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

 



李鎰
1538년(중종 33) ~ 1601년(선조 34)
1. 소개
2. 북방의 수비대장 시절
3. 임진왜란
4. 이후
5. 평가
6. 대중 매체에서
7. 관련 항목


1. 소개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중경(重卿), 시호는 장양(壯襄).
선조 시기 북변에서 여진족 토벌에 큰 공을 세워 신립조선을 대표하는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임진왜란 때는 기존의 적과 전혀 다른 왜군을 상대로 한계를 드러내며 무너졌다. 북도 제승방략 체계를 정립한 인물로 북도 대여진족 전술에 정통했다.

2. 북방의 수비대장 시절


이일은 1538년 경기도 용인현(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신원리)에서 병마우후를 지낸 이민덕(李敏德)의 아들로 태어났다.# 1558년(명종 13) 무과에 급제해서 선전관을 거쳐 경성판관, 단천군수, 경흥·온성 등지의 부사를 역임하였다. 1583년 1월 니탕개의 난이 발발하자 그해 4월 전라도 수사에서 경원 부사로 전임되었다. 경원부사로 부임한 이후 적호에 잘 대처해 나가자 회령부사로 다시 전임시켰는데 회령은 니탕개의 맹공을 받고 있는 지역이었다. 니탕개가 무리 2만을 거느리고 회령부 고령진을 약탈하자 이일은 퇴로를 차단하고 이들 무리를 공격해 격퇴시켰다. 그 후에도 계속 북방에 머무르며 1587년에는 함경도 북병사로 진급하여 북방 수비 책임을 맡았다. 1580년대 내내 북방에서 활동한 장군인데 본인 행적보다 이순신과 얽힌 일화가 잘 알려져 있다. 녹둔도 둔전관으로 근무하던 이순신에게 병력 증원 요청을 받았으나 거부해 녹둔도 전투의 피해를 키우는 원인이 되었다. 전투 보고를 받은 이일은 병력 부족과 녹둔도의 열악한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이순신과 이경록을 패장으로 치부해 처벌하려 했다. 녹둔도의 위치 자체가 너무 방어에 불리해서 조정에서도 말이 나왔던 점과 여진족의 수를 고려하면 (GP에 대규모 병력을 두지 않는 것처럼) 병력을 증원 안해준게 문제라기 보단 전투 후에 그러한 점을 감안해주지 않고 이순신에게 책임을 물려 했던게 진짜 문제였다.

북병사(北兵使)가 치계하였다.

“적호(賊胡)가 녹둔도의 목책(木柵)을 포위했을 때 경흥 부사(慶興府使) 이경록(李慶祿)과 조산 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이 군기를 그르쳐 전사(戰士) 10여 명이 피살되고 1백 6명의 인명과 15필의 말이 잡혀갔습니다. 국가에 욕을 끼쳤으므로 이경록 등을 수금(囚禁)하였습니다.”

ㅡ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선조 20년 10일 10일자

그러나 철두철미한 이순신은 적극적으로 자기변호를 했고 조정도 녹둔도가 위치상 방어가 어려움에도 이순신[1]이 충분히 잘 싸운 정황을 파악했기에 백의종군으로 끝냈다. 이순신이 자신을 변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녹둔도를 수비하는 군사가 적음을 걱정하여 증병하여 달라고 여러 번 청구하였으나 병사가 종시 불청하였습니다. 그 청병하던 서류 원본이 증거로 엄연히 있은즉 만일에 조정에서 이 일을 알면 그 죄가 내게는 있지 아니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단신으로 역전하여서 강포한 호적의 맹장들을 쳐 베고, 잡혀갔던 군민 60여 인을 탈환하였거늘, 어찌 병사는 패군하였다 하시오? 여러 사람이 본 바이거늘 혼자 우기면 되오?”#

그리고 녹둔도 전투를 상세히 수록한 대표적인 사료가 이일이 정리한 <제승방략>이다. 이 책은 함경도의 진보와 주둔 병력, 지형지물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녹둔도 대목에서 해당 지역의 전훈으로 녹둔도 전투 전개 양상을 정리해 놓았으며 이순신이 열악한 상황에서 분전한 것도 모두 적혀 있다.
이게 뭘 뜻하냐면 전투 이후 조정에 실제로 올라간 보고는 선조실록의 저 간략한 기사와는 비교도 안 되게 상세했을 거라는 뜻이다. 당장 선조수정실록은 훨씬 상세한 전투정황을 담고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1583년 경원부가 함락되었을 때 가차없이 부사 김수의 목을 날려버렸던 조정이 이순신은 패장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며 선처할 수가 없다. 선조실록은 임진왜란으로 두찬이 무척 심해서 사료로서 한계가 크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즉, 이 사례는 조정이 위세 높은 이일 때문에 모함인 줄 알면서도 이순신을 처벌한 게 아니라 잘 싸운 거 다 알면서 융통성 없이 피해가 상당하니 패장이라며 처벌하려 한 이일의 보고를 검토한 조정에서 병력과 지형, 적의 수 등을 따졌을 때 패전이 아니라고 결론짓고 선처하여 마무리 지은 사건이다. 아래에도 나오지만 무관인 이일은 조정에 줄 같은 거 없었고 그의 위세는 북방 한정이었다.
조선의 패장 처리 방식을 알면 이해가 더 쉽다. '''무장을 통제하기를 극도로 중시했던''' 당시 조선에선 패전한 장수를 앞뒤 고려 없이 모가지 날려버리는 게 드물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는 도망간 장수가 너무 많아서 다 죽였다간 살아남을 장수가 없어 못했지만, 여진족과 국지전이 지속되던 이 시기에는 자비가 없었다.
1583년 2월 여진의 기습으로 경원부와 안원보가 함락되자 선조는 경원부사 김수(金璲)와 판관 양사의(梁士毅)에게 성을 지키지 못한 죄를 물어 현지에서 참수해 효수하도록 했다. 김수는 1580년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고 혜산첨사에서 당상관으로 영전시켰던 인물인데 봐주는거 없었다. 심지어 북병사 이제신이 명을 받고 3일 후 참수하지 않고 6일 후 참수했다는 이유로 북병사를 그대로 파직시킨 다음 장 100대에 유배형을 내렸다.
제승방략 기준 안원보는 함경도 토병 47명에 남쪽에서 온 부방병 37명 해서 84명 편제, 경원부는 함경도 토병 379명 편제로 니탕개의 난 전후로 수백에서 심하면 천단위로 수가 늘어난 여진족을 비교하면 명백히 수적 열세에 있었지만 그런거 전혀 감안해주지 않았다. '''즉, 당대 조선 문신들은 전장의 안개나 승패는 병가지상사임을 곧잘 무시하고''' 각종 처벌로 무장들을 옭아매는 경향이 심했다. 이일이 뒷날 시전 부락 전투 이후 여진족 내통자를 즉결처분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던 것도 이런 무관 통제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이순신이 무사할 수 있었던 건 녹둔도 전투 이전에 이미 조정에서 녹둔도 둔전은 성공하기 힘들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선조실록 선조 20년(1587) 10월 4일 1번째 기사

병조판서 정언신(鄭彦信)이 아뢰기를,

“ 녹둔도(鹿屯島)에 논밭을 일군 일은 전부 신에게서 발의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적호들이 침범해 와 사람과 가축들을 약탈해 갔다는 소문을 들었으니, 이는 모두 신의 그릇된 생각으로 말미암아 빚어진 일입니다. 먼저 신을 다스려 조야(朝野)에 사과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녹둔도는 오랑캐의 지역과 너무 가까워 오랑캐들이 침입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로서 처음부터 이같은 일이 생기리라는 것을 우려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본도(本島)는 조종조 때부터 우리의 농장이었는데, 경이 군량이 어려운 형편에 놓인 것을 목도하고 백성들을 들여보내 농사를 짓도록 한 것인데 이것이 어찌 잘못인가.

설사 차질을 빚었다고 하더라도 지혜로운 사람도 많은 생각 중에 반드시 한 번은 실수하는 법이니, 경이 국사(國事)에 마음을 다하는 충성에야 어찌 손상됨이 있겠는가. 내 어떻게 경에게 허물을 주어 국사를 돌보지 않고서 방관하는 자들의 웃음거리로 만들어 주겠는가. 부디 이것 때문에 스스로 위축되지 말고 알면서도 하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녹둔도 둔전을 제안한 정언신이 잘못된 계획을 내놓았다며 죄를 청하고 선조 스스로 녹둔도는 처음부터 어려웠다고 인정한 상황에서 이순신이 적극적으로 자기 변호를 했고 이일조차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불리한 상황에서 분전했기 때문에 백의종군으로 끝내고 오히려 선조 눈에 들 수 있었다.
참고로 녹둔도가 아니라 녹둔도가 속한 조산보(造山堡)의 총병력이 토병 48명, 부방병 38명, 총 78명이다. 그리고 조산보가 속한 경흥부(慶興府) 진보 총병력은 저 78명 포함 482명 이었다. 북병사가 주둔하기에 병력이 가장 많은 종성부(鍾城府)조차 진보 총 병력이 1103명 이었다. 그런데 녹둔도 전투때 공격해온 여진기병은 1천이 넘는다. 여진은 수는 많지만 정규군이 아닌 약탈을 목적으로 한 도적떼가 가까워 목적을 이루거나 조선측 구원이 도착하면 대체로 퇴각했기 때문에 조선은 청야입보(淸野入保)을 기본방침으로 하고 성과 조선측에 귀부한 번호부락, 각 진보간 구원을 철저하게 규정하고[2] 주둔 병력을 더 늘리지 않았다.
임진왜란 첫 전투인 부산진 전투때 부산진 병력이 500여 기였던 데서 알 수 있듯 본격적인 전쟁이 아닌 여진족의 약탈과 왜구에 맞서는 방식으로 발전한 조선군의 방어전략은 요새 잘 지어서 소규모 병력으로 버티면 주변에서 구원병력이 도착해 격퇴하는 식이었다. 때문에 최전방에 강력한 다수의 병력을 주둔시키지 않았다. 문제는 '''녹둔도는 여진족 영역과 너무 가까워서 기습을 예방, 대비할 수도 없고''' 구원군이 올 때까지 들어가 미리 들어가 버티는것도 사실상 불가능한데(적이 오는걸 사전해 탐지할 수 있어야 미리 들어가 있을거 아닌가) 증원 못해줄 거면 이걸 당연히 감안해야 했다.
아무튼 아래는 선조가 이일의 장계를 받고 나서 녹둔도 전투는 일반적인 패배와는 다름을 지적하며 백의종군을 명하는 부분이다.

이경록(李慶祿)과 이순신(李舜臣) 등을 잡아올 것에 대한 비변사의 공사(公事)를 입계하자, 전교하였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사(兵使)로 하여금 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 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ㅡ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선조 20년 10월 16일자

백의종군에 대해 중언부언이 많은데 백의종군은 현대로 치면 보직해임이고 그마저도 명목상일 뿐 백의종군중에도 이전 계급에 준하는 대우를 해주며 전투에 참모나 고문 역으로 참여시키고, 공을 세우면 즉시 벗어나는 구조여서 (그냥 나가란 소리인) '''현대의 보직해임보다 가볍다.''' 절대 장교를 사병 만드는 형벌이나 귀양살이가 아니고 조선시대 내내 꽤 흔한 조치였다. 이순신의 사례는 피해는 있으나 정상을 참작받는 지휘관들에게 의례 내려진 조치지 특별한 사례가 아니다.
조선측은 녹둔도 침략에 대한 응징으로 북병사 이일이 지휘하에 여진 번호들에 대한 정토를 2차례 단행하였는데, 목표는 침략을 주도하였던 추도의 번호와 시전 부락이었다. 1차 정토는 11월 초하룻날에 추도의 번호를 대상으로 단행하였는데, 이일은 우후(虞侯) 김우추를 위장(衛將)으로 삼으면서 행영(行營)의 군사와 경흥진의 군사 등 400여 기를 나누어 편성하고 두만강을 도하했다. 이후 새벽녘에 추도의 번호 부락을 습격하여 막사 17개를 불태우고, 수급 33급을 베어서 복귀하였다.
2차 정토는 이듬해 선조 21년(1588)정월에 시전 부락의 여진을 대상으로 감행하였다. 조선군은 길주진 이북 및 온성진 이남에 거주하는 토병들과 행영의 군사, 경흥진 관할 예하 서수라보, 조산보, 무이보, 아오지보 등 4보의 군마 등 모두 2700여 명을 동원하였으며, 회령진 부사 변안수를 좌위장, 온성진 부사 양대수를 우위장으로 임명하여 편성하여 3읍 3위의 정토군으로 편성하였다. 이들 정토군은 14일에 은밀히 출동하여 두만강을 도하하고 15일 새벽녘에 시전 부락의 여진들을 습격하여 모두 섬멸했다. 그 결과 여진의 가옥 2백여 채를 전소시키면서 여진 383급, 말 9필, 소 20수를 참획하는 전과를 거두고 2차례 정토전을 종결하였다. 이일은 이 전투로 신립과 함께 조선에서 제일가는 명장으로 대우받았고 우화열장으로 참전했던 이순신도 공을 세워 백의종군에서 벗어났다.
1588년 10월 여진족과 내통한 토병 부자를 보고 없이 참수했다는 이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된다. 그러나 여진족에게도 무명이 알려진 이일이 없어져 변방의 장수들이 불안해 한다는 함경감사 권징의 탄원으로 파직 조치는 철회되었다. 나무위키에선 자꾸 이일이 중앙에 커넥션이 있었다는 근거 없는 썰이 떠도는데, 진짜 중앙에 줄이 있는 사람은 왕자 신성군(信城君)의 장인인 신립이다. 대공을 세운 직후에 내통자 허락 안 받고 죽였다고 탄핵받아 파직되는 커넥션이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3. 임진왜란


'''생존왕'''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가토 기요마사는 1군, 2군으로 나뉘어 진격해왔다. 부산진 첨사 정발과 다대포 첨사 윤흥신, 동래 부사 송상현 등이 전사하고 경상 우병사 이각, 경상 우수사 원균 등은 도주했다.

3.1. 상주 전투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출정할 때 단지 군관(軍官) 및 사수(射手) 60여 인을 이끌고 가면서 내려가는 도중에 군사 4천여 명을 거두워 모았다. 4월 24일 상주(尙州)에 도착했는데, 이일의 생각에 우리 군사가 오합지졸인 만큼 마땅히 습진(習陣)시켜 기다려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진을 미처 반도 펼치기 전에 적이 갑자기 이르렀으므로 별수없이 대진(對陣)하였으나, 교전하기도 전에 적이 먼저 포를 쏘아대 철환(鐵丸)이 비오듯 쏟아졌으므로 아군이 대적하지 못하였는데, 이에 적이 함성을 지르며 진을 무너뜨리자 우리 군사가 궤멸되면서 사상자가 무더기로 발생하였다. - 상촌집

왜군은 충청도에 육박하게 되었다. 조정은 제승방략의 체제에 따라 신립과 이일을 급파했다.[3] 조정에서 논의를 마치고 4월 18일 밤 4경(2시~4시) 무렵 퇴궐한 이일은 군관 60여 명을 거느리고 먼저 내려갔고 별장 유옥이 남아 군사를 모집해 뒤따랐다.

21일 이일(李鎰)이 문경(聞慶)에 도착하여 치계하기를, “오늘날의 적은 신병(神兵)과 같아서 감당해 낼 자가 없습니다. 신은 오직 죽을 따름이옵니다.” 하였다. 이에 궁중(宮中)도 결코 견고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마침내 미투리 등 멀리 가는 도구를 구입하고, 또 사복시에 명하여 즉시 사용할 수 있는 말을 정돈케 하여 비상시의 사용에 대비하게 하였다.[4]

-기재사초

류성룡의 징비록에서는 이일이 날랜 병사 300을 모아 내려가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3일간 머물다 유옥에게 뒤를 맡기고 내려갔다고 적고 있는데 기재사초에선 4월 21일에 이일이 문경에서 장계를 올렸다고 적고 있다.
참고로 이때 병사를 못 모은게 이일이 이순신을 모함해서 인심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그 어떤 사료에도 나오지 않는 뇌내망상이 이전 서술에 적혀 있었는데 징비록에서 해당 기록을 보자.

이익이 날랜 군사 300여 명을 뽑아 거느리고 떠나려고 하였다. 이때 홍여순이 병조판서로 있었는데, 성질이 사나우며 남의 말을 듣지 않고 무슨 일이든 자기 마음대로 처리하였다. 그가 민간의 잡인들을 병적에 등록시켜 군대를 편성하도록 하니, 모두 시정의 서리들 뿐이었고 심지어 유생까지도 그 속에 들어 있었다. 내가 비변사에 나가서 군사를 점검하여 보내려고 하였는데, 유생으로서 나이 겨우 10여 세밖에 되지 않았으며, 머리에 유건을 쓰고 손에는 시권을 가지고 병역을 면제해달라고 원통함을 호소하는 자들이 뜰과 섬돌 위에 가득차 도성 안이 크게 소란하였다. - 징비록

사료를 도대체 어떻게 읽어야 그런 결론이 나오는 걸까. 징비록에서 거론한 원인은 병조판서 홍여순의 방만함과 질을 담보하지 않고 서류상 할당량 채워넣는 데 급급했던 관료주의적 폐해지, 이일의 인망에 대해선 일언반구 언급한 바 없다. 아예 이일이 녹둔도 전투에 참전했다 도망갔다고 서술도 있었는데, 경성에 있는 북병사가 왜 최전방인 녹둔도에 혼자 가있는데? 여진족 영역과 너무 가까운 녹둔도의 열악한 사정을 감안해주지 않은 것이지 녹둔도 전투에 참여한 적은 없다.
그러나 왜군의 진격은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개전이 14일, 조정에 왜침이 전해진 때가 17일 아침, 이일이 방어 대책을 논의하고 퇴궐한게 18일 새벽이었는데 왜군은 17일에 밀양 부사 박진의 작원잔도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18일 밀양을 점령, 이후 청도를 거쳐 대구로 북상하는 등 미친 듯한 속도로 진격했다. 이 때문에 제승방략 체제에 따라 대구에 모인 수만의 조선군은 이일이 도착하기도 전에 뿔뿔이 흩어져 버렸고 상주성을 지켜야 할 상주 목사 김해는 안 보이고 판관 권길만이 남아있었다.[5] 이 건을 들어 이일의 책임을 묻는 사람도 있는데 당시 왜군의 진격 속도와 조선군의 집결 및 지휘 체계, 한양과의 거리를 고려하면 이일이 아무리 서둘렀어도 제때에 대구에서 군을 지휘하는 건 불가능했다. 이일은 판관 권길을 문책해 수백 명의 병력을 모았지만 억지로 긁어모은 오합지졸들이라 급박한 상황에서 기초적인 제식 훈련부터 시켜야 했다. 현대전에선 제식은 형식 이상의 의미는 없지만, 전근대전에선 제식훈련은 진형을 유지시켜주는 기초 중 기초요 승리의 기본이었다. 오죽하면 나폴레옹이 '제식이 곧 전투력'이란 말까지 했을까. 이런 기초 중 기초인 제식훈련부터 했어야 할 정도로 남방의 조선군은 오합지졸이었다.
이때 개령에 사는 한 농민이 왜군을 발견하고 이일에게 보고했다. 이일은 유언비어를 유포해 군기를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그 농민을 참수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이나 상당수 일반인들은 이건을 들어 이일을 비난하는데 이건 '''이일이 잘못한 게 아니다'''. 기존에 모였던 병사들이 모두 흩어진 시점에서 농민 수백 명을 간신히 끌어모아 기초적인 훈련을 시작한 상황인데 정식 보고 절차도 거치지 않고 온 병영에 적군이 쳐들어온다고 떠들고 다녔으니 병사들의 동요를 막고 어떻게는 싸워야 하는 이일 입장에선 참수는 좀 가혹하단 소리를 할 순 있어도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함부로 병영에서 왜군이 쳐들어온다'''고 떠들고 다니는 이를 참수한 사례는 충무공 이순신에게도 있다.[6]
이 농민의 사례는 이일이 정리한 북도 제승방략의 '''금령(禁令)''' 중 적의 침략을 보고서도 자세히 살피지 아니하고 적의 형세를 정탐할 때에 상세히 보지 아니하고 돌아와서도 돌아왔다고 보고하지 아니하거나 많은 것을 혹은 적다고 말하거나 적은 것을 혹은 많다고 말하는 자는 참형에 처한다는 규정에 해당된다. 이일이 왜군이 도착할 가능성을 무시한 것도 아니고 참수당한 농민도 장담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면 목을 베라고까지 호언장담했다. 즉 유언비어 유포로 바로 참수해도 될 사안임에도 당사자가 장담한 시간까지 기다려줬다. 문제는 고니시군의 도착시점이 고작 '''몇 시간''' 차이나서 참수.
물론 척후병을 보내면 되지만 이제 갓 제식 훈련을 시키고 있던 이일 군의 상태를 고려하면 척후를 보내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이일이 정리한 제승방략을 살펴보면 적어도 이일이 척후의 중요성을 몰랐을 가능성은 없다. 이일이 이론만 빠삭했다고 주장하고 싶다면 북방에서 제승방략 체계에 따라 여진족 정벌을 지휘한 사람이 누군지 다시 보고 오자.[7]
한편 고니시 유키나가 군은 상주에서 불과 20리 거리의 장천에 주둔하며 꾸준히 척후를 보내 이일의 군 상태를 살폈고 음력 4월 25일 왜군은 상주로 진격했다.
25일 상주성 안에서 여러 곳에 검은 연기가 피어나자 북천에서 병사들을 조련하던 이일은 군관 박정호를 보내 알아오게 했다. 박정호가 다리를 건너는 순간 다리 밑에 숨어있던 왜병이 박정호를 사살한 후 박정호의 목을 베어서 갖고 달아났다. 군사들이 일시에 동요하는 상황에서 상주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일이 병사들을 독려해 활을 쏘아 대항했으나 부족한 훈련과 낮은 사기 때문에 왜군에게 제대로 닿지도 못했고, 왜군은 여유있게 양쪽에서 조선군을 포위했다. 전황이 기울었다고 판단한 이일은 도주했고 병사들도 일패도지했다. 종사관 윤섬, 박지,[8] 이경류와 판관 권길, 의병장 김준신,[9] 박호, 박걸, 김일 등은 꿋꿋이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병사들과 함께 전사했다.[10]

3.2. 충주 탄금대 전투


신립이 적세(賊勢)를 물으니 이일은, “이번 '''왜적은 경오ㆍ을묘년과는 비교가 안 되며 또 북쪽 오랑캐 같이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소. 이미 험한 곳에 주둔하지 못하여 넓은 들판에서 싸움을 하게 되어 당해 낼 도리가 만무하니''' 차라리 물러가 서울을 지킵시다.” 하였다. -연려실기술

신립이 왜적의 정세가 어떤가를 물으니, 이일이 대답하기를, “이 적은 경오년(1570년, 선조 3년)과 을묘년의 그것과는 견줄 게 아니며, 또 북쪽 오랑캐 같이 쉽사리 제압되지도 않습니다. 이제 '''험준한 데를 점거하여 적의 길을 끊지 못하였으니 만약 넓은 들판에서 교전한다면 당해낼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후퇴하여 서울이나 지키십시오.” -난중잡록

종사 '''김여물(金汝岉)이 이일(李鎰)의 말에 따라 산길을 굳게 지키자고''' 요청하였으나, 신립은 듣지 않고, “바다를 건너온 왜적은 빨리 걷지 못한다.” 하고는, 마침내 달천을 등지고 탄금대(彈琴臺)에 진을 쳤던 것이다. -난중잡록

도망친 이일은 조령을 지키고자 했다가 충주에서 도순변사 신립[11] 합류한다.[12] 북방에서 여진족 토벌로 명성을 떨친 신립은 장기인 기병대를 편성해 내려갔다. 문경에 도착한 신립은 간신히 도주한 이일을 만났다. 신립은 패전의 책임을 물어 이일을 참수하려 했으나 김여물의 설득으로 참수하지는 않았다.
이일은 신립에게 적은 과거 을묘왜변 때의 왜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하며 니탕개의 난 때의 여진족들처럼 쉽사리 제압되지도 않는다고 단언하고 험준한 장소(문경새재)를 점거하여 적의 길을 끊지 못하였으니 만약에 넓은 평원에서 교전한다면 당해낼 도리가 없을 것이므로 차라리 후퇴하여 서울이나 지키자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종사관 김여물도 정면 대결을 피하고 문경의 새재 바위에 몸을 숨기고 궁병으로 대응하고 그래도 여의치 않으면 서울로 물러나 지키자고 주장했다. 이일이나 김여물이나 적과 평원에서 회전을 벌여서는 안된다는데는 의견이 같았다. 그러나 신립은 모두 무시하고 그냥 싸워 이기면 된다며 협소한 뻘밭인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기병으로 맞섰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이 탄금대에 도착하자 바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논이 산재해 있는 탄금대의 땅은 신립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더군다나 전투 당일 탄금대에는 비까지 내리기까지 했다. 세조 시기를 기점으로 창기병이 쇠퇴하고 상대적으로 충격력이 떨어지는 궁기병이 주력이 된 데다 조선 초기에도 연 단위로 행해지던 대열(大閱)과 강무(講武)[13]가 민폐라는 이유[14]로 조선 중기들어 시행되지 않으면서 대규모 기동 훈련 경험이 아예 없었던 조선군은 몇 차례 기병 돌격을 감행했으나 효율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지 못했고 정면에서 적을 맞는 사이 양 측면에서 포위해 들어간 고니시 군에게 섬멸되었다. 이일은 동쪽으로 산을 타고 전장을 빠져나와 강을 건너 한성까지 올라갔다. 이 과정도 녹록치 않아서 도중에 왜군과 부딪쳐 몇명을 죽이고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간신히 몸을 뺀 다음 조정에 패전 소식을 전하는 장계를 올렸고 신립과 김여물은 싸우다 자결했다.
여기서 또 이일이 전투 시작하자마자 도주했다는 근거없는 낭설을 써갈겨 놓는 사람이 있는데 후술하겠지만 탄금대에서 살아나온 사람은 이일만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기록에 남아야 하는데 그 어떤 기록에도 이일이 전투 시작하자마자 달아났다는 기록은 없다.

신립은 어쩔 줄을 모르고 말을 채찍질해서 몸소 적진(賊陣)에 돌진하고자 두 번이나 시도했으나, 쳐들어가지 못하고 되돌아와 강물에 뛰어들어 물에 빠져 죽었으며, 여러 군사들도 모두 강물에 뛰어들어 시체가 강물을 덮고서 떠내려갔다. 김여물(金汝岉)도 또한 혼란한 군사 속에서 죽었으나, 이일은 동쪽 산골짜기로부터 빠져 나와 도주하였다. - 징비록

4월 28일 맑음, 인각에 문경 출발, 진각에 안보 통과. 충주부 북쪽 반리 지점 소나무 산에 신입석(신립의 오류,砬자를 풀어쓴 것) 장군이 수만의 병력을 이끌고 결진. 대주(종의지)와 섭주(고니시 유키나가) 병력이 공격하여 전과 참수 3000급, 포로 수백명. 적 대장 신입석 전사. - 서정일기

덧붙여 이일이 탄금대의 유일한 생존자니 전투 초장에 도망친게 틀림없다고 주장하는 악질까들이 있는데 '''고니시군 기록'''인 서정일기에 기록된 전과는 수급 3000천급에 포로 수백이다.
탄금대 전투를 기록한 조선측 사료 중에 상촌집이 가장 신뢰성이 높은데 그게 무엇 때문인가? 저자인 신흠이 탄금대 전투의 생존자기 때문이다. 탄금대 전투에서 종군했다 살아나온게 확인되는 조선군 지휘관급만 이일 포함 4명(이일, 이빈, 고언백, 신흠). 이중 앞의 3명은 탄금대 전투에 대한 별다른 기록을 남기지 않았으나 신흠은 제장사난초함패지(諸將士難初陷敗志, 여러 장사들이 왜란 초에 무너져 패한 기록)란 글을 남겨 왜군의 도착 시점과 탄금대 전투 과정을 설명했다.
탄금대 전투에 참여한 조선군의 숫자는 사료에 따라 8천에서 최대 1만 6천까지 추산 가능하다. 즉, 강에 뛰어들었다가 익사해 수급을 건지지 못한 인원을 포함해도 적게는 수백, 많게는 수천이 살아남아 도주에 성공했다. 탄금대는 애초에 완전한 배수진이 아니라 도망갈 구석이 있는 불완전한 배수진으로 산을 따라 동쪽으로 빠져나가거나 강을 헤엄쳐서 건널 힘이 있으면 살아나갈 수 있었다. 야전에서는 강했지만 기병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추격, 섬멸 능력에 한계가 있었던 일본군의 특성도 감안해야 한다.

4. 이후


이일은 강을 건너 강원도 경계를 지나 6월 평양의 어가에 합류했다. 이 때 이일의 몰골이 얼마나 초라했는지, 몇 번의 전투에서 패하고 이리저리 숨어 지낸 까닭에 패랭이를 쓰고 베적삼에 짚신을 신고 있었다. 이에 류성룡이 행장을 뒤져 남색 비단 철릭을 찾아내 그에게 입혀줬고, 다른 사람들도 나서 종립[15]도 주고, 은정자와 채색 갓끈도 마련해 줘 그럭저럭 의관은 갖췄지만. 가죽신을 마련하지 못해 짚신을 신은대로 걸어야 했다. 이에 류성룡이 '''"비단옷에 짚신이라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구려"'''하고 웃자, 주변사람들도 함께 웃었다고 한다. 그리고 선조가 몽진간 사이에 윤두수, 김명원 등과 함께 대동강 방어전에 참가했다. 비교적 늦게 참가했고 거느린 병력도 적었지만 나름대로 의욕적으로 지휘해 초반 왜군의 대동강 도하 시도를 저지하기도 했으나 원체 전력 차이가 심해 이렇다할 전과는 없었다.
이후 광해군의 분조에 내조한 첫 번째 군대이자 분조 내 최강의 전력으로써 7개월간 광해군을 호위하며 분조의 전력으로써 임란 초기의 평양성 포위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1593년에 평양성 전투가 발발하자 명군과 함께 참전했으나, 별다른 활약은 없었다. 평양성 전투 이후에는 주로 함경도 지역에서 종군했다. 전후인 1601년 부하를 처형한 건으로 살인죄를 받아 체포되어 호송되던 중, 정평에서 병사했다. 원래 이일을 국문해서 진상을 밝히려 했으나 이일이 압송 도중 죽어버렸기 때문에 그냥 이일의 장례식만 치르고 국문은 흐지부지되었다.

5. 평가


세묜 부됸니와 유사한 인물. 자기 분야에선(부됸니는 기병 전반, 이일은 북방에서의 대여진족 전술) 최고 전문가로 높은 명성을 얻었으나 그 특기를 발휘할 수 없는 초유의 국난(독소전쟁, 임진왜란)을 맞아 참담한 패배를 경험하고 무명을 깎아먹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여진족과의 전투에선 실력있는 무장으로 명성이 높았지만 전국시대를 거친 노련한 일본군과의 전면전에서는 일본군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던 극초반에 전면에 나섰던 이유도 있고 해서 여러 차례 패했다.
하지만 단순히 이일이 무능하고 겁쟁이라서 그렇다고 패전에 대한 모든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 많은 비용을 들여가며 전쟁을 대비하긴 했지만 니탕개의 난과 비슷한 조금 큰 왜구의 준동 정도로 생각하고 대비했던 당시 조선은 머릿수는 많지만 기강과 훈련도가 현격하게 떨어지는 군사들을 데리고 있다가 완전히 생소한 전략 전술을 가지고 온 일본군에게 뜻밖의 기습을 당해 제대로 된 정보도 없이 전면 패주하는 상황이었다.
그가 정리한 북도 제승방략만 봐도 이일을 무능한 사람으로 보기는 힘들어진다. 한성에서 장수가 도착해서 지방군을 지휘하는 약점이 있던 남방 제승방략과는 달리 북방 제승방략은 현지 지휘관이 지휘했고 오랜 전훈에 의거 여진족이 침공할 수 있는 다양한 상황을 가정해서 행동 방침을 매우 상세하게 기재하였다. 각 상황마다 동원되는 병력, 전술, 전략, 사례와, 전시의 물자 보급 등의 상황을 일일이 정리한 제승방략을 보면 조선군에 대한 평가마저 달라질 정도. 이러한 체제가 온전히 이일의 작품은 아니지만 최종적으로 정리한 사람은 그라는 점에서, 마냥 능력 없는 장수라고 할 수는 없다.
또 한 가지 고려해야 할 점은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기본 사료 중 하나가 류성룡징비록이라는 것이다. 류성룡의 기록은 기본 사료로 쓰이기에 충분하고도 남지만 그는 제승방략 체제 대신 진관 체제로 회귀를 주장했던 인물이다. 제승방략을 다시 정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인물이 이일이었기 때문에 류성룡의 이일 비판은 제승방략에 대한 비판도 섞여있다고 볼 수 있다. 허나 류성룡이 주장한 진관제는 소규모 왜구여진족의 준동에나 적합한 체제였고 일정 규모 이상의 침공에서는 제승방략이 더 적합했다.[16] 문제는 한성에서 온 장수가 지방의 병력을 지휘해야 한다는 맹점인데 이건 남방 제승방략에 미스테리하게 나타날 뿐 이일이 증보한 북방 제승방략에서는 그런 현상이 없다. 물론 임진왜란 직전 군사 정비에서 이일의 의견이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게 보이나 정작 이일이 증보한 제승방략에서 그 문제가 발견되지 않는 것을 보면 정치적인 문제로 인한 남방 제승방략의 특수성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6. 대중 매체에서


불멸의 이순신 이전에 나온 여러 임진왜란 소설에서도 이일은 이렇게 나온게 허다했다. 이일은 녹둔도에 병력을 증원해 달라는 요청을 거부했고 후일 책임을 전가하긴 했어도 녹둔도 전투에 참전했다가 적전 도주한 적은 없다. 참전도 안한 전투에서 어떻게 도망을 간단 말인가.
1980년대 임진왜란을 다룬 소설이나 만화, 드라마까지 싸그리 무능하고 비열하게 달아나는 졸장으로 묘사되었다. 신동우 화백이 그린 금성출판사판 만화 한국사에서도 조총도 모르고 무턱대고 진격했다가 참패하곤 신립에게 불을 뿜는 막대기를 왜군이 가지고 있다고 항변하다가 "조총도 모르다니 그러고도 장군이라는 할 수 있는 거요! 꼴도 보기 싫소! 썩 나가시오!"라고 비난을 당하는 무능한 이미지로 그려냈다. 박홍과 더불어 무능하기만 한 게 아니고 제법 공이 있었고 싸우려고 했음에도 일방적으로 졸장으로 묘사된 장수 중 하나이다.
조선왕조오백년 임진왜란 편에서도 임진왜란 발발 이후 순변사가 되었지만 한양에서부터 데리고 갈 300명의 병사도 확보 못하는 안습한 모습이 나오며 상주 전투에서 패한 후에 병졸로 변장하고 달아나서 뒤이어 도착한 신립에게 갈굼당하는 무능한 인물로만 묘사된다.
김성한7년전쟁에서는 임란이 발발하자 남쪽으로 향하며 마지막 희망을 걸지만, 정작 대구의 상황을 전해듣고 굉장히 허탈해한다. 결국 패전 후 신립과 만나게 되고 후퇴해 후방에서 적을 막자고 주장한다.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이일재가 연기했다. 사사건건 주인공 이순신의 발목을 잡으며 찌질하게 굴다가 중간에 한번 각성해서 개념캐가 되나 했더니 윤두수에게 한번 쪼인트를 까이자 도로 찌질한 악역으로 회귀하는 보기 드문 캐릭터다(...). 이일재는 훗날 동시대를 다룬 사극 징비록에서 원균 역을 맡아, 이순신과의 악연(?) 역할을 이어나갔다.
징비록에서는 개그 캐릭터. 배우는 서현철이다. 상주 전투에선 살기 위해 기어서 도망갔다. 탄금대 전투에선 도망치다가 귀순하려던 사야가를 보고 다시 방향을 돌려 도망친다. 사야가는 이를 보고 당황해서 희대의 명대사 '''조또마떼(...)'''를 외쳤다. 이후 분조에 들어가 광해군을 호송하나 류성룡은 물론 이천리에게마저 디스 당하는 처지(...). 모처럼 왕성탄에서 우키타 히데이에를 기습해 대승을 거두나 정작 히데이에를 놓쳐 또 까였으며 부산원(평양성 인근) 기습에선 대마도주 종의지와 1:1 대결을 벌이다 패배해 놓쳤다. 징비록 갤러리에서는 컬트적인 인기를 끌며 21, 런일, 투애니원, 생존왕 이일 그릴스, 조또마떼 갑으로 불린다. 삼국전투기의 조홍 같은 캐릭터랄까. 또한 오류도 있었는데 아무리 문무반의 차이에 직계상 이일이 명령을 받는 위치라지만 이일이 나이가 4살이 더 많은데도 류성룡이 반말에 호통을 치면서 병졸 다루듯 막대하는 장면도 있었다.
대체역사소설 이순신의 나라에선 삽질을 거하게 벌여 이순신의 한양 입성을 돕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후, 함흥에서 이순신에게 또 패하고 마는데... 이 때는 이일보다 정원군의 잘못이 더 큰 상황이라 여기에 대해 정원군에게 항의한다. 결국은 정원군과 함께 있던 여진족들이 퇴각 전 이일을 난도질하여 살해한다.
이우혁왜란종결자에서는 은근히 버프받았다. 이 모든게 마수들의 음모라는 전제를 깔고 있어 이일이나 신립의 과오도 은근슬쩍 묻힌다. 상주 전투는 글 몇줄로 끝나고 이일은 가까스로 도주해 신립에 합류한다. 신립 옆에서 용감하게 싸우나 전세가 기울자 신립의 명으로 억지로 전장에서 빠져나가 한양으로 피신한다.

7. 관련 항목



[1] 더해서 이경록. 이경록은 이후 임진왜란 때 제주목사로서 임무를 다한다.[2] 먼저 공격받은 진보의 본진에서 구원에 나서고, 그걸론 감당이 안되면 인근 진보에서 구원하는 순서였다. 제승방략 군무 29조 중 제8조는 구원군이 지체되면 군율을 적용한다 규정하고 있다.[3] 신립이나 이일 말고도 다수의 경장들이 한양에서 남쪽으로 급파되었다. 다만 기록이 부족해 이들의 행적은 불분명한 부분이 꽤 많다.[4] 징비록 초본에서는 상주에서 패배한 후 길에서 만난 어떤 사람이 왜군의 기세를 물으니 명군이라도 당해내지 못할거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러 기록을 볼 때 이일은 왜군의 강력함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던걸로 보인다. 이걸 단순히 겁쟁이나 무능으로 보면 곤란한 게 '''200년 동안 평화를 누린 군대와 100년간 전쟁을 한 군대'''가 맞붙었다. 이 정도로 잘 훈련되고 조직적인 군대와 싸워본 게 처음이었으니 막연함이 몰려오는 게 이상하진 않다.[5] 이렇게 모이는 와중에 용궁 현감 우복룡은 도중에 만난 하양 군사 수백 명을 반란군으로 몰아 죽이고 공으로 삼는 미친 짓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유도 기가 막힌데 자기 보는 앞에서 말에서 내리지 않고 그냥 지나가자 너희가 상관을 무시하고 어딜 급하게 가느냐는 것. 당연히 하양 병사들은 어이가 없어서 대구로 서둘러 오라는 명령을 받은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했으나 우복룡은 그들을 반란군으로 몰아 포위해 섬멸해버렸다. 그러니까 인사 안 했다고 반란군이라고 한 것이다. 다만 우복룡 사건은 다소 부풀려지고 불확실한 요소가 많다는 이견도 있으며(일단 하양군과 우복룡이 이끄는 용궁 병사들의 수가 엇비슷해서 포위섬멸 같은 일방적인 학살은 없었을 거라는 얘기다. 이 기록은 징비록에 실려있는데, 상식적으로 류성룡 정도의 위치면 이 일의 진실여부를 파악하고 그 즉시 그에 따른 합당한 처벌을 해야함이 옳다. 그런데 그런 움직임도 없이 우복룡이 그랬다더라고만 썼다), 우복룡은 전후까지 잘 살다가 한참 뒤인 광해군때 이 일로 인해 파직을 당하고 직후 사망한다.[6] 이런 사례로 진짜 비판받아야 하는 장수는 신립이다. 신립은 탄금대 전투 직전 '''왜군이 이미 조령을 넘었다'''(정황상 일본군 척후 부대)고 정식 지휘계통을 거쳐서 보고하는 군관을 미친 소리했다며 죽여버렸다.[7] 이일을 까는 소스의 대부분이 전직 해수부 공무원 방기혁이 쓴 역사 법정 소설(?) '평'에서 나왔다. 과거 이 항목에 있던 죄없는 농민 참수, 난폭한 성질머리는 물론 아군 팀킬 후 왜군 위장, 군기빠져 척후 안세우고 장계 하나도 똑바로 못쓴다는 내용들이 이 책에서 나왔다. 나중에는 '칠금동 설화'라는 없는 얘기까지 만들어 탄금대 전투에서 왜군들에게 아군 위치를 알려주고 같은 편 신립까지 팀킬한다. 이쯤되면 작가가 이일에게 뭣 때문에 악담을 퍼붓는지 궁금해질 지경.[8] 무사히 탈출하긴 했으나 살아서 임금을 만나기 부끄럽다면서 자결했다.[9] 왜군의 후발 부대에 의해 고향인 판곡리 사람들과 김준신의 일가친척들 모두 몰살당했다. 다만 김준신의 어린 아들만은 무사히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10] 이때 전사했다고 알려진 인물 중 백대붕이라는 인물이 있다. 전함사의 노비 출신이라는 말이 있는 사람인데, 촌음 유희경과 함께 당대를 주름잡던 시인이었다. 촌음 유희경과 자주 엮여서 실제로 이매창과 유희경의 대면 때 유희경이 '댁은 유씨입니까, 백씨입니까?' 란 소리를 들었을 정도.[11] 순변사보다 1계급이 높다. '도(都)'는 해당 계급을 총지휘한다는 의미.[12] 이일이 조령을 지키고자 했다는 기록은 징비록 초본에 나온다. 반대로 신립은 역시 패잔병들을 수습해 고개길을 지키던 변기까지 불러들이는 등 험준한 산길에서 방어한다는 고려 자체를 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13] 대열(大閱)은 군사들이 진법 훈련을 한후 왕이 이들을 사열하는 훈련이고 강무는 왕이 특정 지역으로 병사들을 이끌고 간 다음 그곳에서 사냥을 하고 돌아오는 실질적인 기동 훈련이다.[14] 대규모 인력이 동원되니 비용소요도 높고, 진법 훈련을 하려면 농사일을 하던 백성들을 끌어모아야 하고, 사냥(기동훈련)을 겸할 경우 해당지역은 낟알이 여물었는지 여부에 상관없이 조기 추수에 들어가서 백성들의 그해 농사에 큰 지장을 주기 때문이다. 이러니 나라가 제대로 안 돌아갈 것이라고 시행을 안했지만 정작 진짜로 전쟁이 일어나자 문제가 되었다. 즉, 점차 나라와 국왕들이 군 훈련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15] 말총으로 만든 갓.[16] 실제로 진관체제에서 제승방략으로 변경된 것도 '''7천 명'''이나 쳐들어온 을묘왜변 당시 각 진들이 맥없이 무너지는 걸 보고 변경한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