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충갑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


카다안의 침입 당시 치악성을 지킨 고려의 장수이다.

2. 생애


원충갑의 본관은 원주 원씨로 1251년 원주에서 태어났으며 그후 성장해 항공진사라는 벼슬로 치악성의 별초로 그냥 이름없는 무관으로 지낼 뻔했지만 그의 인생에서 큰일이 일어나게 된다.
원나라 내부의 다툼으로 인해 카다안을 위시로 한 반군들이 고려를 침공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충렬왕의 병크와 고려중앙군을 격파하고 각지를 약탈하고 양주의 양근성을 함락하고 원충갑이 근무하던 치악성으로 접근하게 되는데 여기서 전설적인 활약을 한다. 카다안 반군 50명이 치악성 주변을 약탈하려 하자 보병 6명을 이끌고 기습해 말 8필을 획득했고 그후 적장인 도라도가 군사들을 이끌고 약탈을 다시하려하자 이번에는 7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기습을 가해 적병 400명을 격퇴하고 말 25필을 획득하는 미친전공을 세웠으며 이에 상관인 방호별감 복규는 이전공에 매우 기뻐하며 획득한 말 25필을 모두 원충갑에게 하사했다.
그후 합단적 무리들은 치악성을 포위하며 항복을 요구했지만 원충갑은 항복서신을 가지고 온 사절의 목을 베며 항전태세를 갖추었고 적은 치악성을 공격해 치악성은 함락직전까지 가지만 원충갑은 판관 조신을 위시로 한 3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합단적 무리들을 공격했고 100명의 결사대가 지원을 와 치열한 전투 끝에 적장 도라도를 전사시키고 적병절반을 전사시키는 전공을 세우게 된다.
이후 전공을 인정받아 6계단 승진해 삼사우윤이라는 벼슬을 제수받았다.
이후 조정에 출사한 원충갑은 충렬왕vs충선왕의 부자간 대립 속에서 충선왕 일파의 행동대장 격으로 활약한다. 1303년, 충선왕비인 계국대장공주의 2차 개가책동 사태와 관련하여 충선왕 일파가 원 조정에 석주를 고발하는 글을 올려 단사관 테무르부카가 석주를 압송하기 위해 고려로 들어왔는데, 원충갑은 충렬왕의 만류를 가볍게 씹고 테무르부카를 찾아가 당시 권세를 믿고 여러 불법을 저지르던 충렬왕의 측근 오기(오잠)를 탄핵하는 글을 올렸다.
이후 조정 신료 수백명이 원충갑을 따라서 오기를 탄핵했음에도 테무르부카는 오기에게 뇌물을 받고 그냥 원나라로 돌아가버린다. 이렇게 되자 오기는 오기대로 신변에 위협을 느껴 충렬왕 옆에 찰싹 붙어서 떨어지지 않고 충선왕의 최측근인 홍자번도 오기가 자신을 언제 해칠지 몰라 두려워하며 집안에 틀어박히는 묘한 대치상태가 이루어진다.
결국 선수를 치기로 결심한 홍자번은 김심과 함께 삼군의 군사들을 끌어모아 왕궁으로 쳐들어가는데, 이때 홍자번이 앞세운 인물이 원충갑이었다. 원충갑은 왕궁을 포위한 뒤 충렬왕에게 오기를 내어놓으라고 협박했고, 오기가 나오지 않자 호군 오현량, 최숙천 등을 시켜 그를 강제로 끌어내어 원나라로 압송하게 했다.
자세한 사항은 계국대장공주 항목의 제2차 개가책동 부분 참고.
1307년, 충선왕이 지지한 카이산이 충렬왕이 지지한 아난다를 제거하며 원나라의 황위다툼이 일단락되자 충렬왕vs충선왕의 다툼도 사실상 충선왕의 승리로 마무리된다. 원충갑은 충선왕에 의해 응양군 상호군(상장군)으로 임명되고 카다안의 침입 당시의 공로를 인정받아 추성분용정난광국공신에 책록되었으며 1321년 7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3. 기타


고려가 멸망한 뒤 세워진 조선왕조는 충의를 강조하던 왕조였기 때문에 조선후기 현종 때 원충갑의 충의를 인정해 그를 원주 충렬사에 배향했다.
원충갑 본인은 충신이자 명장이지만 후에 원균이라는 희대의 쓰레기급 후손이 나오며 본인의 명성에 제대로 먹칠을 당해야만 했다.
사실 후손인 원연과 더불어 원주 원씨들이 자랑스러워해야 할 조상이지만 이 원주 원씨 후손들이 개념이 없는지 원균만 찬양해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