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겸

 


1. 개요
2. 생애
2.1. 충청도의 의병장
2.2. 송유진의 난에 연루되다


1. 개요


조선 중기의 의병장. 1594년 송유진의 난에 연루되어 취조를 받다가 사망했다.

2. 생애



2.1. 충청도의 의병장


이산겸은 이지함의 서자였다. 실록에 따르면, 이지함이 처가 아들을 낳은 것을 보고 가족들을 데리고 섬으로 들어가 길러서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또한 이지함에게는 적자 셋과 서자 하나가 있었는데, 큰 아들 산두(山斗)는 거인(據仁)을 낳은 뒤 사망했고, 둘째 아들 산휘(山輝)는 호랑이에 물려 죽었으며, 셋째 아들 산룡(山龍)은 열두살 때 역질(疫疾)로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지함의 자식들 중 장성한 이는 서자 이산겸 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후에 이산겸이 송유진의 난에 연루되어 취조받았을 때, 이산겸의 동생 이산두도 끌려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본명은 천두(天斗)였는데 산겸의 동생인 연고로 산두라 불리웠습니다. 뜻이 같지 않으면 부자 사이에도 모르는 것인데 비록 동생이라 하더라도 다른 집에서 사니 그 가운데 있었던 일은 형세상 알기 어렵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27년 2월 14일자 기사

이에 대해 류성룡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산두는 이미 죽었는데 산겸의 동생으로 와서 갇힌 자도 산두라 하니 심히 괴이합니다.

선조실록 선조 27년 2월 27일자 기사

이산겸은 보령에서 살다가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6월 의병장 조헌의 막하에 들어가 진중에서 종사하다가 조헌이 금산 전투에서 전사하자 흩어진 군졸들을 수습하여 평택(平澤)·진위(振威) 사이에 주둔했다. 그해 11월, 사간원이 의병의 활동에 대해 보고하면서 이산겸을 언급했다.

변란이 생긴 이후로 인심이 흩어졌는데 의사(義士)들이 한번 창의(倡義)하자 군민(軍民)이 향응하여 국가가 오늘날까지 있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의병들의 힘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비록 피난하여 자기만을 보호한 사람도 없지는 않지만 관가(官家)에 유익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더군다나 의기를 분발하고 힘을 다해 한결같은 마음으로 적개심(敵愾心)을 발휘한 자이겠습니까. 근래 조그만 폐단 때문에 조정에서 숭장(崇奬)하는 뜻이 점차 처음만 못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사기(士氣)를 붙잡아 세우는 도리이겠습니까.

충청도 의병장 이산겸(李山謙)은 강개스럽고 의기가 있으니 의병들이 그를 장수로 삼은 것은 반드시 중망(衆望)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변사에서 허통(許通)하자고 아뢴 것은 가장(嘉奬)하는 뜻만이 아니고 그 명칭을 중하게 여기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처음 의병을 모집하여 종군(從軍)한 자 및 계본(啓本)을 가지고 간 자들은 모두 허통하였는데 유독 이 사람에게만 아직껏 은명(恩命)을 아끼고 있으니 참으로 근왕(勤王)하는 무리들이 이로 인하여 사기가 꺾일까 두렵습니다. 대적을 멸하지 못한 지금 가벼운 일이 아니니 해조의 공사(公事)대로 시행하소서.

선조실록 선조 25년 11월 16일자 기사

선조 26년(1593년) 11월, 류성룡은 명나라 장군 왕필적(王必迪)이 이산겸을 호평했다며 이산겸을 중국 사신단에 대동시킬 것을 건의했다.

이지함(李之菡)의 서자(庶子) 산겸(山謙)이 충청도 의병장이 되어 2월경에 개성부(開城府)에 왔다가 왕필적(王必迪)·오유충(吳惟忠)을 만났는데, 왕(王)이 신(臣)에게 서간(書簡)보내어 산겸을 크게 칭찬하기를 ‘어떻게 이처럼 간담(肝膽)이 충성스럽고 의리 있는 사람을 배양해냈는가?’ 했고, 신도 만났는데 극력 강화의 불가함을 말했었습니다. 이는 좋은 사람입니다. 신은 이런 사람을 데리고 가야 한다고 여깁니다.

선조실록 선조 26년 11월 21일자 기사

그러나 이산겸은 의병을 모아놓고는 일본군과 한 차례 교전을 하지 않은 채 병량과 무기를 모아놓기만 해 세간의 의심을 샀다.

2.2. 송유진의 난에 연루되다


선조 27년(1594년) 1월, 송유진(宋儒眞)이 창의병(唱義兵)을 자처하며 충청도 천안, 직산 일대에서 세력을 모아 반란을 도모했다가 직산에 살던 홍응기, 홍난생, 홍우, 신계축, 홍찬, 김응추, 홍각 등 7명의 유지들에게 붙잡힌 사건이 발생했다. 충청 병사 변양준(邊良俊)은 사건 경과를 보고하면서 이산겸이 이 일에 연루되었음을 알렸다. 이에 비변사는 선조에게 이산겸을 체포할 것을 청했다.

보령(保寧)에 사는 이(李)씨 성을 가진 사람은 이산겸(李山謙)인 것 같습니다. 산겸은 일찍이 의병(義兵)에 투탁하여 거느린 군사가 자못 많았으나 한 사람의 왜적도 체포한 적이 없었습니다. 지난해 중국 사신을 만나기 위해 개성(開城)에 와 있었는데 그의 사람됨을 본 이들의 말에 의하면 말솜씨가 상당히 능란했다고 합니다. 그 뒤 호서(湖西)에서 온 사람들이 하는 말에 따르면 산겸이 모집한 군대가 아직도 그대로 있는데 산속에 쌓아 놓은 군량과 무기 또한 많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체포하면 뇌옥(牢獄)에 굳게 가두고 반복하여 단서를 추열(推閱)할 것은 물론 무기의 거처도 일일이 추문하여 수취(收聚)해다가 관군을 위하여 사용하게 할 것으로 아울러 하유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27년 1월 17일자 기사

이후 송유진은 끌려와 문초를 받으면서 이산겸이 자신과 가담한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천일(天日)[1]

이 조림(照臨)하시니 소신이 어찌 감히 반역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겠습니까. 동모자(同謀者)는 많습니다만 적도들이 모여 있는 곳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우도(右道)의 적괴(賊魁)는 바로 이산겸(李山謙)인데 얼굴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중략)

정월 5일 아산(牙山) 여라항(汝羅項) 근처에서 말탄 사람 3명이 나를 불러서 ‘우리가 충청도를 총령(總領)하고 있다. 이 일을 맡긴 16인 중에 네가 가장 잔열(殘劣)하다.’ 하고는 광교산(光敎山)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하인(下人)에게 물어보니 노일개(盧一凱)라고 하였습니다. 소신이 ‘직산과 천안에서는 군사를 모을 수가 없다.’고 하였더니, 일개가 ‘우리 아버지가 천안 군수(天安郡守)였기 때문에 천안에 인재가 없다는 것은 내가 일찍부터 알고 있는 바이다.’라고 하고, 격문(檄文)은 이산겸(李山謙)의 글이라고 하였으며, 11월의 체문(帖文)은 바로 홍근이 군사를 일으킬 적에 쓰던 것이고, 기타 이름 없는 통유문(通諭文)에 쓰인 인신(印信)은 속리산의 적괴가 쓰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윤 11월의 체문은 바로 김천수(金天壽)가 지은 것인데 보령(保寧) 이씨(李氏)라고 압서(押署)하였으며, 이미 민망(民望)이 정해졌다는 말은 호조 정랑이라고 일컬은 자가 한 말입니다. 호조 정랑은 성명이 이서(李序)라고 합니다만 그 명자(名字)는 분명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홍근이 시종 적과 동모하였다가 지금 고변(告變)하였으니 어찌 모를 이치가 있겠습니까. 홍근에게 물어보면 적괴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선조실록 선조 27년 1월 24일자 기사

하지만 선조는 다른 죄수들의 공초를 살핀 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적이 이른바 청계산이다, 가야산이다 한 것은 허장 성세로 사람들을 공동시키기 위한 말인 것 같다. 이산겸이 괴수라고 하지만 송유진이 진짜 괴수이다.

그 후 이산겸이 잡혔다는 소식을 접한 선조는 "산겸이 일찍이 의병장이었으므로 용렬한 사람이 아닐 듯하여 뜻밖의 환란이 있을까 두려웠는데, 이제 체포하였으니 진실로 다행이다."라며 안도했다. 이후 선조는 난을 진압한 홍우, 홍근 등을 궐정으로 불러들어 물었다.

너희들이 이미 역도들을 많이 체포하였으니 그 공이 매우 크다. 당초 적중(賊中)에 들어갔던 것은 추론(追論)하지 않을 것이니, 너희들은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적괴와 적정(賊情)을 솔직하게 말하라. 시종(始終)의 곡절을 듣고 싶다. 유진 위에 또 괴수가 있는가? 두 개의 인신(印信)은 누가 만들었는가? 하나는 찾아내었으나 다른 하나는 없는데 어느 곳에 두었는가?

홍우가 대답했다.

신이 적중으로 들어가기 전의 일은 모릅니다. 인신 하나는 송유진이 만들었지만 또 하나는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적중에는 달리 왕래한 사람이 없었고 오직 박 정자(朴正字)라고 칭하는 자가 늘 산에서 왔다고 하면서 빈번히 왕래했습니다. 이른바 서목(書目)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습니다. 저들은 사람들을 위협하여 따르게 하는 것을 일삼고 있었으니 저들 스스로 말을 만들고 스스로 답변하는 것인지를 어찌 알 수 있습니까. 이산겸에 대해서는 의병의 일로 인하여 그 명자(名字)는 들었으나 왕래하면서 서로 내통했느냐의 여부는 실로 아는 바가 없습니다. 노일개(盧一凱)도 모르겠습니다. 대개 유진의 흉측한 정상은 그 군사가 10명이면 1백 명이라고 하고 1백 명이면 1천 명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신이 홍우·홍난생·홍응기(洪應沂)와 서로 모의를 하여 체포하였습니다.

다음날 선조가 송유진에게 압슬형을 가한 후 추문하자, 송유진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역적 모의는 오원종과 홍근이 하였습니다. 원종이 나에게 ‘군사 1천 명을 데리고 경성을 포위하고 서서 3일간 통곡하면 임금이 반드시 허물을 고칠 것이다.’ 하였고 조보(朝報)와 기타 문서를 원종이 매양 가지고와서 보여주었습니다. 정월 2일 이번에 중국 사신이 가지고 온 칙서(勅書)도 가지고와서 ‘중국에서도 우리 나라를 그르다고 한다.’ 하였습니다. 원종은 단지 승지 조원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가지고 올 수 있었다고만 말했을 뿐 조원이 주었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홍근이 나에게 ‘체문(帖文)은 바로 이산겸이 지은 것이다. 천안의 의병 장사준(張士俊)은 바로 장핵(張翮)의 아들인데 그도 대적(大賊)은 바로 산겸이라고 했다. 경성의 내응인은 통사(通事) 윤복은(尹福殷)이다.’ 하였으며, 원종은 윤충은(尹忠殷)이라고 하였습니다.

원종은 나에게 ‘경성이 허술하다. 임금이 있는 곳은 모두 울타리로 둘러쳤으니 2백 명의 군졸만으로도 해볼 수가 있다. 그러나 중국 장수가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정문(呈文)하려 하는데 너의 아비 택종(澤宗)과 네가 화어(華語)를 대강 아니 네가 가서 이 일을 전적으로 맡으라. 그리고 반드시 갑오일(甲午日)에 청계산으로 오라. 경성을 범할 때에는 모든 군기(軍器)를 상자 속에 숨겨 가지고 부인을 말에 태워 싣고서 경성으로 들어가게 해야 된다. 홍근이 음양(陰陽)을 잘 알기 때문에 갑오일로 택일하였다.’ 하였습니다.

원종은 경성을 범할 적에 먼저 수원과 용인의 군사를 데리고 들어가려 하였는데, 용인은 그의 어미의 고향이고 수원은 그가 살고 있는 곳입니다. 직산의 조희성(趙希聖)은 군기의 제조를 감독하였고, 적당(賊黨)은 도훈도(都訓導) 봉유(奉柔), 유학(幼學) 윤훈갑(尹訓甲)·윤계갑(尹戒甲), 충의위(忠義衛) 이삼성(李三省), 수문장(守門將) 배억산(裵億山), 유학 고계남(高季男)·고중남(高仲男)·곽인(郭仁), 내금위(內禁衛) 곽대남(郭大男)이고, 군량을 조달하는 사람은 천안의 별감(別監) 김응신(金應臣)과 청주(淸州)에 사는 조관(朝官) 김충남(金忠男)이고, 홍우(洪瑀)·홍난생(洪蘭生)은 좌우장(左右將)이 되고, 나는 홍근(洪瑾)과 함께 문서 차지(次知)가 되었습니다. 이산겸을 만나보고자 했으나 만날 수가 없었고, 노일개(盧一凱)라는 사람은 만나보았습니다. 승려 일현(一玄)의 말에 의하면 가야산의 적괴는 얼굴이 얽고 수염이 없는 문사(文士)라고 하는데, 일도(一道)가 모두 여대로(呂大老)라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 만든 화가 아니고 거적(巨賊)의 꾐을 받아서입니다. 거적은 산겸인데 밤에 사람을 보내어 결박하였습니다.

이에 선조는 오원종에게 압슬형을 가했지만 자복하지 않자 낙형을 가하게 했으나 역시 자복하지 않자 분노를 터트렸다.

이들이 칙서를 보고서 역모할 생각을 내었으니 원종의 사람됨이 매우 흉악하다.

장운익도 맞장구를 쳤다.

죄인에게 압슬형을 가하면 장(杖)을 참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역적처럼 참아 내는 자는 아직 있지 않았습니다. 매우 흉악합니다.

이후 선조는 역모를 꾸몄음을 실토한 송유진 등을 참수하여 거리에 효수하게 했다. 하지만 선조는 송유진의 진술에 의문을 표했다.

송유진은 이산겸·노일개·여대로를 모두 괴수라고 하였는데 적괴가 어찌 3인이나 된단 말인가?

이에 유춘복을 형신하게 하며 이산겸과 노일개에 대해 진술할 것을 명하자, 유춘복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군사를 일으켰다면 신은 돌격장(突擊將)이 되었을 것이고 또 변희(卞喜)·정천기(鄭天機)와 변희의 아우로 이름을 홍작(弘鵲)으로 고친 자도 돌격장이 되었을 것인데 들어와 경성을 포위하고 동궁(東宮)[2]

을 세웠다면 좋게 되었을 것입니다. 노일개에 대해서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산겸은 길삼봉(吉三峯)이라고도 일컫는데 이산겸과 이산해(李山海)는 섬에 있습니다.

그러나 선조는 유춘복이 고문을 받느라 정신이 어지러워 횡설수설하고 있는 점을 간파하고 더이상 물을 것 없다며 참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류성룡이일이 역모 사건을 핑계로 너무 많은 사람들을 잡아들인다고 보고했다.

무릇 역옥(逆獄)을 다스릴 때는 반드시 초사(招辭)에 나온 자라야 체포하여 문초하는 것이 상례인데, 이번에 이일(李鎰)은 군관(軍官)을 나누어 보내 각각 들은대로 잡아 가둔 자가 매우 많습니다. 의거할 만한 단서가 없을 뿐만 아니라 민심이 소요스러우며, 큰 옥사의 체모에도 또한 매우 온편치 못합니다. 최급(崔岌)까지도 산겸(山謙)이 알고 지내던 집이라 하여 여러 날 갇혔고, 그 밖에 처자를 대신 가둔자도 있는데 모두 온당치 못합니다. 이미 갇힌 사람들을 갑자기 풀어줄 수야 없겠지만 이후로는 범연히 보고 들은 의심이나 한두 번 왕래했다는 연고로 함부로 잡아 가두지 말게 하소서.

선조는 유성룡의 요청대로 이일이 함부로 잡아간 자들을 풀어주게 했다. 그 후 2월 6일에 이산겸이 도착하자, 선조는 친히 그를 국문했다. 이산겸의 진술은 다음과 같았다.

신은 보령(保寧)에 사는 서얼로서 임진년 6월에 스스로 의병장 조헌(趙憲)에게 들어가 진중에서 종사하다가 조헌이 패하여 죽자, 그의 휘하 병사들이 신이 일찍이 막하(幕下)였다고 하여 흩어진 군졸들을 수습하게 하였으므로 군사를 평택(平澤)·진위(振威) 사이에 주둔시켜 놓고 건의 대장(建義大將) 심수경(沈守慶)에게 절제를 받았습니다. 이듬해 계사년 5월에는 중국군의 패문(牌文)에 의거하여 파병(罷兵)하고 집으로 돌아왔다가 건의 부장(建義副將)이 전지를 받들고 전령(傳令)하며 영남으로 내려가라 하기에 곧 25명을 거느리고 경상도로 내려갔습니다.

그후 파병하고 돌아왔다가 충청 감사의 공문(公文)에 의하여 공주(公州) 마곡사(麻谷寺)에 결진(結陣)하였으며, 11월에 상소하고 파병하면서 군량(軍糧)과 군기(軍器)를 감사에게 바쳤습니다. 도원수(都元帥)가 전령하기를 ‘모든 의병은 이미 파했건 아직 파하지 않았건 간에 싸우는 곳으로 뽑아 보내라.’ 하기에 신도 50명을 정밀히 뽑아 먼저 보내고 신 또한 은진(恩津)으로 가서 봉점(逢點)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의병이 하나도 모이지 않았기에 신의 생각에 혼자 내려가서는 당해내지 못할까 염려되었으므로 동궁(東宮)을 호위하려 하다가 전라도의 병사를 모집하는 곳에 자원해볼까 하여 전주(全州)·담양(潭陽)을 거쳐 김덕령(金德齡)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정월 15일에 중로에서 충청도에 도적이 크게 일어났다는 말을 들었으나 어떤 도적인지를 몰랐는데 저물녘에 적계(嫡系)로 4촌인 도검찰사(都檢察使) 이산보(李山甫)를 찾아가 만나보니, 산보가 ‘충청의 적을 사람들이 모두 너라고 생각하는데 네가 지금 왔으니 너는 살 길이 있겠다.’ 하였습니다. 신은 무군사(撫軍司)에 직접 나타나고자 하여 드디어 좌의정을 가서 보았고, 또 병조 판서를 보고서 말하기를 ‘상소로 직접 아뢰고자 하나 그 도적의 일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 다른 사람의 일이라 지휘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충청 감사가 신을 수금(囚禁)할 때에도 또한 분명히 말하지 않고서 군기를 바치지 않았다는 혐의로 가두었습니다. 이는 대체로 도적의 초사에서 나왔으니 분명히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송유진(宋儒眞)의 얼굴은 전혀 알지도 못하고 그 성명 또한 들어보지도 못하였습니다. 신이 연소한 서얼로 의병을 거느렸으므로 필시 이 때문에 신의 이름을 듣고 끌어댔을 것입니다. 신의 집 문서를 수색해 보아도 전혀 의심스러운 것이 없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상소를 지어 옷 안에 품고 무군사 앞에서 목을 매려 하였으나 이미 도적의 초사에 나왔는데 도피하면 임금을 배반하는 사람이 되겠고 늙은 어미를 버리고 죽으면 어버이를 저버리는 사람이 되겠기에 궐하(闕下)에 나아가 조용히 죽음의 길로 나아가려 하였습니다.

선조는 이 진술을 듣고 놀라며 물었다.

이 사람은 무예를 익힌 사람인가? 말투가 졸렬하지 않다.

유성룡이 답했다.

신이 동파(東坡)에 있을 적에 산겸이 의병으로서 소신(小臣)을 와 보고 겸하여 중국 장수를 보았는데 왕필적(王必迪)이 보고 칭찬하였습니다.

선조는 이산겸이 역적이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충청 감사는 이 사람이 분명히 적의 우두머리로서 조금도 의심할 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무엇을 가지고 그렇게 말하였는지 모르겠다. 만약 단지 저 도적이나 그의 공초(供招)에만 의거한다면 참으로 증거할 만한 것이 없다. 역적은 무거운 형옥인데 어찌 억측으로 이루어서야 되겠는가.

유성룡이 답했다.

조헌도 사람들에게 질시를 받았는데 이 사람은 바로 그 막하(幕下)로서 사람됨이 범람한 듯하니 남의 미움을 받아 의심을 사게 된 것인지 어찌 알겠습니까.

이후 선조는 충청 감사에게 이산겸이 역적의 수괴가 맞는지를 물어보게 한 후 이산겸의 주변 사람들을 문초했다. 먼저 이산겸의 장인 신곡(申鵠)은 자신의 나이가 75세로 곧 죽게 되어 늘 방에 처박혀 있었으므로 이산겸이 밖에서 하는 일을 알기 어려웠다고 진술했고, 처남 신기일은 학질을 않은지 2년이 되어 폐인이 되었으므로 의병에 종사하지 못해 이산겸의 행적을 알 수 없었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이산겸의 부관이었던 신응희(申應希)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정로위(定虜衛) 신응희는 나이 26세로 신의 성은 신(辛)이지 신(申)이 아닙니다. 임진년 6월에 조헌(趙憲)의 진영에 응모하여 청주(淸州)·금산(錦山)에서 연이어 접전했는데, 아비 경일(慶一)은 금산에서 전사하고 조헌이 죽자 산겸이 대신 의병을 영솔하였습니다. 11월에 검찰사 군관(檢察使軍官)으로 자망(自望)[3]

되어 군기(軍器) 등 제구(諸具)를 가지고 가는 일로써 산겸의 재궁(齋宮)에 이르렀습니다. 12월에는 산겸을 따라 은진(恩津)에 갔는데 산겸이 혼자 전주(全州)에 가서 이산보(李山甫)를 만났고, 또 익호 장군(翼虎將軍)을 만나본 뒤에 신도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정월 보름에 산겸의 가노(家奴)가 와서 ‘순찰사가 군량을 바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산겸의 가동(家僮)을 잡아 가두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산겸은 신으로 하여금 자기 집에 말을 전하기를 ‘의병 때에 쓰고 남은 우마(牛馬)를 익호 장군에게 드리든가 혹은 순찰사에게 바칠 계획이며, 군량은 이미 어사(御史)에게 바쳤다.’라고 하게 하였는데, 말을 전할 즈음에 순찰사 군관에게 잡혔습니다. 산겸과는 어디든 동행하였으나 산겸은 오직 왜적 토벌할 일만을 말하였지 반역에 대한 일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산겸은 무슨 일이든 남과 상의하지 않고 항상 독단하여 임의로 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지 않았으며, 다른 일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 후 이산겸을 모셨던 다른 부관들을 국문했지만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선조는 이산겸의 노비 막동(莫同)을 국문했다. 이에 막동은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12월에 산겸이 전라도로 향할 때 신은 수행하지 않았는데 산겸이 갇힌 뒤에도 그는 죄가 없다고 생각해서 조금도 도피할 계책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5일을 머물러 있던 중 무군사(撫軍司)에서 나까지 모두 가두었습니다. 수행한 지 2년이지만 산겸은 특별히 한 바는 없고 오직 왜적을 토벌하는 한 가지 일뿐이었으며, 집에 있을 때에 왕래하는 사람이 없었고, 다만 원수심(元守心)·신기일(申起一)과 의병 가운데 안준도(安遵道)·전직(田稙) 뿐이었습니다. 오 참봉(吳參奉)과 박 정자(朴正字)는 본래 알지도 못합니다.

이에 선조는 압슬형을 가해 거의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였지만, 막동은 끝내 승복하지 않았다. 선조는 신용희에게도 매를 30대 때리게 했지만 죄를 인정하지 않자 압슬형을 가하게 했으나 역시 승복을 받아내지 못했다. 이산겸의 처남 신기일에게도 압슬형과 장형을 가했지만 역시 승복하지 않았다. 이에 류성룡이 진언했다.

이들 죄인이 모두 승복하지 않는데, 만약 여러 사간인(事干人)들을 모두 형신한다면 다칠 사람이 필시 많을 테니 이산겸을 곧바로 엄중히 국문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선조는 거부했다.

영상의 생각은, 이산겸 자신은 도적의 초사(招辭)에서 나왔으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지만 사간은 억울하게 죽을 폐해가 있을까 두려워해서일 것이니 그 말은 맞다. 그러나 옥을 다스리는 체모는 그 같이 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사간의 공초가 하나로 귀일된 다음에 당사자를 추문해야 한다.

그 후 선조는 송유진의 난을 진압한 공을 세운 홍각 등을 불러 이산겸의 행적을 물었다. 이에 홍각 등이 답했다.

산겸이 유진의 당이라는 것을 신들은 듣지 못했습니다. 만약 들었다면 어찌 감히 아뢰지 않았겠습니까?

또한 이산겸과 함께 의병을 이끌었던 승려 도현(道玄)도 역모를 부정했다.

승려 영규(靈圭)의 의진군(義陣軍)으로 청주(淸州)와 금산(錦山) 싸움에 나아가 싸우다 절벽에서 떨어져 겨우 살아 돌아왔는데 산겸의 근처에 살았기 때문에 스스로 응모하여 종군하였습니다. 지난해 5월에 경상도로 따라갔다가 굶주림으로 돌아왔습니다만, 시종 나라를 위하여 하였을 뿐 여타의 일은 모르겠습니다.

이에 도현에게 형신을 가했지만 불복하자, 선조는 "이 중은 매우 어리석으니 산겸의 역모를 참으로 알기 어려울 것인즉, 압슬은 잠시만 하고 멈추라."고 지시했다. 그 후 선조는 조정 회의를 열어 이산겸을 어찌 처리할 지를 논의했다. 신하들은 이산겸에게 역모를 꾀했다는 뚜렷한 증거가 없다는 데 동의했지만, 수괴 송유진이 이산겸을 거론하고 죽었기 때문에 이산겸이 죽는들 가엾을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때 류성룡이 보고했다.

금부도사가 산겸의 주머니에서 편지를 얻었는데, 하나는 김덕령이 산겸으로 하여금 모군(募軍)[4]

토록 한 것이며 하나는 산겸이 처자와 영결(永訣)한 것이었습니다.

선조가 물었다.

그 일이 옥사에 관계가 있는가?

류성룡이 답했다.

옥사와는 관계되지 않습니다.

이후 선조는 이산겸의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처음부터 의심하였다. 산겸이 만약 진짜 도적의 괴수였다면 정월 15일의 거사에 어떻게 네 마리 말을 얻어서 전주(全州)로 돌아가겠는가. 송적(宋賊)이 이미 적장인데 그 위에 어찌 다른 사람이 있겠는가. 이것은 송적이 성세(聲勢)를 과장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현혹(眩惑)시킨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산겸은 이미 적의 초사에서 나왔으니 마땅히 죽어야 할 따름이다. 나의 이 말은 산겸을 용서해 주려는 것이 아니다.

이후 선조는 신용희에게 다시 형신을 가하게 했으나 끝내 불복하자, 이산겸의 동생 이산두에게 형신을 가했다. 이에 이산두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형은 미천한 사람이어서 촉휘(觸諱)되는 일도 헤아리지 않았고 가끔 술주정을 하였으므로 동네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의병장이 되었을 때는 모든 일을 자기 임의대로 하였는데 이것이 형이 잘못한 점입니다. 나머지 일은 모릅니다.

그러면서 큰소리로 원통하다고 외치니, 승지가 금지시켰다. 이에 선조는 "그 정실(情實)만을 물어야 하고 외쳐대는 소리를 금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뒤 산두의 사람됨을 보니 미련하고 용렬해 함께 참여할 자가 아닌듯하며 음성이나 용모 또한 산겸과 달라 말을 거짓으로 꾸밀 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에 류성룡, 심희수, 장운익, 홍진이 모두 "상께서 명확히 보셨습니다."라며 동의를 표했다. 그 후에도 여러 사람들을 문초했으나 이산겸의 역모를 입증할 증언은 나오지 않았다.
그 후 선조는 충청 감사로부터 이산겸이 역적의 수괴임은 의심할 것이 없으며 죄상이 통분하다는 보고를 접한 뒤 이것이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를 물었다. 이에 류성룡이 답했다.

산겸이 조헌의 의병을 거느리고도 왜적을 토벌하는 데 뜻이 없어 한번도 왜적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으니 매우 미워할 만하므로 인심(人心)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3월 14일, 선조는 다시 이산겸을 문초했으나 그가 승복하지 않자 다시 형벌을 가하게 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산겸이 도적의 초사에서 많이 나왔으니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그들 중에서는 반드시 이 사람을 추대하여 괴수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장운익이 의문을 표했다.

일도(一道)의 의병장이 매우 많은데 유독 이산겸을 지적한 그 일의 자취가 괴이합니다.

이후 이산겸에게 고문을 가했으나 일체 자백하지 않자 압슬형을 행했으나 역시 승복하지 않자, 선조는 그에게 형벌을 더 가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이산겸이 좀처럼 승복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죄상이 적힌 공초에 서명하지 않으려 하자, 선조는 진노했다.

지척의 아래에서 서명을 하지 않으려고 하며 이와 같이 걸오(桀敖)하게 구니, 이것으로 본다면 그 범죄 사실은 단연코 의심할 것이 없다.

류성룡도 계속 자복하지 않는 이산겸에게 압슬형을 가할 것을 진언했고, 선조는 이에 따라 압슬형을 가하게 했다. 한편, 선조는 이산겸이 일본군과 교전하지 않은 것에 의문을 제기했다.

왜적을 토벌하지 않은 것은 무슨 뜻에서인가? 의병을 모집한 것은 단지 왜적을 토벌하기 위해서인데 왜적을 토벌하지 아니했다면 바로 의병을 빙자하여 그 흉모(兇謀)를 수행하려 함이 아닌가.

장운익이 물었다.

이 뜻으로 힐문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선조가 대답했다.

경솔하게 묻는 것은 옳지 아니하니 상의하여 합일된 다음에 물어야 한다. 또 그 사람됨이 범람하다는 것은 내가 일찍이 이미 들었다마는 이 옥사(獄事)에 혹 애매한 단서가 있지 않나 하고 염려하였는데 이제 보니 거짓이 아닌 듯하다.

장운익이 말했다.

평일의 소행에 필시 흉패한 일이 많았을 것이므로 송유진도 그와 함께 논의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선조는 이산겸에게 압사를 멈추고 낙형을 가하게 했지만, 이산겸은 역시 자백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류성룡이 이산겸의 상태가 위중해 더이상 물을 수 없다고 아뢰자, 선조는 이산겸을 하옥시키라고 명했다. 그 후 그가 어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정황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옥사한 것으로 보인다. 선조수정실록은 이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의병장 이산겸이 역적의 무고로 체포되어 하옥되었다. 역적과 대질한 결과 역적의 말이 꿀렸는데도 이산겸은 오래도록 구금된 채 풀려나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산겸이 의병을 장악하고 해체하지 않은 그 정상이 의심스럽다."

하여, 마침내 형추(刑推)하도록 명함으로써 형장 아래에서 죽으니, 사람들이 대부분 원통하게 여겼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27년 1월 1일자 기사

[1] 임금을 가리킴[2] 광해군[3] 해당 장관이 이조를 거치지 않고 임의로 추천하여 임명하는 것[4] 병력을 모집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