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순
1. 소개
남조의 제13대 군주이자, 제2대 황제이다. 시호는 성명문무제(聖明文武帝). 세륭의 아들.
2. 생애
877년, 아버지 세륭(世隆)이 죽자 그 뒤를 이어서 아들 융순[1] 이 즉위했다. 융순은 스스로를 대봉인(大封人)이라 칭했다.『자치통감고이』 ‘서운건(徐雲虔)의 『南詔錄』에 따르면 '남조의 별명은 학탁(鶴拓)인데 그 후손들은 또한 자신들을 ‘大封人’이라고 불렀다. 이는 봉(封)을 국호로 삼았기 때문이다.’ 라고 나온다. 즉 남조의 별칭이 ‘봉’이었기 때문에 추룡의 아들 융순은 봉국(封國)의 위대한 사람이란 의미로 ‘대봉인’을 자처한 것이었다. 융순은 정사를 보지 않았고, 사냥을 하거나, 술을 마시는데에 전념했다. 국사는 대부분 신하들이 맡았다.
같은 해인 877년, 영남서도절도사 신당(辛讜)이 타서 단강보(段琷寶)와 만나 남조에 화의를 청했다. 신당은 옹주(邕州)에서 많은 전투를 밤낮으로 하여 당나라가 많이 피폐해졌다며 부담을 덜하기 위해 화의를 청한다 했다. 그런데 남조는 그런 거 없다하며 서천(西川)을 약탈했다. 결국 당에서는 명장 고병을 보내 화의를 청하기로 했으나, 당시 현실에 안주하지 못한 신하들이 오랑캐라고 무시했다.
878년 12월에 남조에 사신으로 보낸 자굉(賈宏) 등이 가는 도중에 사망하였다. 당시 신당은 다리에 병을 앓고 있어서, 서운건이 대신 파견되었다. 이에 서천절도사(西川節度使) 최안잠(崔安潛)이 화친을 주장하는 고병을 탄핵하고, 남조와의 화친을 극렬히 반대했다.
최안잠은 최담(崔澹)의 의견을 좇으며 화친을 하는 것이 당의 수치라면서 남조가 당나라를 겁쟁이로 알고 있다며 좌시하느니 군사를 일으켜 대응해야 한다고 했다. 주전과 주화가 논쟁을 벌이는 동안에 일이 터졌다.최안잠이 상언하기를, “만은 새나 짐승의 마음을 품고 있어 예의를 알지 못합니다. 어찌 천한 노예로 하여금 귀한 주인을 섬기게 하여 국가의 대례(大禮)를 잃게 할 수 있겠습니까? 최담 등의 의논은 채택할 만합니다. 신은 청컨데 의정자(義征子)를 모집하여 10호를 1보(保)로 삼고 산동의 날랜 병사 6,000명을 징발하여 여러 주(州)에 주둔시킬 것을 청원합니다. 이렇게 5년을 계속하면 만을 노예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신당서 「남만전」
880년, 안남에서 반란이 일이나 절도사 증곤(曾袞)이 성에서 빠져나왔다. 제도의 군사도 긴급히 후퇴했다. 이때, 새로 부임한 서천절도사 진경선(陳敬瑄)이 당희종에게 남조와 화친하자는 상소를 올렸다. 당시 희종은 황소의 난(黃巢之亂)으로 장안이 점령되어 서천으로 물러가 성도에 머무르고 있었다. 결국 체면을 세우는 것보다 현실을 바라보아야 했기 때문에 희종은 종실의 딸을 안화장공주(安和長公主)[2] 로 삼아 남조에 시집보냈다. 융순은 재상 조융미(趙隆眉)와 양기혼(楊奇混) 그리고 단의종(段義宗)을 성도로 파견해 공주를 맞이하도록 했다. 그런데, 회남에 주둔하고 있던 고병이 양주(揚州)에 상언하여 이들 3명을 죽이도록 제안하니 희종은 그 의견을 따랐다. 재상은 독살당했고, 재상을 잃은 남조는 국격이 크게 훼손되었다.
2년 뒤에 남조는 다시 포섭 양기굉(楊奇肱)을 파견해 공주를 맞이했다. 그러자 진경선이 조서를 내려 양기굉에게 서한을 전하였다. '''“어가가 순행중이라 의물(儀物)이 아직 구비되어 있지 못하니 경읍(京邑)으로 환도할 때를 기다린 연후에 공주를 내려 보낼 것이다.”''' 하지만, 양기굉은 뜻을 받지 아니하고 직접 성도성까지 들어갔다. 남조와 당의 혼사는 아직까지 미스테리다. 신당서 희종기에 따르면 885년 희종은 장안으로 환도했다. 그런데 자치통감에서는 안락장공주를 남조에 출가시켜 당과 남조 사이의 혼사가 성사되어 있다. 이와 반대로 신당서 남만전에 따르면 장초(張譙)를 예회오례사(禮會五禮使)로 삼고 서운건을 부사로 임명하였으나 황소의 난이 평정되어 마침내 혼사가 중지되었다고 전한다.
897년, 융순이 붕어하고, 그 뒤를 아들 순화정(舜化貞)이 즉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