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번

 




陳蕃
(? ~ 168년)
후한 말의 인물. 자는 중거(仲舉). 여남 평여 사람.
본래는 소릉 사람이지만 아버지는 양보현령을 지내고 진번은 따로 평여에서 벼슬살이를 했으며, 할아버지는 하동태수로 할아버지의 무덤은 소릉에 있어서 해마다 소릉에 제사지내러 갔다.
두무, 유숙 등과 함께 삼군(三君)으로 불린 인물이며,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15세 때 어느날 부친의 친구인 설근이 그를 보러 오면서 선배가 자신을 보러 오는 줄도 알면서 왜 청소해놓고 맞이하지 않냐고 묻자 진번은 "대장부는 천하를 청소해야지, 어찌 방 하나만을 청소하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진번의 품행이 널리 알려져 왕공(王龔)의 천거를 받아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중이 되었다가 모친상으로 그만뒀으며, 상을 마친 후에는 예주자사 주경이 별가종사로 초빙했지만 의견이 맞지 않아 거부했으며, 진번이 정직하고 청렴해 여러 차례 조정에 천거했지만 출사하지 않다가 태위 이고가 상주해 천거하면서 의랑으로 출사했다.
의랑에서 낙안태수가 되었다가 낙안군에서 고결하다고 알려진 주구를 천거했지만 응하지 않아 직접 청해 주구와 벗이 되었으며, 나무 침대를 준비해 주구가 오면 앉거나 쉬게 하면서 주구가 관아를 떠나면 들보에 걸어놨다고 한다. 부모가 사망한 후에 부모를 위해 동굴이 달린 큰 묘를 짓고 그 동굴을 봉하지 않은 채 그 속에서 부모를 20여년간 지켰다고 하는 조선이라는 사람을 여러 관원들이 천거했는데, 진번이 조선을 직접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가 상중에 다섯 명의 아이를 낳았음을 알게 되었다.
당시에 거상 기간은 6년으로 그 기간에는 처자와 동거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조선은 20여년간 거상해서 기한을 초과한 자체가 예에 걸맞지 않는데다가 그 사이에 동거한 허위 행위로 조선을 유죄로 판결했다.
대장군 양기가 진번의 평판을 듣고 사람을 보냈지만 만나주지 않았으며, 양기가 보낸 사람이 진번을 속여 양기와 만나게 하려고 하자 그를 때려죽여 수무의 현령으로 좌천되었다가 상서가 되었다. 환제가 영릉과 계양의 산적을 토벌하려고 하자 반대하면서 지방관의 문제로 산적이 나온 것에 대해 조사하면서 삼공부에게 태수, 현령, 현장을 심사하게 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는데, 그의 충정스러움이 외척에게 거슬렸기 때문에 조정에 있지 못하고 147년에는 예장 태수로 좌천되었다.
예장태수가 되었을 때 세설신어에 따르면 서치를 만나고자 할 때 관원들이 모두들 부군께서 먼저 관청으로 납시기를 바라고 있었다고 했지만 진번은 주무왕이 상용이 사는 마을을 향해 수레에서 허리를 굽히느라 자리가 따뜻해질 겨를이 없다면서 내가 현자에게 예의를 차리는 것이 안될 것이 무엇이냐고 했다.
상서령이 되어 다시 중앙으로 복귀했다가 대홍려가 되었으며, 백마 현령 이운이 환제에게 환관을 함부로 후작으로 봉해서는 안된다고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투옥되고 이에 이운과 같이 죽기를 원한다는 글을 올리면서 두중도 투옥되었다. 진번은 양병, 목무, 상관자 등과 함께 이운과 두중에 대한 용서를 바라는 연명장을 써서 올렸다가 면직되자 향리로 돌아갔는데, 다시 초청되어 의랑을 거쳤다가 광록훈이 되었다.
159년에 환관들이 외척인 양기 일파를 제거하면서 환관들을 후대하자 이를 반대했지만 환제는 듣지 않았으며, 서치, 강굉, 원굉, 위저, 이담 등을 추천하거나 오관중랑장 황완과 함께 정치의 쇄신을 노렸지만 실패했다. 165년에는 양병의 후임으로 태위가 되는 것을 사양하면서 호광, 왕창, 이응 등을 추천했지만 환제가 허락하지 않아 태위가 되었으며, 166년에 대사농 유우, 정위 풍곤, 하남윤 이응 등이 중상시 소강, 관패 등의 환관들과 대립해 탄압받자 진번은 이들을 변호했다.
167년에 환제가 붕어하고 여러 관리들이 병을 핑계로 조회에 나오지 않자 문서를 보내 그들을 질책했으며, 이에 두태후(두묘)가 매우 감격해 고양향후로 봉하려고 했지만 이를 거부하면서 대신 태부, 녹상서사에 임명되었다. 명망이 높아 태학생들에게는 어떤 권력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람이라고 평가받았으며, 영제가 즉위하고 사예교위 이응이 죄를 범한 환관 장양의 동생을 주살해 옥에 갇혀 고문을 받고 처형당하게 되자 이응 같은 충신을 처형하면 안된다면서 무죄로 사면해야 한다고 상주해 사면받을 수 있게 했다.
168년에 두무와 함께 환관세력 제거를 모의해 중상시 관패소강을 죽였지만 섭정이었던(영제는 당시 13세) 태후의 동의를 얻지 못하자 (장락궁의)태후의 문서를 관장하는 환관세력인 장락상서 정삽을 체포, 고문해 조절, 왕보와 내통하고 있다는 진술을 얻어내었다. 하지만 두무가 잠시 휴가로 집으로 가자 장락궁 오관사 주우가 이를 다른 환관들에게 알렸고 조절과 왕보는 무리를 모아 궁문을 봉쇄하고 영제를 속여 피신시키고 두태후를 구금한 후 인수를 뺐었다.
두무는 조카인 보병교위 두소에게 달아났고 진번은 80여명의 병사를 이끌고 왕보를 꾸짖으며 승명문을 향해 돌격했다가 잡혀 살해됐다. 환관세력은 마침 흉노의 사자로 파견되었다 돌아온 장환을 속여 군사를 내주고 두무를 공격하게 했다. 두무의 병사들은 달아나거나 항복했고 두무와 두소는 자결했다. 두씨 일가 중 벼슬을 하던 이들은 모두 사형되었고 남은 일족들은 모두 교주 일남으로 유배가게 되었다. 두무와 연루된 호분중랑장 유숙, 전 상서 위랑, 시중 유유, 둔기교위 풍술 등도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