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용팔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원용팔은 1862년 2월 17일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이호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중교(柳重敎)의 문인으로,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발발하자 여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심상희에게 가담해 후군장으로서 활동했다. 그러나 심상희 의병장이 1896년 음력 2월 장호원의 병참소 공격을 실패한 후 청풍으로 패퇴한 뒤 의병대를 해산시키자, 그는 유인석의 제천의진에 가담해 보름 남짓 머무르며 중군장을 맡았다.
제천 의진이 서간도로 이동할 때 함께 하지 않고 서울로 상경하여 상소문을 올렸으며, 의병에게 죽은 단양군수 권숙의 아들이 복수하려고 유인석을 해치려 하자 잘 타일러 그만두게 했다. 이후 자택에 은거한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것에 분노하여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원주 진위대 중대장 김귀현(金貴鉉)과 연락해 내응해줄 것을 당부했다. 또한 호남의 기우만에게도 서신을 보내 호응을 청했고, 서북 일대에서 강학을 펼치고 있던 유인석에게도 글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다. 유인석이 신중론을 제기하며 의병을 일으키는 일을 망설이자, 회당(悔堂) 박정수(朴貞洙)가 원용팔을 대신해 유인석에게 글을 올렸다.
원용팔의 의병 봉기는 많은 친지·지사 및 민중들의 공명(共鳴)을 얻었으며, 격고문이 각 고을에 돌려짐과 함께 제천, 청풍, 횡성, 홍천 일대의 충청북도 일대와 강원 일대에서 호응하여 모여든 이가 천여 명에 달했다. 그러나 원용팔 등은 직접 행동에 옮기기에 앞서 장병들을 모아 편성, 훈련하면서 좀 더 유능하고 신망 있는 인물을 맞이하여 주장(主將)으로 받들 것을 계획하였다.현재의 불행한 형편으로 말한다면, 일본이 말로는 고문이라는 명색을 갖고 있지만, 나라의 권리를 마음대로 행사하니 소위 10부 대신이라는 것을 벌써 일본 정부로 화하여 버렸습니다. 들판을 태우는 큰 불길이 8도로 퍼져서 시골에 약간 남은 옛 풍속도 몇 날 안에 다 없어지게 되고, 소위 재판이니 세금을 받느니 하는 무리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새로 정한 약조(約條)가 1백60조나 된다고 하니, 무슨 흉모(兇謀)가 이렇게까지 많은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이것을 차례차례 실시하여 그들의 욕심을 채우고야 말게 되겠습니다. 이 시기의 형편이야말로 칼자루를 남에게 맡겨서 나를 죽이게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산림 천택(山林川澤)을 점거하는 일이나, 호구를 등록하고 군대를 개혁하는 일같은 것을 제 마음대로 하고, 일찍이 우리를 나라로 보는 일이 없으니, 아 사람으로서야 이 모양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후략)
이때 정부에서는 원주 진위대에 출동을 명령했다. 김귀현(金貴鉉)은 앞서 원용팔과의 내응 약속을 깨기로 결심하고 의병대에서 적극적인 공세를 펴지 않는 것을 기회로 삼아 일진회 회원들을 시켜 의병진의 와해공작을 수행하게 했다. 이로 인해 일부 장병들이 흩어지자, 그는 이 틈을 타 습격해 원용팔을 추적하여 체포했다. 이로 인해 의병대는 해산되어 버렸다.[1]
원용팔은 체포된 뒤에도 기개와 의지를 잃지 않고 심문하는 일본 군인과 관원들을 꾸짖고 타일렀으며, 일본인들이 주는 음식은 들지 않았다. 후에 서울로 압송되어 주한 일본군 사령관 육군대장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의 심문을 받았을 때, 하세가와가 "다시 군사를 일으키지 않겠다고만 하면 이 자리에서 놓아주겠다."고 하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또 하세가와가 "누구와 함께 군사를 일으키겠는가?"라고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동대문 밖에만 나가면 다시 군사를 일으키겠다."
이후 경성형무소에서 심문을 받던 그는 1907년 3월 7일 옥사했다."호응하는 사람이 없으면 집안 사람들과 같이 하고, 집안 사람들도 호응하지 않으면 나 혼자서 하겠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원용팔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