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사

 

鮮于嗣
생몰년도 미상
삼국시대 위(삼국시대)의 인물.
경초 연간(238년) 조위의 황제 조예의 명으로 사마의요동 공손씨 정권을 평정하기 위해 고구려 동천왕과 연합해 요동을 공격했는데 그때 유흔과 함께 각각 대방태수와 낙랑태수에 임명되어 은밀히 바다를 건너 낙랑군, 대방군을 평정했다. 이로 인해 삼한의 여러 신지들에게 읍군의 인수, 신지 휘하의 군장들에게는 읍장을 줬다. 삼한은 그 풍속에 옷을 입고 책 쓰기를 좋아해 하호들도 군에 이르러 조알하면서 옷과 책을 빌려 스스로 인수와 옷과 책을 갖춰입은 자가 1천여 인이었다고 한다.
후임으로는 유무가 낙랑태수가 되었고 이후 범양군수를 지내다가 장화를 추천해 태상박사로 임명되게 했는데, 장화가 232년생이고 약관의 나이부터 천거가 가능한 것을 고려한다면 251년 이후로 정시 연간에 범양군수를 지낸 것으로 보인다.
충남대학교 김수태 교수의 논문인 한성 백제의 성장과 낙랑, 대방군에 따르면 대방군과 낙랑군의 지위는 유흔이 선우사보다 먼저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당시 대방군의 비중을 짐작하게 해준다고 한 것으로 보아 낙랑군이 대방군보다는 지위가 낮았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