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엔비엔푸 전투
프랑스어: La bataille de Diên Biên Phu
영어: Battle of Dien Bien Phu
한자: 奠邊府戰鬪 (전변부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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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54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베트민[3] 과 프랑스 제4공화국간의 전투. '''식민지 베트남이 지배자 프랑스를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이 전투로 인해 프랑스는 엄청난 타격을 받았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후폭풍을 감당하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이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는 해체되고, 모든 프랑스군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했다.[4] 베트남은 마침내 프랑스의 지배에서 해방되어 역사적인 독립을 맞이하게 되었다.[5]"그것은 코끼리와 호랑이의 싸움이 될 것입니다. 만일 호랑이가 가만히 서 있다면 코끼리가 그 막강한 엄니로 호랑이를 짓누르겠지요. 그러나 호랑이는 가만히 있는것이 아닙니다. 낮에는 밀림에 숨어 있고 밤에 나타납니다. 호랑이는 코끼리의 등에 뛰어올라 코끼리의 가죽을 찢어놓고 다시 어두운 밀림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그러면 코끼리는 천천히 피를 흘리며 죽어갑니다. 이것이 인도차이나의 전쟁이 될 것입니다."
1946년 9월 11일, 호치민이 <뉴욕타임스> 통신원 데이비드 쇼에브런(David Schoenbrun)과 한 인터뷰에서
전술적인 면에서는 육로로 다른곳에 연결되지도 않은 분지 위에 요새를 만들고 정예병들의 전투력과 오직 항공보급만으로 버텨보려던 프랑스군에 대항해, 인력으로 수만명 병력의 보급품과 화포들을 정글과 산속으로 운반하고 프랑스군의 눈을 피해 수개월동안 포위하여 공격한 베트남 군의 눈물겨운 사투가 눈여겨볼만하다.
2. 배경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승전한 프랑스는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해 독립을 요구하는 호치민의 베트민[6] 과 싸우고 있었다. 2차대전 종전 이후 베트남에 진입한 중국 국민당 군대를 프랑스 정부가 협상을 통해 철수시키고 군대를 투입해서 인도차이나 반도를 장악한 프랑스는 베트민을 도시지역에서 몰아내고, 호치민과 베트민은 산악지대로 숨어들어갔다. 1947년 10월 프랑스군은 기갑부대를 북부 산악지대로 투입하는 레아작전(L'opération Léa)을 감행하지만 별 성과를 못내고 철수했다. 이후, 베트민은 북부 산악지대에서 서서히 힘을 회복했고, 1949년 국공내전이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의 승리로 끝나자 중국공산당은 프랑스에 맞서 싸우고 있던 호치민의 베트민을 지원했다. 1950년 9월 중순 베트민 부대들은 국경지역 전체에 걸쳐 프랑스의 취약 시설에 대한 일련의 기습을 개시했다. 프랑스군은 패퇴했고[7] 베트민군은 홍 강 삼각주 지역 전체를 손에 넣은 뒤 1950년 12월 베트민은 총공격 계획까지 세웠다.
물론 화력면에서는 프랑스군이 압도적이고 최신식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1951년 1월에는 하노이를 탈환하기 위해 육군 4개 사단을 투입한 베트민의 공세를 미국으로 부터 지원받은 네이팜탄을 사용하여 막아냈고 총공세에 투입됐던 베트민군은 수천명의 사상자만 발생했고 1951년 2월 베트민군의 총공세는 실패로 끝났다.[8] 그러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정글전과 게릴라전의 특성상 전투에서는 이겨도 전쟁 전반적인 측면에서는 야금야금 영토가 축소되던 상황이었기에 프랑스군 또한 상황이 진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베트민은 호아 빈 지역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시작으로 1953년에는 북부 지역을 상당부분 장악하고, 베트남과 중국의 국경지대를 완전히 장악했다.
1953년 5월 8일 극동프랑스원정군(CEFEO) 총사령관으로 부임한 앙리 나바르(Henri Navarre) 장군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10월 하노이 남쪽에 위치한 푸뇨꽌(Phu Nho Quan)을 장악하기 위한 공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베트민은 그곳의 전력을 비운 상황이였고 프랑스군은 얻은 게 하나도 없었다. 이에 나바르는 라오스와 월남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인 디엔비엔푸를 선정하여 프랑스 육군 공수부대 6개 대대(제1, 6식민지공수대대, 제1샤쇠르공수연대 2대대, 제8타격공수대대, 제5베트민공수대대, 제1외인공수대대)를 투하해서 지역을 점령한 후 요새를 건설하고, 해당 요새에 최대한의 병력을 모아 베트민군의 보급로를 차단한 후 적을 유인하여 싸우기로 하였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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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엔비엔푸 위치 및 프랑스군의 전술도이다.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지역은 베트남의 주요 도시와 거점들로 부터 한참 떨어진 오지로, 사실상 육상 접근로가 없다시피 했다. 즉 평상시 보급도 쉽지 않지만 만에 하나 포위 당한다면 구하러 갈 방법도, 도망칠곳도 마땅치가 않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이 지역을 평정하지 못하면 전황이 타개하기 힘들다 보고 항공보급과 공수부대만으로 요새를 건설 하게 된다.
프랑스 육군이 이런 전략을 세우게 된 이유는 다시 한번 베트민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줘서 전세를 되돌릴 필요가 있었으며,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요새를 거점으로 해서 빈약한 무장과 장비를 가진 베트민을 대상으로 전투를 벌인다면 화력에 강점이 있는 프랑스 육군이 쉽게 우세에 설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멍청하게 요새에 닥돌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적의 후방 거점이나 교통로의 요지에 병력을 공수강하시켜서 아군 요새를 만들면 적은 보급로 확보를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요새에 돌격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3. 프랑스군의 전개
▲ 디엔비엔푸 전투 당시 프랑스군 배치도. 비행장을 중심으로 8개의 지원지점(PA, points d’appui)이 설치되었다.
주요 방어거점
PA 위게트(Huguette) : 제2외인 보병연대 1대대,
PA 도미니크(Dominique) : 제3알제리 척후병연대 3대대,
PA 클로딘(Claudine) : 제1외인 공수대대, 제8타격 공수대대,
PA 도미니크2(Dominique2), PA 엘리안(Éliane) : 제4모로코 척후병연대 1대대
원격 저지선
PA 베아트리스(Béatrice) : 제13외인반여단 3대대 (초반에 함락)
PA 가브리엘(Gabrielle) : 제7알제리 척후병연대 5대대 (초반에 함락)
PA 안마리(Anne-Marie) : 제3타이대대 (초반에 함락)
PA 이자벨(Isabelle) : 제1알제리 척후병연대 2대대(1954년1월 제3외인 보병연대 3대대 증원)
3.1. 시작
일단 프랑스 육군은 해당 작전을 위해 현지 주둔 병력은 물론이거니와 본국에서 지원 가능한 거의 모든 병력, 장비, 물자를 총동원했다. 그 이유는 계속 밀리는 상황에서 엉성하게 끌어모은 병력만으로는 당장 적지 한복판에 공수강하한다는 것 자체부터 무리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공수부대를 주축으로 한 정예부대가 결성되며, 그 숫자도 다 합치면 투입병력만 16,000명, 지원병력까지 합치면 2만명에 육박했다.
그리고 이들을 위한 장비도 최대한 확보했다. 당장 요새를 건축하기 위한 각종 장비는 물론이거니와, 포병도 M2 / M101 계열 105mm 곡사포와 M114 155mm 곡사포를 각각 28문과 4문이나 확보했고, 심지어 전차도 경전차지만 M24 채피를 분해해서 수송기로 실어와 현지에서 조립하는 방법으로 10대를 확보했다.[9][10] 여기에 더해서 요새를 지원할 항공전력도 미군에게서 공여 받은 SBD 돈틀리스와 F8F 베어캣을 중심으로 270여대를 배치했으며,[11] C-47과 C-119등 수송기도 100대를 확보했다. 기지내에는 당시로선 최신 기술이었던 헬리콥터도 부상자 수송용으로 3대 있었다.
이런 식으로 만반의 준비를 갖춘 침공부대는 1953년 11월 20일, '''작전명 카스토르(L'opération Castor)''' 라는 이름으로 2개 대대규모의 공수부대(제6식민지공수대대(6 BPC), 제1샤쇠르공수연대 2대대(II/1 RCP))가 현지 공수강하를 시킨다. 공수작전은 성공하였고, 이를 시작으로 순식간에 4,195명의 병력을 공중으로 수송하는데 성공한다. 물론 이 지역에 주둔했던 베트민 2개 중대의 반격으로 프랑스군 34명이 사망하고 13명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베트민 부대는 100여명 이상 전사하고 디엔비엔푸에서 축출되었다. 프랑스군은 즉시 이 지역에 있던 구 일본군 비행장을 확장하고 이를 지킬 요새를 건설했다. 더불어, 비행장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반경 3km 이내에 8개나 되는 전초진지를 탄탄하게 건축하고 병력을 배치했다.[12] 중심부에는 사령부가 위치한 엘리안, 도미니크, 클로딘, 위게트 기지가 있었고 외곽으로는 안마리, 가브리엘, 베아트리스, 이자벨 총 4개의 전초기지가 있었다.[13]
이 때까지 발생한 손해는 지극히 미미했으므로 프랑스군은 한때지만 이미 작전이 성공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3.2. 베트민군의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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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실 디엔비엔푸는 사방이 산에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라 한번 고립되면 거의 탈출이 불가능한 지역인데다가, 애초에 공중에서 병력을 투하해서 만든 요새라 처음부터 프랑스가 지배하는 지역과의 '''육상교통로가 없었다.''' 그리고 육상교통로를 만들려고 해도 애초에 디엔비엔푸가 하노이 서쪽 300km에 위치한 국경지대이므로 만들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그래도 베트민군의 화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던 프랑스는 병력의 열세와 보급의 문제를 압도적 화력과 항공수송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베트민군은 다수의 대공포를 포함한 포병화력을 모아놓고 있었다. 베트민군은 박격포와 대공포를 하나하나 분해해 인력으로 정글과 산을 돌파한 후 프랑스군 모르게 요지에서 재조립하는 방식으로 프랑스군 화력에 대응하고 활주로와 항공기들을 파괴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나는 계속해서 부하들에게 하루만 더 기다리면 미군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 마르셀 비제아 중령[14]
[15]출처: 스티븐의 전쟁영화보고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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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디엔비엔푸에 있는 요새와 비행장은 잘 건설해놓은 상태[16] 였으나, 요새와 방어진지들의 방어력이 썩 좋지가 않았다. 철근 콘크리트가 필요한 양의 1/15도 도착하지 않아서 핵심적인 벙커 몇개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진지가 나무와 흙으로 만들어진 수준이었다. 때문에 요새와 비행장을 수비하기 위해 외곽에 조성한 8개의 진지는 불안한 방어력을 가진 상태였으며, 특히 요새를 내려다보는 고지대에 배치된 병력과 장비의 수는 극단적으로 적었다. 하물며 원래부터 프랑스군이 생각한 요새의 방어력은 게릴라군이 운영할 수 있는 소형 박격포에 대응하여 기동전으로 적을 섬멸하기 위한 것이었지, 정규군이 운영하는 대구경 곡사포의 집중사격을 견뎌낼 수준은 아니었다.
그래서 프랑스군이 초기 작전을 마치고 한숨을 돌리고 나니 '''베트민군에게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다. 베트민의 보응우옌잡 장군은 이미 프랑스가 결전을 시도할 것이라 예상하고 전력을 비축해 놓고 있었고, 프랑스군의 디엔비엔푸 투입을 파악하자 3개 사단을 디엔비엔푸로 집결시켰다. 다수의 병력을 험준한 산악지역으로 이동시키기 위해 보응우옌잡 장군은 육군 제351공병포병(Engineering Artillery)사단에게 디엔비엔푸로 가는 도로 82km를 확장시키라고 명령했고, 사단 병력뿐만 아니라 민간인들까지 가세한 결과 디엔비엔푸로 통하는 확장 도로가 완성되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베트민은 여성이 포함된 25만명을 민간인들을 동원해서 무기와 물자를 디엔비엔푸로 집결 시켰다. 중기관총, 대공포, 야포 같은 중장비들은 트럭과 우마차 등으로 야간에 인근까지 수송한 뒤, 부품 단위로 분해하여 사람이 짊어지고 산 정상까지 가져와서 조립하였다. 군수품 또한 철마여단 등 민간인들이 자전거를 개조하여 수백 킬로그램에 달하는 군수물자를 운반하였다.[17]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 집념을 보여준 셈.'''
한편 보응우옌잡 장군은 디엔비엔푸로 3개 사단을 모으는 동시에, 1개 보병연대가 증원된 1개 사단을 북쪽 200km 지점에 있던 라이차우로 파견해 프랑스군 2,100명이 디엔비엔푸로 증원되기 전에 격파했고, 이들 역시 디엔비엔푸 포위에 합류하였다.
프랑스군이 투입된지 약 2개월이 지나고 1954년 1월 말이 되자, 베트민군은 프랑스군 포병의 배치를 파악할 목적으로 간헐적으로 포병 공격을 가하는 동시에 모든 방향에서 프랑스군의 정찰을 방해했다. 그러면서도 베트민군은 5개 사단, 5만여 명의 대군을 집결하는 동안 섣부른 공격을 삼갔고, 프랑스의 예상과는 달리 프랑스군의 4배에 달하는 포병과 방공 전력을 투입하였다. 그리하여 베트민은 마침내 '공격자 대비 방어자의 승리 비율'인 3대 1의 상황을 만들었다.
베트민군이 공격을 미룬 이유에는 병력의 집결 외에도 날씨 문제도 있었다. 베트남은 대략 11월부터 4월까지는 건기이고, 5월부터 10월까지는 우기이다. 비가 많이 내리는 우기에는 항공 폭격의 난이도가 높아지고 수송 능력도 저하될 것이라는 점을 노린 것이다.
3.2.1. 1차 공격 (1954년 3월 13일 ~ 15일)
1954년 3월 13일 첫 공격으로 PA 베아트리스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고, 베트민은 분당 50발의 포를 발사했다. 베트민의 공격이 시작하자마자, 압도적 포병 화력에 의해 프랑스 육군 제13외인반여단 3대대가 방어하던 북동쪽 PA 베아트리스 방어진지가 순식간에 함락되었다. 당시 훈련 부족으로 장거리 곡사 능력이 형편없었던 베트민 포병은 대신에 땅굴을 파고 그 속에 숨은 채로 직사 화력을 쏟아부었는데, 수적 열세에 있던 프랑스 포병은 엄폐된 적 포병에 대해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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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인 3월 14일 오후 8시에도 압도적인 포병 화력의 지원을 받은 베트민의 파상공세가 정예 제7알제리 척후병 연대 5대대가 방어하고 있던 북쪽 PA 가브리엘 진지에 가해졌고, 이 알제리 부대는 밤새 적의 공격을 저지하다가 압도적인 화력과 병력에 밀려 다음 날 새벽 2시30분에 철수했다가 한 시간 뒤 반격에 나서 12회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 끝에 중과부적으로 결국 철수했다. 15일 알제리 부대를 증원하기 위해 PA 클로딘에 있던 제1외인 공수대대 3, 4중대와 제5베트민공수대대가 M24 전차를 앞세우고 반격을 시도했으나 공격은 이내 저지되어 알제리 부대와 합류하지 못하고 결국 철수했다. 이렇게 북쪽의 고지대를 장악한 베트민군은 극심한 전력손실로 재정비를 위해 참호를 파고 방어로 전환함과 동시에 비행장에 정밀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활주로가 파괴됨에 따라 집중공세 3일째인 3월 15일 비행장이 폐쇄되었다. 이에 따라 프랑스군의 병력과 물자에 대한 항공지원은 낙하산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었다. 그나마도 조종사들이 대공포에 맞을까봐 높은 고도에서 투하하여 회수율은 극히 적었다.
3.2.2. 소강상태 (1954년 3월 15일 ~ 30일)
물론 프랑스군도 놀고 있던 것은 아니라서 전투 초기에는 매일 10회 이상의 공습을 퍼붓고, 보급물자는 물론 하루 100명 이상의 증원병력을 낙하산으로 투입하는 등 지속적인 증원을 했다. 하지만 워낙 베트민군의 숫자가 많고, 정글과 산악이 합쳐진 지역에서 적이 정확하게 어디 있는지도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관측과 정찰이 제대로 안된 상황에서는 답이 없었다. 게다가 베트민군이 투입한 중화기의 숫자도 많아서 요새의 화력으로는 대응하기도 힘들었다. 평소 베트민군 포병화력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던 프랑스군 포병지휘관, 샤를 피로 대령은 결군 압도적인 적 포병화력에 대응하지 못한 점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 3월 16일 수류탄으로 자살했다.[18][19] 그에 당장 대공포만 80여문 이상이었으므로 공습하는 프랑스 공군 항공기에 대해 맹렬하게 대응하는 바람에 전투가 진행되면서 프랑스측 항공 전력도 날로 축소되었다.[20]
3월 16일 오후 하노이 프랑스극동원정군 총사령부는 제6식민지 공수대대(6 BPC)를 디엔비엔푸에 증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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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4년 3월 전투상황. 북쪽의 외곽기지 3개가 전부 베트민 수중에 넘어갔다. 결국, 중앙의 4개 기지와 남쪽의 이자벨 기지만 남아서 베트민의 총공세를 맞게 되었다.
전투 개시 몇일만에 북쪽의 3개 진지가 모두 베트민에게 넘어가자 프랑스군에게 남은 것은 중심부의 4개 진지[21] 와 남쪽에 멀찍이 떨어진 1개 진지였다. 베트민은 3월 23일 남부지역 PA 이자벨과 연결된 도로를 완전히 차단하여 PA 이자벨은 병력증원 없이 단독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베트민은 잘 방어되고 있던 남쪽 진지를 본진과 차단시킨채 본진에 맹공을 퍼부었고, 프랑스군은 위태위태한 상황에서도 간신히 붕괴를 막아내었다. 3월 28일 PA 클로딘에서 제8타격공수대대와 하노이에서 증원된 제6식민지공수대대가 반격을 개시하여 적의 공격 기세를 꺾었다.
3.2.3. 2차 공격과 진지전 (1954년 3월 30일 ~ 4월)
3월 30일 베트민군의 강력한 공격 준비사격 후 동쪽 진지(PA 도미니크, 엘리안, 이자벨)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 개시되었다. 압도적인 적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은 극심한 피해를 감수하여 밤새 싸웠다. 31일에는 반격에 나서 일부 빼앗긴 진지를 탈환했다. 이 전투에서 제8타격공수대대와 제6식민지공수대대, 외인부대의 적극적인 전투태세로 디엔비엔푸에서는 공수부대와 외인부대만이 끝까지 싸웠다는 신화를 남겼다. 베트민군은 4월 4일까지 공세를 지속했지만 프랑스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엄청난 손실을 입고 결국 공세를 포기한다. 공격군 사령관 보응우옌잡 장군은 소극적이고 무능한 지휘관을 즉각 교체하고 재정비에 돌입했다.
본진 주변의 개활지에서 공세를 퍼붓느라 1주일간 많은 인명피해를 본 베트민군은 이제 전략을 바꾸어 참호를 파면서 접근해 왔고, 이후 전투는 제1차 세계 대전 시대의 참호전 양상으로 흘러가게 된다. 이 기간 동안 베트민 측은 뚜렷한 성과없이 발생한 엄청난 사상자와 의약품의 부족으로 사기가 심각하게 저하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측 역시 보급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었다. 프랑스군은 진지전 틈틈히 화염방사기로 역공을 가해 적 참호와 중화기 진지를 유린했다. 프랑스군은 탄약이 부족했고, 나중에는 총검과 수류탄만으로 싸우기도 했다. 보충병이 없어서 부상병들이 차출되었고, 밤낮없이 지속되는 전투로 과로사하는 병력들이 많았다. 이 와중에도 외인부대는 특유의 용맹성에 걸맞는 불굴의 의지로 처절하게 버텼다. 가장 유명한 일화는 제6식민지 공수대대의 한 소총분대원 10명이 8일 밤낮으로 전투를 벌이다가 결국 최후 2명의 생존자만 남았을 때 이들은 그때까지도 최초의 진지를 계속 고수하고 있었다. 마침내 4월 말 베트민은 서북쪽 진지 일부를 점거하고 비행장 영역 대부분에 화력을 퍼부을 수 있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프랑스의 낙하산 공수조차도 착륙 지점을 제대로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22]
3.3.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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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로 넘어가자 베트민은 카츄샤 다연장로켓마저 구해와서 파상공세를 퍼부었고, 프랑스군은 TOT 사격을 통해 적의 대열을 붕괴시키면서 저항했지만 병력과 물자 모두에서 막바지에 몰려 있었다. 프랑스군 최후의 병력증원은 5월2일~5일까지 중대단위로 축차 투입된 프랑스 육군 제1타격공수대대(BPC)의 절망적인 공수 투입이었다. 막바지인 5월 6일에는 베트민이 맹랑한 심리전까지 벌였다. 프랑스군의 사기를 꺾기 위해 프랑스 노래를 불렀는데 다른 노래도 아닌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노래였다. 정말 사면초가의 뜻과 딱 맞아 떨어지게 된 것.
결국 5월 7일 저녁 프랑스군의 모든 진지가 함락되었고, 현장 지휘관이었던 북서부작전단(GONO)장, 카스트리 준장[24] 은 하노이를 향해 '''전투가 끝났습니다'''라는 최후의 무전을 송신하였다. 하노이의 사령부는 모든 물자와 무기를 파괴하고 항복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기지에 남아있던 11721명의 프랑스군이 포로로 잡혔고, 전장을 이탈하여 정글로 도주한 150여명의 탈영병만이 훗날 구조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 중 대부분은 현지 사정을 아는 현지인들 출신이었고, 백인 탈영병 중 구조된 것은 24명 뿐이다.
포로중에 4436명의 부상자들은 적십자가 올때까지 최소한의 응급처치만이 제공되었고, 이들을 제외한 약 8천명의 포로들은 수백 km 떨어진 여러 포로 수용소로 도보로 이동해야 했다.[25] 살아남은 프랑스 포로들은 이후 프랑스군의 폭격을 막기 위한 인간 방패로 이용되었고, 훗날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고작 3290명 뿐이었다. 약 2개월간의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약 만여명의 피해가 발생하는 동안 베트민군도 23,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피해와 관계없이 승리한 것은 확실했다.
포로로 잡힌 프랑스군은 포로 교환 당시 그야말로 굶주리고 영양실조로 뼈만 앙상하게 남은 반면에 베트민 포로들은 제법 잘 먹어서 대조를 이뤘다. 프랑스는 포로 학대라고 항의했지만 베트민 측은 당연히 코웃음치며 무시했다. 11,721명의 포로 중 8,708명이 프랑스인이었고 나머지 3,013여명은 프랑스군을 위해 싸운 베트남 현지인 병사들이었는데, 이들의 생사여부는 알려진 것이 없다. 만약 이 3,013여명 대부분이 생존했을 것으로 가정하고, 동시에 송환대상에서 제외되었을 것으로 가정한 뒤 계산에서 제외시키면 생존률이 좀 더 올라가기는 한다.[26]
디엔비엔푸에서 포로로 잡혔다가 생환했다고 주장한 베트남인이 한 명은 있었다. 바로 남베트남의 팜반푸(Pham Van Phu) 장군으로, 어떻게 생환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으며 따로 검증도 되지 않았다. 이 사람은 후에 1975년 북베트남군의 대공세 때 2군단을 말아 먹은 후, 대세가 기울어지자 따로 기록도 남기지 않고 자살했기 때문에 정확한 정황은 영원히 알 수 없다. 의외로 남베트남은 20년이나 존속했는데도 스스로 남긴 기록들이 그리 많지 않아, 미국 등으로 도망치지 못한 장교들에 대한 자료는 매우 적다.
4. 결과
이로 인해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철수하기로 한다. 아직 병력상으로는 프랑스군이 더 많았지만, 이미 디엔비엔푸에서 정예병력과 물자, 장비를 몽땅 날려먹은 후라서 현지에 남아있는 병력은 전투의지가 바닥을 뚫을 정도로 크게 떨어지는 베트남 현지민이 주축이 된 민병대밖에 없었으며,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만한 물자와 장비, 자금이 크게 부족했기 때문이다.무장 게릴라 단체로 시작해 정규군까지 도달하는 모든 단계를 밟은 非유럽권 독립운동이 현대 서양 점령자와의 대규모 회전(會戰)에서 승리를 거둔 최초의 전투.
"the first time that a non-European colonial independence movement had evolved through all the stages from guerrilla bands to a conventionally organized and equipped army able to defeat a modern Western occupier in pitched battle."
- 마틴 윈드로(Martin Windrow)[27]
프랑스는 이 전투로 커피, 고무, 주석, 향신료와 사탕수수에서 추출한 설탕 등 여러 자원을 착취하던 중요한 식민지를 잃게 된다.
미국은 미 공군의 B-29 수백대를 동원하여 북베트남군 지역에 융단폭격을 감행하는, 실질적으로 선전포고 없는 참전에 해당하는 일까지 검토했지만 1954년 5월에 디엔비엔푸 요새가 베트민에게 함락되면서 이미 때늦은 일이라 포기해 버린다.[28] 프랑스의 합창의장 폴 엘리(Paul Ely)는 미국 합참의장 아서 래드퍼드(Arthur Radford) 제독과 논의하여 소위 '독수리 작전(Operation Vauture)'을 감행하기로 결정했었다. 독수리 작전은 "오키나와와 필리핀에 주둔한 미국 공군기지의 전투기를 출격시켜, 디엔비엔푸 요새에서 공격을 감행하고 있는 보 응우옌 잡 장군의 군대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공습을 가한다"는 것이었다.[29]
일설에는 이 폭격에 원자폭탄까지 사용을 고려했다는 얘기가 있다.[30] 위에서 언급한 이른바 독수리 작전을 논의했던 펜타곤 관리들은 독수리 작전 계획을 입안하는 한편 원자폭탄 2~3발을 사용하는 방안도 논의했다는 것이다. 당시 공군참모총장이던 네이선 트와이닝 장군이 후일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54년 7월 21일, 스위스 제네바서 열린 회담을 통해 휴전협정이 조인, 프랑스군의 철수와 함께 북위 17도선을 휴전선으로 설정하고 합계 8km의 비무장지대를 설치하며, 2년내에 남북통합 선거를 실시한다는 합의가 나온것으로 8년여에 걸친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그 막을 내린다.래드퍼드 합참의장과 나는 전술핵무기 3발 정도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도 그것이 좋은 아이디어였다고 생각한다. 상당히 고립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한 발만 떨어뜨려도 기선을 제압할 수 있다. 반대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 다음 남은 빨갱이들을 쓸어내면 프랑스군은 ‘라마르세예즈(프랑스 국가)’를 연주하면서 말짱하게 디엔비엔푸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빨갱이들은 이럴 것이다. ‘아, 저놈들 우리한테 또 그럴 거야. 조심해야겠어.’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443
하지만 프랑스는 1949년, 일본군의 통치 때도 등장했던 바오다이 황제를 수반으로 한 꼭두각시 정권인 베트남국(1949년~1955년)을 세워놨었고 이를 정통 베트남 정권이라 주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베트남에서 손을 뗀 프랑스의 뒤를 이어 미국이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다.
이후, 북베트남군의 기본 전략은 '''전선 구분 없이 무차별로 사방에서 공격하며 적을 포위 섬멸하는 것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래서 이아드랑 전투에서 북베트남군의 유인에 걸려 적지 한 가운데 공중강습한 미군은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자신감이 붙은 보응우옌잡 장군은 디엔비엔푸 전투의 경험을 되살려 1968년 구정 공세가 시작되기 10일 전인 1월 21일 케산을 포위했다. 이 때문에 베트남 전쟁에서 제2의 디엔비엔푸가 재현될 거라고 예견됐던 '''케산 전투'''가 일어났다. 당시 케산을 포위한 북베트남군 부대 중에도 이 디인비엔푸 때 참전한 부대가 있었고, 서방 기자단 사이에선 보응우옌잡이 베트남군 총사령관 겸 국방장관으로서의 위치가 아니라 현장에서 케산 전투를 직접 지휘하는 거 아니냐는 설레발까지 있을 정도였다. 이에 대해선 보응우옌잡이 ' 우리는 현장 지휘관들의 능력을 신뢰한다.'라며 직접 부인했다.
그러나 미군의 상상을 초월하는 항공지원과 포격으로 오히려 북베트남군을 개박살 내버리며 포위를 풀어버렸다. 미군 지휘부는 이 전투를 '승리'라고 선전했으나 오히려 미국 국민들의 반전정서를 높이는 역효과만 냈는데, 이렇게 어렵게 승리를 했는데도 얻은 게 없었고 얼마 뒤 미군 스스로 케산에서 철수를 해버렸기 때문이다. 한국군을 상대로도 비슷한 전술을 구사했지만 짜빈동 전투에서 중대전술기지와 악과 깡으로 우주방어를 시전하는 1개 중대 규모의 한국 해병대를 상대로 북베트남군 1개 연대가 압도적으로 큰 피해를 입은 채 패퇴당해야 했다.
디엔비엔푸 전투로 베트남이 사실상 독립을 쟁취하자, 프랑스의 여타 식민지에서도 거세게 독립운동의 불길이 타올랐다. 베트남에서 군사력을 소진하고, 막대한 전비 투입으로 경제가 엉망진창이 된 프랑스는 식민지들의 독립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1956년 튀니지를 시작으로 1960년까지 17개 아프리카 국가[31] 들이 프랑스의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하였다. 사실상 프랑스 본토의 일부로 간주했던 알제리는 끝까지 지배하고자 하였으나 알제리민족해방전선과의 참혹한 알제리 전쟁에서 연전연패를 거듭하여 그 여파로 프랑스 본국에서 제4공화국 정부가 붕괴되고[32] 제5공화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1962년에 프랑스는 알제리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4.1. 프랑스군의 패인
- 도를 넘은 자만과 적에 대한 괄시
- 너무 급하게 진행된 카스토르 작전
- 복잡한 인적구성과 일원화되지 않은 지휘체계
여기에 디엔비엔푸 요새의 총지휘관 카스트리 대령은 기병 출신으로 애초에 방어전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고, 그가 지휘해야 하는 부대는 기병부대가 아니라 공수부대와 포병부대였다. 이 때문에 공수부대 지휘관들은 "당신이 공수부대에 대해 뭘 알아?"라는 태도로 일방적으로 카스트리의 명령을 무시했다. 이런 상황에서 카스트리가 지휘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가 없었다.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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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2년, 피에르 쇤도르페르 감독(Pierre Schoendoerffer)이 도널드 플레젠스 주연으로 만든 영화 디엔비엔푸(Diên Biên Phú ,1992)가 있다. 프랑스와 베트남의 합작으로 프랑스 감독과 배우들이 베트남 올로케이션으로 만들었다. 프랑스군의 시각에서 디엔비엔푸의 몰락을 보여주는데 '용감하게 싸운 프랑스만세!'가 아니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병사들의 허망한 모습과 그안에서 벌어지는 갈등[33] 을 현실적으로 그리고 있다.[34] 그러니 빵빵쏘고 부시는 액션을 기대했다면 접어두자. 50년대 프랑스군의 장비와 복식을 제대로 고증한 수작으로 고증덕후들은 눈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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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공수부대[35] 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 '로스트 커맨드(1965)'에서도 초반 배경으로 등장한다. 국내에서는 과거 개봉시 영화 주인공 이름인 '라스피기'로 개봉하기도 했다. 잠깐이긴 해도 디엔비엔푸 전투의 양상과 처절함을 상당히 살린 편으로, 증원군으로 공수 투입된 프랑스 공수부대원들이 전부 베트민군 장악지역으로 떨어져 그대로 몰살당하는 장면도 나온다. 또한 영화의 주 배경인 알제리 독립 전쟁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배하는 사건에서 용기를 얻은 알제리 인들에 의해 더욱 가속된 것으로 나온다.
- 베트남에서 제작된 FPS "7554(게임)"에서는 게임 타이틀 자체가 디엔비엔푸 전투가 끝난 1954년 5월 7일에서 따온 만큼 이 전투가 마지막 미션으로 등장한다.[36] 미션 제목의 영문명이 "Global Impact(국제적인 충격)".
- 프랑스 공군 소속의 여자 간호사 주느비에브 드 갈라르(Geneviève de Galard)는 이런 지옥 같은 현장에서 환자들을 치료하는 살신성인의 모습으로 '디엔비엔푸의 천사'로 불리며 모든 프랑스군인들의 존경을 받았다.[37] 군인들의 배려로 개인 벙커를 사용할수 있었다고 하며 그녀의 헌신에 감동한 지휘부는 무전으로 상부에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신청하여 그녀에게 수여하였다. 디엔비엔푸 전투가 베트남의 승전으로 끝난 후 베트남에서도 그녀의 지위와 기개를 인정하였고 결국 살아남아 고국 땅을 밟았다.
- 2019년 12월 길찾기 출판사에서 보응우옌잡 장군이 집필한 책 두권을 번역하여 디엔비엔푸 라는 이름으로 책을 출간했다.# 전투를 지휘했던 당사자의 입장과 생각을 알 수 있다는 점과 국내에 최초로 출간된 디엔비엔푸 전투 관련 서적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 프랑스군은 전투식량처럼 만든 휴대용 포도주인 비노젤을 마셨다. 이는 부족한 보급에서 식수 문제를 해결하고, 병사들 사기를 높였다. 이와 관련되어 공수보급된 비노젤이 적진에 떨어지는 일이 있었는데 이때 열받은 프랑스군이 적진에 떨어진 비노젤을 탈환할 결사대를 모집하자 너도 나도 지원했다는 일화가 있다.
- 당시 미국 정부는 한국의 이승만 정부가 전투 개시 2개월 전인 1954년 1월에 자청한 한국군 전투사단의 파병도 재검토 했었다. 이승만 정부가 내세웠던 파병 명분은 한국전쟁에서 유엔군으로써 도와줬던 프랑스에 대한 보답과 동남아시아에서의 반공정신 고취 및 강화였다. 즉 이승만 정권은 자신의 주도아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병력을 파견하면 반공투쟁을 강화하고 동시에 앞으로 미국과의 군비 강화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이런 이승만 정부의 파병 제안을 내부 의논 끝에 정중히 거부했다.
- 그런데 놀랍게도 프랑스군으로 참전한 한국인이 몇 명 있다.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가한 프랑스군 부대들은 한국전쟁에 파병되었다가 바로 이동하여 전투에 참가했는데, 당시 프랑스군 부대에는 한국인 노무자와 카투사와 유사하게 프랑스군 부대에서 복무한 한국군 병사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 중 일부가 현지 입대 방식으로 프랑스군 외인부대에 입대하거나 부대를 따라 인도차이나로 갔으며, 대략 3명 정도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1명이 풀려났다는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