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말룡

 


'''이말룡'''
[image]
(3기의 모습)
'''이름'''
이말룡[1], 이선달[2]
'''직업'''
회사원
'''가족'''
슬하 [3] 2남 1녀
'''좋아하는 것'''
가족
'''싫어하는 것'''
기영이와 기철이가 속을 썩이는 것
'''성우'''
'''오세홍'''[4][5] (1~3기)
박영재[6] (4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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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기타


1. 개요


검정 고무신의 등장인물. 이기영, 이기철, 이오덕의 아버지. 해병대 예비역 병장 출신이며, 이는 삼척동자 편에서 확인되고 김달룡 상사가 선배님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확고히 자리잡았다.[7][8][9] 나이는 42세(1928년생), 키는 168cm.[10] 가끔 엄할 때도 있지만 자상하고 따뜻한 아버지의 표본이다. 무역회사에 다니고 있다.

2. 상세


보릿고개 시련기 에피소드에서는 자신이 다니던 무역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실직하고 이곳저곳 일자리를 알아보느라 굉장히 고생한다.[11] 애니에서는 전체적으로 상냥하지만 철없는 행보도 약간 있다. 할아버지가 새로 산 자전거를 타다가 땡구의 똥에 미끄러져 넘어졌는데 할아버지 걱정부터 하지 않아서 욕을 먹는다던지, 기영이와 기철이의 장래가 걱정된다며 만화책을 압수하고는 도리어 그 만화책을 자기가 읽는다던지, 돼지꿈을 꿔서 복권에 당첨되는 생각만 한다던지...[12] 원작에서는 이게 더 심해서 좀 한심하거나 지나친 면도 많이 보이는 편이다. 도둑이 대놓고 들어와도 무서워서 아무것도 못해놓고 땡구에게 화풀이를 한다거나[13] 두 아들에게 밥만 축내는 식충이들이라는 말을 2번 이상은 하는 등 화를 꽤 잘 내는 편이다. 아내외에 여자랑도 얽히는 가끔 경우가 있는데, 애니에 나온 구미호에게 홀린 것은 요괴니까 둘째치더라도 원작의 마을 팔씨름 대회 때 다방녀 미스 최와 엮인다던지... 참고로 이 에피소드에서 같이 왔던 아내도 아닌 미스 최의 응원버프로 우승했다. 그래도 항상 가족을 생각하고 노력하는 좋은 아버지다. 4기 들어서는 비중이 많이 줄었으며, 회사에서 늦게 돌아온 모습이나 회사일 때문에 피곤해하는 모습만 보인다. 아빠의 돼지꿈 편에서는 돼지꿈을 꾼 일로 이번 월급을 받지 않고 복권 10장을 구해 당첨에 대한 자만감에 빠져 마지막에 꽝 크리를 먹고 한동안 몸져 누웠고, 기철이는 차력사 편에서는 회사에서 지쳐 고단된 모습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이지만 기철이가 얻어온 약 덕에[14] 기운을 차리고 모두 방학숙제 편에서는 3일 안에 숙제를 끝내야 하는 기영이와 기철이에게 나폴레옹의 대사를 읊어주면서 숙제를 할 수 있도록 자극했다. 원작에서는 허세가 심할 때도 종종 있는데, 어떻게 보면 기철이의 특유의 허세끼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원작에서는 할머니가 기철이를 보고 아버지가 어릴 때 성격과 똑 닮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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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었을 적 모습.

3. 기타


  • 원작에서는 기영이가 성인이 된 시점에서는 사망했다고 나온다.[15][16]
[1] 검정 고무신 코믹스 15권에서 나온다.[2] 극장판 추억의 검정고무신에선 이선달로 나온다.[3] 원작 한정으로 미군에게 초콜릿 받으러 갔다가 실종된 진짜 장남인 이기만 포함.[4] 노하라 히로시와 더불어 아버지 연기의 대표작이다. 4기가 방영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별세해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했다.[5] 오랫동안 이종구 성우가 맡았다고 나와있었는데, 이는 잘못된 정보다.[6] 아들 역을 맡은 박지윤, 오인실과 동기지만 나이는 박영재가 더 많다. 오세홍 성우의 별세로 인해 교체되었다. [7] 다만 옥의 티와 같은 고증오류적인 설정이 많다. 우선 해당 회차에서 도승이네 삼촌과 기영이 아버지도 월남전에 참전했다는 언급이 있었다. 근데 이 만화 배경이 1960년대 말이라는 것을 보면(한국군이 참전한 베트남전은 1964년에 일어났고, 한국군 파병은 1965년에 이루어졌다.) 도승이네 삼촌은 그렇다 쳐도 해병대 제대 이후 총 한 번 다시 못 잡고 10년 이상(왜 그런지는 예비군/대한민국 문서와 1.21 사태 문서 참조. 간단히 말하자면, 저 사건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본격적으로 예비군 제도와 조직이 굴러가기 시작했다. 따라서 제대 시점이 1950년대 초반인데다가 작중에서 40대 아저씨 이말룡이 예비군 훈련을 받았을 리가 없다.) 순수 민간인으로 살았을 기영이 아버지가 월남전에 참전했을 가능성은 제로다.(여담으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막바지인 1954년 1월에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군 1개 사단을 전투가 벌어지던 베트남 지역에 파병하려고 했으며,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패배하고 약 1달이 지난 뒤에는 미국과 협의 하에 3개 사단을 파병하려고 했으나 각각 미국과 프랑스가 거절한데다가 그 해 7월에 월맹과 프랑스군 사이에 맺어진 휴전 협정으로 인해 전쟁이 끝나면서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설렁 미국과 프랑스가 이승만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한국군 사단을 파병한다고 해도 이말룡이 베트남에 갈 수 없었던 것이, 당시 해병대는 육군과 달리 상비사단이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제1해병사단이 창설된 건 이 제안을 한 이듬해인 1955년이다. 결정적으로 디엔비엔푸 전투의 결과가 실제 역사와 다르게 나오지 않은 이상 프랑스는 그 해에 전의를 잃고 철수했을 것이 뻔했다. 즉, 한국은 괜히 힘만 뺐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독재정권이 제정신이 아니었다고는 해도 제대 이후 10년 넘게 총을 못 들어본 30대 후반(월남 파병 시작 시점)~40대 초반(작중 시간대)의 모집병 출신 아저씨를 대부분이 20대인 초급장교와 중사 이하 사병들과 함께 월남의 전쟁터로 보내서 싸우게 하지는 않았다. 그건 인명경시 이전에 군사적인 면에서 봐도 비효율적이라는 걸 이미 높으신 분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다들 알다시피 당시 정권을 잡은 박정희와 그 밑에서 일하는 정치인들과 관료들의 절대다수가 1961년 5월까지만 해도 국군 고위 장교로 복무하던 이들이었다.) 아마 제작진이 6.25 전쟁과 헷갈렸을 가능성이 높다. 1928년생인 기영이 아버지는 1950년 6.25 전쟁 당시 만 22세인지라 이미 해병대에 복무 중이거나 군대에 징병이 될 연령대이기 때문. 나이대나 병 전역인 것을 보면 월남전이 아닌 6.25 참전용사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8] 그리고 당시 기영이 아버지가 복무할 당시(50년대로 추정) 국군에는 병장이라는 계급이 없었다. 병장(과 상병) 계급이 신설된 건 병진급령이 개정된 1957년이었으며, 그 전까지의 한국군 사병 계급은 미군식 사병 계급체계를 따라 이등병-일등병-하사-이등중사-일등중사-이등상사-일등상사-특무상사였다.(참고로 50년대 대한민국 해군과 해병대의 부사관 명칭은 삼등병조-이등병조-일등병조-병조장이었는데, 이는 구 일본 제국 해군의 하사관 계급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물론 육해공군 모두 1962년이 되면 하사-중사-상사로 부사관 계급의 이름과 체계가 바뀌게 된다.) 여기서 현대의 병장에 해당하는 계급은 하사로 (참고로 이등중사와 삼등병조는 현재의 하사에, 일등중사와 이등병조는 중사에, 이등/일등상사와 일등병조는 상사에, 특무상사와 병조장은 원사에 해당된다. 다만 일본군의 준위/병조장은 해당 계급의 이름만 준위이며, 실제로는 미군과 한국군의 원사 대우를 받았다. 그러니까 일본군에서는 준위 계급을 국군과 미군처럼 장교에 준하는 권한을 가진 간부가 아니라 단순히 하사관들의 수장인 계급으로 인식했다는 것.), 이렇게 설정했으면 깔끔했을 것이다.[9] 또한 한 가지 더 문제가 있는 것이 바로 복무기간이다. 1953년에 정전 협정이 맺어진 이후 대한민국 국군에 복무하는 육해공 병들의 복무기간이 3년으로 정해졌다. 따라서 이말룡이 전쟁 후반기인 1953년에 대한민국 해병대 병으로 입대해서 참전한 뒤에 살아서 휴전을 맞이했다면 사고를 당하거나 하사관이나 장교로 신분전환을 하지 않은 이상 1956년에 만기제대해야 한다. 문제는 앞서 설명했다시피 한국군에서 병장 계급이 도입된 때는 1957년이라 이말룡이 제대할 시기와 맞지 않다. 실제로 건군기 혹은 한국전쟁 당시에 징집되거나 모집된 병들은 전후 복무기간이 정해지고 난 후에 하사관이나 장교로 신분 전환한 인원을 제외하면 1956년까지 제대해야 맞다. 게다가 이말룡이 춘심과 결혼 전에 찍었던 사짐의 시점은 1953년 봄, 그것도 3월로 추정되는 이른 봄인데다가 머리숱도 갓 제대한 군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풍성했다. 즉, 이말룡의 제대 시점은 아무리 늦어도 1952년 9월 정도라는 말인데 전쟁 당시 한 명 한 명이 아쉬운 마당에 건군기 내지 전쟁 초반부터 복무했던지라 나름 짬도 높고 실전경험도 많은 고참병을 쉽게 제대시켜주었을지는 의문.(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전쟁 중에는 명확한 복무기간이 없었다.) 물론 해당 문제는 1954년 이후에 입대했다고 하면 해결될 문제이기는 하나, 그러면 제작진이 강조하고 싶었던 참전용사라는 설정 역시 폐기해야만 한다. 정전협정 발효 이후에 입대한 징집병이 한국전쟁에 참전했을 리가 없기 때문.[10] 원작판 기준[11] 양말을 팔다가 깡패들 때문에 허리를 다쳤고, 액션영화 엑스트라를 하다가 주먹을 생으로 맞아 얼굴이 망가졌다(감독이 맞는 연기를 너무 못한다고 구박하자 그냥 배우가 휘두르는 주먹에 직접 맞기로 한다.). 심지어 사극 엑스트라 때는 엉덩이 보호대를 깜빡하고 하지 않아서 곤장을 생으로 맞았다. 그래도 결국에는 기철이와 같이 신문 배달을 하던 어느 회사 사장 덕분에 취직했다.[12] 복권 당첨에 대한 자만감에 빠졌다. 그래서 미리 받은 월급으로 설탕, 카스테라, 고기 등을 사먹고 직원들한테 쏘고 돈을 엄첨 많이 썼다. 물론 마지막에는 다 꽝이어서 한동안 몸져 누워야 했다. [13] 나중에는 도둑이 깨워서 인사까지 한뒤 갈 정도로 호구처럼 당하다 결국 땡구가 빡쳐서 잡았다. 결국 모든 것이 까발려진 뒤에는 아내에게 어떻게 강아지만도 못하냐는 소리를 들으며 깨갱하기도 했다...[14] 4기에서 기철이가 좋은 모습을 보여준 몇 안되는 에피소드 중 하나다.[15] 그 이야기가 나온게 아내가 손녀인 지현이한테 이기영이기철의 어릴적 얘기를 해주는 에피소드이며 마지막 장면에 영정 사진이 나온다. 참고로 기영이는 1960년생이다. 그리고 저때 당시 성인임이 인정되는 최소한의 나이는 만 20세였다. 즉, 80년대 초에 50대 초반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말이 되기 때문에 지금은 물론이고 당시 시점으로 봐도 평균 수명도 채우지 못 하고 단명했다고 볼 수 있다.[16] 다만 애니판에서는 이것보다 오래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일례로 4기 마지막화에서 이말룡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온 가족이 모였을 당시에 봉숭아 학당에서 연변총각으로 분한 강성범이 나오는 장면이 있었기 때문. 이때가 2001년 4월 중순 ~ 2002년 7월 하순이었는데, 보통 제사는 고인이 죽은 다음 해에 치뤄지기 때문에 이말룡의 사망 시점을 최대한 늦추면 2001년이 된다.(참고로 이 경우 이말룡은 74세에 죽은 것이 된다. 장수까지는 아니어도 그 당시 평균 수명은 채우고 죽은 셈.) 다만 해당 회차에서 나온 등장 인물들의 태도를 보면 첫 제사는 아닌 걸로 보인다. 이를 보아 사망한 지 꽤 된 것은 확실하기는 하다.(아마 80년대 후반이나 90년대 초반에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이후에 죽었다면 기영이네 가족들이 이말룡을 떠나보낸 것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짧기 때문에 저런 분위기일 수 없다.) 게다가 원작의 어두운 이야기를 애니에서까지 구현하라는 법은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