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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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고려의 제26대 임금. 묘호는 없으며 시호는 충선헌효대왕(忠宣憲孝大王).
왕위에 오르기 전 이름은 원(謜)이었으며 왕으로 즉위한 후에 장(璋)으로 고쳤다. 황태자비 코코친[7] 에게서 이지르부카(益智禮普化)[8] 라는 몽골식 이름도 받았다. 자는 중앙(仲昻).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의 장남이며 원나라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이자 칭기즈 칸의 4대손이다. 충선왕을 시작으로 충자 돌림 왕들의 대부분이 고려인과 몽골인 사이에서 태어난 한몽 혼혈이 되었다.
원나라의 초대 심왕이다. 고려왕과 심왕이라는 두 왕작을 동시에 가졌기 때문에 고려심왕(高麗瀋王)이라고 불린 유일한 인물이다. 즉 명목상 한반도와 요동의 동시 통치자였다.
아래 구체적인 내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고려의 왕인데도 원나라에서 살았던 기간이 고려에서 살았던 기간보다 훨씬 길고 특히 2차례에 걸친 재위 기간 동안에는 겨우 1년 정도만 고려에 있었다. 어머니가 원나라 공주라 외가인 원나라의 언어나 문화에 익숙한 상태로 자랐을 것이고 16세부터는 거의 원나라에서 살았기 때문에 고려에 대한 애착이 깊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원나라 황실에서 고려로 귀국해서 통치하라고 압력을 넣었음에도 끝까지 원나라 대도에 남으려 했고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준 후에는 아예 대도에서 눌러 살다 죽었기에 직설적으로 적자면 그냥 몽골인이었다. 그에게는 고려 왕보다 원나라 황실의 인척이라는 지위가 훨씬 중요했다.
2. 생애
2.1. 즉위하기 전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의 아들로 태어난 것을 축하하는 연회에 제국대장공주와 제2비인 정화궁주를 동급의 서열로 두었다가 제국대장공주가 노발대발해서 결국 연회가 파토나는 해프닝이 있었다. 2살 때 제국대장공주가 원나라로 데려간 적이 있는데 이때 쿠빌라이 칸의 아들인 친킴 태자의 태자비 쿠케친(闊闊真)[10] 이 충선왕을 귀여워하며 힘센 황소라는 뜻의 이지르부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1277년 세자로 책봉되고 이듬해 원나라에 갔으며 이 때 쿠빌라이 칸은 늦둥이 막내딸에게서 태어난 어린 외손자를 상당히 귀여워했던 것으로 보인다.[11] 처음 외손자가 찾아왔을 때는 고려에 대해 많은 것들에 호기심을 가지며 묻고 충선왕의 학문적 소양을 시험했으며 "세자는 머리가 좋았고 학문도 좋아하기 때문에 좋은 왕이 될 거다."라고 칭찬하기도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좋은 왕은 아니었다.
이렇듯 충선왕은 어릴 적에 총명할뿐만 아니라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이 각별하여 주변인들로부터 좋은 평가와 기대를 받았는데 이러한 기질을 보여주는 일화가 오늘날까지도 전해진다. 1283년 9살 꼬마였던 충선왕은 아버지 충렬왕이 충청도 방면으로 사냥을 나가자 갑자기 구슬프게 울기 시작했는데 놀란 유모가 까닭을 묻자 "현재 백성의 생활이 곤궁한데다 농사철이 닥쳐왔는데 아버지는 어찌하여 멀리 사냥을 떠나려하시는가?"라고 하니 측근 신하가 충렬왕에게 그대로 전한바 있다. 9살에 불과한 어린아이치고는 제법 성숙한 생각과 발언이라 할 수 있으며 왕자다운 면모를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또 해진 베옷을 입은 사람이 땔나무를 지고 궁문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사람을 보내 사연을 물었는데 사실 땔나무 진 사람은 장작서의 기인이었고 형편이 가난하여 베옷을 입은 것뿐이었다. 그것을 들은 충선왕은 측은한 마음이 들었던지 "나는 좋은 의복을 입고 있는데 백성의 형편은 저러하니 내 마음이 어찌 편안하겠는가?"라고 말한바 있다.
또 궁노가 동리 아이들의 연을 빼앗아다가 충선왕에게 바치길래 충선왕이 정색하고 묻기를 "네가 이 연을 어디서 얻어왔느냐?"라고 하니 궁노는 우물쭈물하여 동리 아이들에게 빼앗았다라고 이실직고했다. 그러나 충선왕은 어찌하여 남의 물건을 빼앗느냐고 궁노를 책망하며 돌려주라고 명령하였다. 이러한 사연을 통하여 보면 어릴 적에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소년이었다.
1296년 계국대장공주를 제1비로 맞아들이게 되는데 원나라에서 혼인할 대상을 정한 것이었다. 계국대장공주는 훗날 충선왕이 즉위를 도와주는 원무종과 원인종의 사촌이며 황제가 되는 원진종의 누나이다. 자기 어머니인 제국대장공주의 오빠 친킴의 손녀이기 때문에 외가 기준으로 5촌 당조카와 결혼한 셈이 된다.
이는 쿠빌라이 칸 사후 황태후가 된 쿠케친의 뜻이 작용한 것으로 훗날 원나라 황제가 되는 태정제의 아버지인 진왕(晉王) 캄말라의 딸 계국대장공주와 혼인시켰다. 진왕 캄말라는 진금 태자와 태자비 쿠케친의 장남으로 칭기즈 칸의 무덤이 있는 고비 사막 북쪽 몽골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쿠케친의 3남이자 카말라의 동생 테무르가 원성종으로 즉위하면서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렸다.
쿠케친은 충선왕을 마음에 들어했기 때문에 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캄말라의 딸 계국대장공주를 고려 왕위가 보장되어 있던 고려 세자와 인척 관계를 가지게 하는 것으로 배려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또 원나라 인척이기도 한 세자를 원나라 내에서 상당한 세력 소유자였던 캄말라의 딸과 혼인시키는 것으로 서로 좋은 배경이 되라는 뜻이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충선왕과 계국대장공주의 결혼은 파탄나다못해 방해만 되었다.
충선왕은 계국대장공주와 혼인 이전에 왕영의 딸[12] , 홍문계의 딸[13] , 조인규의 딸을[14] 이미 아내로 맞은 상태였다. 그리고 충숙왕의 생모인 의비와 혼인한 시기가 계국대장공주와 혼인한 시기보다 이전이라는 추측도 있다. 어쨌든 일찍이 충선왕과 결혼한 고려인 3명은 몽골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계국대장공주와 의비보다 서열이 뒤로 밀렸다.
카다안의 침입 당시에는 쿠빌라이 칸에게 지원군을 요청하기도 했으며 1297년 원나라에 갔다가 고려로 돌아오면서 책들을 잔뜩 가지고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충선왕이 고려로 돌아온 이유는 어머니인 제국대장공주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충선왕은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이유를 당시 충렬왕의 후궁으로 총애를 받으면서 안하무인으로 날뛰던 무비의 소행이라 생각하여 무비 및 그와 관련된 사람들을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다.
실제 아버지 충렬왕은 무비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다. 백성은 굶고 있는데 시도 때도 없이 큰 돈을 들여 사냥과 연회를 즐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제1비인 제국대장공주는 여러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엄격하고 사리에 밝은 성격인만큼 여러 차례 간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거기다 제국대장공주는 강한 자존심과 사랑받지 못한 불행 때문인지 투기가 매우 강해서 다른 여자들과 그 자녀들에게 화풀이를 하는 일이 많았다.(특히 자신이 시집오기 이전 충렬왕의 정실이었던 정화궁주에게 강한 질투심을 드러냈다.) 충렬왕은 그런 제국대장공주의 눈을 피해 무비와 사랑을 나누기 위해 더욱 자주 사냥을 나갔다. 부자 간에는 틈이 생기기 시작했고 정치에 뜻을 잃은 충렬왕이 양위 의사를 밝히자 1298년 즉위했다.
2.2. 폐위
즉위 직후 혈기 넘치는 젊은 국왕은 원나라 간섭의 영향으로 인한 폐단을 철폐하고 '''사림원'''(詞林院)을 설치하여 측근 세력을 키웠다. 이로 인해 총애를 받은 인물이 박전지, 오한경, 이진, 권부의 4학사. 또한 관제를 개혁 하였으며, 무엇보다 권세를 누리던 권문세족의 토지를 몰수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주목할 만한 정책을 의욕적으로 실시해 나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공민왕처럼 독립할 생각 따위를 한 것은 아니었는데, 당시 원나라는 여전히 잘 나가고 있었고 무엇보다 본인 정체성이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였기 때문에 그럴 이유 자체가 없었다. 스스로도 '나는 위대한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다'라고 자칭할 정도.
즉, 충선왕은 고려가 이자겸의 난과 무신정변으로 인하여 떨어진 왕권을 이해하지 못하고 펼친것이다.
알게 쉽게 말하면 "나는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니까 니들은 내 말에 따라라!"라고 말했고 고려 대신들은 "우리가 굳이??"라고 의견 충돌이 발생하였고 고려 대신들중 친원파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밀어내려는 충선왕을 가만두지 않았다.
그 결과, 권문세가의 힘은 막강해서 일련의 개혁 정책은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다. 계국대장공주와의 불화가 심했고, 그 내용을 원나라 황실에 편지로 보내기도 했다. 이는 충선왕이 세자 시절에 맞아들인 고려 여인 조씨를 총애하자 계국대장공주가 조비를 질투해서 벌인 일로 이른바 '조비무고사건'이라고 부른다. 여기에 권문세가의 모략으로 인해, 결국 충선왕은 즉위 8개월 만에 원에 의해 폐위당하고 원나라로 소환되었다.
2.3. 정쟁
이후에도 충선왕에게 원한을 품은 왕유소 등은 충선왕을 계속 모함하여 충렬왕과 충선왕 부자(父子) 사이를 이간질했으며, 충선왕을 아주 폐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계국대장공주 재가 소동도 있었다.
충선왕은 폐위되고 원으로 온 이후 원 성종 테무르 칸의 형으로 요절한 다르마발라의 두 아들인 카이산과 아유르바르와다에게 접근한다. 당시 카이산과 아유르바르와다는 둘 다 소년이었고, 다르마발라가 일찍 죽은 탓에 계승이 불확실했지만, 당시 원나라의 중진들은 대부분 원정나간 상태라서 본국에 남아있던 이들 외에 딱히 접근 대상이 없었기 때문에 충선왕은 이들에게 접근한 것으로 보인다. 충선왕은 학식이 뛰어난 종친이었고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라서 항렬도 높았으며, 이들 또한 아비 잃은 어린 종친으로서 불안정한 처지였던 만큼 공감대가 형성되어 금방 가까워지게 된다.
몇 년 안 되어 먼저 장성한 카이산이 원정으로 오랫동안 본국을 떠났기 때문에, 충선왕은 아유르바르와다와 더 가까워졌다. 충선왕은 학문적 소양만은 원의 종친들 중에서도 수준급이었기 때문에 아유르바르와다의 스승 역할을 맡으며 한집에 머물며 보살폈다. 이들의 어머니 다기(곤기라트부 출신)는 카이산보다는 오랫동안 함께한 아유르바르와다에게 더 마음이 쏠려 있었다.
1307년 테무르 칸이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죽자, 몽골 제국에서 되풀이 되던 후계자 쟁탈전이 다시 재현되어 황제의 자리를 둘러싸고 모후, 외척, 권신 등 몽골 귀족끼리의 격렬한 권력다툼이 되풀이되었다. 권력 다툼의 중심이 된 이들은 곤기라트(옹기라트 혹은 콩기라트) 부족을 중심으로 결속된 궁정 귀족들이었다.
테무르 칸의 황후 브르간은 곤기라트부 출신이 아니고 위구르 계통의 바야우트씨(伯岳吾氏)였기 때문에 테무르 칸의 종제였던 안서왕 아난다를 황제로 맞이했으나, 방계 즉위에 의해 기득권을 위협받는 것을 두려워한 중신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브르간과 아난다를 살해하고, 몽골 고원의 방위를 담당하던 카이산이 귀환하자 그를 황제로 맞이했다.
그런데 당시 고려에서 충렬왕 세력이 테무르 칸의 황후 브르간과 안서왕 아난다에게 줄을 댔기 때문에 충선왕은 아난다의 즉위를 반드시 막아야 했다. 이 때 충렬왕까지 대도로 와서 이 일에 개입할 정도였다. 충렬왕은 쿠빌라이 칸의 부마였기 때문에 종친 내에서 서열이 높았고, 친왕의 딸과 혼인한 쿠빌라이의 외손자였던 충선왕보다도 더 높았다. 하지만 대칸의 외손자였던 만큼 충선왕 또한 계승 경쟁에서 발언권을 발휘할 수 있었다. 충선왕은 자신과 함께한 아유르바르와다를 밀었는데, 기록은 없지만 당시 충선왕은 이 복잡한 정국 속에서 대도에 있었기 때문에 다른 곳에 있던 아유르바르와다와 중신들 사이를 연결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신들은 아유르바르와다를 먼저 불러들였지만, 몽골 고원에 있던 카이산이 대도로 향하자 결국 카이산이 즉위하는 것으로 상호 합의를 보게 된다. 안서왕 아난다는 죽고 훗날 태정제(진종)로 즉위하는 계국대장공주의 남동생 이순테무르도 후계 순위에서 밀어내는 데 성공한 시점에서 카이산이 칸이 되어도 상관없었던 충선왕이 원의 중신들을 설득해 카이산의 입성을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 공로로 무종 카이산 칸 시절 그는 황태제가 된 아유르바르와다의 스승인 태사로 임명되었으며, 심양왕 자리까지 하사받게 된다.
충선왕은 칸 계승 경쟁에서 이기고, 자신을 모략한 왕유소 일당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듬해(1308) 심양왕에 봉해졌다. 그 뒤 같은 해 아버지 충렬왕이 승하하자 고려로 돌아와서 다시 한번 고려의 국왕이 되었다. 충선왕이 고려 왕으로 복위한지 1년 후인 1310년, 심양왕은 심왕(瀋王)으로 격상되었다.[15]
하지만 이 과정에서 그는 지나치게 원의 권력 중심과 가까워졌고, 몽골인이 아님에도 심양왕 자리를 받는 등의 출세 때문에 타 종친들의 견제가 심해져서 고려의 신하들조차 충선왕의 입지는 무종과 인종 때문에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에 원의 정계에서 조심해야 한다고 간언할 정도였다.
2.4. 복위
다시 왕이 되어서 일시적으로 즉위했을 때처럼 개혁 정책을 펼쳤으나, 그다지 적극적으로 정치를 펼치지는 않았고[16][17] 자형(姉兄)이 되는 제안대군 왕숙에게 정치를 대행하게 하고 자신은 원나라로 가서 일종의 원격 통치를 했다. 이 와중에 나름의 성과를 거둔 것도 있었는데, 바로 각염법을 시행해서 권문세가와 사원의 소금의 전매 독점을 금지하여 폭리를 취하는 것을 막으면서 재정을 강화한 것. 신진사대부가 이 사람을 통해 성장했다는 주장도 있다.[18]
충선왕이 해마다 많은 물품을 원나라로 가져가고 계속 원나라에 머물길 원하자 왕의 귀국 운동이 있었으나, 충선왕은 번번히 거절하였다. 나라 밖에서 국왕이 머물며 통치함이 부당하다는 이야기가 계속 들리자 왕위를 차남 강릉대군 왕도에게 넘겨주면서까지 귀국을 싫어했다.
1310년 원 인종에 의해 심양왕에서 심왕(瀋王)으로 높여지게 된다. 원래 전통적으로 2자왕보다 1자왕이 더 격이 높은데, 형식적으로 만주 최대의 실력자들인 칭기즈 칸의 동생 가문들인 동방 3왕가와 같은 격까지 오른 것이다. 거기다 충선왕은 후대 심왕들이 명목상일 뿐 실권이 없던 것과 달리 그는 출신과 공적 때문에 진짜로 실권 있던 동군연합 군주였다. 동군연합이 해체된 이후에는 고려 왕실을 이이제이하는 역할만 남게 되지만, 충선왕 시절에는 그랬다.
2.5. 양위
충선왕에게 귀국을 간청하던 신하들은 결국 포기하고 세자인 광릉군 왕감을 고려 국왕으로 추대하려고 시도하였는데 충선왕의 심복들이 즉시 이를 연경에 알렸고 이로 인해 1310년 5월, '''세자 왕감과 그를 추대하고자 했던 김의중을 살해해버린 것이다.'''
이리하여 새 왕을 추대하는 것마저 어려워지자 신하들은 재차 충선왕에게 귀국을 종용했고 압력에 못 이겨 그제서야 결국 1313년, 재위 5년 만에 아들 충숙왕에게 고려 국왕 자리를 양위한다.
이후로 그는 대도에 머물며 고려에서 따라온 양자 왕후를 황태자 아유르바르와다의 측근으로 두고 가까이 지냈으며, 이후 황제로 즉위한 원 인종의 지원으로 원에서 높은 지위에 오른다. 1314년 '만권당'(萬卷堂)[19] 을 설립해 고려와 원의 저명한 학자들을 초빙하여 학술을 교류하고, 고전 연구에 힘썼다. 이때 초빙된 학자로 이제현이 있다. 이 와중에 원 인종에게 과거제를 제의해 원의 과거제 실행을 돕기도 했다.
말년의 그는 점차 원나라 내에서도 권력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1316년에는 충렬왕과 제2비 정화궁주 왕씨의 아들로 본인의 이복형인 강양공의 차남 연안군 왕고에게 심왕 작위도 양위한다. 우승상이 물러나 그 자리가 비자 원 인종이 우승상 자리를 제안했는데, 충선왕은 자신은 그 자리를 맡기에 부족하다며 거절한다. 원 인종은 "그대가 권력과 거리를 두는 것은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권력에서 아주 떨어지는 순간 자신의 모든 것이 끝장난다는 것을 충선왕은 알고 있었다. 그는 이런 처지 속에서 아버지 충렬왕처럼 사냥이나 연회에 빠지지는 않았지만 만권당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불사에 참가하거나 원나라 여기저기에 순방을 다녀오곤 했다. 2차례의 즉위와 폐위, 복위를 겪고 아버지 및 아내 계국대장공주와도 권력다툼을 벌인 그이기에 권력의 무상함만을 절실히 깨달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원 인종의 반대세력들은 충선왕에게 적대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원 무종과 원 인종의 총애로 눈에 띄는 지위까지 올라간 시점에서 이미 그의 말로는 정해져 있던 걸지도 모른다. 자기 정체성이 원나라의 종친이라도 혈통주의가 대단한 유목민들에게 있어서 충선왕은 완전한 몽골인이 결코 될 수 없었다. 말년의 그의 행보는 화무십일홍을 겪으며 그의 정체성이 몽골인이 아닌 경계인[20] 에 가깝게 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320년 원 인종이 죽고 무종의 아들 영종이 즉위한다. 충선왕은 환관 임백안과 틈이 생겨 그의 참소로 '''토번까지 유배를 갔다가''' 이제현의 간절한 상소가 먹혀 계국대장공주의 남동생이 원 태정제가 풀어줘 3년 후에 돌아왔다. 그 후 원나라 수도 대도에서 소일하다 1325년 5월에 사망했다. 향년 51세. 지천명을 넘기기는 했지만, 51세라는 나이는 당시 기준으로도 장수한 것도 아닌 생이었다.
정식 시호는 충선헌효대왕(忠宣憲孝大王)으로 원나라에서 내려준 시호를 불러주기 싫어하는 쪽은 '헌효왕' 혹은 '헌왕'이라고 부른다.
3. 평가
충선왕은 성품이 현인을 좋아하고 악인을 미워했으며 총명하고 기억력이 좋아 한 번 보고 들은 일은 끝까지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늘 선비들을 데려다가 역사상 국가들의 흥망과 군신의 잘잘못에 대해 지칠 줄 모르고 열심히 토론했다. 특히 송나라 시대의 옛 일들에 큰 흥미를 가진 나머지, 자신의 막료를 시켜 『동도사략(東都事略)』을 읽게 하면서 왕단(王旦), 이항(李沆), 부필(富弼), 한기(韓琦), 범중엄(范仲淹), 구양수(歐陽脩), 사마광(司馬光) 등 명신들의 전기에 이르면 반드시 손을 들어 이마에 댐으로써 존경의 뜻을 표했다. 그리고 정위(丁謂), 채경(蔡京),장돈(章惇) 등 간신의 전기를 들을 때면 반드시 이를 갈면서 통분해 하곤 했다.
《고려사》 충선왕 총서
충선왕을 평가할 때 감안해야 할 점은, 이 사람은 요즘으로 치면 한국계 외국인으로 고려인이 아니라 몽골인, 원의 황족으로 자랐다는 점이다. 원나라로부터 '충'자 돌림 시호를 받은 군주들 중 가장 능력 있던 군주였고 나름대로 개혁 정책을 펼쳐서 약간의 성과를 거둔 면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개혁 대상이었던 권문세도가의 힘이 여전히 막강했고, 더더욱 그 배후인 원나라의 영향력 또한 굳건했기에 그의 개혁은 의지 실종과 함께 실패하고 말았다. 이러한 개혁의 좌절은 후계자 충숙왕의 앞날을 가로막으며 훗날 공민왕이 원명 교체기를 이용해 독립 운동을 펼칠 때까지 개혁이 이루어지기 어렵게 만들었다.사신(史臣)은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충선왕은 세자 시절 원나라 조정에 입시해 요수(姚燧)·조맹부(趙孟頫) 같은 명유들과 교유했으며 간혹 그 나라 정치에 관여해 썩 훌륭한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왕위에 오른 후 상국의 관직 제도와 겹치는 것을 피해 관직 명칭을 바꾼 것은 제후로서의 법도에 충실한 조치였으며, 전부(田賦)를 올바르게 고치고 염법(鹽法)을 제정한 것은 정치의 요체를 안 행동이었다.
그러나 임금의 자리는 온 백성들이 우러르며 모든 정무가 집중되는 자리라 단 하루라도 비워서는 안 되는 것인데도, 왕은 황제의 분부로 복위한 뒤 부녀자들과 내시들의 꾐에 빠져 다섯 해나 연경에 그대로 눌러앉았다. 이에 나라 사람들이 필요한 물자를 대느라 고통을 겪었고 시종하는 신하들은 오랜 객지 생활에 지친 나머지 귀국할 생각만 하면서 마침내 서로 모함하기에 이르렀다.
원나라도 또한 그에게 염증을 느껴 2차례나 귀국을 종용해오자, 왕은 회피할 구실이 없어 아들 왕도(王燾)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또 조카 왕고(王暠)를 세자(世子)로 삼았다. 때문에 부자와 형제 사이에 온갖 시기 질투가 일어나 결국 그 화(禍)가 여러 대에 이르기까지 그치지 않았다. 장래에 대한 계획이 이처럼 불성실했으니 그가 토번(吐蕃)에 유배간 것도 기실 우연이 아닌 것이다.”[21]
그러나 이는 이 시기 '충'자 돌림 왕들이 꼭두각시 노릇이 싫어 정치를 내팽개친 것 때문에 멀리서나마 문서로 형식적으로 정무를 본 충선왕이 상대적으로 높게 평가받는 것이지,[22] 그의 정치 역시 따져보면 문제투성이었다. 스마트폰 등 통신수단이 매우 발달한 현대에서도 문서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 대통령과 장관이 얼굴을 마주보고 앉아 회의하며 결정을 내리는데, 통신이 불편했던 전근대에서 멀리서 '문서만으로 통치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이었으며 이는 수많은 문제점을 불러왔다.
당장 고려사를 편찬했던 사신의 평가만 봐도 위와 같이 '이 사람 능력이 있었던 건 확실한데 통치가 어찌 이러한가? 원격 통치한답시고 대도에 눌러앉은 덕분에 물자 낭비에 신하들 관리가 안 되는 등 정무가 불량하며, 원나라에서도 보다 못해 가서 통치하라고 했더니 가기 싫어 자기 아들에게 왕 자리를 떠넘겼으니 책임감도 없고.... 티베트로 귀양간 것이 자업자득이다'라는 식으로 혹평을 하고 있다.
또한 심왕 문제로 훗날 심왕에 임명된 자들은 고려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고 이 때문에 분란이 생겨 정치 문제로 비화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거기다가 1310년 원나라에서 자신을 폐하고 세자 왕감을 고려 왕위에 올리려 한다는 움직임이 있어 측근들이 이를 포착하자 '''자신의 장남을 죽여버리는''' 비정한 면모도 있었다. 자신도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3대가 부자 간의 악연으로 얽혀버린 막장 드라마를 리얼로 찍은 셈.[23][24]
고려국을 폐하고 원나라의 직할령으로 편입해 달라는 입성책동이 불거진 요인을 제공한 것이 충선왕이기도 하다. 첫째로 권문세족과 척을 지면서도 누르지 못했고, 둘째로 고려 밖에서 원격 통치를 했고, 셋째로 심왕 작위를 고려왕이 아닌 조카에게 물려줘서 적절히 훗날 입성책동의 단초를 제공한 것이다.[25]
요컨대 학식도 있었고 정치적인 감각은 비상했던 인물이었음은 분명하지만, 한평생 '''스스로를 고려왕이 아닌 원의 황족으로 생각하고 그에 맞춰 살았다.''' 원 간섭기라는 두루뭉술한 용어로 포장하지만 결국 원제국 지배를 받던 고려의 현실을 대변하는 인물로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았고, 왕으로선 무책임했다는 고려왕 왕장에 대한 후대의 평을 몽골인 이지르부카는 억울해 할지도 모른다. 허나 어쩌겠는가? 고려에 대한 애착이 없는 거야 배경을 보면 이해간다지만 자기자신만 생각했지 그에 맞는 책임의식을 보여준 적이 없었으니 평가가 냉혹한 건 결국 자업자득일 뿐이다.
4. 호학 군주
왕 개인적으로는 학문을 좋아해서 책벌레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었다고 하는데, 학문적 수준이 높아 세자 시절 외조부 쿠빌라이 칸에게 학문적 수준을 인정받기도 했고 원에서 지내던 시절 황족들 사이에서 학문에 능하다고 인정받았다. 원 인종이 어렸을 적에는 수십 년 동안 함께하면서 학문을 가르치기도 했고, 원 무종 시절에는 태제였던 원 인종의 태사가 되어 태제의 스승역을 맡기도 했다.
호학 성향 때문에 상왕 시절 대도에 만권당을 세우고 학자들을 초청해서 학문 연구에 힘쓴 것도 유명하다. 이 때 원의 높으신 분들에게 고려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하자 고려왕조실록을 고려에서 가져와 보여주다가 당국의 항의 때문에 돌려준 일도 있었다.[26] 이 과정에서 뛰어난 고려인 학자들을 발굴해 원에서 활동하도록 지원하기도 했는데, 이제현[27] 이 그 중에 한 명이다.
남송 멸망 이후 원으로 전파된 성리학이 원에서 고려로 처음 전해질 때 만권당을 경유했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후기 고려와 조선시대 유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5. 예술
예술 감각도 뛰어나서 특히 그림에 능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예술가적 기질을 가진 군주답게 여성 관계도 제법 복잡해서 정사인 고려사도 그렇고 야사에도 여성들과 얽힌 일화가 많이 남아 있다. 하여튼 여러 가지로 정말 드라마틱한 삶을 산 임금.
6. 가계
- 제1비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
- 제2비 의비 야속진(懿妃 也速眞,? ~ 1316년) - 非 황족 몽골인.
- 장남: 광릉군 세자 감 (廣陵君 世子 鑑, ? ~ 1310년)
- 차남: 충숙왕(忠肅王)
- 제3비 정비 왕씨(靜妃 王氏, ? ~ 1345년) - 정화궁주의 조카.
- 제4비 조비(趙妃)
- 제5비 순화원비 홍씨(順和院妃 洪氏, ? ~ 1306년) - 홍규(洪奎,1242 ~ 1316년)의 딸. 원비(院妃)는 고려시대에 궁주(宮主) 다음가는 원주(院主)인 비(妃)를 칭하는 말이기 때문에 원주(院主)로 추정된다.[28]
- 제6비 순비 허씨(順妃 許氏, 1271년~1335년) - 과부 출신이며 전 남편은 제안공 숙의 아들 평량공 현(平陽公 眩, ?~1300년)이다. 딸들이 옹주인 것으로 보아 옹주(翁主)로 추정된다.(고려시대에는 어머니와 딸이 봉작을 공유했다)전 남편 사이에서 3남 4녀를 두었다.
- 의붓아들: 순정군 숙(順正君 璹)
- 의붓아들: 쌍봉장로 자각(雙峰長老 慈覺)
- 의붓아들: 회인군정(懷仁君 楨)
- 의붓딸: 영복옹주(永福翁主) - 양양군(襄陽君) 김기언(金基彦)에게 출가
- 의붓딸: 연희옹주(延禧翁主) - 원나라의 좌승상 길길반의(吉吉反懿)에게 출가
- 의붓딸: 백안홀독황후(伯顔忽篤皇后) - 원 인종과 혼인
- 의붓딸: 경녕옹주(慶寧翁主) - 경양군 노책(慶陽君 盧吸)에게 출가, 손녀는 공양왕의 비인 순비 노씨이다.
- 궁인(宮人)
- 3남: 덕흥군 혜(德興君 譓, 생몰년 미상) - 몽골식 이름은 타스티무르(塔思帖木兒)다.[30]
- ?(옹주로 추정)
- 딸 : 수춘옹주(壽春翁主) 수사도 정안부원군(定安府院君) 허종(許日+宗)에게 출가, 시부는 양천군 허숭(許嵩).
7. 매체
여성편력이 아주 화려하고 그 때문에 폐위까지 당했으며, 또 한편으론 남자 애인도 거느렸던 한국사 전무후무한 양성애자 왕인 데다 부자 갈등, 개인적 기질과 개혁 군주의 이미지 등을 생각하면 이 왕도 나름대로 사극의 소재거리로는 충분한 요소를 꽤 가지고 있는데 묘하게도 사극에 등장한 적은 거의 없다.
드라마 외로는 만화가 김은희 씨가 충선왕과 무종을 주인공으로 한 만화 '더 칸'을 연재했으나 결국 미완성으로 남았다.
로맨스 소설로는 충선왕을 주인공 중 한 명으로 한 '왕은 사랑한다'가 있는데, 고려의 개혁을 꿈꾸는 세자로 아버지 충렬왕 및 충렬왕의 측근인 환관과 권문세족 등의 기득권 세력과 갈등한다. 고려 제일의 거부 종실 제후 영인백의 외동딸인 왕산을 사랑하게 되나, 종친이자 자신의 절친인 왕린이 그녀와 가까워지자 둘 모두에 대한 애정이 배신감으로 변해 점차 얀데레화 되어 간다. 로맨스 소설이나 정치 상황 묘사도 실제 역사를 따라 사실적으로 쓰여진 편이다. 충렬왕과 충선왕의 갈등과 충선왕의 개혁 시도 등에도 비중을 두어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책을 찾는 사람들도 재미있게 읽을 법하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가 2017년 7월 ~ 9월에 MBC에서 방영되었다.[31] 충선왕을 맡은 배우는 임시완. 왕은 사랑한다 항목 참조.
채널A의 천 개의 비밀 어메이징 스토리에서 아버지 충렬왕의 후궁이었던 숙창원비를 취하는 막장 드라마 스토리가 소개되었다.
8. 기타
여성편력이 상당히 화려했던 왕이지만 양성애자로 동성애인을 둔 기록이 남아있는 고려의 국왕 중 한 사람이다. 충선왕의 동성연인은 원충(元忠)이라는 사람이었는데, 18세가 되던 해에 원나라 수도에 머물고 있던 충선왕을 모시기 위해 파견되었고 이후 그의 측근으로 남았다.[32]
『고려사』 열전에 따르면 충선왕은 원충을 남색으로 총애하여 그가 채 20세가 되기도 전에 왕씨 성을 내려주고 벼슬도 높여주었는데, 성격이 강직했던 원충은 이를 부담스러워하며 사양했다. 그러자 충선왕은 기분이 크게 상해 그에게 내려주었던 왕씨 성을 거두어가고 벼슬도 강등시켜 버렸다. 그러나 후에 충선왕이 고려로 귀국할 때에 압록강까지 자신을 마중나온 원충을 보고는 화가 풀렸는지 그를 다시 특별히 우대하고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 원충은 이후 충선왕의 아들인 충숙왕까지 섬기다가 죽었다. 역사 속에서 왕의 동성연인이 뒷배경을 믿고 오만방자한 짓을 일삼는 것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닌데, 원충은 드물게도 그런 일 없이 바르게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별 상관없지만 조선의 17대 국왕인 효종도 청나라로부터 '충선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한자까지 고려의 충선왕과 같다. 다만 조선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멸시해서, 청나라에 보내는 국서 등에만 이걸 쓰고 내부적으로는 사용하지 않았다. 효종이라는 묘호는 중국 몰래 쓴 것이다.
인천광역시 부평구에 이 왕의 이름을 딴 도로인 충선로가 있다. 부평이란 지명이 정해진 게 충선왕 때라는 걸 감안한 듯. 부평의 본래 지명은 길주목이었으나, 충선왕 2년(1310년)에 부평부로 바꾸었던 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한편 인천이라는 지명은 조선의 태종 13년(1413년)부터 사용되었다.
어진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는 왕이다. 공민왕 대에 왜구에 의해서 흥천사에 소장된 충선왕과 계국대장공주의 영정이 탈취되었기 때문이다. 왜구들 입장에서는 어진은 상당히 고가품으로 거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만일 남아있다면 고려 시대 유물이 많은 일본 어딘가에 떠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전설에 따르면, 1차 재위기간 이후 원나라에 끌려갔을 때 어느 공녀 출신 궁녀가 가야금을 타면서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본 꿈을 꿨는데 하도 이상해서 그 궁녀를 찾았더니 고려에서 살았던 소녀로 봉선화 물을 들이면서 고국으로 돌아올 꿈을 품고 있었다. 그런 다음 궁녀는 가야금 음악으로 그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그는 그 궁녀를 생각하면서 조국으로 돌아오려는 간절한 꿈을 키운 결과, 무종이 왕위에 오를 때 크게 공을 세운 덕분에 다시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다음 궁녀에게 은혜를 갚으려고 불러오려고 했으나 이미 그 궁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왕은 궁녀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궁에 봉선화를 많이 심었다는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