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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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두에 다량의 탄자를 넣어 쏘는 인마살상용 포탄. 산탄과 비슷한 측면이 없지 않으나 총구를 터나는 즉시 자탄이 퍼지는 산탄과는 달리 유산탄은 탄두가 일정 거리를 날아가다 자탄을 뿜어내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발사시 지연신관이 작동하여 시간이 되면 탄두 밑바닥의 작약이 터지면서 자탄을 풀어낸다. 이 때문에 탄두는 지연신관이 작약을 폭발시킬 때까지 형태를 유지하며 산탄의 사거리를 획기적으로 늘린다.
1784년에 영국의 헨리 쉬라프넬(Henry Shrapnel)이 왕립포병대에 근무하면서 현대적인 의미의 유산탄을 개발했다. 유산탄의 영어명인 Shrapnel은 발명가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후 1차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인 원리가 유지된 채로 사용되었다.
작동 원리면에서는 비격진천뢰도 유산탄의 일종으로 볼 여지가 있다. 물론, 비격진천뢰는 현대적인 지연신관이 아니라 심지로 작동하는 시한폭탄 개념이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면 내부의 쇠구슬을 자탄으로 뿜어낸다는 점에서 유사성이 있다. 유산탄의 선조쯤 되는 물건이다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에 이르면서 효율적인 인마살상 수단이었던 유산탄은 여러 문제점들을 노출했다. 악명 높은 참호전이 전개됨에 따라 이전까지의 전장에서 큰 효과를 보던 유산탄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는데 가장 큰 문제가 영국군의 믿음과 달리 더이상 유산탄으로는 철조망 지대를 철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폭압이 아닌 작은 쇠구슬을 쏟아내는 유산탄의 특성상 안그래도 철조망 철거에 한계가 있었는데 독일이 유산탄에 대비하여 더 두껍게 강화된 철조망을 생산하면서 철조망을 상대로는 유산탄의 자탄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었다. 왕립 포병대의 충분한 포격으로 철조망이 파괴었을 것이라 판단하고 보병부대가 돌격을 개시하고 보면 무인지대에는 여전히 철조망 지대가 남아있었고 이로 인해 거대한 인명손실로 이어졌다. 또한 작은 철구슬인 자탄들은 흙이나 덮개와 같은 방호기재에 쉽게 막혀 유개호나 철모 등을 뚫지 못해 참호 내의 병력에 대한 살상능력도 크게 제한되었다. 물론 나름 군사강국이던 영국이 고폭탄의 장점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그 복잡한 구조로 인한 제조공정이 까다로워 당시의 영국의 공업능력의 한계에 의해서 포병대에 보급된 포탄의 일부만이 고폭탄이었으며 절대다수는 유산탄이었다. 결국 기술의 발전과 공업능력이 성장으로 인해 유산탄은 빠르게 고폭탄에 대체되었다.
그러나 현대에 다시 유산탄 계열이 전면에 등장했는데, 기술의 발달로 인마살상용 뿐만 아니라 대기갑용으로도 쓸만하게 되었기 때문이다.[1] 고폭탄만으로는 광역 제압이 힘들고 유개호를 파고 틀어박히지 않은 적들을 상대하기에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기갑 병과에서 쓸 수 있는 유산탄도 등장해서 전차의 대보병 교전능력을 향상시키고 있다. 아무래도 날탄[2] 만으로는 보병을 제압하기 어렵고, 대탄[3] 도 엄밀히 따지면 보병을 상대하라고 있는 탄종은 아니라서 본격적인 대보병용 포탄으로 쓰이는 것이다.
최근에는 비슷한 원리를 가진 급조폭발물이 유산탄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1. 개요
탄두에 다량의 탄자를 넣어 쏘는 인마살상용 포탄. 산탄과 비슷한 측면이 없지 않으나 총구를 터나는 즉시 자탄이 퍼지는 산탄과는 달리 유산탄은 탄두가 일정 거리를 날아가다 자탄을 뿜어내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2. 원리
발사시 지연신관이 작동하여 시간이 되면 탄두 밑바닥의 작약이 터지면서 자탄을 풀어낸다. 이 때문에 탄두는 지연신관이 작약을 폭발시킬 때까지 형태를 유지하며 산탄의 사거리를 획기적으로 늘린다.
3. 역사
1784년에 영국의 헨리 쉬라프넬(Henry Shrapnel)이 왕립포병대에 근무하면서 현대적인 의미의 유산탄을 개발했다. 유산탄의 영어명인 Shrapnel은 발명가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후 1차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인 원리가 유지된 채로 사용되었다.
작동 원리면에서는 비격진천뢰도 유산탄의 일종으로 볼 여지가 있다. 물론, 비격진천뢰는 현대적인 지연신관이 아니라 심지로 작동하는 시한폭탄 개념이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면 내부의 쇠구슬을 자탄으로 뿜어낸다는 점에서 유사성이 있다. 유산탄의 선조쯤 되는 물건이다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에 이르면서 효율적인 인마살상 수단이었던 유산탄은 여러 문제점들을 노출했다. 악명 높은 참호전이 전개됨에 따라 이전까지의 전장에서 큰 효과를 보던 유산탄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는데 가장 큰 문제가 영국군의 믿음과 달리 더이상 유산탄으로는 철조망 지대를 철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폭압이 아닌 작은 쇠구슬을 쏟아내는 유산탄의 특성상 안그래도 철조망 철거에 한계가 있었는데 독일이 유산탄에 대비하여 더 두껍게 강화된 철조망을 생산하면서 철조망을 상대로는 유산탄의 자탄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었다. 왕립 포병대의 충분한 포격으로 철조망이 파괴었을 것이라 판단하고 보병부대가 돌격을 개시하고 보면 무인지대에는 여전히 철조망 지대가 남아있었고 이로 인해 거대한 인명손실로 이어졌다. 또한 작은 철구슬인 자탄들은 흙이나 덮개와 같은 방호기재에 쉽게 막혀 유개호나 철모 등을 뚫지 못해 참호 내의 병력에 대한 살상능력도 크게 제한되었다. 물론 나름 군사강국이던 영국이 고폭탄의 장점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그 복잡한 구조로 인한 제조공정이 까다로워 당시의 영국의 공업능력의 한계에 의해서 포병대에 보급된 포탄의 일부만이 고폭탄이었으며 절대다수는 유산탄이었다. 결국 기술의 발전과 공업능력이 성장으로 인해 유산탄은 빠르게 고폭탄에 대체되었다.
그러나 현대에 다시 유산탄 계열이 전면에 등장했는데, 기술의 발달로 인마살상용 뿐만 아니라 대기갑용으로도 쓸만하게 되었기 때문이다.[1] 고폭탄만으로는 광역 제압이 힘들고 유개호를 파고 틀어박히지 않은 적들을 상대하기에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기갑 병과에서 쓸 수 있는 유산탄도 등장해서 전차의 대보병 교전능력을 향상시키고 있다. 아무래도 날탄[2] 만으로는 보병을 제압하기 어렵고, 대탄[3] 도 엄밀히 따지면 보병을 상대하라고 있는 탄종은 아니라서 본격적인 대보병용 포탄으로 쓰이는 것이다.
최근에는 비슷한 원리를 가진 급조폭발물이 유산탄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