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소의 난

 


'''황소의 난(당말농민기의)'''
黃巢之亂(唐末農民起義)

Huang Chao Rebellion
'''시기'''
875년-884년
'''장소'''
강남 일대와 황하 유역
'''원인'''
당(唐) 조정의 가혹한 조세 정책
'''교전 세력'''


'''지휘관'''
황소
왕선지†
상양†
당희종
주온
이극용
왕탁
'''병력'''
병력 규모 불명
병력 규모 불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당(唐)의 반란 진압 성공.
'''영향'''
당(唐), 경조부를 제외한 대부분 지역을 상실.
5대10국시대 도래.
1. 개요
2. 황소의 난의 발단
3. 황소의 난의 전개
4. 황소의 난의 결말
5. 그 후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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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소의 난'''(黃巢之亂) 또는 '''당말농민기의'''(唐末农民起义)[1]는 중국 당나라 말기인 875년에서 884년 사이에 일어난 대규모 농민 반란이다. 이로써 무너져가던 당나라에 '''사형선고를 내린''' 사건이다. 앞선 안록산의 난과 후대의 이자성의 난과 함께 중화 제국의 수도를 점령한, 몇 안 되는 민중 반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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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에 입성하는 황소

2. 황소의 난의 발단


당시 당나라는 최후의 중흥군주라 불리는 선종의 사망 이후 국가 막장·멸망 테크를 타고 있었다. 선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의종은 반란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상황에서도 꿋꿋이 유흥을 즐겼으며 의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희종 역시도 암군의 길을 걷고 있으니 당연히 민심은 개막장. 반란이 끊이지가 않던 상황이었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서도 꿋꿋하게 당나라를 지탱해주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소금이었다. 지금이야 마트 가서 사먹는 게 소금이지만 그 당시 소금은 그야말로 '''금값 그 자체'''였다. 더군다나 안사의 난 이후 당나라는 소금 전매(소금의 국가적 독점 판매)에 몰두, 소금값의 30배 폭등을 이뤄내며 총재정 수입의 절반 이상을 벌어들이는 쏠쏠한 상황. 허나, 소금을 반드시 먹어야 하는 가난한 백성들은 가장 큰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고 이 상황 속에서 먹고 살기 위해, 일확천금을 위해 소금밀매업자들이 비밀결사의 형식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당연히 당나라는 재정수익을 위해 소금밀매업자를 강력히 처벌하기 시작했고, '''잡히면 사형'''이라는 강경처벌이 잇따르자 소금밀매업자들은 사생결단을 내리게 된다.

3. 황소의 난의 전개


마침 희종 원년에 대기근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리자 하남성산동성 접경 부근의 소금밀매업 대장이었던 왕선지(王仙之)는 실업자 농민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이윽고 이번 사건의 주인공, 황소산동성에서 호응하면서 반란군의 기세는 더욱 커진다. 그런데 둘의 군대가 하나로 뭉쳐 산동과 하남 일대를 공격하자 당나라군의 어그로는 최대치로 증가... 결국 둘은 군대를 나눠 각각 동쪽과 서쪽으로 진군하기로 하지만 서쪽, 즉 낙양을 향해 나아가던 왕선지는 당나라 중앙군의 강력함에 놀라 벼슬을 주겠다는 당나라에 항복했다가 다시 배반한 후 전사한다. 그리고 목숨을 부지한 채 황소에게로 도망쳐온 패잔병들은 황소 부대와 합류하여 그를 '''왕으로 추대했다'''.
황소의 군대가 하나로 합쳐져 다시 하남성 일대를 향해 진군하려 하자, 당나라는 즉시 낙양 일대로 수십만 대군을 소집하여 황소군을 포위섬멸하고자 한다. 황소는 이 정보를 듣자 '''"그럼 중앙군 없는 곳 치면 되지?"'''라는 심플한 생각으로 하남진군을 포기, 남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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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 반군의 진격로.
남쪽으로 광주(광저우)까지 이르렀던 황소군은 남부에 전염병이 돌자 이를 계기로 북상하고, 6년 간의 대모험 끝에 880년, 충천대장군(沖天大將軍) 황소는 60만 대군을 이끌고 동관(당나라의 수도 장안의 코앞)을 점령한다. 이렇게 되자 수도는 그야말로 아비규환. 관리들은 도망가고 희종마저도 성도로 피신하기로 결정한다.
며칠 뒤, 장안의 서문으로는 당나라 황제가 빠져나가고 동문으로는 백성들의 환호와 함께 황소가 무혈입성하는 기이한 풍경이 벌어진다. 수도 장안이 함락당한 것이다. 군기를 엄중히 하여 장안성의 민심마저 자기 것으로 만든 황소는 국호를 대제(大齊), 연호를 금통(金統)으로 하여 황위에 올라선다. 장장 7년 간의 대장정 끝에 그가 천하를 거머쥐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4. 황소의 난의 결말


황소군이 중국 남부를 휘젓고 있을 때, 아주 큰 실수 하나를 했다. '''바로 군사를 주둔시키지 않은 것.'''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애초에 황소의 군대는 당나라 주력군을 피해서 전국 일주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병력을 나누어 주둔시켰다면, 각개격파 당했을 것이었다. 애초에 제대로 된 군편제도 아니었기 때문에, 주둔병력이 흩어지거나 또 다른 왕을 자처했을지도 몰랐던 것이 현실.[2]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황소군이 떠나면 다시 관군이 찾아왔기 때문에 황소군이 장안에 눌러앉았을 땐 이미 사실상 포위상태. 사실 황소군은 계속 움직여야 유지되는 상황이었으며 수도인 장안을 점령했다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해서 그 자리에 눌러앉은 것은 전략적 실책이었던 셈이다.
황소는 매우 당황한다. 더군다나 경제적 기반마저 갖지 못한 상황이라 황소의 제국은 너무나도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당나라 정부가 각 지역에서 급히 병사들을 징발하자 결국 안 되겠다 싶었던 황소는 그의 심복, 주온(朱溫)을 출병시켜 관군을 격퇴해보고자 한다. 하지만 주온은 당나라에 깔끔히 투항. 정세는 극도로 악화되고 투르크계 사타족 출신의 장수 이극용(李克用)을 비롯한 토벌군에 의해 결국 황소군은 3년 간의 항쟁 끝에 장안을 내버리고 탈주한다. 이들은 하남성 일대로 파고 들어가 투쟁을 계속했지만 884년 진주(陳州, 하남 회양)에서 관군에게 대패하고 태산 낭호곡(狼虎谷)에서 결국 황소가 자결하면서 대란은 끝을 맺는다.

5. 그 후


관군에 큰 힘이 된 주온은 희종으로부터 전충(全忠)이란 이름을 하사받고 여러 절도사직을 겸하게 되었으며 양왕(梁王)으로 책봉되었다. 또한 장안 탈환의 일등공신인 이극용은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국가는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했고 결국 반란 진압 23년 후인 907년, 주전충은 황제에게 양위받아 후량을 건국하면서 당나라는 멸망하게 된다.

6. 여담


  • 최치원토황소격문을 지었다는 것이 바로 이 황소의 난이다. 하지만, 그 토황소격문은 절도사 고변의 이름으로 나왔고, 그 효과는 본문을 읽어보자.
  • 한동안 구글에서 '황소의 난'을 검색하면 첫머리에 황소 사진이 나왔으나, 현재는 황소의 난을 묘사한 그림으로 나온다.
  • 몇몇 사람들은 이때 발해에서 당 정부에 지원군을 보냈다면 공식적으로 고려국왕이라는 책봉호를 받고 공식적으로 고구려 계승국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 거라고 주장한다. 이게 어느정도 가능성이 있는게 황소의 난 당시 황제는 역대 당 황제 중에 최악의 암군인 희종이었다. 그리고 실질적인 권력은 환관들이 잡고 있었는데, 아마 발해가 지원군을 보내면서 뇌물로 환관을 구워 삶았다면 토벌의 공로로 고려왕 작위를 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1]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쓰는 표현. 일반 중국인에게 '황소의 난'이라고 하면 '백제부흥운동'을 '부여풍의 난'이라고 부른 것처럼 무슨 사건인지 잘 모른다. [2] 이는 초한지 시대를 개막한 진승 오광의 난 때 그대로 나타났었는데, 혈통이 매우 중시 됐던 전근대시절에 민초에 불과했던 진승과 오광은 권위라는 게 없었고 군사를 나누는 족족 장수들이 독립을 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