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왕

 


고려 제25대 대왕
忠烈王 / 景孝大王
충렬왕 / 경효대왕

<colcolor=#670000> 묘호
없음
시호
고려
경효대왕
(景孝大王)

임시
순성수정상승대왕
(純誠守正上昇大王)


충렬왕
(忠烈王)

절일
탄일(誕日)[1]
성씨
왕(王)

심(諶) / 춘(賰) → 거(昛)

중앙(仲昻)
왕비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정화궁주(貞和宮主) 
왕세자
왕원(王謜)
부왕
원종 순효대왕
모후
순경태후(順敬太后)
능호
경릉(慶陵)
출생지
고려국 강도(江都)[2] 강화군(江華郡)[3]
사망지
고려국 승천부(昇天府)[4] 신효사(神孝寺)
생몰
년도

음력
1236년 2월 26일 ~ 1308년 7월 13일
양력
1236년 4월 3일 ~ 1308년 7월 30일 (72세)
재위
기간

음력
1274년 6월 계해일 ~ 1298년 1월 갑진일 (24년)
양력

재위
기간

(복위 후)
음력
1298년 8월 임신일 ~ 1308년 7월 갑인일 (11년)
양력

1. 소개
3. 생애
3.1. 즉위
3.2. 양위, 그리고 복위
4. 평가
4.1. 협상의 달인
4.2. 개혁 시도
4.3. 원 간섭기
4.4. 제후국으로의 격하
5. 가계
5.2. 아들과의 대립
5.2.1. 며느리 계국대장공주 개가 책동
6. 기타
6.1. 대중매체
7.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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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고려 제25대 임금. 묘호는 없고 시호는 몽골의 충렬왕(忠烈王), 고려의 경효대왕(景孝大王).
원래의 휘는 심(諶) 혹은 춘(賰)이었는데 왕으로 즉위한 후에 거(昛)로 개명했다. 당시 태자였던 원종 순효대왕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순경태후.[5] 어머니가 6대 무신 집권자 최우의 외손녀이므로 최씨 정권의 혈통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원나라 공주와 혼인한 고려의 첫 국왕이다.

2. 묘호, 시호, 존호


묘호는 없다. 고려가 성종종묘를 건설한 이래로 처음으로 묘호가 없는 국왕이다.[6] 이는 고려가 원종 대까지는 자국 임금을 천자(天子)로 대우해 고려 천자로서 종묘에 모셨지만 충렬왕이 죽고 충선왕 대부터는 원나라 황제제후로서 종묘에 모셨기 때문.
충렬왕의 시호는 특이하게 3가지나 올려졌다. 가장 처음 올려진건 세자 충선왕이 고려가 이전에는 독자적인 시호를 올렸다는걸 감안해 올린 순성수정상승대왕(純誠守正上昇大王). 약칭 상승대왕(上昇大王)이다. 하지만 원나라의 신하국으로써 시호는 임금에게 받아야 하니 금방 취소됐다. 2번째는 충렬왕(忠烈王). 원나라 무종(武宗) 황제가 직접 하사한 시호로도 잘 알려져 있다. 신하로서 쿠빌라이(忽必'烈') 칸에 충성('忠'誠)을 맹세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충렬왕 즉위 이후 고려 조정에 대한 원나라의 간섭이 본격화된 이후부터는 충정왕 대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고려 왕이 원나라 조정의 시법에 따라 충(忠) 자 시호를 추중받았다. 마지막으로 받은 시호는 '경효대왕(景孝大王)'. 원나라를 싫어한 증손자 공민왕이 직접 독자적으로 올린 시호다. 보통 충렬왕으로 불리지만 두 시호를 합쳐 '충렬경효대왕(忠烈景孝大王)'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가 상왕 재위시 받은 존호는 '광문선덕태상왕(光文宣德太上王)'이다. 왜 존호가 상왕이 아닌 태상왕이냐면 고려는 상왕을 전부 태상왕[7]으로 불렀다. 명종, 희종도 상왕이었지만 칭호는 태상왕이었다. 원나라가 작위로 내린 작호로는 '부마국왕(駙馬國王)', 태상왕이 됐을 때 받은 '일수왕(逸壽王)'이 있다.

3. 생애


고려의 역대 왕태자(왕세자)
왕정(왕태자)

왕거

왕장(왕세자)
고종 안효대왕이 붕어했을 때 태자 원종은 몽골에 가 있었기 때문에 사왕(嗣王)이 돌아오기 전까지 태손으로서 섭정을 했다.
1260년 아버지인 원종이 즉위한 이듬해 태자에 책봉되었다. 1271년 원나라에 갔으며 세조 쿠빌라이 칸의 딸인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했다.

3.1. 즉위


1274년, 원종이 죽자 고려에 돌아와서 즉위했다. 귀국할 때 몽골식으로 머리를 변발하고 옷도 몽골식으로 입고 있어서, 거리에서 왕의 모습을 보고 대성통곡하다가 기절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부왕 시절 고려가 원나라에 굴복한 데다가 충렬왕이 쿠빌라이 칸사위가 되면서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어 원나라의 간섭이 심해졌지만, 사실 충렬왕도 세조구제 이후로 다루가치를 내보내고 몽골군을 철수시키며, 고려의 복식을 지키는 등 나름대로 나라의 독립성을 유지하는 데 힘썼다. 또한 황제의 부마라는 위치는 상당한 것이라 쿠릴타이에 참석할 권한도 있으며[8], 원의 사신과 다루가치들도 충렬왕과 술잔을 받을 때는 절을 하고 받아야 할 정도로 함부로 굴지 못했다.
쿠빌라이는 원종 시절부터 일본을 공격한다(정일론)는 방침을 세우고 일본 정벌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결국 즉위하자마자 쿠빌라이는 일본 원정을 실시하여 훈둔(忻都, 忽敦)을 사령관으로 일본에 파견했고, 충렬왕 즉위 원년(1274년) 고려도 김방경을 사령관으로 한 일본 원정군을 파견했다. 고려군은 나름대로 선전했지만 잘 알려진 태풍[9] 때문에 일본 정벌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후 1281년에도 재차 침공했지만 이 역시 태풍으로 실패했다. 이 원정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항목을 참고할 것.
어쨌든 이 원정 준비 때문에 고려는 재정적으로 큰 손해를 입었으며 전쟁 물자 징발로 백성들의 삶은 더 피폐해졌다. 특히 제주도에 군마를 키우기 위한 목마장을 설치했는데, 이 때문에 제주도이 많아졌다고 한다. 또한 1290년에는 원나라의 반란 세력이 고려를 공격하는 카다안의 침입이 일어났다. 이때 충렬왕의 태도는 가히 가관인데, 자세한 부분은 항목 참조. 몽골의 침입(여몽전쟁)은 끝났지만 아주 수난이 많은 시기였다.
다만 원나라 역시 속국 고려가 망하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 물자(공급)에 대한 지불은 확실히 했으며, 1291년엔 고려에 기근이 들자 10만 석을 공짜로 주기도 했다.

3.2. 양위, 그리고 복위


고려 존호
<colbgcolor=white,#1f2023> 광문선덕태상왕
(光文宣德太上王)

작위
일수왕(逸壽王)
관저
덕자궁(德慈宮)
태상왕 재위기간
1298.01 ~ 1298.07 (7개월)
측근 세력들을 활용하여 왕권이 강화된 후에는 긴장감이 풀어졌는지 잔치와 매사냥을 즐겼다. 이러던 중 1297년 몽골에서 세자의 혼인을 마치고 돌아온 후 제국대장공주가 죽자 정치에 염증을 느꼈는지 1298년 아들 장(충선왕)에게 선위할 뜻을 밝히고 결국 양위하면서 물러났다. 그러나 충선왕의 개혁 정책에 대한 반발과 왕실의 치정 문제[10]로 부자 사이를 모략하는 무리가 생기는 등 여러 문제가 겹쳐 결국 8개월 만에 다시 복위했다.[11]
1306년, 충렬왕파가 충선왕파를 공격했다. 충선왕의 복위를 막기 위해 충선왕과 계국대장공주 부부를 이혼시켜 충선왕의 권력을 대폭 약화시키려 한 것이다.[12] 하지만 충선왕파의 빠른 대응과 1307년, 충선왕파가 지지하던 무종이 즉위하자[13] 충렬왕이 역으로 밀려 원나라 대도에 있던 경수사에 감금 당했다. 결국 충렬왕은 모든 실권을 뺏긴 채 고려로 환국했다.

불곡(不穀)한 자가 천지(天地)와 조종(祖宗)의 보우를 받아 참람히 왕위(王位)를 가지니, 지금까지 35년이었다.

그간 나라는 어려움이 많았고 민은 제 일을 할 수 없었으며, 사악하고 비루한 자가 득세하고 충성스럽고 우수한 자는 사라지니, 모두 덕이 없었던 탓이라 마음 속엔 부끄러움만 가득하다. 다만 하늘의 보우로 73년을 살았으니, 지금은 깊은 병에 걸려 낫지 않고 있다. 한번만이라도 심양왕(瀋陽王)을 보고 싶어 편지를 보내 빨리 오게 했지만 대기(大期)[14]

가 먼저 왔으니 얼굴을 맞대기를 기대할 순 없을듯 하다.

아!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으니, 이치가 당연한 것이다. 아버지가 전하고 아들이 받으니, 옛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조종(祖宗)의 기업(基業)과 방국(邦國)의 기무(機務)는 모두 심양왕에게 맡기겠다. 너희 신료(臣僚)들은 오로지 너희의 임무를 다하고 왕이 오길 기다리다 내(予) 유훈(遺訓)을 잃어버리지 말고 전하라.

- 고려사 충렬왕 세가 중, 충렬왕의 유교(遺敎). 나라가 엉망이었던 것과 가족 간 불화에 대한 회한을 포함해 책임감과 후회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정쟁에서 참패하고 고려로 복귀한 후 충렬왕은 정치에 뜻을 잃고 사냥과 음주가무 등으로 소일하다가 1308년 7월, 신효사에서 죽었다. 향년 73세로 고려의 역대 국왕 중 제일 장수했다[15]. 사후 2년 뒤인 1310년, 원무종은 왕에게 순성수정추충선력정원보절인량흥화봉경공신(純誠守正推忠宣力定遠保節寅亮弘化奉慶功臣) - 태사(太師) -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 상서우승상(尙書右丞相) - 상주국(上柱國) - 부마(駙馬) - 고려국충렬왕(高麗國忠烈王) 관작을 추증했다.

4. 평가



4.1. 협상의 달인


매사냥과 여색, 음주가무에 너무 빠져 있어 백성들의 고충이 심해 제국대장공주가 말릴 정도였으니 충렬왕은 왕으로서는 결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 다만 이와 별개로 협상에는 확실한 업적이 있다. 20년 전 원종쿠빌라이 칸에게 받은 '불개토풍'의 약속과 고려의 존속을 확실히 도장 찍고 구체적으로 확약받고 왔다는 점이다.
충렬왕은 1278년 다시 원나라로 찾아가서 20년 전 약속을 빌미로 원나라 주둔군을 고려에서 철수시키고, 다루가치를 내쫓았으며 이후 원나라의 군대나 관리가 고려에 주둔하지 않게 된다.
원나라의 호구조사 요구를 거부하고 고려에서 독자적으로 하기로 했으며, 고려의 독자적인 조세징수 권한을 확답받은 것도 이 사람의 업적. 덕분에 고려의 백성들은 직접적으로 원나라에 세금을 바치지 않아도 되었다. 물론 원나라에서는 공출이라며 고려 조정에서 요청해 뜯어가긴 하지만, 적어도 백성들이 직접 매년 매년 세금을 내는 것보다는 훨씬 다행한 일이었다.
또한, 원종 때 잃어버린 땅을 돌려받은 것도 충렬왕 시기의 일이다. 1290년에 자비령 이북의 동녕총관부의 땅을[16] 1301년에 탐라총관부를 원나라로부터 돌려받았다. 다만 고종 때 빼앗긴 쌍성총관부는 돌려받지 못했는데 이것은 훗날 공민왕이 무력을 써서 탈환한다.
이후 고려의 여몽관계가 확립된 것은 충렬왕의 업적이니 협상력 하나는 인정해야 할 듯하다.

4.2. 개혁 시도


사실 완전히 개혁과 무관했던 것은 아니다. 홍자번편민 18사가 이때 나왔고, 이후 고려 왕들이 개혁 조치를 위해서 설치하는 전민변정도감을 재설한 것도(최초는 원종) 충렬왕이다. 몽골은 몽골과 중국식으로 노비양천제를 실시하려고 했는데 일천제를 통해 노비를 불려나가던 권세가들과 충렬왕부터 이를 맹렬히 반대하여 무위로 돌렸다. 몽골도 어쩔수 없어 나중에는 크게 문제 삼지는 않아 결국 무위로 돌아갔는데 전민변정도감은 한때 해방된 노비들을 다시 노비로 되돌리는 작업을 수행했다.(...) 게다가 권문세족에 대한 견제가 이루어지긴 했으나 이 또한 충렬왕이 귀족들을 믿지 못하여 천출 측근들을 띄우면서 이뤄진 일로 그 측근들도 권문세족화하여 온갖 악행을 일삼았다. 편민 18사를 내놓은 홍자번도 권문세족이라, 편민18사도 수취체제 중심의 온건한 개혁이었을 뿐 아니라, 관료 부패를 지적한 부분은 대부분 지방관 등 다른 세력에게 돌리고 권문세족 관련은 사소한 부분만 언급하고 있다. 고려가 시궁창이 되어 멸망의 원인 중 하나가 충렬왕의 측근 정치와 무능, 부패라 해도 좋을 정도.
유학과 관련해서는 경사6학을 가르치던 국자감을 개칭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성균관의 전신인 성균이다. 그리고 문묘가 이 시기에 만들어졌으며, 안향의 건의로 장학재단인 섬학전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경사교수도감을 설치하여 기존의 시문 창작에서 벗어나서 보다 적극적인 유학진흥을 꾀하였다. 이처럼 고려의 유학발달에 안향이나 공민왕의 역할만을 기억하지만, 의외로 충렬왕의 업적도 만만치 않았다.
다만 이 모두가 그렇게까지 효과를 보지는 못했고 이미지도 약하기 때문에, 충렬왕은 왕으로서의 업적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특히 공민왕 이전의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도 나름대로 개혁을 시도는 하지만 모두 좌절하고 개혁에 염증을 느끼는 전개를 탔다. 어떤 의미에서는 공민왕 역시 마찬가지.

4.3. 원 간섭기


충렬왕 치세는 원 간섭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시기로, 이 치세에 원의 문물과 풍습이 많이 들어왔다. 충렬왕 또한 원나라에 자주 들락거리며[17] 원의 문물제도를 받아들이는 데 앞장섰다.
원의 부마국이 되면서 고려는 원의 내정 간섭을 많이 받았고, 원에 빌붙은 권문세족들이 토지를 많이 소유하면서 농민들의 삶은 궁핍해졌다.
의복을 몽골식(호복)으로 바꾸게 했는데 충렬왕 8년에 고려의 사신 강수형(康守衡)에게 쿠빌라이 칸이 "고려의 복색은 요즘 어떠냐??"고 묻자 “달단의[18] 의복과 모자를 입었고 조서를 맞이하든지 절일을 하례할 때에는 고려 의복을 입고 일을 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쿠빌라이 칸이 “내가 고려 풍속은 그대로 놔두겠다고 했고,[19] 이제껏 바꾸라고 내가 뭐라고 한 적도 없었는데, 왜 그렇게 갑자기 바꿨다냐?"라고 의아해했을 정도다.
1274년, 10월 신유일, 충렬왕이 서북면까지 가서 제국대장공주를 영접할때 왕의 수행원들 중 이분희 등이 변발하지않은 것을 보고 왕이 심하게 책망하였다. 이렇듯 충렬왕 스스로 주변인들에게 몽고 풍속을 강요했으며 11월 정축일, 왕과 공주 일행이 개경에 도착했을때는 재상과 관원들이 국청사 문 앞까지 나가 왕 일행을 영접하였는데 이때 호복을 입지않은 대신들을 골라내 회초리로 마구 쥐어팼다고 한다.

문화적인 면으로는 제법 볼만한데 일연의 <삼국유사>가 완성된 시대이며, 이승휴의 <제왕운기>가 간행되는 등 문화적으로 가치 있는 서적들이 많이 간행되었다. 그리고 유명한 고려 가요 <쌍화점#s-1>이 나온 시기도 충렬왕 치세로 알려져 있다. 충렬왕 개인적으로 음악을 즐겼기에 당대에 신하들에게 노래를 자주 작곡하게 했는데, 그 중 하나였다고 한다.
고려사에서는 충렬왕을 "태자 때는 학문에 충실하고 성격도 좋아서 잘 나가다가 막판에 참소하는 말이나 듣고 아들하고 싸우며 항락에 빠지는 등 완전히 시ㅋ망ㅋ한 왕"이란 식으로 평가하고 있다. 사실 충렬왕으로써도 재위 초기에는 고려를 지키기 위해 힘썼지만, 왕권이 강화된 이후로는 향락에 빠지는 등 왕으로써 무책임했던 군주였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을 듯하다.

4.4. 제후국으로의 격하


(생략)...신하들이 사사로히 왕을 성상(聖上), 황상(皇上)이라 했으며, 임금을 요(堯), 순(舜)으로, 나라를 한(漢), 당(唐)으로 표현했다.

왕은 스스로를 짐(朕), 여일인(予一人)[20]

이라 칭하고, 명령을 조(詔), 제(制)라하고, 유경내(宥境內)를 대사천하(大赦天下)[21]로 표현했으며, 관부 제도는 모두 천조(天朝)와 같게 했으니, 이들은 너무나도 참람하다....(생략)

- '동인지문사륙' 서문 중. 1388년 여말 우왕 치세에 만들어진 서적 동인지문사륙엔 고려가 충렬왕 대 관제 격하를 당하기 전의 모습이 나온다.

전왕 원종 때까지만 해도 계속 기존 천자국 제도를 사용하려했다.[22][23] 하지만 충렬왕 때부터 다루가치의 반발로 인해 대다수 제도가 크게 격하된다.

다루가치가 따졌다: "선지(宣旨)라 칭하고, 짐(朕)이라 칭하고, 사(赦)라 칭하니 어찌 이리 참람할 수 있습니까?"

왕은 검의중찬 김방경, 좌승선 박항을 보내 해명했다: "참람하려는 것이 아니라 조종(祖宗)이 오래토록 전해 왔으니 바꾸길 겁냈을 뿐이다."

그리하여 선지(宣旨)를 왕지(王旨)로, 짐(朕)을 고(孤)로, 사(赦)[24]

를 유(宥)[25]로, 주(奏)[26]를 정(呈)으로 바꾸었다.

- 고려사 충렬왕 세가 재위 2년 3월 중 발췌.

  • 1276년을 기점으로 많은 왕실 예법이 격하된다. 대표적으로 선지(宣旨)가 왕지(王旨)로, 짐(朕)을 고(孤)로, 폐하(陛下)는 전하(殿下)로, 표문(表文)[27]은 전문(箋文)[28]으로, 태후(太后)는 대비(大妃)로, 왕후(王后)는 왕비(王妃)로 바뀌었다.
  • 제사 제도 또한 바뀌었다. 천자의 종묘인 7묘제 태묘는 제후의 5묘제 태묘로 바뀌었고 묘호는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동안 올려진 묘호는 "X왕"으로 격하되어 원에 소개된다.[29]
  • 시호 또한 스스로 올리지 못하게 되었다. 원나라의 제후국가, 부마가 됐으니 시호는 원 천자의 시호를 받아야 했다.[30] 충렬왕 때 시작해 충정왕까지 원의 시호만 받았고 고려 독자적으로 올린 시호는 없었다.[31] 그래서 아들 충선왕이 따로 시호를 올렸다가 포기한다.
  • 관제 역시 격하되어 2성 6부제에서 1부 4사제로 바뀌었다. 충렬왕 때는 그나마 훈위, 오등작 봉작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지만 말기에는 군호만을 사용하게 되었다.
  • 고려가 개국 초부터 제정한 경(京)도 충렬왕 34년에 폐지되었다.[32] 천자는 경(京)과 부(府)를 설치해 수도의 범위와 차별성을 정할 수 있는데, 고려국왕은 더 이상 천자가 아니므로 경(京)이 없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고려의 수도 '개경 개성부'는 '개성부 개성현'으로 하락했다.[33]
  • 절일 또한 폐지되었다. 충렬왕 재위 33년 6월 병오일, 절일을 칭하는 것이 참람하다는 이유로 전면 중단되었고[34], 절일은 500여 년 뒤인 대한제국 고종 황제 때에 겨우 복구된다.
  • 태조 대부터 이어져 온 팔관회도 개수되었는데, 고려사 팔관회 예지에 따르면 충렬왕 재위 원년인 1275년 11월에 팔관회가 열렸지만 기존 장식에 적혀있던 '성수만세(聖壽萬歲)'가 경력천추(慶曆千秋)로 고쳐졌고 '한 사람에게 경사가 있으면(其一人有慶) 팔표[35]가 내정하고(八表來庭) 천하가 태평해진다(天下太平).' 문구도 없앴다. '만세(萬歲)'라고 외치던 것이 금지되어 천세(千歲)로 바뀌었다. 또한 임금의 가마가 지나가는 길에 '황토 즉 누런 흙'으로 포장하지 못하게 했다.
바뀌지 않은 것도 있는데, 원은 몽골 유목민족이다 보니 한족과 조금씩 다른 점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고려의 몇몇 제도는 격하를 피해 갔다. 의복도 그대로 이어졌다. 노랑색 곤룡포는 천자만이 입는 옷이지만, 원이 고려왕복 색깔은 그닥 신경쓰질 않아 몽골풍 옷을 입을 때를 제외하고 황포를 유지했다. 원구단 또한 살아남았다. 충숙왕 때까지 원구에서 기우제를 지낸게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원구단은 몰래몰래 살아남아 조선 태조 대까지 이어진다.

5. 가계


  • 제1비 제국대장공주
  • 제2비 정화궁주
    • 장남: 강양공 왕자(江陽公 王滋, ? ~1308)
    • 장녀: 정녕원비(靜寧院妃) - 제안공(齊安公) 왕숙(王淑)과 혼인하였다.
    • 차녀: 명순원비(明順院妃) - 한양공(漢陽公) 왕현(王儇)과 혼인하였다.
  • 후궁: 숙창원비(淑昌院妃) - 김취려의 증손녀이자 과부 출신으로 충선왕이 무비 일가족 숙청 이후 아버지 충렬왕에게 바친 여인이지만 충렬왕 사망이후 충선왕이 취하는 패륜을 범하였다.
  • 후궁: 반주(盤珠)
  • 후궁: 시무비(柴無比)

5.1. 제국대장공주



제국대장공주는 유명한 쿠빌라이 칸의 막내딸로, 원나라에서 유일하게 직계 황금씨족임에도 몽골인이 아닌 이민족 왕과 결혼한 공주였다. 그 때문에 원나라 내에서 충렬왕의 서열은 왕들 중 7위였다고 한다. 이는 자기 아들이자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인 충선왕보다도 높았다고 한다. 결혼 당시 제국대장공주는 16세 꽃처녀였지만 충렬왕은 무려 39세 아저씨였다.(....)
충렬왕은 결혼 당시까지 애매한 처지였던[36] 공주에게 원성전에서 따온 원성공주[37]로 책봉하고 원나라 황제를 설득해 원나라로부터 안평공주의 책봉을 받아내 자신이 부마로서 입지를 굳혔다. 거기다 황제가 바뀐 뒤 안평공주가 제국대장공주로 높여지면서 자신의 원 내 입지도 더 강해지게 된다.
제국대장공주는 탁월한 상업 감각이 있었다. 1274년 16세에 충렬왕과 결혼한 제국대장공주는 자신의 상인을 데려와서 고려인삼, 종이, 모시 따위를 원나라가 장악한 실크로드를 통해 러시아아랍에까지 팔았다. 이 때부터 고려의 물건이 세계에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특히 결혼한 지 8년 뒤, 원나라남송을 점령하고 중국을 집어삼킨 뒤론 인삼 교역에 날개가 달렸다.
제국대장공주는 제국의 공주이며 쿠빌라이 칸의 딸이라는 자부심이 강해서 관료들에게 몽고풍을 강요하거나 자기가 데려온 측근들의 우대로 그들이 만행을 부리기도 했으며, 상업 능력으로 고려에 탕목읍을 두어 축재를 벌이는 등 부정적인 면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공주의 성격은 엄하고 밝아 잘못하면 측근들도 용서하지 않았고 책임감이 강해 백성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거나, 사냥을 멈추고 정사에 힘을 쓸 것을 왕에게 간하는 왕비의 면모를 보였다.
예를 들면 충렬왕이 사냥 나간 곳에 따라 나가서 사냥감이 변변한 것이 없자 "국정 돌보기도 바쁜 왕을, 왜 이런 거위 새끼 한 마리 없는 곳까지 끌고 오냐??"고 호종한 신하들에게 호통을 치거나 음악에 취미를 가져 내시 및 악공들과 풍류를 즐기는 충렬왕에게 "음악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린다는 말을 들어본 적 없거든요?"고 해서 중지시키기도 했다.
아래 사례는 충렬왕 11년(1285년)에는 환관 김자정(金子廷)을 동경부사(東京副使)로 삼았는데, 다음은 이때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 사이에 오간 대화.

공주: 저는 동경이 대왕의 외가 고을이라 들었는데[38]

맞나요?

충렬왕: 그렇소.

공주가: 그러면 그런 중요한 고을 수령에 집안에서 심부름이나 하는 사람을 임명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언제부터 고려에서 남반(南班) 출신이 그런 요직을 맡게 된 거죠?

충렬왕: 원묘(元廟)[39]

때부터요.

공주: 대왕께선 역시 원왕(元王)의 아드님이시네요.[40]

이런 엄격한 성격에 투기가 매우 강해서 부부 사이는 좋지 않았다. 아들(충선왕)이 태어난 것을 하례하는 연회에서 미리 설치된 높은 자리에 앉았는데, 그 연회에 마침 정화궁주 왕씨도 참석해 있었다. 정화궁주는 충렬왕이 태자이던 시절 처음 맞이한 아내로, 본래 충렬왕의 첫째부인이었다가 제국대장공주의 등장으로 인해 무려 결혼 14년 만에 둘째부인으로 밀려난 비운의 여인이다. 그런데 이때 충렬왕이 정화궁주와 자신을 동렬에 놓자 매우 분노했고, 결국 정화궁주를 꿇게 하여 술을 받아냈다. 이에 충렬왕이 어이 없어하며 연회 중에 제국대장공주를 한 번 쳐다봤는데 그걸 "왜 쳐다봐요? 내가 정화궁주한테 막 대한다고 뭐, 지금 따지는 거임?" 하고는 "연회상이고 뭐고 갈아엎고, 나 내 아들 있는 데로 갈 거니까, 당장 가마 가져오라."고 생떼를 부렸다.

동쪽 행랑의 평상에 공주의 자리를 마련했다. 식투르가 말하기를 "평상에 자리를 마련한 것은 공주님을 궁주와 같이 대접하려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공주가 크게 노하여 바로 명하여 자리를 서쪽 행랑으로 옮겼는데 대개 서쪽 행랑엔 예부터 높은 의자가 있었기때문이다. (...) 결국 왕이 잔치를 그만두라 명하자, 공주는 전에서 내려와 크게 곡하며 말하길, "내 아기가 있는 곳으로 가련다." 라고 하고 드디어 가마를 재촉하였다.

<<고려사>> <제국대장공주 열전>

그런데 이건 자기 아들의 탄생을 축하하는 연회에 남편이 딴 여자를 끼고 와서는 자기와 동급으로 취급하면, 누구라도 화낼 만한 일이었다. 제국대장공주는 충렬왕과의 사이에서 여러 자식들이 있었지만 충선왕 이외에는 모두 일찍 죽었고, 호색해서 다른 여자들만 찾아대는 충렬왕의 행동이 제국대장공주에게 매우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는지, 그녀의 투기는 대단했다. 화풀이로 다른 후궁들과 그 자제들을 족치는 일이 여러 번 있었고, 특히 충렬왕의 전 정처였던 정화궁주 왕씨의 서열관계를 가지고 따지거나, 정화궁주와 자신의 시종 수에 관해서 질투하기도 했다.
이런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제국대장공주는 충렬왕 23년(1297년)에 3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당시 23세의 충선왕은 어머니가 죽은 이유가 충렬왕의 총애를 받던 후궁 무비 탓이라고 생각하여 주변 사람들을 잡아 죽이거나 귀양보냈고, 당시 63세이던 충렬왕은 이에 환멸을 느껴 잠시 왕위를 양위했으나 곧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5.2. 아들과의 대립


충렬왕-충선왕 부자의 악연은 이미 일찌감찌 조짐이 보였다. 총명한 충선왕은 아버지가 국정과 민심을 돌보지 않는 게 불만이었고 아버지인 충렬왕은 사사건건 간섭하는 아들이 못마땅했기에 그런 듯 하지만 이미 어린 시절부터 충선왕은 부왕의 잦은 사냥에 비판적이었고, 이러한 세자를 왕은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제국대장공주의 죽음이었다.
그 때 당시 충렬왕의 총애를 받던 무비라는 후궁이 있었는데, 왕은 그녀를 대단히 아껴서 사냥하러 갈 때도 항상 대동하고 다닐 정도였다. 당연히 제국대장공주에게 질투 및 핍박의 대상이었고[41], 그러던 중 제국대장공주가 죽자 당시 세자였던 충선왕원나라에서 급히 귀국하였다. 평소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충선왕은 어머니의 죽음을 평소에 미움받던 무비 등이 꾸민 소행이라 보고, 무비와 그녀의 측근 40여 명을 죽인다. 하지만 이게 실질적으로는 충렬왕의 수족을 잘라버린 것과 다름없던 것이었다. 마침 원나라 황실의 부마라는 끈도 떨어졌고 수족마저 잘린 상황에서 충렬왕은 결국 양위를 결심하고[42], 1298년 1월 세자에게 양위하였다. 그리고 충선왕은 고려 26대 왕위에 오른다.
즉위와 함께 충선왕은 대대적인 개혁 정책을 발표한다. 당장 그의 즉위 교서에만 봐도 잘 드러난다.[43] 앞으로의 개혁 방안부터 시작해 구체적인 사항까지 세세히 열거하였다. 그러한 개혁 정책 중 하나가 원나라의 간섭으로 격하된 기존 관제 복구였는데, 이것은 충분히 반원 정책으로 보일 수 있는 조치였다.[44] 결국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충선왕은 즉위한 지 불과 8개월 만에 왕위를 빼앗긴 후[45] 원나라로 끌려가고, 충렬왕이 다시 복위하게 되었다.
조선인조소현세자와의 관계랑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부자 간의 알력이 그렇게 크게 불거지지 않지만 결국 폭발하게 되는 사건이 터지게 된다.

5.2.1. 며느리 계국대장공주 개가 책동


충렬왕-제국대장공주의 금슬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처럼 충선왕-계국대장공주 간의 금슬도 좋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부왕보다 더 심한 편이었다.[46] 그리고 이것을 충렬왕파 신하였던 송균, 송린, 왕유소, 송방영 등이 부자간을 이간질하는데 써먹게 된다. 바로 계국대장공주충선왕이혼시키고 고려 왕족과 재혼하게끔 하여 충선왕의 즉위를 막는 것. 언뜻 봐서는 무슨 상관이 있나 싶겠지만, 당시 황금씨족인 원나라 공주의 영향력은 고려의 왕위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컸다. 당장 충렬왕이 제국대장공주 사후 원 황족과 인척관계가 없어지자 충선왕에게 양위해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계국대장공주를 개가시킬 왕족으로 서흥후(瑞興侯) 왕전(王琠)이 결정되었다. 그는 본래 정화궁주 왕씨의 조카로 신종의 후손이었지만, 충렬왕의 이복동생으로 요절한 시양후(始陽侯) 왕태(王珆)의 양자로 들어가게 됨으로서 형식적으로는 충렬왕의 조카라는 가까운 인척이 되었기 때문인 것도 있었고 현실적으로 잘 생겨서 공주의 호감을 살 수 있었던 바도 컸다. 서흥후 본인은 이 계획을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모르지만 일단 계국대장공주가 있는 원나라로 가게 되었고, 결국 대장공주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성공했다.
거기다 이 일은 당시 원나라에서 원성종 테무르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결정하는 문제에 얽히면서, 양측 모두 사생결단으로 진행된다. 당시 원성종은 후계자가 없는 상태인데다 오늘 내일 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황후 브루간을 위시한 옹기라트 부족[47]은 종제였던 안서왕 아난다를 옹립하려 했고, 반황후파는 황제의 조카였던 카이샨을 지지하고 있던 상황. 여기서 중요한 것은 충선왕이 카이샨과 그 동생인 아유르바르바다와 절친이었다는 것. 자연 충선왕 일파는 카이샨 형제를 지지했고 그에 반하는 충렬왕 세력은 아난다를 밀게 됨으로서, 상황은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흘러간다. 결국 신하들이 선수를 쳐서 카이샨(무종)을 옹립하였다.
결국 충렬왕파 신하였던 송균, 송린, 왕유소, 송방연 등은 모두 처형되었다. 형식적으로는 아난다를 지지했다는 이유였지만... 서흥후 왕전 또한 처형되었다.[48] 계국대장공주의 개가도 물 말아 먹고 끝났고, 충렬왕은 모든 권한을 빼앗긴 채 쓸쓸히 고려로 귀국하게 된다. 그로부터 1년 후 세상을 떠난다.[사건]
죽기 이전에는 아들인 충선왕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유언을 남기는 등 아들을 향한 감정이 없지는 않던 모양이다. 어찌 보면 원나라의 간섭으로 인하여 아내와 아들의 불화 속에서 살다간 비극의 인물.

6. 기타


  • 충렬왕은 73세까지 살았기에 고려 국왕 34명 중에선 가장 장수한 인물이기도 하다.[49]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왕은 46년 동안 재위한 고종. 하지만 68세에 사망했기 때문에 가장 장수한 국왕은 아니다. 그의 왕후인 제국대장공주가 충렬왕 본인보다 무려 23년 연하였는데 그는 그의 아내보다 11년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 충렬왕은 원손(元孫) → 태손(太孫) → 태자(세자) → 국왕 순으로 매우 정석적인 순서로 등극했다. 심지어 세자에게 양위해 태상왕(太上王)까지 해보니, 그야말로 유교의 종법에 완벽히 들어맞는 군주였다. 조선시대였다면 이는 무시할 수 없는 완벽한 정통성이 되었겠지만[50], 충렬왕의 시대는 유교 종법이 그닥 선호되지 않던 고려시대라 별다른 메리트가 없었다.
  • 이후의 고려의 국왕들은 모두 그의 후손이다. 창왕까지는 충선왕의 후손이며, 공양왕은 모계 쪽으로 충렬왕의 현손자가 된다.
  • 외할머니 최씨가 최우의 장녀다. 즉 최충헌의 먼 후손인 셈. 친손은 아니지만 어찌되었든 현손이다. 충렬왕의 외할머니의 할아버지가 최충헌이므로.
  • 충렬왕과 충선왕이 대립했던 것처럼 충선왕 본인 역시 후에 자신의 아들이었던 세자 왕감과 대립하였고 끝내 그를 살해한다.[51]
  •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카다안의 침입 당시 행적으로 인해 선조(조선), 인조가 양반으로 보이는 한국사 최악의 졸렬 군주라고 악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6.1. 대중매체


[image]
  • 2017년 MBC 드라마 왕은 사랑한다에서는 배우 정보석이 충렬왕 역할을 맡아 출연했다.[52]

7. 같이보기



[1] 왕태자 시절엔 수원절(壽元節), 왕이 되고나서 수원천성절(壽元天聖節)로 고쳤으나 탄일로 개칭. 하지만 탄일은 단순히 "태어나신 날"이란 뜻으로, 절일 제도가 사실상 충렬왕 때 폐지되었다는 뜻과 마찬가지다.[2] 고종이 현 인천광역시 강화군으로 천도하면서 원 양광도 강화현이었던 행정단위를 강도 강화군으로 확 올렸다. 도(都)는 광종이 처음 사용한 지역단위로 경(京)보다 더 높은 의미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성종 때 도(都)는 폐지됐지만 고종 때 다시 사용되었다. 별칭으로 강화경(江華京)이 있다.[3] 고려국왕 중 유일하게 강화경에서 태어난 임금이다.[4] 원 정주(貞州)로 개경 개성부의 경기(京畿) 중 하나였지만, 예종 때 부(府)로 떼어냈다. 떼어낸 이유는 자신의 어머니 명의태후가 정주 유씨 가문 출신이기 때문이다.[5] 순경태후는 충렬왕을 낳고 다음 해에 15세의 나이로 요절했다.[6] 헌종도 처음에는 묘호가 없었지만 예종이 추가해줬기에 예외. 의종도 묘호 및 시호를 받지 못했지만 조위총의 성토로 명종이 추가해줬다.[7] 혹 상황(上皇).[8] 자기 마누라 제국대장공주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아들 충선왕보다 서열이 낮긴 했다[9] 일본에서는 카미카제#s-1라고 부른다.[10] 자세한 것은 아래 항목 참고.[11] 충선왕은 다시 원나라로 돌아갔다가 10년이 지난 후 충렬왕이 죽고 나서야 고려에 돌아온다.[12] 원 간섭 하에 있던 고려는 국왕이 꼭 원 황실의 여성과 결혼해야 정권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13] 원 무종은 계국대장공주의 남동생이다.[14] 죽음의 때.[15] 재위는 고종이 가장 길고, 문종이 그 다음이다.[16] 동녕총관부를 아예 고려가 돌려받았다고 쓰여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정확히는 동녕총관부를 요동으로 이전하면서 땅을 반환한 것이다. 요동으로 이전된 동녕총관부는 공민왕의 제1차 요동정벌의 목표가 된다.[17] 쿠빌라이 칸 사후 그 후계자인 원성종 테무르의 즉위식에 참가한 적이 있는데, 이 때 원성종이 상석에 앉고 충렬왕은 제후국의 군주로써 위에서 7번째 자리에 앉았다고 한다.[18] 타타르. 여기서는 몽골을 의미한다.[19] 고려원나라 사이의 화친 조건 가운데, 고려의 풍속과 제도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불개토풍(不改土風)의 조항을 의미한다.[20] 주문왕의 자칭.[21] 이 대사천하란 표현은 고려사에서 최대한 과거의 표현을 직서하고자 한 세종대왕까지도 꺼려했다. 결국 뒤의 천하를 빼버려 직서의 한계를 드러냈다.[22] 7묘 9실제 종묘에 짐, 폐하 등 천자식 예법을 그대로 썼으며 독자적 묘호와 시호를 받았다.[23] 다만 태자는 세자로 바뀐다. 당시 원종의 태자 충렬왕이 계속 원나라에 왔다갔다했기 때문에, 충렬왕이 태자라 불리는 걸 원이 문제삼았기 때문.[24] 천자가 천하에 온정을 베푸는 것을 사(赦)한다고 표현한다.[25] 제후가 자기 경역에 온정을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26] 신하가 임금에게 아뢰는걸 주(奏)라고 한다. 제후가 천자에게 아뢰는 것도 주(奏)라하기 때문에 다루가치가 불평한 것이다.[27] 신하, 제후가 천자에게 올리는 문서.[28] 신하가 제후에게 올리는 문서.[29] 예를 들어 태조는 태왕(太王) 혹은 조왕(祖王)으로, 혜종은 혜왕(惠王)으로. 보통 원 간섭기에 쓰인 책들이 전왕들을 언급할 때 이런 식으로 쓰였다.[30] 시호를 고려에서 스스로 올리면 고려 왕이 원 황제의 제후라는걸 부정하는 것이 되니까.[31] 이는 반원 성향인 공민왕이 재위 6년에 독자적으로 시호를 올릴 때까지 이어진다.[32] 중간에 광종 대 경(京)이 도(都)로 바뀌어 개경이 황도, 서경이 서도가 된 적이 있다. 고종 대 강도(江都)가 설치되어 제1수도가 됐지만 개경과 동, 서, 남경은 경 단위를 사용해 경 단위는 살아있었다.[33] 이는 고려 말에도 회복이 안되고 왕조가 바뀐다.[34] 고려사 예지 가례 왕태자절일수궁관하병회의 기록.[35] 팔표는 팔방(八方), 팔굉(八紘)과 같은 뜻으로 우주, 온 세상을 의미한다.[36] 당시 기록을 보면 당시 제국대장공주공주의 예우를 받았지만 그냥 공주 또는 쿠툴룩켈미쉬 황녀로만 기록된 것으로 보아 봉호는 없던 것으로 보인다.[37] 고려시대 왕후, 왕비, 비는 자신의 거처인 궁이나 원에서 따온 궁주나 원주를 사용했고 태후는 전주를 사용했다. 제국대장공주는 공주의 지위 때문에 거처인 경성궁이 아닌 원성전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원의 공주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원성전에서 따왔음에도 전주가 아닌 공주로 책봉했다.[38] 충렬왕의 어머니 정순왕후는 김약선의 딸로 경주 김씨다.[39] 아버지 원종의 묘호를 높혀 부르는 표현이다.[40] 여기서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의 기싸움이 보인다. 충렬왕은 아버지 원종을 원묘(元廟), 즉 묘호로 불렀는데 공주는 그걸 원왕(元王)으로 격하해 불렀다. 천자의 묘호를 받은 선왕을 두고 두 사람의 입장 차이가 보인다.[41] 사실 제국대장공주는 충렬왕이 민심을 돌보지 않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평소에도 자주 다투었다.[42] 자의도 있었겠지만 압력도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다.[43] 보통 왕의 즉위 교서는 형식적인 표현들이 대부분이었다.[44] 이것 말고도 다루가치정동행성 등도 개혁 대상으로 다루고 있었다.[45] 말 그대로 뺏긴 거다. 원나라의 사신이 다짜고짜 옥새를 빼앗았다.[46] 둘이 아예 별거하고 지냈다. 원나라에서나 고려에서나.[47] 대대로 황후를 배출한 원나라 대의 대표적인 외척 집안.[48] 고려사 열전 기록엔 충선왕이 용서해주려 했지만 원나라 승상이 이를 반대해 결국 참수되었다고 적혀 있다.[사건] 당시 충렬왕과 충선왕 모두 원나라에 있었다. 거기다 충렬왕은 아들의 사저에 거처했었다.[49] 조선의 국왕들 평균수명이 47.1세로 알려져 있는데 고려는 그보다도 더 짧아서 겨우 42.3세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충렬왕은 흔히 원 간섭기 때의 행적이 잘 알려져있지만, 실제론 무려 30대 중반까지 무신정권을 겪은 인물이다. 당장 출생 연도가 최충헌의 아들 최우 집권 중반기이고, 최씨 정권의 최항, 최의김준, 임씨 정권 임연임유무까지 다 겪었다.[50] 조선단종 임금이 이 사례다. 충렬왕과 똑같이 원손 → 세손 → 세자 → 국왕 테크를 탔고, 세조가 자리를 뺏었을 때 단종의 정통성 때문에 엄청난 반발이 일어났다.[51] 1310년 왕위 계승 문제를 두고 벌어진 사건으로 아무래도 세자의 영향력을 경계해오던 충선왕의 의심이 폭발한 것으로 보인다.[52] 재미있게도 MBC 사극인 무신에서는 외할머니 최씨의 아버지, 즉 외증조할아버지인 최우로 출연했고, 같은 MBC 사극 신돈에서는 충렬왕의 증손자 공민왕을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