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후한)

 



李膺
(? ~ 169년)
후한 말의 인물. 자는 원례(元禮). 영천군 양성 사람.
한안제 때 태위를 지낸 이수(李脩)의 손자이자 조국상을 지낸 이익(李益)의 아들이며, 팔준(八俊)의 한 사람.
고상한 뜻이 맑고도 오묘했으며, 문무에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동군의 순숙, 진식 등과 교류했으며, 효렴을 통해 천거되면서 사도 호광이 불러 관직에 오르면서 청주자사, 어양태수, 촉군태수 등을 거쳤지만 촉군태수로 임명되었을 때 어머니가 있었으므로 가지 않았다. 호오환교위가 되었다가 이후 면직되었다가 156년에 선비가 운중을 공격하자 도료장군으로 임명되어 싸우러 나갔다가 강족과 호족이 그 소문만 듣고 굴복했다.
일찍이 순상은 이응의 마부가 된 적이 있었는데, 순상이 기뻐하면서 "오늘 나 순상은 이응의 마부가 될 수 있었다"고 말할 정도로 이와 같이 이응은 존경받았다. 159년에는 하남윤을 지낼 때 완릉의 호족인 양원군이 북해태수를 그만두고 뇌물을 받거나 난폭한 행위를 하자 이를 단속했다가 환관들의 수작으로 이응이 반대로 죄를 입게 되었으며, 이응, 정위 풍곤, 대사농 유우 등을 환관이 처벌하려고 했지만 사례교위 응봉이 이응을 변호하면서 사면되었다.
이응이 사례교위가 되면서 장양의 동생인 장삭이 사람을 함부로 죽이고 나쁜 행동을 일삼자 체포하게 했는데, 장양의 권세 때문에 부하가 두려워해 만류했지만 이를 듣지 않고 장삭을 체포하기로 했다. 장양이 동생을 보호하기 위해 뇌물로 그를 설득하려고 하자 이응은 뇌물을 받았다가 몰래 사람을 보내 장삭을 찾았다가 장양의 집에 있음을 알아냈으며, 장양의 집으로 가서 기둥을 부수고 장삭을 끌어내 법에 따라 죽였다.
또한 166년에 후람과 친한 장성이라는 방사가 후람에게서 대사령을 내릴 것이라는 소식을 듣자 장성이 여러 사람들에게 내가 풍향을 보니 황상께서 오래지 않아 곧 사면령을 내릴 것이라 했다가 사람들이 믿지 않자 내기를 걸면서 아들을 시켜 살인을 저질렀는데, 결국 사면령이 내리지고 장성이 여러 사람들에게 점을 치지 않아도 자신은 미리 안다면서 이제 조서가 내려져 사예교위가 자신의 아들을 내놓을 것이라고 했다. 이응은 그 이야기를 듣고 대사령이 내릴 것을 미리 알고 살인하는 사람에게까지 대사령을 내려주는 것이 아니라면서 붙잡아 가뒀던 장성의 아들을 처형했으며, 장성은 후람과 장양에게 자기 아들의 원수를 갚아달라고 간청하자 환관들에게서 당을 만든다는 무고를 당해 투옥되었다가 금고되었다.
167년에 환제가 죽고 168년에 영제가 즉위하면서 대장군 두무가 불러 장락소부가 되었으며, 두무가 환관을 죽이려다가 실패하면서 금고되었다가 169년 10월에 조절의 모함을 받아 벌을 받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도망가라고 권했지만 이를 거절하고 스스로 옥을 들어갔다가 고문으로 죽임을 당했다.
등용문이라는 고사성어의 유래가 된 사람으로 세설신어등용문에 관한 것과 순숙과 종호를 칭찬한 이야기, 섭계보에 대해 평가한 이야기가 있다.
순숙과 종호를 칭찬할 때 순숙에 대해서는 순숙의 맑은 식견은 그 위에 다른 것을 더하기 어려우며, 종호에 대해서는 종호의 지극한 덕은 가히 스승이 될 만하다고 했다.
당시 같은 현에 살고 있던 섭계보는 가난한 집안의 아들이라 감히 이응을 만날 수 없었고 두밀이 섭계보의 현명함을 알아봤지만 그의 명성을 판정할 수 없어서 이응에게 만나보게 했는데, 이응은 섭계보를 만나보고 얘기를 나누고 이 사람은 반드시 국사가 될 것이라 판단했다. 훗날 섭계보는 이응의 말대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