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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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제15대 국왕이자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군주.
양위 및 폐위로 묘호가 추숭되지 않았던 4인의 조선 국왕 중 한 임금이다. 다른 3명은 2대 공정왕, 6대 노산군, 10대 연산군이다. 다만 공정왕은 묘호만 없었을 뿐 능호도 후'릉'이라 하고 실록도 일기가 아니라 공정왕'실록'이었으며 종묘에 신주가 모셔지는 등 정식 군주의 대우를 받았으며, 공정왕과 노산군은 숙종 대에 들어서 각각 정종과 단종으로 추숭되었으므로, 결국에는 연산군과 같이 둘밖에 남지 않았다. 더불어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노산군, 연산군과 같이 '실록'이 아닌 '일기'의 형식으로 그들에 대한 기록이 실린[12] 단 셋뿐인 임금 중 하나이다.
세자 시절에는 아버지 선조가 버리고 간 국토에 남아 목숨을 걸고 전쟁영웅으로서의 행보를 보여주었으나, 왕이 되자 무리한 왕권강화에 대한 집착 증세는 당파와 문무를 초월한 중신들의 반감을 사게 되면서 쫓겨나게 된다.
평가가 갈리는 재위 후반기를 떼놓고 보더라도 세자 시절 구국을 위해 분조(分朝) 활동으로 전장을 누볐던 면모부터 노년기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 끝에 숨을 거두기에 이르기까지 군주가 아닌 한 인간의 생애로 보면 굉장히 파란만장하고 굴곡이 큰 편이어서 업적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아니라 현대인들의 취향에 따라 역사적 담론보다는 정치적인 재해석과 이념적인 투영이 더욱 많은 인물이다.
2. 생애
2.1. 즉위 이전
광해군은 1575년에 선조와 훗날 잠시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되었던 후궁 공빈 김씨의 사이에서 둘째 서자로 태어났다. 선조의 장남이자 광해군의 동복형으로는 임해군이 있었지만 그는 나이가 많은데도 너무나 제멋대로에 포악한 성격의 인물이었기에 대중의 외면을 받았으며 선조가 임진왜란 이전에 눈여겨 본 인빈 김씨 소생의 배다른 동생 의안군과 신성군은 모두 일찍 죽어서 경쟁상대가 사라졌다.
여기에 조정의 여론은 이미 임진왜란 이전부터 광해군이 대세였고, 임진왜란 시기 '''분조'''활동을 거치며 권위가 선조를 위협할 정도로 강해져서 30살 넘게 차이나는 영창대군을 데리고 의도가 명백한 견제를 받아야 했다.[13] 단, 선조의 견제는 광해군의 평판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영창대군은 선조가 떨어진 권위로 어떻게든 왕노릇 계속하기 위한 일종의 투쟁 수단이었다. 이 글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애초에 광해군은 종법상으로 따져봐도 영창대군보다 우월한 위치였다.
그가 왕자였던 시절에 부왕의 물음에 영특하게 답한 야사가 전해진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하루는 선조가 여러 왕자들을 모아놓고 "세상에서 가장 으뜸인 반찬이 무엇이냐?"며 묻기를, 다른 왕자들은 저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14] 을 댔으나 유독 광해군만은 조미료인 소금이라 답했다 한다. 그 이유를 물으니 광해군이 이르기를, '소금이 아니면 온갖 맛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어서 선조가 왕자들에게 가장 아쉽게 여기는 점이 무엇이냐 묻자, 다른 왕자들의 답변과 달리 광해군은 생모가 일찍 죽은 것을 가장 아쉽게 여긴다고 답했다. 마지막으로 선조가 갖가지 선물을 준비해 왕자들에게 가지고 싶은 물건을 가져가라고 하자 다른 왕자들은 앞다투어 보물들을 가져갔는데 광해군만 붓과 먹을 가져가서 선조가 놀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2.2. 임진왜란
임진왜란 당시에는 위대한 전쟁영웅으로서의 행보를 보여주었다. 임진왜란이 벌어지고, 도성이 함락되기까지 하자, 선조는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피난길에서의 책봉이었다. 이로써 광해군은 조선 최초의 '''서자 출신 세자'''가 된다.[15] 이후 광해군은 평양성 제1차 전투에서 지휘를 맡기도 한다. 후에 선조는 광해군에게 분조를 맡긴게 아니라 조정을 떠넘겼다. 영변에서 선조가 세자에게 조정을 맡긴다고 했는데, 그 조정을 맡긴다는 것이 분조의 개념이 아니라 그냥 너에게 다 줄테니 난 요동을 가겠어 수준이다.[16] 심지어는 양위하겠다고 하기까지 했다.
아버지는 나라를 버리고 외국으로 튈 생각만 하던 그 순간 18살의 광해군은 조정을 이끌고 남으로 향했다. 원래 강계로 가기로 되어있으나, 남쪽으로 향한다. 그것도 강원도 이천이라는 그 당시 전국이 일본군의 손에 떨어진 한복판으로 들어간 것이다. 당시 청년 시절의 광해군의 활약은 왕으로서 그에 대한 평가의 호오와 별개로 조선 왕조 역사상 그리 많지 않은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실천된 사례로써 뭇사람들이 그를 긍정적으로 인정하는 시기였다. 조선의 역사를 통틀어 조선의 창건자인 이성계와 그리고 같이 전쟁터에 나갔던 정종을 제외한다면, 외적과의 전면전에 직접 뛰어들어 맞서 싸운 경험이 있는 국왕은 '''광해군이 유일하다.''' 농성을 포함한다면 인조도 해당되겠지만 이쪽은 삼남 쪽으로 도망치려다 갇혀서 농성했기 때문에 본의로 임한 것이 아니라서 경우가 좀 다르다.
선조의 도주로[17] 백성들이 궁궐에 불을 지르고[18] 왕의 아들들을 (깽판을 쳤다지만) 왜군에게 넘기던 시절[19] , '''유일하게 왕실의 일원으로서 해야할 일을 책임있게 그리고 꽤 성공적으로 임한 인물로 민심 수습과 사기 회복, 왕실 이미지 회복'''의 효과는 꽤 컸다.[20] 그 때 광해군의 나이[21] 나 상황[22] 을 고려했을 때 이 정도로 책임 의식을 가지고 해낸 것이 놀라울 정도이며 이 때 대처는 한국사 통틀어 다른 전란기 왕들과 비교해봐도 꿇리지 않을 정도. 괜히 신하들과 명이 선조를 끌어내리고 광해군을 즉위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던 게 아니다.
전란이 계속되면서, 광해군이 엄청난 활약을 하고, 명이 광해군을 새로운 조선의 국왕으로 즉위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신하들도 이에 동조하는 분위기를 보이자, 선조는 왕위를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의심이 짙어졌다. 그런 와중에 몇 차례의 반란 사건으로 가뜩이나 의심이 많아진 선조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광해군도 신뢰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권위를 되찾고 광해군을 견제할 목적으로 여러차례 양위 소동을 벌였다. 다만, 견제하는 이상의 일은 벌이지 않았다. 애초에 대안으로 내세울 패가 너무 없었는데 나머지 아들들은 개념이 없지 영창대군이 태어난 것도 나중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는 인목왕후를 새로이 맞아들였는데 왕후가 영창대군을 낳았다. 적자인 동생이 태어나자 선조는 왕권강화를 위하여 그를 우대하였다.[23] 영창대군은 아직 어려도 너무 어렸던 데다가 광해군이 공이 크고 흠이 없었기 때문에 전례를 고려하면 별 문제가 아닌 명의 책봉 문제(당시 명 황제는 적자가 없고 서자들만 있었는데 원칙대로라면 서장자를 태자로 삼아야 하지만 황제는 세 번째 후궁을 더 좋아했다. 그래서 그 후궁의 소생을 태자로 삼을 것을 우려한 명나라 신하들은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를 끌어내 견제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유영경의 탁소북은 그런 선조에게 부화뇌동하여 광해군의 지위를 흔들려 했으나 영창대군이 너무 어렸고, 대북, 서인, 남인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세자라서 기반이 정말로 불안하진 않았다. 다만 궁 내에서는 왕이 10년만 더 살면 영창대군이 될 수 있었다는 것 때문인지 중궁전 나인들이 동궁전 나인들을 핍박했다고도 하는 등, 여러모로 광해군이 불안해할 수밖에 없었던 분위기가 형성되어가고 있었으며, 실제로 광해군은 이후 왕이 되자 인목대비를 핍박하기에 이른다.
2.3. 즉위과정
선조는 병상에 누워서까지 후계에 대한 확정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승하가 임박해서야 광해군을 왕위에 앉히고 왕비와 영창대군을 잘 보살피라는 교지를 내렸다. 그러나 당시 탁소북의 영수[24] 이자 권신이었던 유영경이 영창대군의 옹립을 위해 이 교지를 자신의 집에 몰래 감추어 왕위 계승을 교란시켰다. 이에 선조의 계비였던 인목왕후가 언문 교지를 통해 광해군의 후계를 인정하고서야 광해군이 즉위할 수 있었다.[25]
선조는 임진왜란에서 드러난 왕같지도 않은 인성 때문에 인기가 매우 낮은 편이었고, 위의 사건 이후 소북이 몰락하면서 광해군은 신하들의 강력한 지지를 등에 업고 즉위하게 된다. 오히려 선조가 광해군에게 취했다는 견제 행위는 광해군 정권 초기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고, 현실에서는 인기가 낮아진 선조가 정권후반 레임덕에 시달리지 않고 본인의 정책 기조를 유지하기 위하여 벌인 시위에 가까웠으나 대국적인 관점에서는 지극히 한심한 행동이었으며 결코 무시할 것은 아니었고 신하들의 끊임없는 반발을 사게 된다. 다른 신하들은 따라서 광해군의 즉위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다만 이런 선조의 기세를 등에 엎은 탁소북 유영경의 월권, 훗날에 이어지는 영창대군과 인목왕후를 향한 과한 핍박과 정적을 향한 지나친 숙청을 볼 때 이러한 적합한 후계자를 양성해야 하는 선조의 임무방기를 넘어선 과한 견제가 정신적 영향을 끼쳤다고밖에 볼 수 없다. 이는 자신이 멀쩡히 살아있음에도 칭왕을 한 아들을 대계를 위해 받아들인 당 현종과는 그릇의 격차를 느끼게 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선조의 레임덕 회피에 이용된 영창대군 문제는 점차 옥사와 정파간 균형 파괴로 이어져버렸다. 이이첨을 중심으로 한 대북 세력은 권력을 더욱 강화하고자 광해군의 불안감을 노골적으로 증폭시키기 시작한다. 기폭제가 된 것은 임해군을 시작으로 한 봉산 옥사, 김직재와 신경희의 옥, 계축 화옥 등 거듭 발각되는 역모 모의 사건이었다. 이 사건들은 대부분 과장된 허위성 고변에 불과했다. 대표적인게 봉산 옥사. 광해군 역시도 이러한 숙청이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왕권 확립을 위해 묵인했을 가능성이 높다. 광해군은 조정, 재야, 당파를 막론하고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음에도 부왕 선조가 이몽학의 난 이후부터 보여준 극심한 노이로제 증상을 똑같이 겪었다. 그 결과 왕권을 위협할만한 징후가 보이면 주저없이 친국을 통해 이를 가차없이 제압해 버렸으며 이 과정에서 옥사에 찬동한 이이첨 등 대북에 권력이 쏠리게 된다.[26]
선조의 사망에 허준과 광해군이 관여했다는 독살설 음모론을 미는 사람들도 간혹 있다. 그들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열거해보면 우선 선조가 의외로 제법 건강한 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돌연사했으며 당시에 어의였던 허준이 광해군의 비호로 인하여 왕의 죽음으로 어의인 그에게 내려지는 형식적인 형벌이 귀양에서 그쳤다는 점, 심지어는 북인의 신하들이 허준에게 더한 중벌을 내려야 한다는 상소를 내렸으나 광해군은 이를 모두 묵살했다는 점들이다.
그러나 독살설과 관계없이 허준을 등용한 사람은 광해군이 아니라 선조였다. 광해군이 허준에게 호의를 보일만했던 점은 광해군이 왕자였을 때 두창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와중에 자원하여 치료를 해주고 마침내 완쾌시킨 사람이 허준이었다는 점 정도이다. 허준은 그 공로로 당상관에 오른 적도 있었는데, 실록에서도 이와 관련하여 광해군 치료에 대한 포상이 너무 과하다고 신하들이 따지는 대목이 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허준을 등용한 첫 왕은 바로 선조였다. 오히려, 선조는 허준의 입장에서 은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 시대에 왕이 죽었다고 무조건 어의들을 때려잡듯이 벌을 주고 귀양을 보낸 것은 절대 아니었다. 노환으로 인한 자연사의 경우 거의 책임을 묻지 않았으며 병사한 경우에도 형식적인 귀양으로 끝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유배에도 급이 있어서(가령 자기 땅 많은 곳에 보낸다든지, 자원 부처라든지.) 누가 봐도 형식적인 귀양이라면 그냥 휴가보내듯 갔다가 돌아올 수도 있다.[27] 따라서 음모론은 말 그대로 음모론일 뿐이며 오늘날 허준은 당대 조선의 민중을 구원한 위대한 의술가로 높이 평가된다. 게다가 이 음모론 자체도 인조반정 당시 인목대비의 주도로 광해군의 죄상에 포함시키려다가 바로 그 광해군을 폐위시킨 서인들이 말도 안 된다며 반발하여 빠진 부분이다. 말 그대로 찹쌀 떡밥.[28] 애초에 이러한 독살설들은 대부분 심증에 지나지 않는다.
2.4. 붕당 간 균형의 붕괴
위의 불안정한 상황 때문에, 광해군은 초기부터 선조와 인조의 실책에 버금가는 극심한 왕권 노이로제를 보여준다. 수많은 옥사들은 붕당간의 균형을 뒤흔들었고, 특히 대북이 인조 시기의 서인들에 맞먹는 패악을 부리게 된다.[29] 특히, 대신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옥사에 찬동한 대북파의 힘이 너무 커져 광해군은 이이첨에게 위협을 느끼기 시작한다. 윤선도의 상소에서도 지적되었듯이 여러 옥사들을 주도하며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된 대북은 이후 각종 국가 기관들과 심지어 과거 시험까지 조작해가면서 권력을 다지게 되었고. 광해군 초기 실세 그룹이었던 소북파인 박승종과 유희분마저 손쓸 수 없는 정도로 막장화되어 버렸다.
광해군이 총애하던 허균이 처형당하기 직전 할 말이 있다고 외쳤고 광해군 또한 허균의 말을 들어보려 하였으나 이이첨이 광해군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신의 독단으로 허균을 처형하는 등 대북에게 왕권이 잠식되어 있는 막장 직전의 상황이 되었다.
선조는 기가 막히게 인물을 돌려쓰면서 붕당을 제어하면서 정무적 능력을 보여준다. 건전한 정치문화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동서인들을 적절히 이간질해 자기들끼리 칼춤을 추게 만든 뒤 너도 먹고 나도 먹는 사약 레이스 연 뒤 슬쩍 중재하는 등...반면 광해군은 그런 정치력을 보여주지 못해서 결국 이이첨에게 휘둘려 이이첨 독재의 길을 열었는데 결국 이는 조선의 내정의 피폐화는 물론 결국 인조반정으로 마무리 된다.
이 때문에 광해군은 옥사에 대한 시각이 바뀌었으나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이귀와 김류 등 서인 세력들은 광해군의 잦은 옥사 때문에 피해를 입는 바람에 광해군에게 원한을 품어 잠재적 불만론자들이 되어버렸고 그들에 대한 경계를 거두고 오히려 권신인 이이첨 등 대북파로부터 권력을 거둬들이기 시작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이처럼 경계를 푼 결과는 거사 당일 날의 밀고마저 일축함으로써 인조반정이 성공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2.5. 폐모살제
'''廢母殺弟'''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이다.
인조반정 세력이 광해군을 축출하기 위해 세운 명분 중의 하나가 소위 폐모살제라 불리는 친족에 대한 무자비한 견제였다. 형인 임해군을 독살했고, 조카인 능창군과 이복 동생인 영창대군을 유배보낸 뒤 사실상 목숨을 빼앗았으며, 인목왕후를 서인으로 강등하여 경운궁에 유폐시키는 패륜을 저질렀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임해군, 능창군, 영창대군을 죽이도록 광해군이 직접 교사했다는 사료는 전무하다. 사실 실록에 등장하는 영창대군 살해 진상은 '''그 때 그 때 다 다르다.''' 또한 영창대군 사사에 연루된 인사들 중 영창대군 살해에 가담했던 정항 등 상당 수는 훗날 인조반정 공신들에 의해 복권되었다. 어느 쪽이든 당시 정황상 심증으로 광해군이 그랬을 거라 취급하는 것이며, 또한 반정 세력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실처럼 몰아간 면도 꽤 있는 편이다. 기록에 따르면 저들은 모두 유배지의 현지 관리가 왕명과 무관하게 임의 살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이첨 등 대북 강경파의 소행이라는 견해가 있다.[30]
2.5.1. 이의 살해 관련 의혹
다만 영창대군을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는 강화 부사 정항 등 의심자들에 대해 딱히 이렇다할 처벌이 이뤄지지 않았고, 이것이 광해군이 내심 이들의 행위를 두둔했다는 것이 근거로 꼽히기도 한다. 임해군의 경우 '어쩔 수 없이 따른다'면서도 가족과 노비까지 혹독히 수사하면서 몰아붙였고[31] , 처음 임해군이 병사했다고 보고했으나 인조반정 이후 재조사 도중 노비가 "독약을 올렸다가 임해군이 먹지 않으니 목을 매어 죽였다"고 증언한[32] 대상인 이정표라는 인물은 임해군 사후 전혀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영창대군을 감시하는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런 미온적인 대응과 광해군이 일으킨 옥사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가혹한 조치가 표면적으로 극형을 꺼린 광해군의 입장과는 앞뒤가 맞지 않다며 도마에 오르기도 한다. 진짜 의중과 이면에 감춰진 진실은 본인과 연루자들 밖에 모를 것이다. 그런데 정작 정권을 뒤엎고 집권한 인조 자신조차 영창대군 살해 관련자(이정표, 정항)들에 대한 처벌 요청에는 시큰둥하다 못해 '''아예 화를 내면서 막았다.'''
그리고 거기에 영창대군의 죽음이 증살설, 굶어죽은 것, 양잿물을 먹여 죽게 했다는 등 일관되지 못하고 광해군 시대에는 병사설이 정설이었다가 인조 후 다양한 죽음설들이 돌며 광해군이 살해한 것으로 묘사되고 인조 측도 폐모살제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정작 재조사는 없었기에 영창대군의 죽음은 병사가 맞고 살해했다는 것은 누명이라는 의견도 간혹 보인다.
또한 광해군 대에 영창대군이 죽었을 때의 상소의 내용은 '''역적을 국법으로 죽여야 하는데 정항 놈이 제대로 관리를 안해서 국법으로 처벌을 내리기도 전에 죽어 종묘 사직을 욕되게 하였으니 정항에게 벌 주세요''' 정도로 되어 있다고 한다.
특히나 정항이 살해했다는 말은 인조나 서인 측에서도 단순히 소문일 뿐이라며 정항의 가족들에게 아무런 위해도 끼치지 않았었고, 본래 인조 대에 편찬된 광해군일기의 중초본에 "정항이 영창대군에게 밥을 주지 않아 영창대군이 기력이 다해 죽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33] 정항이 영창대군을 증살하였다" 등 일관되지 못한 내용에 인조 대의 영창대군의 비문에는 불을 피우지 않아 영창대군이 얼어죽게 만드려고 했다가 안 죽으니 양잿물을 먹여 죽였다고 되어있으며, 이 양잿물설은 인조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또한 양잿물을 먹인 것은 정항이 아닌 이정표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이덕형 등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은 신료들이 역적이라고 하는 영창대군을 어린 아이를 섬에 보내 중병에 걸려 죽게 한 자신의 책임이라며 영창대군을 대군의 예로 장례를 치르게 했다.
영창대군이 죽기 며칠 전에도 중병에 걸렸다고도 하는 등의 내용이 있고 정항이 급한 서신이라며 보낸 서신도 있긴 하지만 정설은 없이 수많은 추측들이 오가고 있는 상황으로 영창대군의 죽음은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 경우는 반론이 있다. 이정포가 별장 홍유의에게 영창을 죽이자고 했지만 홍유의는 반대했고 교체되었다. 그리고 강화 부사 기협도 파직됐는데 그 이유는 "강화 수령으로 있을 때 역적 의를 비호하여 하지 않는 짓이 없었으며, 음식 공급을 그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었다는 게 이유였다.[34]
2.5.2. 신경희의 옥
능창군의 경우는 '신경희의 옥'이라는 반역죄의 핵심 인물로 연루되어 즉결 처분해도 상관 없음에도 불구하고 유배형에 처했다. 또한 이 죄목을 적용하면 광해군은 능창군의 형인 인조(능양군)과 그 아비인 정원군도 굴비처럼 엮어 숙청할 수 있었고, 결국 인조는 왕에 오르지 못할 뻔했다. 다만 패륜 여부를 떠나서 신경희의 옥사 자체가 평소에 소명국과 친했던 신경희가 소명국을 간통죄로 고발하자 옥에 갇힌 소명국은 뜬금없이 신경희가 역모를 꾸몄다고 고발한 것이다. 둘의 대질에서 소명국의 말에 신경희는 우물쭈물했다고 하고 광해군은 이에 분노해 신경희를 엄하게 신문할 것을 명령하였다.
문제는 이 신경희가 바로 이이첨의 사람이었다는 것으로. 박승종은 이 말을 듣고 "과연 역적이 가까이에 있었다"고 외쳤다고 하며. 박승종이 이이첨을 잡으려고 침소봉대한 사건인데다가 결정적으로 사건의 전모를 밝히기 전에 지나친 고문으로 신경희가 옥사해버리면서 흐지부지된 감이 있다. 정확한 증거나 증언이 나오기도 전에 용의자가 죽어버렸으니 그걸 빌미로 마구 죽일 수도 없었으므로 관련자들을 즉결 처분하는 건 실제로도 무리한 감이 있었다. 결국 이게 나비 효과를 만들게되었다. 능창군은 유배간 후 자살, 아버지 정원군은 그 충격으로 죽었고 이에 분노한 능양군이 복수를 다짐하였고 반정의 주역인 신경진은 신경희의 사촌 동생이었다.
2.5.3. 이이첨의 사주
폐모론 수용과 관련해서, 광해군 5년 당시 이위경이 이이첨의 사주를 받고 정조, 윤인 등을 비롯한 태학생 19명을 대동해 폐모소를 올리자 처음에 광해군은 그 주된 근거인 신덕왕후 및 이방석, 방번의 전례를 상고해보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대사헌 이지완과 최유원이 이에 반하여 상소하자 "국모를 동요하니 그 죄가 윤리와 기강에 관계된다"며 이위경 등 20명 모두에게 정거(停擧)[35] 조치를 내렸다. 여기서 일단락 될 뻔했던 폐모론은 4년이 지난 광해군 9년 11월에 다시 유생들(박몽준, 한보길, 윤유겸 등등)의 빗발치는 상소로 불거져 의정부에서 논해졌는데, 당시 광해군일기 11월 ~ 12월자를 보면 온통 유생들의 폐모 상소 관련 내용이다. 결국 유생들의 상소 러시로 촉발된 폐모 정국 과정에서 조정은 허균, 이이첨 등 대북을 위시한 찬성파와 기자헌, 이원익, 이덕형 등의 반대파 두 패로 갈라졌고, 심지어 양사까지 나서서 폐모를 주청하는 등 몇 년을 끌다 광해군 11년 무렵에야 겨우 서궁에 안치시키는 선에서 마무리된다.
이런 와중에 선조 생전에 영창대군을 지켜달라는 말을 들은 여러 노신들이 김제남의 가족들과 함께 잡혀왔었는데 그 중 박동량이 서궁에서 왕에 대한 저주가 이루어졌다고 고변하였다. 그 내용은 대군 궁방의 사람들은 선왕께서 병환에 시달리게 된 이유를 선조의 첫 왕비인 의인왕후에게 돌렸고 그리하여 수십여 명이 요망한 무당들과 함께 잇따라 유릉에 가서 저주하는 일을 대대적으로 벌였다는 것이다.[36]
2.5.4. 사관의 주장
다만 사관은 그들이 저주한 게 의인왕후가 아닌 광해군의 어미인 공빈 김씨의 능에서 했다고 적고 있고 그마저도 임해군이 노비들을 동원해 막아서 실제 하진 못 했다고 적고 있다. 이 말로 인해 대비전의 궁녀들이 줄줄이 불려와 고문을 가해 새로운 증언이 나왔고 그 증언에 따라 선조의 능까지 파보았다. 하지만 증거가 발견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국 역모에 휘말린 김제남은 6월 1일에 사사되었고 이즈음 궁중에서는 과거 작서의 변 때와 같은 유사한 일들이 많았다. 실록의 사관은 인목왕후의 어미 정씨의 소행이라 주장하였다. 결국 광해군일기 11년 1월 13일자에선 이를 조보에 내지 말라고 굳이 덮어두는 조치가 눈에 띈다.
광해군은 폐모론 주창자 중 정조, 윤인 등을 삭직했다가 복귀시켰고, 폐모론 반대 주창자 중 이원익은 한동안 유배 후 고향인 여주로 돌려보내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유배 당시 이원익은 아래와 같은 말을 했다.
광해군은 이 말을 듣고 어디서 들었냐고 따졌고, 이원익은 그냥 걱정돼서 한 거라면서 남에게 들은 게 아니라고 답한다. 결국 이 일은 이원익의 유배로 마무리되었다."지금 항간에 떠도는 말을 들으니, 머리를 맞대고 흉흉하게 하는 말이 ‘이로 인해 장차 대비에게까지 미칠 것이다.’고 합니다. 신은 그만 놀라서 간담이 철렁 내려앉아 자신도 모르게 혼비백산하였습니다. 어미가 비록 사랑하지 않더라도 자식은 효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모자간이란 그 명분이 지극히 크고 그 윤기가 지극히 중합니다. 성인은 인륜의 극치인데, 성명의 시대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만일 조정에 과연 이 논의가 없었다면 신이 경솔히 항간의 말을 믿고 사전에 시끄럽게 한 것이니 그 죄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신이 함부로 말한 죄를 다스려 사람들의 의혹을 풀어주소서. 그러면 이보다 더 다행스러운 일이 없겠습니다."
이창록이라는 이는 7년 8월에 강경한 상소를 올렸다가 죽기도 하였다. 그 내용이 좀 과격하긴 했지만.
실록에서는 그 내용을 그대로 전하지 않고 야사에서는 그가 평소에 이런 말을 하고 다녔다고 적고 있다. 다만 앞부분 형과 아우를 죽였다는 건 실록에서도 나온다. 다만 야사에서는 정인홍이 이를 고발했다. 하는데 정작 정인홍은 광해군과 만났을 때 이걸로 그 고을까지 벌 준 걸 좀 까는 뉘앙스의 말을 하였다."형을 죽이고 아우를 죽였으니 이 일을 어떻게 차마 하였는고. 내 어찌 착하지 못한 이를 임금으로 여기랴?"
2.5.5. 폐모론 여론 조사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광해군은 폐모론에 대해 여론 조사를 시행한 적이 있다. 세종의 공법 여론 조사는 잘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여론 조사는 광해군일기에도 나오지만 <추안급국안>이라는 사료에 좀 더 자세히 나오는데, 이 자료에 따르면 이 조사에 참가한 인원은 전현직 관리 970명, 종실 170명과 도성에 사는 많은 백성들이었고 그 결과는 소수의 관리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찬성 의견을 냈다.[37] 그러나 폐모론에 대한 인목왕후 폐비에 대한 여론 조사에서 압도적으로 찬성으로 나왔다지만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이이첨이 자파 세력을 동원해 여론 조작을 했다는 것이 명백히 기술되어 있다. 또 신료들 대부분이 찬성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폐모론에 반대한 서인 남인 원로 대신을 광해군이 다 쫓아내 대북 세력만 남은 상황에서 여론 조사를 했으니 당연히 찬성이 높게 나올 수 밖에 없었다.
2.5.6. 외교에 끼친 영향
어쨌든 광해군 재위기에 터진 이런 저런 일들은 반정 세력의 좋은 명분이 되었음도 사실이며, 임해군 사사건은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까지 얽혀 대중국 외교에 상당한 무리를 주게 되기도 했다. 인목대비의 예도 광해군보다 9살이나 어리긴 하지만, 여하간 유교적으로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북을 제외한 붕당들의 반발이 있었다. 대북 내에서도 곽재우, 기자헌, 유몽인 정창연 정온 같은 이이첨 일파가 아닌 대북이나 유희분, 박승종, 남이공 같은 소북 공빈 김씨의 남동생으로 광해군의 외숙인 김예직마저 폐비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다만 광해군이 폐비하라고 정식으로 교서를 내린 일은 없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다시 말해 인목대비는 폐비 취급을 당하긴 했으나 공식적으로 폐모가 된 것은 아니었다.[38]
2.5.7. 광해군에게 끼친 영향
하지만 폐모살제는 결국 광해군 본인의 몰락을 불러왔다. 서인, 남인, 대북파, 소북파, 친척까지 광해군에게 반대하고 나서는데 결국 광해군은 이를 단행했다. 비록 인목왕후를 정식으로 폐위시키지 않았고 설사 좋은 궁궐에 가두었다고 해도, 결국 아들이 어머니를 강제로 감금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이는 유교가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큰 문제다. 특히 위에 서술 되었든 영창대군 죽음 이후에도 광해군을 지지하는 비 이이첨 일당[39] 사람들이 폐비를 결사 반대하는데 이를 유배와 숙청 등으로 이룬다. 그런데 이로 인해 이이첨을 비롯한 대북파 일부가 권력을 차지해 자신과 격렬하게 대립함에도 광해군은 이들을 숙청하지 못한다. 서인, 남인을 다시 끌어들이려면 대비의 유폐 문제가 일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광해군은 즉위한지 14년이 되고 나서야 겨우 서인, 남인들을 다시 포용하기 시작했다.[40] 광해군이 유폐를 단행한 것은 특유의 미신에 대한 집착과 불안감이 만들어 낸 것이지만, 대비 유폐는 광해군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만약에 광해군이 조금이라도 상식있고 포용력 있게 나갔다면 대북의 일당 독재로 벌어진 빈 틈 없이 정권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폐위 과정에서 알 수 있듯 광해군은 본인의 내치에서 보인 무책임한 태도와 함께 폐모살제는 단순한 명분론 차원의 문제를 넘어 광해군 자신의 목을 조르게 되었다.
3. 정책
3.1. 대동법 시행과 반대
광해군 즉위년,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건의로 경기선혜법으로 대동법을 최초로 실시하였다. 하지만, 광해군 본인은 이 법의 시행 건의를 받아들이면서도 개인적으론 부정적이었고 일찍이 시도나 성공 전례가 없었으므로 이 법이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겠냐며 강한 의구심을 드러냈다. 그리고 시범 실시 지역인 경기권 밖으로 선혜법을 확대하자는 주장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을 분명히 했다. 대동법은 당대에도 반발이 심했으며 결국 100년이나 더 지나서야 제대로 시행이 된다.
자세한 건 대동법/광해군 시기 참고.
3.2. 전후 복구
호적과 토지를 다시 조사하여 세수를 확보하고, 왜란으로 인해 소실된 여러 서적들을 복원했으며 동의보감을 발간했다. 또 창덕궁 등을 지어 왕실의 권위를 바로 세우려 노력했다. 또 임진왜란 과정에서 한양이 생각보다 방어에 취약하다는 것을 느꼈던지 일찍부터 천도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이에 지관 이의신의 견해에 따라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요지인 파주의 교하로 천도하려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신들이 묘청의 난 등의 전례를 들어 적극적으로 반대했고, 결국 반정으로 실각함에 따라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 외에 광해군 시기 적상산성과 남한산성 석성 개축, 북방 성벽 강화, 강화도에 진지 구축, 수군 훈련 등이 기록에서 확인된다. 다만 광해군 대부터 인조 대까지 반란과 호란으로 소실된 기록이 많아 구체적으로 얼마의 병사들이 전방에 배치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부실한 편이다.
반정 세력은 집권 후 민생 파탄의 주범이었던 궁궐 공사를 중지하는 제스쳐를 내보여 급작스런 정권 교체로 혼란한 민심을 수습하려 했다. 물론 인조 정권 역시 이괄의 난과 호란으로 궁궐 등을 공사를 하긴 했지만 인조 대의 그것은 규모와 필요 성면에서 광해군 대의 그것에 비교할 만한 것이 아니다.
3.3. 기록물 편찬과 보존 사업
일반적으로 광해군은 동의보감의 편찬과 완성을 후원했던 것으로 특히 유명하나, 그 외에도 국조보감,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을 재간 및 보급했다.
조선왕조실록과 관련해서는 재위 2년차에 무주군의 적상산성을 수리하면서 적상산 사고를 새로 설치한 것이 유명하다. 그는 임진왜란을 겪은 이후 줄곧 새로운 외침 가능성을 내다보았고 특히 후금의 침입 가능성에 대해서는 훗날 호란 때의 실제 침공 루트까지도 거의 간파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기존 사고의 불안성을 보완할 새로운 실록 사고 건축을 명했는데, 결과적으로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거치며 마니산, 춘추관 사고에 보존되어 있던 사료들 태반이 소실됨으로써 이 예견은 맞아떨어졌다. 참고로 적상산 사고본은 정묘호란 당시 그곳을 지키던 승려 상훈이 재빨리 인근 굴 속으로 숨김으로써 무사히 보존될 수 있었고, 현종 때 소실된 실록들을 보완했던 작업에서는 적상산 사고본이 주된 참고 사료가 되었다.
3.4. 이중외교
건주여진의 누르하치가 흥기하여 1588년 건주여진을 통합하고 칙서 500여 통을 확보함으로써, 이듬해 명으로부터 도독첨사를 제수했으며, 1595년에는 용호장군(龍虎將軍)이라는 직첩을 받았다. 조선은 건주여진 부족정들과의 호시와 개시 관할 구역을 명과 분점했었으나, 누르하치가 건주여진을 모두 정복하고 1601년 해서여진의 하다(hada) 마저 병합하면서 조선에 서신을 보내어 직첩을 요구했다. 조선 조정은 이중수직을 받는 여진인이 16세기 중반 이래 사실상 자취를 감추고, 임진왜란으로 종주국 명과의 관계가 밀접해진 국제정세에 따라 인신무외교의 원칙을 준수한다는 명분으로 그의 요구를 거절했다. 식량난에 시달리던 누르하치는 대신 양곡을 빌리겠다는 타협책을 제시하였으며, 조선 측도 건주여진과의 충돌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1613년까지 해마다 만포에서 수백~수천여 명의 여진인들을 구휼했다. 또한 누르하치에게 복속한 안추라쿠(anculakū) 내하(內河, dorgi birai golo; 동량북)의 로툰(lotun)에 대해서도 무산을 진으로 승격하고 개시하는 방법을 통해 변경의 안정을 도모했다.[41]우리가 광해군이 뭐 엄청난 탁월한 외교가가 돼 가지고 뭐 중립외교하고 그런게 아니라 자기방어에요. 여러분이 왕이면 지킬게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내 왕위를 지켜야 하고, 두 번째는 왕조, 즉 종묘사직을 지켜야 해요. 누가 위협합니까? 내 에너지가 100이 있으면 편의상 50은 내부의 적을 막는 데 쓰고, 50은 외부의 적을 막는 데 쓰는데 ... 근데 문제는 외부의 적이, 강력한 적이 나온 것입니다. 근데 이건 내가 붙을만한 적수가 아니에요. 도움도 올 때가 없어요. 그러면 어떡합니까? 누르하치하고 창구를 열어서, 핫 라인을 열어서 명나라 몰래 은밀하게 대화해야 해요. 그니까 이건 제 개인 학설이지만, 중립외교라고 하는 거는 말이 안되고, 이중외교라는게 맞다는거죠. 여러분 중립외교라고 하는 건 A, B, C 삼국이 있을 때 똑같이 100% 독립국이에요. A와 B가 싸우는데 C가 중립을 지킨다하고 싸움에 안들어가. 그게 중립이에요.
계승범(2018), "조선시대 해외 파병과 한중관계", 제14회 박물관역사문화교실.
누르하치는 1605년 만포첨사에게, 1607년에는 선조에게 보낸 서신에서 건주등처지방(建州等處地方)의 왕을 자칭하고 건주좌위의 인신도 대체하면서 명의 위소제도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군주로 군림하고 있다는 늬앙스를 풍기면서도, 이성량이 경질된 것이나 조선의 대명보고를 의식하여 명에 대한 조공을 재개하는 한편, 조선과는 허례에 불과하긴 했지만 번호규례(藩胡規例)를 준수해주며 오갈암 전투를 통해 우라(ula) 세력을 축출한 회령 방면으로 초피무역을 추진하였으며 녹봉을 지급받았다. 광해군과 장만 등은 비록 흉폭하긴 하나 우라를 통해서 건주여진을 견제하고자 다양한 방식으로 정보를 수집했으나, 1613년, 누르하치가 우라를 친정하여 국성을 함락하고 버이러(beile)인 부잔타이는 예허(yehe)로 망명함으로써, 대여진 정책은 완전히 일원화 됐다.[42]
1614년, 만력제가 누르하치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요좌(遼左)의 번리인 예허(yehe)를 누르하치로부터 구원할 것을 명하며 예허의 두 성에 명의 화기수(火器手) 천여 명을 주둔시켰다. 이러한 만력제의 적극적인 태도에 요동아문의 분수도 백양수(白養粹)는 조선에 징병을 요청했다. 자신의 생모인 공빈 김씨에 대한 추숭을 순조롭게 성사시키고자 한 광해군은 징병 가능성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줘 의주에 1만의 병력을 주둔시켰다.[43]비변사가 아뢰기를, "호차(胡差)가 나오면 그 문답할 말을 투서 및 박규영(朴葵英)이 가지고 갈 글의 뜻으로 참작하여 가감하고, 별증(別贈)을 후하게 주어 반드시 환심을 얻도록 하되, 아주 상세하고 신중하게 하여 중국 사람이 알지 못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뜻을 원수(元帥)·찬신(贊臣)·(의주 부윤에게) 치유(馳諭)하여 (어설프게 잘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라고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 적이 바야흐로 (용천에 명 감군어사가 이끄는) 수병(水兵)이 나온 것과 우리 나라가 중국 장수를 대접해 주고 있는 데 대하여 크게 노여워하고 있으니, 이번 문답 때 대답할 말을 상세하게 지시하여 주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1618년 요동순무 이유한(李維翰)은 누르하치의 요좌 진출에 대항하여 조선에 원병을 지시했으며, 계료총독 왕가수는 수만 명의 병력을 징발할 것을 요구하는 격문을 발송했다. 명에 대한 원병은 후금에 대한 적대로 이어져 조선 서북 지방에 대한 후금의 침략을 부를 것이고 이는 명이 요동 변경에 있어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조선에 파병하면 선조 때처럼 왕권이 추락하거나 조선이 후금의 침입을 받아도 요동아문이 제대로 돕기 어려워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이때문에 비변사와 광해군은 칙서의 부재와 요동아문의 월권 등을 불편해하면서 조선군의 미약함, 명군의 변경 파견 요청 등을 명분으로 출병을 최대한 피하고자 했다. 조선의 바람과 달리 명군과의 군사적 공조가 현실화되자 광해군은 주본을 올린 이상 만력제의 성지가 없이는 움직이지 않겠다는 방침을 내놓는다. 그러나 경략 양호는 만력제의 칙서에 '고무조선(鼓舞朝鮮)'이라는 문구가 있었음을 내세우고, 재조지은의 논리로 출병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또한 조선 측의 자문에 대해서 관망의 태도가 있음을 힐책하고 예허의 적극적인 징발을 비교하면서 1만 명의 정병을 차출할 것을 명령했다. 소중화를 자부하던 조선의 정체성을 깎아내리고 성지를 거론한 양호의 논리는 조선의 명분을 전부 무력화시켰다. 이에 광해군은 자신에게 직접적인 성지가 없었다는 논리를 내세우나, 비변사는 경략이 칙서를 받든 이상 군사적 공조는 더이상 요동아문의 월권 행사가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켰다. 광해군은 이에 수긍하면서도 칙서의 부재를 내세웠고, 조정 신료들은 이에 동조하지 않았으나 그의 의중을 어느 반영해주었다. 광해군의 의지와 달리 요동아문의 분수도 염명태와 요동총병 이여백의 자문이 잇달아 수신되어 공조를 다짐했으며, 또 회답의 재촉과 추가 병력 배치를 요구하는 양호의 자문도 접수되었다. 게다가 병력을 준비해놓고 칙서를 기다리겠다는 성절사 윤휘의 주본이 명 조정에 수신되자 만력제는 병부의 복제에 따라 출병을 꺼리던 광해군에게 직접 칙서를 내려 출병하게 하였다.[44]
출병이 불가피해지자, 광해군은 패전할 경우를 대비하여, 조선군이 명 장수의 지휘를 받지 않도록 하여 도원수 강홍립의 지휘권을 지키는 한편, 조선군을 명의 동로군에 예속시켜 자의에 따른 출병이 아님을 드러내고자 했다. 또한 동로군이 출병하기도 직전 후금과의 초피 교역을 시행하고 녹봉을 지급했으며, 이 과정에서 회령부사 한명련으로 하여금 누르하치의 차관 쇼롱오(šolonggo)에게 "우리가 어쩔 수 없이 군대를 보냈지만 명군의 진[唐陣]의 뒤에 있을 것"이라 유시하였다. 한명련과 같이 광해군의 밀령을 받은 강홍립은 배동관령에 이르러 호역 하세국을 허투아라로 보내어 조선 측이 후금을 적대시하지 않으며, 이번 출병은 상국(명)의 재촉을 받아 부득이하게 한 것으로, 얼마안되는 군졸들은 명군 진 뒤에 있었다고 전했다. 마찬가지로 사르후 전투 현장에서는 조선군 좌우영이 전멸하자, 다이샨은 조선군 중영에 통사를 요구했고, 이에 강홍립은 통사 황연해로 하여금 "지금은 부득이 해서 온 것"이라 전했으며, 후금 측도 번호 출신들을 보내어 조선의 뜻을 이해하고 있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삼사에서는 강홍립 등을 적신(賊臣)이라 칭하면서 처벌을 주장했으나 이들에게 밀지를 내린 광해군은 그들의 처벌 논의를 수용하지 않았다.[45]비변사가 아뢰기를, "적신 강홍립 등이 명을 받고 싸움터로 나갔다면 오직 적만을 쫓아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도중에서 먼저 통역을 보내어 미리 출병하는 까닭을 통지하는 등 마치 당초에 싸울 뜻이 없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이어, 도망쳐 돌아온 사람들의 말을 듣고도 반신반의하였다가 그들의 장계를 보니, 힘이 모자라 함락을 당하였다는 정상은 조금도 없고 또한 구차하게 살아난 것을 부끄러워하는 뜻도 없이 가는 길의 행군한 절차를 차례로 서술하고 감히 미리 통지하여 낭패하였다는 등의 말을 버젓이 아뢰면서 스스로 그들이 한 일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있으며, 끝에 가서는 다시 회답할 말을 지시해 주어 살아서 돌아오기를 꾀하고 있습니다." …… 전교하기를 …… 대국 섬기는 성의를 더욱 다하여 붙들어 잡는 계책을 조금도 해이하게 하지 말고 한창 기세가 왕성한 적을 잘 미봉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 국가를 보전할 수 있는 좋은 계책이다. 그런데 이것을 버려두고 생각지 않은 채 번번이 강홍립 등의 처자를 구금하는 일만 가지고 줄곧 계문하여 번거롭히고 있으니, 나는 마음 속으로 웃음이 나온다. 본사에서 누차 청하는 뜻을 나 또한 어찌 모르겠는가. 천천히 선처하여도 진실로 늦지 않다. 오직 국가의 다급한 것을 급선무로 삼아야 할 것이다. 노추의 서신이 들어온 지 이미 7일이 되었는데 아직도 처결하지 못하였다. 국가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모두 하늘의 운수이니 더욱 통탄스럽기만 하다."
《광해군일기[중초본]》 49권, 만력 47년 4월 8일 1번째 기사
한편 1616년 정월, 누르하치는 겅옌 한(genggiyen han)이라는 새로운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사르후 전투 직후인 3월 21일, 천명(天命, abkai fulingga) 2년(1618년)이라는 독자적 연호와 함께 후금국의 한(amaga aisin gurun-i han)과 천명금국한(abkai fulingga aisin gurun han)[46] 을 자칭하며, 자신을 조선국왕(solho han)과 대등하게 설정한 국서를 보내어 통교를 요구했다. 광해군은 후금과의 교섭을 통해 난극을 타개하고자 하였으며, 신료들과 달리 비록 속국관계와 그에 따른 사대관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누르하치와의 직접적인 대화에 중점을 두었다. 누르하치는 이외에도 4월 4일 칭한(稱汗)은 물론 명을 남조(南朝)라 지칭하는 서신들을 보내왔으며, 1621년 3월과 6월에는 각각 만주국 한을 자칭하며 광해군을 너(si)라고 지칭하거나, 만포진이 아닌 의주로 발송하는 '''조서'''를 보내왔다. 조정은 회신은 절대 불가하다고 반발했지만, 광해군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서를 받은 것에 대해 개의치 않으며 대화를 강조했다. 그는 즉시 차관을 파견하여 회신을 우호적으로 할 것을 명하는 한편, 회신에 반대하는 비변사 당상들을 세상 물정도 모르는 선비라고 질책했다. 광해군의 독촉에 비변사는 마지못해 그에게 동의했으며, 마침내 누르하치를 '후금국 한 전하(殿下)' 지칭하고 후금과의 신의를 강조하는 답신을 보냈다.[47]
1622년 4월 명이 감군어사 양지원(梁之垣)을 파견하여 청병칙서를 전달했다. 칙서를 근거로 징병을 거부하덤 광해군은 관외가 모두 누르하치의 수중에 들어간 상황에서 선박 지원 외에 군사의 파병은 불가하다는 새로운 명분으로 이를 거절했다. 비변사는 노골적으로 반발하여 명 측과 합의 사항을 도출했으나 광해군은 이에 인준을 거부하였으며, 양지원은 시간을 끄는 조정의 행태를 힐난하며 담당 관리를 군율에 따라 처단하겠다는 언동을 일삼았다. 이렇든 칙서와 존호마저 거절한 광해군은 그해 10월 신료들의 반발 심리를 무릎쓰고 후금에게 국서를 회신하고, 11월에 이르면 마침내 모문룡 휘하 명군을 가도로 이주시킴으로써 1622년 10월경부터 조선과 후금 간 긴장관계는 개선되었으며, 누르하치는 이후 요서 공략이 집중했다. 이런 형세는 정묘호란 발발 직전인 1626년 12월까지 지속되었다.[48]
일련의 사건은 광해군의 외교 정책이 명을 은밀히 기만하던 차원에서 공개적으로 명을 기피하는 차원으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하며, 조선의 적극적 공조로 자리잡혀가던 명질서의 균열 조짐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양반귀족 지지와 명 황제의 승인을 조선국왕의 정통성을 삼은 조선의 양반귀족층에게 군부(君父, 명)와 이적(夷狄, 후금)의 대치 속에서 신자(臣子, 조선)의 이러한 행태는 종주국 황제에 대한 속국 군주의 항명을 넘어 패륜으로 받아들여졌다. 보국안민을 내세우며 실행한 대후금 교섭으로 인해 오명을 쓴 고달픈 처지를 토로하던 광해군은 능양군과 서인에 의해 배명(背明) 행위 등을 했다는 이유로 폐위됐으며, 정변으로 성립된 인조 정권은 명 황제의 책봉을 받기 위해 매달리다시피 하는 것은 물론 모문륭 휘하 명군에게 물자를 쏟아 붇는 등 강한 친명 노선으로 회귀하였다.[49]소성정의 왕대비(昭聖貞懿王大妃)는 다음과 같이 이르노라. …… 우리 나라가 중국을 섬겨온 지 200여 년이 지났으니 의리에 있어서는 군신의 사이지만 은혜에 있어서는 부자의 사이와 같았고, 임진년에 나라를 다시 일으켜준 은혜는 영원토록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선왕께서 40년 간 보위에 계시면서 지성으로 중국을 섬기시며 평생에 한 번도 서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으신 적이 없었다. 그런데 광해는 은덕을 저버리고 천자의 명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배반하는 마음을 품고 오랑캐와 화친하였다. 이리하여 기미년(1619)에 중국이 오랑캐를 정벌할 때 장수에게 사태를 관망하여 향배(向背)를 결정하라고 은밀히 지시하여 끝내 우리 군사 모두를 오랑캐에게 투항하게 하여 추악한 명성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였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 온 중국 사신을 구속 수금하는 데 있어 감옥의 죄수들보다 더하였고, 황제가 칙서를 여러 번 내렸으나 군사를 보낼 생각을 하지 아니하여 예의의 나라인 우리 삼한(三韓)으로 하여금 이적 금수의 나라가 되는 것을 모면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가슴 아픈 일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천리(天理)를 멸절시키고 인륜을 막아 위로 중국 조정에 죄를 짓고 아래로 백성들에게 원한을 사고 있는데 이러한 죄악을 저지른 자가 어떻게 나라의 임금으로서 백성의 부모가 될 수 있으며, 조종의 보위에 있으면서 종묘·사직의 신령을 받들 수 있겠는가. 이에 그를 폐위시키노라.
광해군일기[중초본] 187권, 천계 3년 3월 14일 1번째 기사
3.5. 옥사
광해군 4년(1612년) 2월 13일, 역모 보고가 들어온다. 장소는 황해도 봉산으로 그 장본인은 김제세로 공문서를 위조해 군역을 피하려 하였다가 엉터리로 만들었기에 '위조한 흔적이 현저해 의심의 여지가 없어서' 그를 붙잡아 추궁하였는데 그의 입에서 뜬금없는 말이 나온다. "평산의 대장이 군내에서 반역을 일으키고자 우리 형제로 하여금 허실을 염탐하게 하였기 때문에 여기에 왔다." 김제세가 대장이라고 고한 김백함은 바로 붙잡혀왔고 이름이 나오는대로 굴비 엮이듯 줄줄이 들어왔으며. 광해군은 이를 직접 심문(친국)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사건이 이상해져갔다. 일단 맨 처음 황해 병사 유공량의 장계에서도 그런 부분이 나오는데 이런 내용이다. "그의 꾸며대는 말이 괴이하여 다시 국문을 가한즉 말이 혼란하여 믿을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17일, 황해 감사 윤훤과 병사 유공량은 각기 장계를 올리면서 공초에서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다고 보고하였다.
"그자는 이미 어보와 인장을 위조하고 체포된 뒤 틀림없이 사형이 될 것임을 스스로 알고는 평소에 일면식이라도 있고 조금이라도 원한이 있는 사람은 다수 끌어대어 묻는 대로 대답하는 말들이 마치 미리 외워놓은 것처럼 하였습니다. 그러니 또 무어라 끌어댈지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중략) 앞뒤로 말을 바꾼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풍병이 들었거나 정신나간 사람은 아닌 듯한데, 형제가 같은 말로 공초를 하였으니,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 윤훤
현장에서 이들을 심문한 병사와 감사가 거짓을 말했다고 본 것이었고 이 일을 듣고 이덕형이 급히 들어왔는데 그 역시 죄인들이 다 잡혔으니 더 일을 크게 만들 필요가 없다는 쪽으로 말하지만 광해군은 그럴 생각이 없어 매일마다 친국했다, 붙잡혀 온 이들이 부정하면 곧바로 압슬형을 행하였고 그렇게 죄인들은 압슬형을 당하면 이런저런 이름을 댔다가 다시 부정했고, 또 압슬형이 시작되면 다른 이름들을 끌어내는 식으로. 여기서 나온 이름이 그냥 아무 사람일 수도 있고 자기가 원한이 있는 이였을 수도 있었지만 참 많은 사람들이 또 끌려오게 되었다. 대장이라는 김백함은 2월 22일에 다른 이들과 함께 거열형에 처해지는데 이 때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나라가 나에게 속았다!" 이런 것을 근거로 박승종 등은 계축 옥사 때 적당히 하라는 쪽으로 광해군에게 말하지만, 광해군은 이렇게 답한다. "역적을 국문할 때에는 엄히 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러다 보면 국맥을 실제로 손상시키게 될 것이다. 나 역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역적이 끌어대는 숫자가 점점 많아져서 많은 사람들이 의구심을 가지며 민간에서는 소요하여 뜻밖의 변란이 이로 말미암아 발생할 수도 있겠기에, 신의 어리석은 염려도 아울러 장계 중에 언급하였습니다. (중략) 심문하여 전일의 공초를 가지고 힐문하니 대개 앞뒤가 들어맞지 않았습니다. 모든 역모를 꾀한 사실을 마치 심상한 보통 이야기 하듯 하고 두서 없고 혼란한 말들을 많이 하였습니다" - 유공량
3.5.1. 봉산옥사
옥사가 확대되는 가운데 모든 일의 시작이었던 봉산 군수 신율의 지인 유팽석도 끌어온다. 그는 황혁, 정경세 등의 대신부터 정인홍까지 끌어들였고 여기에 유영경의 자식들까지 끌어들였다. 원수 사이인 정인홍과 유영경이 같이 역모를 꾸몄다고 고한 것이다. 광해군은 정인홍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모두 붙잡았고, 황혁은 죽고 정경세는 파직되었다. 실록의 사관 평에서는 이게 신율이 꾸민 것으로 적고 있다. 지인인 유팽석을 희생시켜 자기의 원수였던 황혁과 정경세를 숙청하려 했다는 거였다. 애초에 신율에 대한 평은 좋지 않았다.[50] 고문으로 더 큰 범죄를 만든다는 식으로. 옥사에는 죽은 이들의 처첩과 어린아이들까지 연루되었다. 보통 이들은 관비로 가지 고문을 하진 않지만, 광해군은 이러한 과정에 개입하였다. 9월이 되어서야 이 모든 게 끝이 난다. 이른바 봉산옥사로 이로 인해 100여 가문이 멸문되었다고 한다.
3.5.2. 안위 두둔
그 후에도 지인과 허위 역모를 꾸민다음 그 지인을 고발해버린 일이 벌어지는데 안위[51] 라는 자로 임해군이 잡힐 때 수문장이었던 김위를 본받은 것이었다. 김위는 임해군이 무기를 들고 갔다는 걸 고발했고, 원래라면 수문장이 막지 않은 것이므로 벌을 받아야 하지만 상을 받았기 때문에 그 일을 본받은 것이다. 안위는 거짓 고변을 하더라도 상을 받으려고 음모를 꾸며놓고는 같이 꾸민 이 또한 고발하였다. 그렇게 같이 의논해놓고 역모의 대상이 된 조극신, 그의 아비는 이 모든 것을 꾸민 일이라 자백하라고 하였고[52] 조극신은 이를 모두 자백했지만 광해군은 조극신은 유배보내놓고 안위는 집으로 보내주었고. 거짓이라 해도 알리기만 하면 아무 죄를 묻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때문에 나중에 폐모론이 일때 장령이던 배대유는 "김덕룡이란 자는 간음하다 붙들리자 고변했고 김언춘은 도둑질하다 붙들리자 모역을 했다고 칭했습니다." 라며 깠다.[53] 사실 상식적으로도 광해군이 잘못한 것인데 역모죄라는 게 걸려서 사실로 드러나면 집안 망치는 것이라서 역모를 무고로 고변하면 거의 다 죽이게 되어있다. 하지만 안위의 사례를 보면 '''자기가 먼저 저질러놓고 남을 끌어들여 그 남을 망쳐놓았다.''' 누가봐도 안위가 잘못한 것이고[54] 설령 광해군이 안위를 보호하고 싶다 해도 처벌하는 척쯤은 했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것도 안했으니 앞서 지적대로 고변이 면책 방법이 될 수밖에.[55]
3.6. 궁궐병과 재정파탄
광해군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학자들조차 과오로 인정하거나 아니면 어물쩍 넘어가는 광해군의 가장 심각한 실책. 인조 측의 영향인지 광해군일기에는 광해군이 군사력에 신경쓰는 모습을 보여도 징발을 했다는 기록 등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정작 인조 2년에 바로 광해군 시대 때 5년, 6년간이나 군사 징발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이 가능하며 동시에 광해군일기에서도 궁궐을 수도 없이 지으면서도 죄다 변경에 군사를 밀어넣어서 도성 내에 군사가 3,000명 이하로 떨어질 지경이 되어 업무를 수행할 수도 없어 호위를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도성 내의 군사들까지 죄다 변경에 투입하는 짓을 제발 좀 그만하라고 만류하는 내용이 있다. 궁궐병과 군사력 강화병이 '''이중'''으로 발동되었으니 백성들의 고난은 알 만한 수준.
또 악소배(惡少輩)를 시켜 백성들의 소와 말을 빼앗아 자재를 운반하게 하고, 개경 근처의 각 군(郡)에서 장정을 징발해 벌목한 후 목재를 강물로 떠내려 보냈다. 이로 인해 인마(人馬)의 왕래가 끊이지 않아 주(州)·군(郡)이 소란하니 농민들은 아예 농사를 작파해버렸다. 당시 개경 백성들에 사이에는, “왕이 민가의 어린이 수십 명을 잡아다가 새 궁전의 주춧돌 밑에 묻으려 한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아 집집마다 놀란 나머지 아이를 안고 도망하여 숨는 사람이 많았다. 악소배들은 이 틈을 타서 겁탈과 도둑질을 자행했다.
왕은 완공이 지연되자 노하여 김선장과 박양연 등에게,
“만약 10월까지 완공하지 못하면 반드시 중형을 받게 될 것이고 또 하사했던 물품과 공사 비용도 추징할 것이다.”
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에 김선장 등이 밤낮으로 쉼없이 공사를 독촉하면서,
“재상으로부터 권무(權務)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재를 실어 나르되, 기한에 미치지 못하는 자는 베 5백 필을 징수하고 바닷섬으로 유배보낸다.” 는 방을 붙이니 자재를 실은 수레가 길을 메웠다. 신궁(新宮)의 처마와 문을 모두 놋쇠와 구리로 장식하면서, 백관으로부터 서리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분부해 두 사람당 오종포(五綜布) 1필 씩을 주고 놋쇠와 구리(鍮銅) 2근씩을 징수하니 모든 사람들이 괴로워했다.
또 각 도(道)로부터 구리와 철을 거두어 세 발 달린 솥과 발이 없는 큰솥 및 가마솥을 만들어 신궁에 들여 놓았으므로 민간의 농기구는 아예 남아나지를 않았다. 그럼에도 왕은 공사가 지연되는 것에 노해서 몸소 김선장·박양연·민환에게 장형을 내리니 민가와 사원의 재목·기와·주춧돌·섬돌이 모두 뜯겨져 나갔다. 그 궁실의 구조는 왕의 거소와 사뭇 달랐다.
광해 114권, 9년(1617년 정사 / 명 만력(萬曆) 45년) 4월 18일(임자) 4번째 기사
호조가 궁궐의 건축으로 인한 재정의 부족에 대해 아뢰다
호조가 아뢰기를,
“조정에 이미 궁궐을 짓는 큰 역사가 있으니 백성들이 포목을 내는 것은 참으로 부득이한 것입니다. 다만 지금은 묵은 곡식이 다 떨어져서 백성들은 곤궁하고 재물은 고갈되어 조석조차도 급급합니다. 그러니 만약 달리 조치할 만한 형세가 있다면 전결에 따라 포목을 거두는 것을 정지하여 성상의 뜻을 받들어 따르는 것보다 나은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근년에 들어서는 세입(稅入)이 1년의 쓰임새를 다 대지 못하여서 10월등(十月等)의 반록(頒菉)과 다음해 정월등(正月等)의 반록은 매년 계속해서 대기가 어려웠습니다. 이에 부득이 계청해서 경기와 공홍도의 전세(田稅)를 미리 끌어다가 썼습니다.
광해 155권, 12년(1620년 경신 / 명 만력(萬曆) 48년) 8월 7일(임자) 3번째 기사
공명첩을 만들지 않은 해조의 색낭청을 추고하게 하다
“방추(防秋)할 시기가 이미 다가왔는데, 공명첩(空名帖)을 아직도 만들어 보내지 않았다고 하니, 해조의 색낭청을 추고하라.”
3.6.1. 비상식적인 행동
공명첩[56] 을 발행 안 했다고 조사한다니 고금에 토목 공사를 자주 벌였던 임금 치고 말로가 좋은 경우는 드문데 광해군은 역대에서 유례가 없을만큼 새로 짓고, 꾸미는데 열심이었다. 광해군은 즉위 직후, 불타버린 종묘의 중건을 마쳤고 선조가 시작한 창덕궁 중건 사업을 재개하여 1611년 완성하고 창덕궁으로 옮겼다. 중건 뒤엔 다시 창경궁을 중수했고 정원군[57] 의 사저가 있던 자리에 왕기가 있다는 풍문을 이유로 돈의문 안에 경덕궁[58] 을 짓고, 풍수에 따라 또 인왕산에 왕기가 있다며 인경궁을 짓고 북악 자리에는 자수궁을 짓는 등, 궁궐을 짓고 또 지었다.
임진왜란 때 궁궐들이 다 불탔으니 원래 있던 궁궐을 짓는다면 신하들도 반대하기 힘들었겠지만 광해군은 그런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선조때 이미 창덕궁 공사가 시작되어 거처할 궁궐을 확보했는데도 새로운 궁궐들을 인경궁과 경덕궁(훗날 경희궁으로 명칭변경)의 건설을 시작하여 연거푸 공역이 이어졌다. 심지어 인경궁에는 주된 전각에 청기와를 사용했는데 이 청기와 제조의 주 재료가 화약의 원료인 염초다. 앞의 선조나 후대의 인조 시기는 말할것도 광해군 대에도 화약이 크게 부족했다는걸 고려하면 국방에 신경을 썼지만 그러면서도 궁궐을 짓는데 너무 과도한 힘을 소비하여 군사력 강화까지 합쳐져 백성들의 삶이 더욱 고되졌다.
심지어 궁궐병 못지 않게 변경의 군사력을 강화시키는데도 정신병적인 집착을 보이는데 당장 광해군일기에서 광해군 14년대를 보면 훈련 도감에서 도성 내의 군사가 3,000명도 채 안되고 업무가 너무 많아서 그들이 너무 힘들어하는데 이 상태에서 또 변경으로 보내면 궁성을 호위할 병력도 없어질 것이라고 광해군을 만류하는 내용이 있다.[59] 즉 '''자신을 호위할 병력까지도 전쟁 대비랍시고 변경에 보내 배치시키는 것인데''' 이게 왕권 강화를 생각하는 사람이 하는 짓인지도 의문이 들 정도. 궁궐을 짓는 이유가 왕권 강화라고 하지만 정작 하는 행동을 보면 왕권 강화와는 거리가 먼 행동들만 하고 있다.
또한 이 때에서 7개월 전 홍타이지가 병권을 잡았다는 사실을 보고를 받았던 광해군은 홍타이지에게 권력 싸움에서 밀려난 누르하치의 장남인 다이샨[60] 의 행방을 찾으라고 정충신에게 다급히 명하기도 했고 홍타이지를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도성 내의 호위를 거의 포기하면서까지 저렇게 닥치는대로 병력을 모아다가 보내던 것은 홍타이지가 병권을 잡은 것을 경계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3.6.2. 궁궐 건설 후
게다가 궁궐을 짓고 나서의 행보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즉위 초에 이미 창덕궁 중건을 마쳤는데도 그곳에 계속 거처하지 않고 수시로 '좁고 불편한' 정릉 행궁(덕수궁)으로 옮겨가서 거처했다. 반대를 뿌리치고 경덕궁을 중건한 다음에도 그랬다. 한명기 교수에 따르면 광해군의 이런 행동은 세자 시절 겪은 전쟁 후유증[61] 이 주된 원인이다. 당시 조선 사회는 임진왜란을 통해 '죽고, 다치고, 포로로 끌려가고, 굶어죽고, 병에 걸리고, 사람이 사람을 먹고, 강간을 목도'하면서 사람들은 운수에 병적으로 집착하거나 미신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적극으로 나서 싸웠던 세자였으니 당연히 이런 것에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운수에 집착이 심했고 술사들을 가까이 했다.
광해군은 일찍이 이의신에게 '창덕궁은 두 번이나 큰 일을 치러서 머물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의신은 "고금의 제왕가에서 피할 수 없었던 변란들은 궁궐의 길흉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로지 도성의 기가 쇠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속히 옮길 곳은 점쳐야 합니다"고 했다. 광해군은 이후에도 창덕궁에 거처하지 않았다. 이의신의 주장에 신료들은 격렬히 반대했다. 광해군은 이의신의 주장에 동조했다. 광해군 7년 5월 23일, 머물고 있던 창덕궁 대조전을 떠나 창경궁이나 정릉동 행궁으로 옮기겠다고 했다. '대조전은 유암불편하여 오래 머물 수 없으니 창경궁으로 옮기고 싶다'고 한 것이다. 두 궁궐을 수리하라고 지시한 것은 이런 이유였다. 그리고 이건 수리에 그치지 않고 새 궁궐을 짓는 것으로 연결되었다.
왕권의 위상을 높이려는 욕구도 역시 그 원인 중 하나라고 한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부왕 선조의 권위가 무너지는 걸 직접 보았다. 평양에서는 군민들이 북상하려던 선조 일행을 막고 시위를 벌였다. 숙천에서는 선조의 행방을 알려주려고 벽에다가 낙서를 해놓은 백성도 있었다. 그렇게 선조는 임진왜란 당시 국왕으로서 권위를 구겼다. 명군 지휘관들한테도 수모를 당했다. 선조는 명군의 최고 지휘관인 병부 시랑 송응창이나 이여송은 물론, 연대장 급 정도인 장교들과도 맞절을 했다. 선조 실록에는 선조를 면담했던 명군 지휘관들이 자신들의 처소보다 국왕의 거처가 누추해서 송구스럽다고 말하는 장면도 있다.[62]
3.6.3. 지나친 공사
왜란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당시 궁궐 공사에 따른 부가세까지 얹은 것. 그런 상황에서 명나라는 파병 요구를 해왔다. "전쟁과 토목 공사를 병행한 나라치고 망하지 않은 나라 없다"는 상식적인 지적이 당시 신료들 내부에서 터져나왔다. 그런데도 광해군은 궁궐 공사에 계속 집착했다. 일부 지방관들은 잘 협조하지 않아 자재 수습과 재정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걸 타개하기 위해 특별 어사들을 지방에 파견했다. 조도와 독운별장이다.
광해군은 궁궐 공사 재원 마련을 위해 전국에 영건 도감 소속 조도사를 내려보내 면포를 걷었다. 영건 도감 자체가 왕의 지대한 비호 아래 부패, 권력 기구화하여 정해진 수량[63] 에다 방납가를 적용, 최대 100배까지 징수해 백성의 고혈을 쥐어짰던 것이다. 지방에 내려간 조도사들은 어명을 내세워 마구잡이로 징색과 횡포를 벌였다. 한가지 예로, 서자 출신인 김충보는 광해군 15년 1월, "경주 부윤 김존경이 궁궐 영건을 못마땅해하고 자신한테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서울로 소환하여 옥에 가두라 상소했다. 조도사가 종2품의 "고관을 잡아넣어야한다"고 직보한 것. 그런데도 광해군은 '''"조도사가 취한 건 별비(別備)지 백성들에게 취한게 아니다"'''라는 궤변으로 지방 수령들의 탄원을 무시하고 조도사들의 수탈을 지원했다(!).
한명기 교수의 지적에 따르면 이런 것들이 인조반정의 빌미의 싹을 텼을 수 있다고 한다. 적어도 내정면에서, 광해군의 나라는 그야말로 망국 직전의 아노미였다.
1619년 결국 원정군을 파병했는데도 궁궐 공사는 이어졌다. 원정군에게 필요한 군량과 군수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또 다른 조도사가 삼남에 파견됐다. 영건 비용 + 원정을 위한 증세 조처가 더 해진 것! 또다시 궁궐 영건을 중단하라는 요구들이 나왔다. 하지만 광해군은 꿈쩍도 안 했다. 원정군이 후금군에 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경덕궁의 공사는 광해군 12년 11월경에 거의 끝났다. 하지만 인경궁 공사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3.6.4. 민심의 악화
이 무렵 호남 등지에는 심각한 기근이 생겨 농민들이 죽겠다고 아우성이였다. 파견된 조도사들 사이에서도 회의를 느끼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예로 호남에 파견됐던 조도사 이창정은 농민들의 참상을 목도했다. 그래서 죄책감을 크게 느꼈다한다. 심지어는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도둑질하는 신하이고 하루를 이 자리에 있으면 하루의 죄악을 더할 뿐." 조도사조차 이런 죄책감을 느꼈다.[64] 당시 서인과 남인들은 쫓겨났다. 대북파도 광해군한테 고분고분하지 않았다.[65] 이런 상황에서 이창정 같은 실무 관료들은 광해군의 권력에 중요한 인물들이다. 그런데 이런 인물들조차 자신들을 '도둑질하는 신하'라고 했다. 한명기 교수는 여기서 '광해군 정권을 몰락을 예고'했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리고 광해군은 인경궁의 건설을 끝내지도 못하고 인조반정을 맞았다.[66] 한명기 교수는 이렇게 지적했다. '광해군이 왕권 강화 차원에서 집착했던 궁궐 영건 사업이 농민들을 병들게 하고 광해군 자신을 몰락하게 만들었던 것이다.'[67]
사실 형편을 도외시한 궁궐 공사 자체는 조선 왕조 기간 동안 가끔 있었다. 예로 태종은 재위 초기에 흉년 중에도 궁궐 공사를 감행할 정도였고 반대하는 대간들을 투옥시킬 정도로 강압적이었고, 성종도 흉년 중 세자궁 공사를 감행하였고, 문정왕후는 사찰 건립 공사로 재정과 민생에 큰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선조는 재위 말기 왜란으로 피폐한 상황에도 고려치 않고 창덕궁 중건 공사를 강행하여 대간들의 지탄을 받을 정도였다. 조선 말기인 흥선대원군 집권기에도 경복궁 중건을 하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전쟁으로 나라가 '''완전히 피폐해진 상황에서 광해군 정도로 토목 공사를 집중시키진 않았다.'''
3.6.5. 수탈
광해군이 처음에 말한 대로 경운궁, 창덕궁, 창경궁까지 짓고 말았으면 임진년 이전처럼 3궁 체제를 복구한 것이니 그렇다고 칠 수 있다. 그러나 그에 그치지 않고 더 크게 궁궐 공사를 벌리고 심지어 교하 천도까지 생각했었으니 가히 "궁궐병"이라고 할만 했는데, 그나마도 죄다 풍수가, 점쟁이들의 말을 듣고 결정한 것이었다. 전란으로 피폐해진 재정이 회복되지 않았고 심지어 한 궁궐이 다 지어지지도 않은 시점에서 황기와와 청기와로 지붕을 덮도록 지시하는 등의 조치는 위에서 언급한 PTSD가 어느 정도 작용했겠지만, 다른 시기에 비해서도 분명 과한 감이 있음이 분명하다. 실제로 광해군의 지나친 궁궐 공사와 수탈이 얼마나 심했는지 광해군 12년 여름을 기점으로 농민 경제는 확실하게 붕괴 국면에 접어들기 시작하여 이 무렵에는 이렇게 가다가는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중앙과 지방의 관료와 지식인들 사이에서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고 아예 백성들은 공정하고 관대하게 행정 업무를 수행하는 지방관이 탄핵받거나 임기가 만료되어 교체될 경우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 그의 연임 운동을 펼치기까지 했다.
광해군 14년 (1622년) 10월 전라도 나주 백성들이 목사 유석증의 유임을 위해 쌀 1,000석을 바치거나 함평 백성들이 현감 이홍망의 재부임을 위해 쌀 300석을 바친 것이 그 사례로 유석증은 임지에서 근신하면서 잘 다스렸고, 이홍망도 청렴하고 근신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내용을 기록한 사관은 "백성들의 마음이 무척 감동적이다"면서 감탄하고 있다 목사와 현감의 공정 가격이 각각 쌀 1000석 · 300석이라면, 백성들이 돈을 바치고 그들의 수령을 스스로 구입하는 웃지 못할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관련기사
여담으로 광해군의 이 궁궐 많이 짓는 일은 '''후금까지 소문이 나 유명했다.''' 누르하치는 조선 통사 박경룡(朴景龍)에게 "듣건대 너희 나라에 궁궐을 많이 짓는다고 하는데, 그러한가?"라고 묻기도 했다.
이 당시 실록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광해군 3년에 경제를 담당하는 호조 판서 황신이 국가 재정이 파탄났음을 알리고, 이에 대한 대비책 마련이 시급함을 광해군에게 강조한다. 황신은 대동법 시행을 통해 재정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으나, 광해군의 반대로 실패.광해 44권, 3년(1611년 신해 / 명 만력(萬曆) 39년) 8월 8일(을해) 1번째 기사
호조 판서 황신이 재정의 고갈을 아뢰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여 대비할 것을 청하다
호조 판서 황신(黃愼)이 아뢰기를,
“신이 얼마 전의 계사에서 삼가 성상의 비답을 받들어 보니 ‘구임(久任)시켜 성취를 책임지운다.’는 뜻으로 유시하셨기에, 신은 진실로 황공하고 감격스러워 죽을 곳을 모르겠습니다. 신이 삼가 나름대로 생각건대, 임명을 받은 이래 벌써 3년이 되었는데도 재주와 국량이 부족하고 일을 처리함이 생소한 까닭에 제대로 조획(措劃)하여 구원(久遠)한 규모를 마련해내지 못하고, 전후로 힘을 들인 바라고는 소소하게 보철(補綴)하여 목전의 급한 상황을 구제하는 정도에 불과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와서는 국가의 재정이 점차 탕갈되어 관아에 저축해 둔 것이 없고 해관(該官)은 실직(失職)한 채 단지 허명(虛名)만 남았습니다. 이미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하지 못한 데다, 또 지출을 헤아려 거둬들이지도 못하므로, 비유하자면 원천이 없는 물이 당장 말라 버리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물며 이미 말라 버린 것이야 어련하겠습니까. 진실로 지금 당장 변통을 하여 국가의 큰 규모를 세우지 아니하면, 몇 년 가지 않아서 공사(公私)간에 모두 바닥이 나서 제아무리 지혜로운 자가 있더라도 또한 능히 그 뒤를 선처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신은 삼가 우려하는 마음을 누를 수 없어, 감히 구구한 견해를 하나하나 별지에 적어 아룁니다. 간절히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특별히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만일 가능하다고 하거든, 근거없는 논의에 흔들리지 마시고 착실하게 시행하소서. 그렇게 해주시면 신이 비록 재직하다가 말라 죽더라도 조금도 한스러워하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아니하고서 신으로 하여금 그저 남의 뒤만 따라 오락가락하면서 의례적으로 책임만 때우도록 하신다면, 이는 실로 신이 평소 원하던 바가 아니고, 후일에 누적된 폐단이 더욱 고질화되어 대세가 지탱하기 어렵게 될 경우, 하는 일 없이 벼슬에 있으면서 일을 그르친 죄가 반드시 돌아갈 데가 있을 것이니 신은 삼가 안타깝습니다.”
하니 왕이 따랐다.【황신은 대체로 양전제(量田制)의 운용을 변통하고자 한 것인데, 후에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광해 111권, 9년(1617년 정사 / 명 만력(萬曆) 45년) 1월 3일(기사) 6번째 기사
호조에서 재정이 탕진되 선혜청의 방법으로 운영하기를 청하다
호조가 아뢰기를, 【호조 참의 장세철(張世哲)의 상소를 지난 병진년 4월 4일에 특별 전교를 인하여 입계하였었는데, 정사년 1월 3일에 비로소 내리면서 점련(粘連)하여 비변사에 계하해서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판하(判下)하였다.】
“영의정은 의논드리기를 ‘나라의 재정이 이때보다 더 심하게 탕진된 적이 없는데, 선혜청이 이미 성과가 있었으니, 이 상소의 내용 역시 선혜청과 마찬가지로 시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만약 혹시라도 자질구레하게 방해되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그때 가서 처리해도 됩니다. 다만 지금은 대신이 혹 외방에 있기도 하고 혹 정고(呈告) 중에 있기도 한데, 이와 같이 크게 경장(更張)하는 일은 수의(收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널리 조정의 의견을 거두어서 결정하소서. 삼가 상께서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하였습니다. 〈우의정 정창연은 병으로 인해 수의하지 못하였습니다. 상께서 결정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우선은 대신이 모두 모이기를 기다려서 널리 의논을 모아 처리하라.” 하였다.
광해 114권, 9년(1617년 정사 / 명 만력(萬曆) 45년) 4월 18일(임자) 4번째 기사
호조가 궁궐의 건축으로 인한 재정의 부족에 대해 아뢰다
호조가 아뢰기를,
“조정에 이미 궁궐을 짓는 큰 역사가 있으니 백성들이 포목을 내는 것은 참으로 부득이한 것입니다. 다만 지금은 묵은 곡식이 다 떨어져서 백성들은 곤궁하고 재물은 고갈되어 조석조차도 급급합니다. 그러니 만약 달리 조치할 만한 형세가 있다면 전결에 따라 포목을 거두는 것을 정지하여 성상의 뜻을 받들어 따르는 것보다 나은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근년에 들어서는 세입(稅入)이 1년의 쓰임새를 다 대지 못하여서 10월등(十月等)의 반록(頒菉)과 다음해 정월등(正月等)의 반록은 매년 계속해서 대기가 어려웠습니다. 이에 부득이 계청해서 경기와 공홍도의 전세(田稅)를 미리 끌어다가 썼습니다.
금년에는 신들이 이에 대해 미리 염려하여, 애써 수합한 여러 가지의 작미(作米)와 작목(作木)을 이미 받아들인 것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통계내어 보니, 금년부터 내년까지 쓸 잡차하(雜上下)와 녹봉으로 반급(頒給)할 것을 제외하고도 상수(常數) 외에서 나온 나머지가 마땅히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 가운데서 포목 5백 동과 쌀 1만 석을 선수 도감으로 이송(移送)해서 조금이나마 보태어 써서 백성들의 힘을 늦추어 주고, 그 이외에 부족한 숫자에 대해서는 천천히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아마도 마땅할 듯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광해 126권, 10년(1618년 무오 / 명 만력(萬曆) 46년) 4월 3일(임진) 6번째 기사
호조에서 신설한 관원의 녹봉을 지급하는 일로 아뢰다
호조가 아뢰기를,
“근일 병조가 부장(部將) 10인을 원록체아(原祿遞兒)로 더 차출하고는 비교해 보아서 녹봉을 지급하라고 이문(移文)하였으며, 또 무신 겸선전관 30인을 체아직으로 더 차출했는데 부사과(副司果) 2인, 부사정(副司正) 5인, 부사맹(副司猛) 8인, 부사용(副司勇) 15인으로 계하(啓下) 받아 녹봉을 지급하라고 이문하였습니다. 또 병조의 관문(關文)을 보건대, 그 안에 ‘별장(別將)과 위장(衛將)은 모두 정원 외에 남아도는 관원을 신설한 것이므로 현재 남아 있는 녹체아로 옮길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부사과와 부사정으로 각각 10인, 부사맹 20인을 균등하게 부록(付祿)하는 체아직으로 더 차출하고 가위장(假衛將) 이하 다관(多官)은 돌아가며 부록할 것으로 승전을 받들었다.’ 하였습니다.
그런에 요즘 으레 녹봉을 지급하는 규정을 보건대, 통산 1년 사등(四等)의 녹봉이 미두(米豆)로 도합 1천 7백여 석입니다. 현재 국가 재정이 고갈될 대로 고갈되었다는 것을 상께서 어찌 모르시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녹봉을 나눠줄 시기가 이미 박두했는데, 정박한 세선(稅船)은 한 척도 없습니다. 예로부터 양호(兩湖)의 세선이 4월이 되었는 데도 강에 도착하지 않은 때가 언제 있기나 했습니까. 소문에 의하면 양호에서 세금으로 미두를 전혀 거두지 못했다고도 하고 유민(流民)이 길에 깔려 봄 초에 납부해야 할 미곡도 지금까지 반이나 넘게 납부하지 않고 있는데 그렇지 않은 고을이 없다고도 합니다. 여기에 다시 겨울과 봄의 빗물 때문에 봄 보리도 갈지 못한 채 보리와 밀이 시들어 버리고 말았으니 앞으로 참혹한 광경이 벌어지리라는 것은 지혜로운 자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러한 때야말로 경비를 철저히 절감해서 줄이는 것은 있어도 늘리는 것은 없도록 해야만 그런대로 지탱해 갈 수가 있는데, 지금 졸지에 1백 명에 가까운 관원들을 더 두고는 그들에게 녹봉을 지급하라 하고 있습니다. 정례적으로 나누어주어야 할 녹봉도 넉넉하지 못한데 더구나 이렇게 천만 뜻밖에 더 설치한 인원에 대한 것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신들이 감히 구구하게 비용을 아까워하는 유사(有司)의 행태를 융통성 없이 지키려고 해서가 아니라 정말 바짝 마른 나무에서 물을 찾듯이 어찌해 볼 계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금방 실시했다 금방 그만둘 성격의 것이 아니고 형세상 오래도록 시행될 것이 분명한데 혹 그만한 액수만큼 더 백성에게 부과하든가 아니면 양전(量田)하는 정사를 급히 행하여 세입(歲入)을 증가시킨 다음에야 비로소 그들에게 녹봉을 지급하는 일을 의논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곡절을 대신에게 의논하여 결정을 지은 뒤에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광해 129권, 10년(1618년 무오 / 명 만력(萬曆) 46년) 6월 21일(무인) 7번째 기사
호조에서 징병 군사들의 군량 조치 문제에 대해 아뢰다
호조가 아뢰기를,
“지난번 비국의 계사를 인하여, 징병된 군사들이 머지않아 올라올 테니 군량을 조치해두라고 분호조 당상 및 각도 감사에게 이미 하유하였습니다.
각도의 군사를 점검하여 보낼 때에는 으레 초면(初面) 고을의 점고를 받게 되는데, 가령 공홍도(公洪道)는 직산(稷山)에서, 전라도는 여산(礪山)과 익산(益山)에서 점고를 받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전라도의 군대는 은진(恩津)에 도착했을 때 급료를 주고, 공홍도의 군대는 수원(水原)에 도착했을 때 급료를 주고, 경상도의 군대는 영동(嶺東)을 통해 들어올 경우 평해(平海)에서 급료를 주거나 공홍도에 도착했을 때 급료를 주고, 황연도(黃延道)의 군대는 양덕(陽德)을 통해 들어올 경우 평안도에 도착했을 때 급료를 주고, 강원도의 군대는 고산(高山)에 도착했을 때 급료를 주는 것으로, 을사년에 크게 군사를 일으켰을 때 이미 이렇게 예가 굳어졌으니, 이대로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평안도 군대의 경우 역시 그때 가서 변경에 도착하면 급료를 주어야 할 듯합니다. 다만 원수가 군대를 모아 조련시키는 곳의 경우는 꼭 일정한 규정에 구애받을 필요없이 분호조로 하여금 원수의 분부를 받아 시행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군병이 많이 들어간 뒤에는 조금이라도 허비되는 폐단이 없도록 방량관(放糧官)이 지급하는 규정을 두지 않을 수 없는데 이것은 분조(分曹)가 알아서 처치하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방량관은 윤수겸(尹守謙)으로 하여금 도내의 강명(剛明)한 문관이나 경관(京官)인 문음(文蔭) 중에서 엄선하여 자벽(自辟)토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대체로 각도가 똑같이 재정이 고갈되었는데 그야말로 옛 곡식이 다 떨어지고 새 곡식은 아직 익지 않은 날을 당하였으니 어떻게 마련해 낼 대책이 없습니다. 그리고 고을 수령들도 대부분 적임자가 아니니 그 누가 기꺼이 없는 가운데에서 그래도 마련해내어 국가의 급한 수요를 충당하려 하겠습니까. 지나는 길에서 급료로 줄 양식마저도 부족하다고 하소연할 걱정이 없지 않은데, 본조에서 미리 분조를 내어 제때에 내려보내기로 한 것은 대체로 이 때문입니다.
평안도의 군량을 계속 조달할 계책을 생각하노라면 더욱 걱정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도내의 원곡(元穀) 가운데 미곡(米穀)의 숫자가 본래 적다고는 하나 그래도 추수 때 적곡(糴穀)을 거두어들이고 나면 만분의 일이나마 지탱해 나가겠지만 지금 묘가 자라기만 할 뿐 아직 익지도 않았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사신들이 바삐 오가고 장사(將士)의 왕래가 끊임없게 되면 계속 접대하기 어렵게 되어 하졸(下卒)이 놀라 흩어질텐데 이렇게 관가(官家)가 먼저 엉망이 된 뒤에는 설령 원곡이 있다 하더라도 수습하기가 지극히 어렵게 될 것입니다. 전일 안응형(安應亨)의 장계 가운데 ‘정확하게 어느 곳에 얼마나 양식이 비축되어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윤수겸은 어떻게 조치했는지의 형세를 점검하여 현재 어느 정도나 되는지 치계해야 마땅한 데도 지금까지 보고가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조의 생각에, 군대가 요양(遼陽)으로 들어갈 경우 신속히 수송하기가 어려우니 만약 중국 조정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면 혹 은(銀)으로 미곡 값을 환산해 무역해야 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미곡 값이 얼마인지 그리고 중국 조정에서 양식을 지급해 줄지의 여부를 재자관 일행으로 하여금 세밀히 알아오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광해군 대 조선은 연이은 두 차례 왜란의 영향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시기 전결 상태와 이를 기반으로 한 국가 재정은 이러한 상황을 뚜렷이 보여준다. 호조 판서 황신에 따르면 '''국가의 세입은 전쟁 전에 비해 2/10, 3/10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지출은 어느덧 전쟁 전의 규모를 회복하고 있었다.''' 한 해에 받아들이는 공물로는 당년의 용도를 지탱하기에 크게 부족했다. 또 임진왜란 이전 삼남 지역의 총 전결수 113만 결은 계묘양전(선조 36년, 1603년)에서 29만 결로 줄었다가, 갑술양전(인조 12년, 1634년)에서야 89만 5,000여 결로 회복되었다. 광해군 대에 중앙 정부가 운용한 전결의 규모는 전쟁 전의 26%, 갑술양전의 32% 수준에 불과했다.그런데 경략의 자문 내용을 듣건대 ‘한 달 가량의 양식을 아울러 마련하고 진병할 날짜를 기다리라.’ 하였고, 또 ‘불과 2백 리, 3백 리 정도 떨어진 지역에서 몇 길로 나누어 일제히 공격할 것이다.’고 하였다 합니다. 따라서 도로를 이미 예측하기 어려울 뿐더러 우리로 하여금 양식을 싸들고 오도록 하는 계책이 이미 결정되었다고 할 것이니, 군대가 갈 때 군량도 따라가는 문제를 아울러 미리 헤아려 생각토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변경에 머물러 주둔할 때 소요되는 양식은 얼마이고, 진병한 뒤에 소요되는 양식은 얼마이며, 도내 원곡 숫자 안에서 가식미(可食米)를 덜어내고 지급할 예정인 것은 얼마이고, 장사에게 주어야 할 급료는 얼마이며, 군병에게 지급할 양은 얼마이고, 말먹이 콩으로 들어갈 양은 얼마인지 모두 계산하여 미리 아룀으로써 처치할 근거를 마련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한번 병화(兵禍)를 입게 되면 1년, 2년 사이에 끝날 수는 없을 듯한데 그럴 경우 군량을 계속 조달할 걱정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쪽 백성들이 만약 하루 아침에 모조리 결딴이 나버린다면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따라서 오늘날의 계책 가운데에서도 서쪽 백성들이 조금이라도 폐해를 덜 받도록 해 주는 것이야말로 가장 급무라 할 것이니, 대관(大官) 이하로부터 모두에 대한 접대 비용을 가능한 한 줄여 간소하게 하고 그릇 수를 정할 것이며, 군관 이하에 대해서는 전에 군사를 일으켰던 때의 예에 의거하여 산료(散料)를 지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이 한 조목에 대해서는 비국으로 하여금 결정하게 하고, 상기 각 조항의 일들을 모두 분조 당상 및 각도 관찰사에게 하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광해군 시기는 피폐된 국가 운영을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 차분히 제도적 재정비에 힘써야 할 때였다. 하지만 수많은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났고 이것들 대부분은 중앙 정부의 대규모 재정 수요를 직접적으로 발생시켰다. 5개, 6개에 이르는 궁궐 공사가 한 예다. 선조 40년(1607년)에 시작해서 광해군 대에 완료된 창덕궁을 비롯하여 창경궁, 경덕궁, 경운궁, 인경궁, 자수궁 등의 공사가 진행되었다. 역대 조선 왕조 전체를 살펴도, 이렇듯 짦은 기간에 궁궐 공사가 집중된 때가 없었다. 공사비는 대부분 전결에 부과하는 결미, 결포로 충당되었다.[68]
3.7. 폐위
돈아비야, 돈아비야 그 많은 돈 두고 어디 가느냐?[69]
3.7.1. 대북의 독주와 서인의 소외
광해군은 재위 초부터 서자라는 불안정한 위치와 수시로 후계자 선정을 번복하는 부왕 선조의 견제에 시달리는 과정에서 자연히 자신을 지지해주는 남명 학파(조식의 문하) 인사들과 친교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들이 훗날 북인(대북)으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다만 광해군 정권 초기에는 실세는 대북이 아니라 소북이였고 여기에 대북과 서인, 남인이 공존하는 체제였으나 광해군의 잦은 옥사로 인해 광해군이 정인홍과 이이첨 같은 대북 인물들에게 힘을 몰아주게 되자 이 때문에 이이첨 일파의 독주를 불러오게 되었고 자연히 권력 핵심에서 멀어진 서인과 남인, 소북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광해군의 끝없는 옥사는 광해군의 불안감이 너무 컸다는 걸로 설명이 된다. 물론 옥사가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긴 했다. 류영경과 임해군은 모든 당파가 그들의 처벌을 주장하였고. 신하들은 광해군에게 존호를 올리면서 충성 경쟁을 했다. 하지만 강해진 왕권으로 광해군은 대북만을 키워주면서 균형이 깨지게 되었다. 부왕 선조만 해도 정여립의 난을 이용해 동인들을 대거 숙청했지만, 곧바로 서인의 정철도 세자책봉 촉구 건의를 빌미로 숙청하면서 동서 양당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고 자신의 위신을 보전했다. 반면 광해군은 이걸 하지 못함으로써 피해자들의 분노는 대북은 물론 그 자신에게로 향하고 말았다. 실제로 인조반정의 주역들은 그 동안의 옥사에 연루돼서 겨우 벗어나거나 유배된 상태였고. 계속되는 옥사에 그들 자신의 목숨부터 걱정해야 했고, 이는 당하느니 먼저 치자는 것으로 바뀌었고 이는 반정의 가장 근본적인 단초가 된다.#
물론 부왕인 선조 때에도 중기 이후 서인, 동인이 번갈아가면서 권력을 독식하긴 했으나 기축옥사와 같은 대규모 옥사 및 견제를 통해 대대적인 물갈이가 종종 이뤄져 정권 재창출을 꾀할 수 있었던 것과 달리, 광해군 집권 15년간은 꾸준히 대북이 권력의 핵심을 장악했다. 물론 대북 영수급의 거물인 정인홍조차 성균관 유생들의 반발을 제압하지 못할 만큼 당시 붕당도 나름대로 견제와 균형이 이뤄지기는 했다. 그런데 광해군 중기부터 이이첨이 실세로 부상하여 권력을 휘두르면서 변두리로 밀려난 서인이 잦은 옥사와 친국으로 생존 위기 의식까지 느낄 정도에 이르렀고, 이런 상황은 광해군조차도 더 좌시하지 못할 수준에 이르렀다.
3.7.2. 인조반정
결국 광해군 집권 후반기에는 대북을 견제하며 국정을 주도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 서인 일부 세력은 권력 회복을 위해 반정을 획책했으며 끝내 이를 막을 수는 없게되어 소북이 방관하고, 남인이 방조하였으며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을 당하게 된다.
이이첨에 대한 광해군의 불안은 다음 대목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반정 당시 변장하여 안국신에 집에 머무를 때 안국신의 처에게 건넸던 말.
광해군 15년, 이귀, 김류, 최명길을 위시한 서인들의 반정 계획은 이미 상당히 알려져 있었고, 심지어 발각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귀는 대질 심문까지 주장하며 교묘하게 반정과 무관한 척 연기를 벌였고 광해군의 의심을 (잠시나마) 거둘 수 있었다. 여기에는 김자점에게 매수된 상궁 김개시의 조언도 한 몫 했다. 훈련대장 이흥립이 내통해 있었던 것도 반란의 성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혹시 이이첨이 한 짓이 아니던가?"'''
반정은 발각되었기에 더욱 한밤중에 기습적으로 결행되었다.[70] 어쨌든 급작스런 변고에 궁을 탈출한 광해군은 의관인 안국신의 집에 상주로 변장한 차림으로 피신해 있다가 의원 정남수의 밀고로 발견되어 끌려나왔다거나 혹은 한강 나루터에서 체포되었다는 설도 있다.
폐위 직후 도성의 남녀들이 왕이 잡혀가는 것을 보고 모두 담장과 지붕에 올라가 바라보았고 어떤 사람은 욕하기를 돈 애비야 돈 애비야 거두어 들인 금은은 어느 곳에 두고 이 길을 가는가라며 조롱했다고 한다.
광해군은 파란만장한 즉위 과정 때문에 점쟁이와 지관, 운명을 신봉했던 것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광해군이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던 그 수많은 시도 가운데 일부가 아이러니하게도 인조반정의 요인이 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반정 세력이 주장한 명분들 이면에 인조가 반정을 주도하게 된 계기가 그러한데, 왕기가 있다는 이유로 정원군의 가택을 몰수하였으며 이는 정원군의 아들이자 능양군(인조)의 동생인 능창군이 역모로 유배당해 죽은 사건까지 겹쳐져 인조로 하여금 정권 찬탈의 동기를 제공했다는 것. (참고로 민담에 따르면 광해군이 가족 계획을 위해 만든 부적들도 있는데, 낙태에 효험이 있다는 명성이 드높아 심지어 구한말까지도 고가에 거래되었다고 한다. 관련 기사)
3.7.3. 강등과 유배
아무튼 붙잡힌 광해군은 곧장 서인으로 강등당해 부인, 아들 부부와 함께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이이첨 등 당대 권신들은 모조리 참수당함으로써 반정은 성공리에 끝났다. 이 때 왕족으로서 반정을 주도한 능양군이 비어있는 왕좌를 접수하니 그가 바로 삼전도의 치욕으로 유명한 인조다.
4. 폐위 이후
광해군은 처음 강화도로 유배되었으나 호란 즈음에 청에서 광해군 폐위를 명분으로 내정을 흔들어보려는 공작 시도가 있자[71] , 유배지를 제주도로 옮겼다. 광해군은 결국 제주도 생활 4년 4개월만에 66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수명으로만 따지면 조선 역대 국왕 중 네 번째로 장수한 임금이다.[72]
이처럼 장수했던 이유는 일부 신하들이 그를 사사하려는 시도가 있기도 했으나, 이원익 등 광해군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중신들의 극렬한 반대가 있었고, 인조 본인도 선왕을 죽이는 것은 선례[73] 가 없다는 판단 하에 거부함으로써 무산된다. 이후 그의 심복들이 여러번 역모에 걸려들어 처형당했는데 이것이 모두 광해군의 복위와 연루된 것이었다. 심지어 북인인 유효립을 비롯한 일부 심복은 광해군의 친필 편지를 보유하기도 했고, 실패로 돌아가자 광해군은 식음을 전폐하고 머리 풀고 울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인조도 할아버지 선조와 삼촌 광해군처럼 왕위에 대해 극심한 노이로제를 보이게 되었으며, 결국 인조 자신도 애먼 삼촌 인성군을 역모 혐의로 엮어 죽이는 짓을 저지르게 된다. 다만 인성군은 사후에 무고함이 인정되어 다시 복권되었다.[74]
4.1. 정치적 영향으로 인한 부지
이럼에도 광해군 자신이 죽음을 당하지 않은 것은 이미 그의 세력에 대해 거의 씨를 말렸기 때문이다. 다른 의견으로 광해군의 세자 시절의 업적이 너무 컸기에 그 업적을 무시하고 죽이기에는 너무 부담이 크다는 점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폭군이기는 해도, 전쟁영웅이었던 인물을 죽이는 것은 쉽지 않는 일이다. 단종의 경우 그의 세력에 대해 씨를 말렸음에도 사사가 진행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단순히 세력의 씨가 말렸다고 해서 포기했다고 하기는 어렵다.[75] 실제로 폐위를 주도한 서인들도 광해군 폐위의 근거로 선조독살설을 넣거나, 또는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는 것에 절대로 반대했다. 유교의 예법으로도 '폭군을 내치는 법은 있어도 주륙하는 예는 없다' 는 것이었고[76] 인륜을 기치로 든 인조 정권이 광해군을 죽일 경우 명분이 꺾일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폐주라고 해도 죽여버린다면 인조의 반정 명분에 크게 흠을 입게 되는 것이라 폐위시키는 선에서 끝낼 수밖에 없었던 것.
게다가 연이은 전쟁에서의 패배로 무능하다는 평판을 받고 있었던 당시 인조가 광해군을 죽인다는 것은 한마디로 자신의 지지 기반을 무너뜨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반정이 성공한 후 인목왕후가 "광해군의 목을 베고 살을 씹겠다."란 말을 했을 때도 이들은 계속 반대했다. 인목왕후(혹은 그녀의 나인)가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는 계축일기를 보면 인목왕후가 얼마나 편집증적으로 광해군을 저주했는지 잘 드러나 있다.[77]
사실 명에게 큰 지지조차 받지 못한 반정이었다는 점도 그의 사사를 꺼리게 했을 것이다. 실제로 명나라 조정에서는 반정 소식을 듣고 "조선 국왕은 충순한데 왜 폐위시켰냐?" 라는 반응을 보냈다.[78] 반정 이후 책봉을 받으러 간 사신들은 배를 타고[79] 도착한 산동에서 등주 자사에게 "임금을 시해한 짐승같은 놈들"이라고 욕을 시원하게 바가지로 퍼먹고 북경으로 가는 것도 방해받았다. 또한 당시 명 황제는 '''"왜군 3000명을 동원해 조선 왕을 쫓아내고 능양군이 찬탈했다."'''는 소문을 듣고 있어서 조선 사신단은 이를 해명하는데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이 결과 인조가 즉위하고 나서 '''22개월동안 책봉을 받지 못했다.'''[80] 결국 인조 정권은 예전 임해군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명 수뇌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뇌물을 대량으로 썼으며 이 과정에서 가도의 명나라 장수 모문룡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81] 인조가 명에 바친 뇌물의 양은 광해군 재위 전반에 명나라 사신에게 바친 은의 총량을 능가했다.[82] 그리고 모문룡은 책봉을 도운 것을 인조 정권의 아킬레스 건 삼아서 갖은 행패를 부려댔다. 그리고 인조 14년(1636년) 정묘호란에 이어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인조 15년(1637년). 인조는 왕위를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으나 병자호란으로 인한 민심 이반을 감지하고 왕권을 지킬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번에도 광해군을 죽이지는 않고 제주도로 보내 외부와의 연결을 차단하는 데서 끝냈다. 현재 광해군이 제주로 유배왔을 때 배에서 내린 곳인 구좌읍 행원리에 광해군 기착비가 세워져있다.
4.2. 광해군 기착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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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제주도로 이주된 광해군은 유배지에서 가시 울타리 안에 위리 안치되었고, 감시하는 군인과 계집종들에게 영감#s-2[爺爺][83] 이라 불리는 수모를 받았지만, 화를 내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연려실기술에 인용된 '공사견문록'에 의하면 유난히 광해군에게 버릇없이 구는 계집종이 있어서 참다 못한 광해군이 질책을 했다. 그러자 그 계집종은 광해군에게 되레 '''“영감이 이전에 임금 자리에 있을 때 무엇이 부족해 아랫사람들에게 음식까지 부탁해 김치판서, 잡채참판이라는 말까지 만들어내게 했소? 영감이 임금의 자리를 잃은 건 자업자득이지만 우리는 무슨 죄로 이 가시덩굴 안에 갇혀 있어야 한단 말이오?”''' 라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는데,[84] 광해군은 모든 것을 달관한 듯, 아니면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는지 고개를 숙인 채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자신을 감시하는 별장이 상방을 차지하고, 광해군을 하방에 두는 등의 모욕적 처사에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어쩌면 그 시점에서 이미 인생 무상을 느끼고 달관했던 것일지도. 그러한 성품은 그가 유배지에서도 천수를 누리는데 기여했을 가능성도 있겠다. 해당 유배처는 현재 제주시 중앙로의 국민은행 중앙점 자리로 비정되며 현재 그곳에 광해군 적소 터 비석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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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시(詩)
제주도로 가기 직전 광해군이 남긴 시가 전해지고 있다. 인조 실록 42권의 인조 19년 7월 10일 1번째 광해군 사망 기사에 따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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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위의 시는 그가 제주도로 간다는 것을 미리 알고 지은 것은 아니다. 보안을 위해 교동도에서 이송하기 전부터 이송 계획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고, 이동 과정에서는 배에 장막을 둘러쳐서 향하는 장소를 알 수 없게 했기 때문이다. 도착한 후에야 이원로의 말을 통해 새 유배지가 제주도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은 광해군은 매우 당혹해하며 "어째서 이런 곳에! 도대체 어째서!"라고 탄식했다고 전한다. 참고로 당시 제주도는 말 그대로 '''오지'''였다.
4.4. 사후
이후 제주목사(제150대, 1640.9~1642.8)였던 이시방(李時昉, 1594 ~ 1660)[86] 이 광해군의 신변을 맡았으며, 결국 광해군이 세상을 떠나자 이를 애석해하면서 만류를 뿌리치고 손수 염습했다고 전해진다. [87] 광해군이 숨을 거둔 것은 인조 19년(1641년) 음력 7월 1일로, 유폐 생활 19년에 제주에 온지는 4년 만이고 병자호란이 있은지는 5년 만이었다.
인조실록에 보면 제주목사 이시방은 광해군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서울에 전하게 한 뒤에 이에 대한 지시가 내려오기도 전에 자신이 먼저 광해군이 유폐된 곳의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가 시신의 염습을 행하였으며, 대정현과 정의현의 수령들에게도 광해군이 사망하였다는 사실을 전해서 제주목으로 오게 하였다. 그리고 이시방 자신이 제주를 맡고 제주향교의 교생을 뽑아 집사를 맡겨서 그해 음력 7월 4일 시신을 입관했다. 인조는 광해군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조의를 표하고 예조참의 채유후(蔡裕後)를 보내 장례를 주관하게 하였다고 한다. 채유후는 제주에 도착해 7월 27일에 관덕정 앞에서 대제(大祭)를 거행했고, 8월 18일에 영구가 육지로 옮겨졌다. 제주에서 1개월, 남양주까지 가는 2개월 이렇게 시신이 옮겨지는 데는 총 3개월이 걸렸고 때가 여름이라 한창 더웠음에도, 시신이 전혀 부패하지 않았다고 한다.
4.5. 광해우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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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역사에서 보면 광해군은 '''조선의 역대 국왕, 아니 근대 이전의 한국사의 역대 군주 가운데서 제주 땅을 밟은 유일한 군주'''였다. 제주도에서는 음력 7월 1일을 광해우(光海雨) 내리는 날이라고 부른다. 광해군의 숨이 끊어지던 날 맑은 하늘에 갑자기 비 구름이 몰려와 비를 흩뿌린 것에서 유래한다고 하며[88] , 이후 음력 7월 1일마다 돌연 비가 내린다는 전설이 생겼다.[89]
4.6. 기타
연산군과 대조적으로 유배지에서 보낸 여생이 재위 기간보다 더 길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90] 그래서인지 천수를 누린 것으로 보며 연산군처럼 독살당했다는 음모론은 잘 나오지 않는다. 다만 노년 들어 제주도로 이송된 뒤엔 척박한 환경 탓에 급속도로 몸이 쇠해져 얼마 살지 못했다고 하지만 그의 나이가 제주도로 이송될 당시에 이미 60이 넘었고 왕의 자리라는 게 원래 건강을 해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미 이전부터 몸 상태가 좋지 않았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광해군은 죽기 직전에 2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 공빈 김씨의 무덤 근처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다만 광해군은 공빈 김씨의 무덤 바로 곁이 아니라 그 아래 위치에 자신의 비였던 문성군부인과 합장되었는데 문제는 광해군의 묘 위치가 풍수지리적으로 워낙 좋지 못해서 유언이 날조된 것 혹은 유언을 악용한 것이 아닌가 보는 시각도 있다.
선대 왕이자 같은 폭군으로 폐위되어 축출된 연산군과 함께 종묘 신위에도 제외되어 종묘에까지도 모셔지지 못한 임금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인조와 그 후손들이 왕위에 올랐기에 복권이 불가능해서다. 이전까지는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던 단종도 마찬가지였던 입장이었으나 숙종에 의해 단종으로 추존 복위되어 종묘 신위에 뒤늦게 포함됨으로써 빠졌다.
5. 평가
6. 특이사항
왕으로선 꽤 특이한 기록이 있는데, 최다 공신 배출, 최다 존호 보유, 친국(親鞫) 직접 참여 등이 있단 거다. 최다 존호 보유 기록을 통해 그가 나름대로 강력했던 왕권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혹은, 그만큼 법을 본인 의지대로 갖고 놀았으면서도 국력을 회복시키지 못하고 말아먹은 암군으로서의 면모 역시.
그의 탯줄(태실)을 묻은 곳이 대구광역시 연경동의 야산이라고 한다. 동네에 도는 이야기 중에는 폐위당한 왕이라서 관리가 안 되다 보니 탯줄을 묻은 위치에 있던 석상 등을 집 지으려고 부숴서 가져간 사람들이 있었는데, 돌 조각을 부숴서 가져간 사람들이 안 좋은 일을 몇번 겪자 조각을 다시 다 모아서 원래 있던 위치에 던져놨다고 한다. 지금도 산에 올라가 보면 비석이나 거북이 조각 등의 잔해가 남아있다.
그를 재평가 하는 사람 중에 그를 왕으로 추존하는 경우도 꽤나 많은데, '광'해군이란 이유로 '''광종(光宗)'''이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다. 또한 2002년 11월 15일에 사이버 조선왕조라는 사이트에서 광해군에게 혜종 경렬성평민무헌문대왕 (惠宗 景烈成平愍武獻文大王)이라는 묘호 및 시호를 올려 추숭 복위하는 일이 있었다. 부인인 폐비 류씨(문성군부인)은 소온사헌혜장왕후(昭溫思獻惠章王后)로 같이 추존되었다. 아울러 능호는 열릉(烈陵)이라 하였다. 하지만 이건 말 그대로 가상 사회에서 있었던 일이라 정식으로 인정받지는 못하며, 당연히 전주이씨의 왕실 종친회라고 할 수 있는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과도 일체 무관하다.
담배 냄새를 몹시 싫어하여 궁중은 물론 '''신분이 높은 사람이나 어른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하는 예절(예법)을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그 전까지 조선 사회에서는 서구권처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맞담배를 피우는 게 일반적이었다.
계축일기에 따르면, 고기를 먹을 때 익힌 고기는 먹지 않고 육회나 살짝 불에 익힌 정도로만 해서 먹었다고 한다. 고기 취향이 뚜렷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같은 자료에 '산나물은 더럽다 하여 먹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 결과 심각한 배변장애(...)에 시달렸으며 혈색도 칙칙했다고 한다. 이것 때문인지 계축일기에는 배변 시 매화틀을 호출하지 않고 직접 변소로 거둥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다만 이건 귀찮은 일이 생기면 변소에 틀어박히러 갔다는 추측도 있다.
광해군일기, 광해군 1년 9월 25일자에는 강원도에서 UFO(미확인 비행물체)가 나타난 기록이 있다. 광해군 시기의 UFO 소동 참조. 해당 실록 국역 링크 해당 내용을 설정에 써먹은 드라마나 작품이 많다. 기찰비록이나 설희, 별에서 온 그대.
개인적으로는 미신(무속신앙/점쟁이/굿놀이 등)을 매우 신봉했다. 풍수가, 점쟁이들을 늘 가까이 두었고, 정책에서도 이들의 결정을 많이 따랐다고 한다.[91] 대표적인 사레는 이와 같다.
- 풍수가 이의신이 한양의 지기가 다했으니 교하로 천도하자고 하자 교하 천도를 추진했다. 단 이것은 신하들이 반대해 실패했다.
- 계축옥사때 저주 행위로 절도유배에 처해진 점쟁이가 용하다 하여 사람을 보내 점을 쳤다.
- 말년에는 칙서를 받는 일도 길일을 택해서 하려고 했다. 단 이를 위해선 결국 사신에게 많은 뇌물이 주어져야 했다.[94]
이것만으로도 모자랐는지, 이번에는 또 한성부 새문동에 왕기(王氣)가 흐른다는 풍수가 김일룡의 말을 듣고 새문동에 집을 짓는데, 문제는 그 터가 광해군의 동생 정원군의 집이었다는 것(...) 결국 정원군은 집을 빼앗겼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궁이 경덕궁[95] 두 개의 궁전을 한번에 지으려고 하니 재정이 고갈되는건 당연지사.
그의 치세 중에 '''유럽의 해적들이 조선 해안을 약탈하려고 한 적도 있다'''. 나중에 돌던 풍문같은 것도 아니고, 광해군 치세의 인물인 지봉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과 광해군의 치세를 기록한 광해군일기에도 떡하니 실린 기록이다[96] . 이 해적선이 조선 해군의 막강한 화력에 놀라 도망가면서 배를 나포하는 데는 실패했으나, 당시의 군관들은 이 유럽제 선박에 대해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97] . 이 해적선의 정체는 잉글랜드 해군의 사략함대로 추정된다. 일단 지봉유설에도 이 함대가 잉글랜드에서 왔다고 기록되어있으므로, 일단 이 침략 자체가 잉글랜드 해군의 소행이라는 사실은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7. 가족 관계
- 정비 : 문성군부인 류씨
- 후궁 : 소의 윤씨(昭儀尹氏)
- 딸 : 왕녀 - 박징원(朴澂遠)의 처
- 후궁 : 소의 홍씨(昭儀洪氏)
- 후궁 : 소의 권씨(昭儀權氏)
- 후궁 : 숙의 허씨(淑儀許氏)
- 후궁 : 숙의 원씨(淑儀元氏)
- 후궁 : 소용 정씨(昭容鄭氏)
- 후궁 : 소용 임씨(昭容任氏)
- 후궁 : 소원 신씨(昭媛辛氏) - 인빈 김씨의 조카
- 후궁 : 숙원 한씨(淑媛韓氏)
- 후궁 : 상궁 이씨(尙宮李氏)
- 후궁 : 상궁 최씨(尙宮崔氏)
- 후궁 : 궁인 조씨(宮人趙氏)
- 후궁 : 궁인 변씨(宮人邊氏) - 변상궁으로 알려져 있다.[102]
광해군과 같이 유배당한 문성군부인 류씨는 아들 내외의 비참한 소식을 접하고 우울증과 홧병 등으로 죽었다. 야사 대동야승에서는 아들 부부가 죽자 스스로 식음을 전폐해서 아사했다는 기록도 있다. 참고로 류씨는 광해군 재위기에도 친명배금을 주장했을 정도로 강단 있는 여인이었다.[104] 그녀가 왕비였던 시절, 사찰을 돌아다니며 "내생엔 두 번 다시 왕가의 며느리가 되지 않게 하소서"라 빌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105] 그녀의 형제들도 반정 직후 모두 처형되었으니, 실로 비극의 가계라 할 만하다.
광해군은 소의 윤씨에게서 옹주를 1명 낳았는데 옹주는 인조반정 이후 폐서인되었고, 이후 박징원과 결혼해 2남 3녀를 낳았다. 광해군의 아들 이지가 후손이 없었으므로, 서녀인 옹주의 후손들(즉, 광해군의 외손자의 후손들)이 광해군의 묘를 돌보았고 지금도 제사를 지내고 있다.
손자녀로는 폐세자와 폐세자빈 사이에서 자식이 없고[106] 후궁 소생의 현주#s-1가 1명 있었는데 김문거와 결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