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유(후한)
1. 劉儒
(? ~ 169년)
후한 말의 인물. 자는 숙림(叔林). 동군 양평 사람.
유유는 재앙이 일어날 징조에 대해 묻자 환제에게 직언을 했으며, 임성상, 의랑을 역임했다. 곽태는 유유에 대해 말재주는 없지만 성질이 좋다고 평가했으며, 168년에 두무가 환관들을 죽이기 모의했다가 환관에게 죽었다.
두무 일파를 없애고 조절이 유사에게 사주해 서로 끌어들여 도당을 만들었다는 자들로 우방, 이응, 두밀, 주우, 순익, 적초, 범방 등과 함께 지목해 주군에 회부시켜 고문해서 죄를 다스리도록 주청하면서 연좌되어 감옥에 갇히자 자살했다.
천하의 사대부들은 이응 등의 법도를 숭상하면서 조정을 더럽다고 해 그들처럼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오직 그들에게 미치지 못할까 염려해서 서로를 표방하면서 그들을 위해 이름을 붙여서 불렀다. 그들이 표방한 여러 개 칭호 중에서 유유는 도상, 장막, 왕고, 호모반, 진주, 피향, 왕장 등과 함께 재물로써 사람을 구제할 수 있는 것을 말하는 팔주라 불렀다.
2. 劉瑜
(? ~ 168년)
후한 말의 인물. 자는 계절(季節).
광릉 사람으로 젊어서 경학을 좋아하고 특히 천문, 역산에 밝았으며, 주군에서 초빙하자 사양했고 165년에 태위 양병이 현량방정으로 천거하자 수도로 와서 국정을 논하는 상서를 올렸다. 상서를 올릴 당시에는 자신을 천거한 양병은 이미 사망했다.
환제가 특별히 조서로 불러 재앙의 조짐에 대해 묻자 경전과 참위설에 근거해 말했으며, 집권한 자들은 유유의 답변이 법을 위반했다면서 다른 일을 물었다. 유유는 정성스럽게 8천 여 글자의 답변을 올렸지만 환제는 채용하지 않았다.
의랑이 되었고 환제가 붕어하자 두태후가 영제를 아들로 삼아 임조청정을 하고 두무, 진번에게 정사를 맡기도록 했는데, 유유는 이 때 이응, 두밀, 윤훈과 함께 조정의 부름을 받아 정사에 참여했다. 두무가 환관을 주살하기 위해 유유를 승진시켜 시중에 임용했으며, 두무가 환관을 몰아내려다가 모의가 발각되어 실패하자 유유는 윤훈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