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흔

 

劉昕
생몰년도 미상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대방태수로 당시 사마의가 공손씨 세력을 평정하기 위해 고구려와 연합해 요동을 공격했는데, 경초 연간에 명제의 명으로 낙랑태수 선우사와 함께 은밀히 바다를 건너 낙랑군, 대방군을 평정했다. 이로 인해 여러 한국(韓國)의 신지들에게 읍군의 인수, 신지 휘하의 군장들에게는 읍장을 줬으며, 한(韓)은 그 풍속에 옷을 입고 책 쓰기를 좋아해 하호들도 군에 이르러 조알하면서 옷과 책을 빌려 스스로 인수와 옷과 책을 갖춰입은 자가 1천여 인이었다고 한다.
이후 239년에 대방태수가 유하로 변경되었는데, 그 사이에 기록대로 태수가 변경된 것인지 이름의 오기인지 알 수 없다.
충남대의 김수태 교수의 논문인 한성 백제의 성장과 낙랑, 대방군에 따르면 대방군이 중국의 권력 변화와 함께 영향을 받게 되어 경초 연간에 위나라가 몰래 대방, 낙랑을 접수한 과정을 알 수 있다고 하며, 군현 세력과 공손씨 정권의 연결을 차단하려는 것으로 위에서 배후 세력의 안정에 관심을 가졌기에 위의 군현에 대한 통제라는 목적이 중요했다면서 대방군과 낙랑군의 지위는 유흔이 선우사보다 먼저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당시 대방군의 비중을 짐작하게 해준다고 했다.
일본의 고고학자인 모리 고이치는 1985년에 유흔이 후임인 유하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