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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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기우만(奇宇萬)

회일(會一)

송사((松沙), 학정거사(學靜居士)
생몰
1846년 8월 7일 ~ 1916년 10월 28일
출생지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탁곡[1]#
본관
행주 기씨
매장지
전라북도 순창군 무이산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을사조약 이전의 행적
2.3. 을사의병
2.4. 이후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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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의병장.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기우만은 1846년 8월 7일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탁곡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고종 초기 대표적인 위정척사파였던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이며, 아버지는 기만연(奇晩衍), 어머니는 이기성(李耆成)의 딸이다. 아버지 기만연은 학문의 수준이 높기로 유명했지만 일찍 죽었기 때문에, 기우만은 8살 때부터 조부 기정진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10살 때 사서(四書, 논어·맹자·대학·중용)를 읽었고, 13세 때는 자치통감을 읽었으며 14세 때는 <심경(心經)>, 16세 때 <주역>, <예기>, 춘추 등을 읽었다. 1862년 17세의 나이로 삭녕 최씨 최인석(崔錫麟)의 딸과 혼인했고, 1869년에 승보복시(陞補覆試)에 응시하여 삼장[2]에 수석을 차지하고 이듬해 봄에 식년 진사시에 3등 36위로 급제했다. 그러나 1874년 가을에 문과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조부 기정진은 노론 가문 출신으로 존화양이에 기반한 대일통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대일통 사상은 주나라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주를 중심으로 하여 천하를 통일하고자 함에서 나온 것으로, 효종 대에 서인의 영수로서 북벌을 주장했던 송시열의 핵심 사상이었다. 기정진은 중화는 명나라이며, 청나라는 오랑캐로 인식했고, 명나라의 중화 문명을 파괴한 오랑캐 청나라를 정벌하려고 한 효종이 대일통의 춘추 의리를 행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고종이 춘추 대의를 구현하면서 모든 신민을 통일하는 대일통의 세계를 구축하기를 고대했다.
이렇듯 중화를 받들고 오랑캐를 배척하는 확고한 사상을 갖고 있었던 기정진은 서학인 천주교를 배척했고 위정척사 정책을 지지했다. 그는 손자 기우만이 21세가 되던 1866년 상소를 올려 서양의 통상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고 향촌에서 군사를 조련하고 화포 등 무기를 제작하고 무예를 익혀 서양 세력의 침략을 막을 것을 촉구했다. 얼마 후 병인양요가 발발하자, 그는 의병을 일으키려 했고 프랑스 해군이 철수하자 사직소를 올리면서 천주교도들의 확산을 막기 위해 유교 질서를 재정비하고 소민의 생활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기우만은 이러한 조부의 서양 배척 정신을 수용하고 일찍부터 위정척사로서의 면모를 다졌다.

2.2. 을사조약 이전의 행적


1879년 기정진이 사망한 뒤, 기우만은 34세의 나이로 호남 유림의 종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조부의 학문을 계승해 대일통 사상을 받들면서 서구의 신사상을 단호히 거부하고 성리학적 질서를 수호하고자 노력했다. 정부가 개화 정책을 실시하고 신하들에게 서양의 옷을 입으라는 개복령을 발표하자, 기우만은 이를 적극 반대하고 '군주의 명'이라 할 지라도 따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이 발발하자, 마을 모임을 열어 동학도를 물리칠 방도를 모색했으며 동학에 가담한 유생들을 배척했다.
그러던 1895년 8월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발생해 조선 유림들이 격분했다. 여기에 그해 겨울에는 단발령이 발표되자, 기우만은 더이상 참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1895년 12월에 <을미소(乙未疏)>를 올렸다.

신은 훼발의 명령을 들은 후로부터 문을 닫고 곡기를 끊어서 갑자기 죽어 세상을 올리지 않기로 맹세했습니다. 대개 황후의 원수는 곧 신하들이 함께 와신상담해야 할 자인데 국가의 형세가 날로 깍이어 설욕할 희망이 없습니다. 전장(典章)과 문물은 여러 성조(聖朝)에서 전수된 옛 법도인데 하루아침에 개변하여 다시 회복할 기약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훼발령까지 이르니 혼란스러움이 지극합니다.

대개 나라는 망하지 않음이 없으니, 모발을 훼손하여 존재하기 보다는 차라리 모발을 보존하여 망하는 것이 낫습니다. 사람은 죽지 아니함이 없으니, 모발을 훼손시켜 사는 것 보다는 차라리 모발을 보존하여 죽는 것이 낫습니다. 나라가 망함은 욕된 바이나 욕됨이 망함보다 심한 것이 있고, 사람의 죽음은 미워하는 바이나 미워함이 죽음보다 심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차라리 망하고 사람이 차라리 죽을지언정 몸을 보존하면서 사는 것을 원치 않는 것입니다.

1896년 1월 유인석이 경기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기우만 역시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동지를 규합하기 시작했다. 그해 2월, 그는 고광순, 기삼연, 김익중 등 200여 명의 지사들과 함께 나주로 가서 전열을 정비하고 호남대의소장(湖南大義所將)이 되었다. 이후 상소를 올려 의거를 보고했지만 전달되지 않았고, 사방에 통문을 돌려 30윌 광주에 집결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2월 27일 선유사 신기선 등이 내려와 의병의 해산을 명령하는 왕명을 전하자, 통곡하며 의병을 해산했다. 이후 그는 삼성산 꼭대기에 삼산재를 짓고 그곳에 줄곧 머물며 외부 활동을 끊었다. 그는 이 시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이제부터 우직하게 처세를 하고 싶지만

커다란 집을 누가 기둥하나로 버티겠는가.

서툰 목수가 제 손만 다치는 것을 이제 알고서

목을 움츠리고 산에 들어와 썩은 선비가 되었다.

1897년 10월, 명성황후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기우만은 산에 올라 통곡하고 삿갓, 의복, 이불을 모두 흰색으로 하여 예를 갖추었다. 이 때 고종이 사람을 보내 귀가할 것을 권했지만 듣지 않았다. 그는 지인 조성가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엎어진 둥지에 온전한 알이 없듯이, 현인군자들이 유리되고 도망쳐 숨는 것이 진실로 이와 같습니다. 저 집에 사는 제비가 어찌 화가 장치 미치려 하는 것을 알겠습니까? 사람으로 하여금 혀를 끌끌 차게 합니다. 군자는 곤궁 속에서 형통하니 바로 이때가 그렇습니다. 지리산 바위동굴에서 크게 『춘추』를 읽는다면 어찌 꼭 노중련(鲁仲连, 전국시대 제나라 사람) 처럼 동해를 밟고, 백이(伯夷, 은나라 말엽의 사람)처럼 수양산에 오를 것이 있겠습니까? 저의 처신은 그 마땅함을 얻지 못했으니 삼성산 산중으로 들어가 수풀 속에 집을 지어 인생을 마치는 계책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일 만들기를 좋아하는 주변 사람들이 5칸짜리 집을 지어 지난달부터 들어와 살고 있습니다. 집과의 거리는 5리로 가깝습니다. 멀리 보낼 편지라 감히 장황하게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2.3. 을사의병


1900년 7월, 기우만은 중추원 의관에 제수되었지만 거절했고, 이듬해 정재규 등과 함께 단성의 신안정사에 간역소(刊役所)를 설치했으며, 그해 11월 최익현을 찾아뵙고 조부 기정진의 신도비명을 받았다. 이후 초야에 조용히 지내며 학문을 닦던 그는 1905년 10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나라의 외교권이 일본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을 듣자 을사소를 올려 을사오적을 처형할 것을 주장했다.

섬 오랑캐가 우리나라에 야심을 품은 지가 오래되었으나 본국의 신하들 가운데 백비와 자란(子蘭)[3]

같은 자가 앞뒤로 이어지지 않았다면 어찌 주인 없는 집에 들어오듯 하겠습니까. 그때 성명께서 법에 따라 주벌하지 못하여 금일의 재앙이 있게 되었습니다. 저들은 이미 개화 등의 말로 손가락을 적셔서 한번 시험해 보다가 성공하면 다음은 구제도를 개혁한다고 하여 얻어내고 군기를 녹여 깨뜨린다고 하여 얻어내고, 조정에도 손을 써서 얻어내고 관부에도 발을 동동거리며 얻어냈습니다. 여러 도적들 이 또한 그들의 앞잡이가 되어, 사적으로 우리 군주의 토지와 인민 아울러 그 정권까지 함께 내주었습니다.

아, 견양(犬羊)을 가리키며 절하게 하니 비록 무지한 종자라도 오히려 또한 부끄러워하며 달가워하지 않을 것인데 이 무리들은 과연 어떤 마음으로 몰래 견양만도 못한 자들을 이끌고 와서 우리 4천년 부모의 나라를 패망시킨단 말입니까. 이들은 이른바 천하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죽여야 할 뿐만이 아니라 또한 땅 속 귀신들이 은밀하게 베어야 할 자입니다. 그런데 조정의 법도가 가해지지 않으니 성상의 뜻이 있는 바를 신은 진실로 알지 못하겠습니다.

1906년 1월, 기우만은 연명으로 상소를 올리고자 계획했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곡성에서 회합을 가지고자 했지만 이루지 못했다. 그해 여름엔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하고자 했지만 중국 정부가 그를 압송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자 중도에서 포기했다. 그 해 10월, 그는 의병을 모의했다는 혐의를 받고 일본 경찰에 의해 광주 경무서에 구금되었다. 이때 기우만은 일본 경찰에게 다음과 같이 항의했다.

1895년 을미년 망극의 변고는 너희가 한 짓이다. 조선의 신민이라면 누가 너희를 진멸시켜 너희의 고기를 먹고 너희의 가죽에 눕고자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바야흐로 동지를 불러 모아 곧장 (서울을 향하여) 북상하려고 하였으나 선유사가 와서 회유하여 부득이 해산하고 돌아가 입산하여 토굴을 지어 생활하였다. (중략) 손 안에는 비록 작은 무기도 없지만 흉중에는 항상 만 명의 갑옷 입은 병사가 있다.

강물소리를 들으면 철갑옷을 털어 입고 동쪽(일본)으로 정벌 갈 것을 생각하고, 산수를 보면 거짓 병사로 위장시켜 오랑캐를 축출하고 싶어진다. 비록 온 나라 사람들이 의거를 일으켜 나를 추대하더라도 나는 사양하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살아서는 이씨(조선)의 신하가 되고 죽어서는 이씨의 귀신이 되는 것으로 종결지을 것이다.


2.4. 이후의 경력


1907년 봄, 기우만은 을사오적의 암살을 사주했다는 이유로 영광 경무서에 체포되었고 4월 5일 서울로 압송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20일에 석방되었다. 이듬해 1월엔 순천 조계산의 암자에서 다시 거사를 꾀하다가 고종이 퇴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한 뒤 은둔했다. 이후 1909년에 <호남의사열전>을 집필해 의병에 참가했던 호남지역 지사들의 충정을 기렸다. 이후 1910년에 한일합방이 선포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침식을 폐하고 천인(賤人)을 자처하며 사람들을 일체 만나지 않았다.
1911년 3월 전라북도 남원의 사촌(沙村: 현 전라북도 남원시 대강면 사석리 사촌마을)으로 이주한 그는 그곳에서 은둔 생활을 지내다가 1916년 10월 28일 7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 나이가 80을 바라보니 죽는 것은 한이 없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원수가 소멸되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기우만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 행주 기씨 집성촌으로, 의병장 기삼연, 기산도도 이 마을 출신이다.[2] 초장, 중장, 종장의 세 단계 시험[3]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의 간신. 충신 굴원을 모함해 실각시킨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