빈에서 혁명세력이 승리를 거둘 경우 혁명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혁명세력이 패할 경우 독일에서는 오랫동안 ‘암울한 상황’이 전개되리라는 것이 그의 분석이었다. 아울러 독일권에서 좌파 정치가로 간주되었던 F.프라이그라트(F.Freigrath) 역시 빈의 상황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방했는데 그것은 다음의 인용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무릎을 꿇을 수 있다면 우리는 즉시 무릎을 꿇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아직까지 기도를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빈을 위해 기도할 것이다.”[12] 크렘지어는 올로모우츠 근처의 소도시였다.[13] 이 자리에서 슈바르첸베르크는 오스트리아 제국을 존속시켜야 하는 의미에 대해 거론했다. 그에 따를 경우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적인 필요(ein deutsches wie ein europäisches Bedürfnis)’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을 앞으로도 존속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크렘지어의 선언(Kremsier Erklärung)으로 공포되기도 했다.[14] 빈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슈셀카는 1848년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848년 8월 27일 자신의 의원직을 포기했는데 그것은 자신이 빈 제국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10월 소요 이후 슈셀카는 크렘지어 제국의회에서 독일계 출신 의원들을 주도하는 역량을 발휘하기도 했다.[15] 공화정 체제를 지향하던 좌파세력은 10월 소요가 진압된 이후 의회 내에서 바로 제거되었고 이들 모두는 오스트리아 제국을 떠났다.[16] 마이어는 제국의회 활동 기간 중에 자신이 슬라브인이라는 것을 강조했지만 후에 그는 독일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러한 것은 모라비아 지방에서 독일인들이나 슬라브인들 모두가 모라비아인들로 지칭된 데서 비롯된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가능했던 것은 보헤미아 지방과는 달리 모라비아 지방에서는 민족 간의 대립이 크게 표면화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17] 이 양반이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신절대주의를 심어준 사람이다.[18]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는 1848년 4월 11일 팔라츠키가 프랑크푸르트 예비 의회로 보내는 거절 편지에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팔라츠키는 빈 정부의 중앙체제에 대해 불만을 가진 제국의 슬라브 민족들이 독일 민족처럼 독립을 지향할 경우, 그것은 불가능하고, 무모한 행위에 불과하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또한 그는 슬라브 민족들이 민족주의 원칙에 따라 오스트리아 제국을 이탈하여 독립 국가를 형성할 경우 과연 그러한 국가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을지에 대해 강한 의구심도 제기했는데 그것은 그가 러시아 제국의 범슬라브주의와 그것에 따른 슬라브 세계의 통합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팔라츠키는 자신의 편지에서 제국 내 슬라브 민족들이 주어진 체제를 인정하고 거기서 그들의 민족성을 보존하면서 권익향상을 점차적으로 도모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던 것이다. 오스트리아 근대사 또는 체코 근대사를 취급한 저서 및 논문들은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의 내용과 지향하는 바를 다루고 있다.[19] 빈 제국의회와는 달리 슬라브 정치가들은 소수세력(12명)으로 30인 헌법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20] 빈 신정부는 1848년 11월 21일에 구성되었다. 그런데 내무장관으로 임명된 프란츠 제라프 슈타디온 백작(Graf Franz Seraph Stadion)을 제외한 내각 구성원들, 예를 들면 법무장관으로 임명된 알렉산더 폰 바흐나 교역장관으로 지명된 카를 프리드리히 폰 브루크 남작(Freiherr Karl Friedrich von Bruck)은 의회의 기능과 권한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21] 자카르파탸[22] 구오스트리아주의자로 간주되던 뢰너(Löhner)도 크렘지어 제국의회에서 팔라츠키의 제국 분할안에 동조했는데 그것은 10월 소요 진압 이후의 정치적 상황이 그로 하여금 체코 정치가들과의 대립을 포기하고 협력하는 자세를 가지도록 했기 때문이다. [23]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 역시 제 1차 세계대전 중에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이 결속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24] 팔라츠키는 이 당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승전국들이 종종 사용하던 ‘민족의 강제이주(Zwangsumsiedlung der besiegten Nationalitäten)’라는 방법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러한 것은 그가 보헤미아 지방의 분할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점이 발생될 수 있다는 것을 시인하면서도 그것에 대한 어떠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데서 확인할 수 있다.[25] 합스부르크 왕조 및 지배자에 대한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자들의 관점은 보헤미아 국가법에서 비롯된다. 그들에게 있어서 오스트리아 황제는 보헤미아 국왕에 불과했다. 이렇게 프로그램화된 왕정주의는 민족적 자각을 현실화시키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정당성과 연계된다 하겠다.[26] 30인 헌법 준비위원회에서 팔라츠키의 헌법초안을 지지한 의원은 9명에 불과했다.[27] 팔라츠키와 고비의 헌법초안이 ‘30인 헌법위원회’에서 과반수이상의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됨에 따라 제 3의 헌법 초안으로 마이어의 헌법 초안이 제출되었던 것이다.[28] 팔라츠키 역시 후에 자신의 안이 그러한 점을 고려하지 않았음을 시인했다.[29] 이 당시 대다수의 시민 계층은 5굴덴 이상의 세금을 내고 있었다. [30] 페르디난트 1세는 건강상의 이유로 1848년 12월 2일에 퇴위했고 그의 조카였던 프란츠 요제프가 18세의 나이로 황제 직을 승계했는데 그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31] 이 헌법안이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은 제국의회가 강제로 해산된 직후였다.[32] 이 당시 신문은 슬라브 지식인들에게 있어서 빈 정부의 정책을 비판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슬라브 지식인들은 그것마저 박탈당하게 되었다.[33] 팔라츠키는 자신의 논문에서 제국 분할을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1. 독일-오스트리아 지역, 2. 보헤미아-모라비아-실레시아(체코슬로바키아) 지역, 3.갈리치아-카르파티아 루테니아(폴란드-루테니아) 지역, 4. 헝가리 지역, 5. 루마니아 지역, 6. 크로아티아-달마티아-보이보디나(남슬라브) 지역, 7. 이탈리아 지역[34] 제국 내 최대 민족은 독일계로 나중에는 약 24% 정도였지만, 과반수를 점한 적이 없었다. 후기로 접어들면 독일계는 줄고 슬라브계와 헝가리계의 숫자가 크게 늘어났다. 그나마도 오스트리아의 인구는 더 적어서 이것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다만 이 시기에는 모든 지역의 인구가 크게 증가해 인구 비중이 그렇게까지 극적으로 변하지는 않긴 했다.[35] 그런데 크로아티아인과 함께 제국 내 대표적인 슬라브족인 체코인들은 완전 분리를 원하지는 않았다. 체코는 당시 동유럽 안에서 가장 산업이 앞선 지역이고 문화적으로도 정교회가 아니라 가톨릭이어서 체코인의 이런 대응은 다른 슬라브족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36] 인구의 약 20%를 차지했지만 마찬가지로 그나마 본토의 인구는 조금 더 적었고 주변 지역을 합쳐야 이 정도의 인구가 되었다.[37] 원래는 루마니아의 영토였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소련이 베사라비아(현재의 몰도바, 오데사 주 일부, 체르니우치 주 북부 일부)와 함께 부코비나 북부 지역을 가져갔다. 현재는 체르니우치 주에 속해 있다.[38] 남부 일부는 현재의 슬로베니아.[39] 영어로는 스티리아(Styria)로 불리며 부르크뮐러의 에튀드 Op.100 중 하나인 '스티리아의 여인'에서 나온다.[40] 남부 일부는 현재의 슬로베니아 동부.[41] 쥐트티롤 지역인 남부 티롤은 이탈리아인이 많은 지역이었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에 포함되어 현재의 볼차노 자치구가 되었다. 나머지 티롤 지역은 오스트리아에 잔류.[42] 오스트리아 부르겐란트 주, 헝가리 전체, 슬로바키아 전체, 우크라이나 카르파티아 루테니아[43] 롬바르디아 지역을 이탈리아 왕국에게 뺏기면서 더 줄어든 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