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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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문신, 학자.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졌을 때 남인의 영수였으며 임진왜란 때 행정과 군사를 총괄한 전시 재상이자 전란이 끝난 후 징비록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대중적으로는 이순신의 친구이자 후원자로도 알려져 있다.
柳(버들 류)자를 쓰기 때문에 본래의 발음인 '류'를 쓸 건지 두음법칙을 따른 '유'를 쓸 건지 논란이 있는데 일단 柳씨 문중이 '류'를 사용하기에 주로 '류성룡'이라는 표기가 많이 사용된다.[5] 다만 조선 시대 인물이라 본인이 자신의 이름을 어떤 발음으로 불렀는지 알 수 없고 조선 시대의 한글 문헌에도 '유성룡', '류성룡', '뉴성룡' 등의 표기가 혼재된 만큼 본래의 한글 맞춤법 기준에 따라 '유성룡'으로 부를 때도 많다. 때문에 '유성룡'과 '류성룡' 중 어느 발음으로 읽어도 문제가 없다.
2. 생애
2.1. 출생부터 임진왜란 전야까지
황해도 관찰사 류중영과 안동 김씨(安東 金氏) 진사(進士) 김광수(金光粹)의 딸 김소강(金小姜)의 아들로 외가가 있던 경상북도 의성에서 태어났다. 그 후 안동에서 지내다가 20대에 퇴계 이황의 제자로 들어갔다. 책을 읽을 때 한 번 눈을 스치면 환히 알아 한 글자도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을 정도로[6] 머리가 좋아 이황의 수제자로 명망이 높았으며 이황도 "이 사람은 하늘이 내린 사람이다(天之所出者)."라며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7] 어린 시절 서울로 올라와서 지냈다고 하는데 이 때 충무공 이순신과도 친밀하게 지냈다고.[8] 서울에 살 무렵에는 지금의 충무로에 살았는데 지금도 충무로에 가면 '서애길'이라는 길이 있고 그곳에 류성룡의 집터라는 표석이 있다.
1564년 명종 때에 사마시(소과)에 합격했고 1566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여러 내직을 거쳤으며 선조가 즉위한 뒤에도 중용되어 그럭저럭 순탄한 관직 코스를 밟았으며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 다만 그가 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선조의 즉위와 함께 갓 집권한 사림파가 다시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지는 시기였고 류성룡도 당쟁에 휩쓸리게 되었는데 그는 상대적으로 이황과 조식의 제자가 많았던 동인에 속했다. 특히 정여립의 난과 관련한 기축옥사와 그와 관련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있었는데 여기서 그는 원만한 처신과 선조의 비호[9] 로 별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건저 문제(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의 영수 정철이 실각하자 이후 서인에 대한 처우를 두고 동인이 이산해, 정인홍이 이끄는 강경파 북인과 온건파 남인으로 분열하는데[10] 류성룡은 남인의 영수가 되었다. 또한 이 무렵 우의정에 임명되어 마침내 정승이 되었다.
2.2. 임진왜란의 전시재상(戰時宰相)
이 때쯤 일본의 전국시대가 종결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의 야욕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었던 참이었지만 서인이었던 황윤길의 강력한 왜군 침입 예고와 대비 주장에도 류성룡은 같은 당파 동인이자 쌍벽을 이루는 이황의 수제자였던 김성일의 보고를 듣고 기본적으로는 설마했던 것 같다.[12] 하지만 역시 찜찜했는지 이순신이나 권율 등을 천거해서 등용하도록 조치하고 각 지역의 방비를 튼튼히 하는 등 나름의 전쟁 준비를 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지금 조정의 신하들 가운데 명민하고 능란하며 경우가 바르고 말솜씨 있는 사람은 유 정승만 한 이가 없다."
그러나 결국 1592년 임진왜란이 터졌고 조선군은 무너져 선조가 피난을 가야 할 상황까지 몰리고 말았다. 이 때 전란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간관들의 탄핵으로 인해 잠시 이산해와 함께 파직되었다가[13] 복직되었고 이 때 비변사의 도제조이면서 의정부의 수장인 영의정이자 도체찰사가 되어(오늘날로 치면 국무총리 겸 총사령관) 조선의 내정과 군사를 모두 총괄했으며 조선 후기의 군영으로 유명한 훈련도감을 설치한 것도 바로 그였고 원군으로 온 명나라 군대를 원만히 상대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그 외 화포를 제조하고 성곽을 수축했으며 새로 설치된 훈련도감의 관리역으로 임명되어 병법서를 강의하는 등 군비 확충에도 많은 일을 했다.
전시에 행해진 류성룡의 조치들은 유연하고도 실용적이었는데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가 뜬금없이 조선에 구원병을 보내겠다는 제안을 하자 "당나라가 안록산의 난을 막으려고 위구르와 티베트에 원병을 청했다가 난리가 났듯 이걸 받아들이면 훗날의 우환이 될 수 있으니 거절하는 게 좋겠다. 다만 여진족으로서는 예전부터 우리에 대한 원한이 크므로 단호히 물리쳐 괜히 자극할 게 아니라 '도와준다는 건 고마운데 지금은 왜란이 거의 평정되었으므로 굳이 너희한테까지 수고를 끼치고 싶지는 않다' 정도로 잘 사양하는 게 좋겠다"라는 의견을 낸 것만 보아도 류성룡의 통찰력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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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의 갑옷과 투구. 단순한 투구 모양과 가죽으로 만든 찰갑으로 구성된 특이한 형태다.
전란이 끝나갈 무렵인 1598년 명나라 경략 정응태가 "조선이랑 일본이랑 합세해서 우리나라 치러 온다"라고 명나라 조정에 무고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를 해명하기 위해 무게감 있는 대신이 가야 한다는 여론이 우세했고 선조 또한 원해서 류성룡에게 이를 해명하러 갔다 오라고 부탁했지만 류성룡은 노모가 있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 그런데 북인[14] 이 남인의 영수였던 류성룡을 이 일을 빌미삼아 탄핵을 하였고 결국 삭탈관직되어 낙향했다.[15]
2.3. 말년
이후 1600년 복직되었으나 벼슬을 하지 않고 은둔 생활을 하면서 저술에 힘썼는데 쓰여진 저작 중 하나가 바로 《징비록》. 자신이 겪은 임진왜란 때 조선의 실태와 참상, 이를 반성하는 의미에서 저술한 것으로 지금까지도 임진왜란 연구사의 중요한 자료로 꼽히고 있다. 그렇게 조용히 살다가 1604년 은거하던 고향 하회마을이 수해를 입는 바람에 하회 마을에서 풍산 서미동으로 옮겨 살았고 1607년 5월 6일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류성룡의 문집 《서애집》의 서애 선생 연보에는 말년에 "조용히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손님들을 물리치며 살았다고 하며 류성룡이 임종하는 모습이 상세히 적혀 있다.
그의 죽음이 전해지자 숭례문의 상인들은 철시를 하여 애도를 표했고 백성들은 "류 정승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1명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라며 슬퍼했다. 청렴했던 탓에 집안에 재산이 없어서 백성들이 제수 용품을 차려 장례를 지냈다고 한다.5월 6일 무진일, 진시(辰時)에 정침(正寢)에서 고종(考終)하였다.
그 전날 밤에는 남의 부축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일어나 앉아서 말하기를 "오늘은 정신이 환하여 병이 없던 때와 같다."고 하면서 홍범(洪範)을 끝까지 외었다.
이날 진시 초에 사람을 시켜 내의를 맞아 오게 했다. 내의는 약을 달이느라고 곧바로 들어가지 못했는데, 여러 번 명하여 빨리 들어오라고 재촉하고, 들어온 뒤에 손을 잡고 영결하며 말하였다.
"멀리 와서 병을 간호해 주니 천은이 망극합니다. 그대의 수고도 많았는데, 며칠이면 서울에 도착할 수 있겠는가?"
곧 명하여 당(堂) 중간에다 자리[席]를 마련하고 거기로 옮겨 나가려 하자 모시는 사람은 힘들게 움직이다가 괴로움이 더할까 염려해서 굳이 간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 이에 빨리 붙들어서 그곳으로 옮기자, 북쪽으로 향하여 정좌하고 편안하게 서거하였다.
- 《서애집》, 서애선생연보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수2리에 있다. 1589년 먼저 사망한 아내 전주 이씨와 합장되어 있다. 류성룡의 부인 이씨는 세종대왕의 5남인 광평대군의 후손이다.
3. 인물됨과 이야기거리
세종대왕 시대의 황희, 류성룡과 동시대의 이원익, 정조 시대의 채제공 등과 더불어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명재상의 위치에 있는 인물로 전체적으로 그의 업적은 정말 훌륭하다. 행정이나 군사, 외교 등 어떤 업무를 맡겨도 척척 해결해내는 인물이었으며 사람 보는 눈도 대단히 뛰어나서 많은 인재들을 등용했다. 당시에도 명석함과 영특함으로도 소문이 자자해서 당대에는 "이원익은 속일 수는 있지만 차마 속이지 못하겠고, 류성룡은 속이려고 해도 도저히 속일 수 없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나돌았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바둑이나 의술, 점술, 천문에도 통달하여 그와 관련한 일화들을 많이 남겼다. 의술에 대해서는 허준에게 조언할 정도였다고. 특히 바둑은 국수(國手)라고 불릴 정도로 당대 조선을 대표하는 고수였다고 한다. 이여송과 선조가 바둑을 둘 때 바둑을 둘 줄 몰랐다는 선조를 위해 양산을 받치고 거기에 구멍을 내어 구멍 틈으로 들어오는 빛으로 선조에게 훈수를 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며,[16] 그 외에도 바둑과 관련된 일화들은 야사에 많이 전하나 기보 등의 직접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서 객관적인 기력이나 실력을 짐작해 볼 수는 없다. 다만 평소 바보천치로 살던 형 류운룡에게 지기도 했다는 야담이나 일화도 남아있다.
류성룡의 형 류운룡은 동생과 같이 이황 문하에 수학한 문인이였으나, 영의정에 오른 동생과 달리 음서로 올라 평생 한직을 전전하다가 생을 마쳤다. 그래서 동생보다 못하다는 얘기가 당대에도 퍼져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야사에서는 사실 동생보다 재주가 비상하고 뛰어난 인물로 나오고, 안동 일대에도 류운룡을 소재로 한 전설이 꽤 많다. 류운룡은 평생 풍류를 즐기다 죽었는데 선비들의 이상향인 지리산 청학동을 찾는데 주력했다고도 한다. 야사를 반영해 볼 때 학식은 있지만 관직 생활에는 적성이 맞지 않았던 모양. 이런 전설들에서는 조정의 재상으로 활약하는 동생 류성룡과 은거기인으로 살아가며 음지에서 동생을 돕는 형 류운룡을 대비하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는 비록 현실 정치에서 활약하여 크게 출세한 인물은 류성룡이었어도 안동 지방이나 류성룡 일가의 고향이었던 하회 마을 입장에서는 종가를 잇고 있는 형 류운룡의 입지와 위상을 세워줄 필요가 있었기에 이런 의식이 '류운룡이 비록 벼슬살이는 하지 않았지만 사실은 동생보다 뛰어났다'는 형태의 전설로 나타났다는 해석도 있다.
바둑 관련 야사로 전해지는 에피소드 중에는 이런 것이 있다. 류성룡이 상주 목사 시절에 한양에서 귀한 손님이 찾아 와서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때마침 고을에 복잡한 송사가 일어난 데다가 조정에서 사람이 와서 조정에 보낼 공문을 급히 작성해야 할 일이 겹치고 말았다. 하지만 류성룡은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이방과 형방을 불러서 송사의 판결문과 조정에 보낼 공문을 구두로 작성하면서 손님과의 바둑도 계속 둬서 결국 그 대국을 이겨버렸으며, 송사 판결문과 조정에 보낼 공문에는 한 치의 실수도 없었다고 한다. 뒷날 류성룡의 후임으로 온 상주 목사가 이것에 감탄해서 자기도 류성룡과 똑같은 상황을 만들어 놓고 3가지 일을 동시에 시행하려 했으나 결과는 셋 다 실패.[17] 이는 야사이지만 그만큼 류성룡은 일 처리 능력이 훌륭한 사람이었다고 받아들여졌다는 걸 내포하는 이야기로 보면 될 것이다.
그리고 성품은 대단히 온화하여 남인의 영수라고는 해도 정작 본인이 당쟁의 선두에 나선 적은 없었는데, 상대편 당수였던 정철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서인들도 류성룡과 별로 불화가 없었고 그와 친밀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류성룡의 정치적 행적을 보면 서인보다 나중에 북인으로 갈라지는 동인 강경파와 대립하는 경우가 많았다. 앞에서 말했듯이 류성룡은 대인 관계가 원만하기로 유명했지만, 비타협적이고 강직한 북인의 중추였던 정인홍과는 앙숙 관계로 잘 알려져 있다. 글자 그대로 '물과 기름 같은' 관계라고나 할까.[18]
또한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순신과도 친밀했던 것으로도 유명한데,[19] 《난중일기》를 보면 류성룡과 서신 교환을 했다는 기록이 많이 보이며 이순신의 꿈에서까지 류성룡이 자주 나타나는 것을 보면 정말 각별한 사이였던 듯하다. 이를 증명하는 난중일기의 기록이 또 하나 있는데, 충무공에게 류성룡이 사망했다는 오보가 전해진 일이 있다. 이때 이순신의 반응은 "이건 잘못된 소문임. 그럴 리가 없음… 근데 만약 류 정승이 돌아가셨다면 어떡하지?? ㄷㄷ 점을 쳐볼까??"로 요약할 수 있다. 실제로 이날 이순신은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급기야 점까지 쳐보며 류성룡의 안위를 걱정한다. 특히 왜란 직전 이순신에게 《증손전수방략》이라는 병법서를 보내줬는데 그 책을 읽고 나서 이순신이 책을 높이 평가하는 장면도 있다. 이 책은 지금은 남아 있지 않아서 류성룡 본인이 직접 저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국의 여러 병법서들을 류성룡이 정리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비록 창안이 아니라 정리한 병법서라고는 해도 류성룡이 군사적 지식에도 꽤 전문가였음을 보여주는 부분. 《징비록》에서도 군제 운영이나 성벽의 방비 방안에 대해서도 자신의 의견을 나타내고 있으며 꽤 주목할 만한 의견도 있다.
그런데 류성룡은 정작 이순신이 선조에게 찍혔을 때는 발을 쓱 빼는 모습을 보였다. 조금 아쉬운 부분. 물론 아예 발을 뺀 것은 아니다. 대중이 생각하는 이순신과 류성룡의 친분과 상대적으로 비교했을 때 생각보다 조력자로써의 모습이 잘 안보였을 뿐. 당시 류성룡의 위치와 입지를 고려해보면 충분히 이해갈만한 부분이기도 하다. 사적으로는 충분한 조력자였으나 공적으로는 그러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다만 사적인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적극적으로 변호하기 어려웠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한편 이러한 친분 관계 때문에 이순신은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당대 사람들은 그를 남인으로 인식하였다.
《징비록》이 일본에서도 간행[20] 된 탓인지 일본에 대해 서술한 책인 《해동제국기》의 저자인 신숙주와 더불어 조선의 정치인 중 일본에 가장 잘 알려진 인물 중 한 명인 듯하다. 일본 서적 중에는 그를 ''''전시재상(戰時宰相)''''이라고 소개한 책이 있는데, 참 걸맞은 평가라고 할 수 있겠다.
징비록에는 지병으로 치질을 앓아서 거의 '''기어가다시피''' 해 가며 출근을 했다는 이야기도 실려 있다. 또한 왜란기에 신경을 많이 쓴 탓인지 자주 아파서 병석에 누운 적이 많았다고 한다.
야사에 따르면 한음 이덕형, 백사 이항복과 더불어 당대 미남자 중 하나였다고 한다.
안동에서 전해오는 구비 전설에 의하면 여섯 살 때 강에서 멱을 감다가 물에 빠져 죽을 뻔 했는데, 갑자기 돌개바람이 불어와서 류성룡의 몸을 바위 위로 날려 착지시켜서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 바위를 '돌고지바위'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 양반도 키가 장신이었다고 한다. 6척장신이라는 소릴 들을정도로 키가 커서, 나중에 사망한 후 제자들이 염을 하는데 너무 커서 방 안에 몸이 모두 들어가지가 않아 발목이 문 밖으로 나온채로 염을 했다고 한다. 그 모습을 지켜본 문하생들은 하염없이 통곡했다고...
4. 사후
안동의 하회마을은 현재 풍산 류씨의 집성촌이다.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하회 마을을 방문했을 때 호스트로 맞이한 배우 류시원이 류성룡의 후손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류성룡의 형 류운룡의 13대손으로 직계후손은 아니다. 단지 유명하기 때문에 호스트로 선택되었을 뿐이다.
이명박 정부의 대통령 실장, 통일부 장관을 지낸 류우익과 풍산그룹[21] 의 창업주 류찬우가 류성용의 12대 손이다. 또한 정치인 유시민은 직계 13대손으로 장남의 요절로 종가를 이루는 차남가의 자손이다. 문민정부 시기에 외무부 장관을 지낸 류종하도 14대손[22] 이다.
프로 바둑기사 류시훈 9단도 류성룡의 후손이라 하나, 앞의 류시원처럼 확인을 필요로 한다.
류성룡의 위패를 모신 안동 병산서원은 많은 건축가들이 손꼽는 아름다운 서원으로 유명하다. 웬만한 고건축 서적에 병산 서원과 만대루가 빠지는 일이 거의 없으며, 여름 내내 피고지는 목백일홍(배롱나무)로 인해 한여름이면 꽃대궐 같은 풍경이 장관이다. 한겨울 눈 내리는 날의 병산서원도 고즈넉함이 일품.
대한민국 해군에서는 (의도하지 않게) 충무공 이순신의 이름이 구축함에 명명되는 바람에 상위 구축함인 이지스 구축함 3번함에 서애 류성룡 선생의 이름을 붙여 충무공을 임명, 지휘한 역사를 기리고 있다.
5. 병호시비
류성룡 사후 1620년 퇴계 이황을 주향으로 하는 여강 서원(1676년 사액으로 호계 서원으로 바뀜)을 건립하면서 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 가운데 누구의 위패를 퇴계의 왼편에 봉안할지를 두고 문제가 발생하였는데, 이게 의성 김씨 문중과 풍산 류씨 문중이 대립하게 되는 병호시비이다. 여기서 병은 풍산 류씨의 병산 서원이고 호는 의성 김씨의 호계 서원이다. 이를 가지고 병파 / 호파라고 하기도 한다.
논쟁의 중점은 '남인 계열의 큰 어른인 퇴계 선생의 위패 왼쪽에 누구의 위패를 두어야 할 것인가?'였다. 유교 사당에서 1인자의 왼편은 2인자를 뜻하니[23] , 이는 곧 퇴계의 다음 서열인 넘버 2가 누구인지를 정하는 것이었다. 더 높은 관직에 올라간 류성룡(정1품 영의정, 1542년생)의 위패를 퇴계의 왼쪽에 두어야 하는가, 아니면 연장자인 김성일(종2품 경상도 관찰사, 1538년생)의 위패를 두어야 하는가로 격심한 대립이 벌어져 갈등이 심해졌는데 영남 유림 내의 여론상 서애보다는 학봉이 존경받고 있었기에 관직만으로는 뜻을 관철시키기 어려웠고 이는 갈등 장기화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조정에서는 당시 영남 유림의 최고 원로였던 상주의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에게 자문을 구하여 서애를 왼쪽, 학봉을 오른쪽에 배향함으로써 위치 문제를 일단락지으려 했지만 결국 3차에 걸쳐 이 문제는 두고두고 대립하게 되었고, 심지어 남인의 지지를 받으려던 흥선대원군이 중재에 나섰지만 실패했을 정도로 갈등과 대립이 심했다. 결국 400년이 지난 2008년 2월에야 호계 서원 복원 기념으로 양 문중이 합의하게 된다. 서애를 왼쪽, 학봉을 오른쪽으로 하는 대신 학봉 옆에 그의 학맥을 이은 '소퇴계' 이상정(李象靖, 1711-1781, 목은 이색의 15세손)을 함께 놓기로 한 것.[24]
병호시비는 단순한 문중간의 대립이 아니라 학봉과 서애의 학풍을 이어받은 이들의 자존심 대립이기도 하였고, 또한 양 문중과 혼인 관계에 있던 가문들은 거의 모두 참가하였다. 심지어 학봉과 서애 스승인 퇴계 가문 진성이씨도 종파와 원촌파는 병파를, 하계파는 호파를 지지했다. 당시 대원군이 안동부사에게 시켜 호계서원에서 중재를 시도했을 때 참가한 인원만 호파 600명에 병파 400명이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화해가 쉽게 되겠는가? 또한 이인좌의 난 이후 영남 남인 세력들 대부분이 관직에 진출할 길이 막히고 신분제가 붕괴되면서 자신의 양반 지위를 확고하게 유지하고 지역민들을 장악하기 위해서 양반으로써 신분 지위를 공고하게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한 측면도 있다.
정작 생전에 류성룡과 김성일 두 사람은 어디까지나 서로를 동문으로서 존중해 주었을 뿐, 스스로를 상대보다 높이려고 한 적은 없었다. 냉정하게 따지면 무리하게 자신들의 조상을 높이려는 후손들의 과욕이었던 것.
6. 평가
이순신에게 가려져 그의 존재와 역할이 조명받지 못한 측면도 있다. 류성룡은 퇴계 학풍을 계승한 인물로 근원적인 예학을 추구하기는 했지만, 왜란 때의 행보를 보면 현실 문제에도 관심이 많아 '수미법'이라 하여 대동법의 전신격인 제도를 주장해서 실현시키기도 했다. 또한 가끔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까이기도 하지만, 십만양병설 자체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고,[25] 류성룡의 주장이나 행보를 보면 이이의 '경장론(개혁론)'과 부합하는 면도 많다. 근본적으로 보수적이었던 이황의 제자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부분.
다만 실록에는 그의 단점을 들어 "재상으로서의 줏대가 없었으며 옳지 못한 일을 간하는 것이 없었다."는 등 다소 좋지 않은 평이 있다. 실제로 이순신이 탄핵될 때 류성룡은 당시 분위기 때문에 이순신을 제대로 구원하지 못했다. 실록에 기록된 당시 어전에서의 발언을 보면 오히려 류성룡이 이순신의 모함에 소극적으로라도 편승하는 듯한 모양새를 취하기도 한다. 이 당시 류성룡의 발언'''만'''을 그대로 옮겨보면,
조정 신하들 중 정탁과 이원익 두 사람만이 이순신의 변호를 했고, 결국 이순신은 백의종군 처벌로 끝났다.성품이 굽히기를 좋아하지 않아 제법 취할 만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어느 곳 수령으로 있을 때 신이 수사로 천거했습니다. 임진년에 신이 차령(車嶺)에 있을 때 이순신이 정헌(正憲)이 되고, 원균이 가선(嘉善)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작상(爵賞)이 지나치다고 여겼습니다. '''무장은 지기가 교만해지면 쓸 수가 없게 됩니다.''' 거제에 들어가 지켰다면 영등·김해의 적이 반드시 두려워하였을 것인데 '''오랫동안 한산에 머물면서 별로 하는 일이 없었고''' 이번 바닷길도 역시 요격하지 않았으니, 어찌 죄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다만 체대(遞代)하는 사이에 사세가 어려울 것 같기 때문에 전일에 그렇게 계달하였던 것입니다. '''비변사로서 어찌 이순신 하나를 비호하겠습니까.'''
-《선조 실록》 1597년(선조 30년) 1월 27일
하지만 간과하면 안 될 것이, 애초에 원균이 이순신에 대해 모함하고 허위 보고를 했기에 이순신이 이런 처벌을 받게 된 것이다. 원균이 보고한 내용의 진의를 말 타고 그 먼 곳까지 가봐야 알던 시절에, 조정에선 보고서만을 놓고 결정을 해야 했다. 물론 조정도 심사숙고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전란통에 "이순신이 출정을 안 한다."는 둥 원균이 허위보고를 했다고 해서, 그 진위 여부를 적절한 시간 안에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물론, 류성룡이 임진왜란 지휘와 수습에 많은 공을 세웠던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 뛰어난 일솜씨와 전란 극복의 공적은 당대 신하들도 인정하는 바였고 특히 훈련도감의 창설로 인해 조선 후기의 군제에 영향을 끼친 것도 업적이라 할 수 있으며, "지난 일을 반성하여 앞으로의 일을 경계한다."[26] 는 의미에서 역작 징비록을 저술했으니, 이것들만 봐도 류성룡은 충분히 명신 대열에 들어갈 만한 인물이다. 당장 임진난 최고의 무장인 이순신과 권율을 천거해서 방비한 사람이 류성룡으로, 과장 없이 말해도 그가 없으면 전쟁에서 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묘하게도 350여 년 후인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을 이끈 윈스턴 처칠과 비슷한 점이 제법 있다. 역사상 최악의 전쟁에서 국가의 운명을 실질적으로 책임진 지도자였고,[27]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 물러났으며,[28] 전쟁의 경험을 회고록으로 남겼다는 점 등이 대표적.
7. 대중 매체에서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에서는 강성욱이 담당하였다. 이 드라마가 행재소를 중심으로 진행되기에 주요 인물 급 비중으로 나온다. 극중에 명나라의 민폐꾼들의 행각에 분노해 몸을 부르르 떠는 모습이 자주 나온다.
KBS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이재룡이 배역을 맡았는데 시작부터 이순신과 절친한 관계로 묘사되어 이순신에 대한 깊은 신뢰 아래 늘 뜻을 같이하며[29] 그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조력자가 된다.
조정에서 그와 관련된 논란이 일어나면 선조의 육탄 공격을 맞아가면서도 늘 이순신의 편에 서 주는데 대충 나열해보자면 이순신이 이일에 의해 녹둔도 패전(?)의 원흉으로 모함을 받았을 때 변호했고 전라 좌수사로 제수된 원균을 그릇이 안된다며 파직시키고 이순신을 천거했으며,[30] 좌수사 이순신이 왜란 직전 수군 폐지를 막기 위해 궁궐로 올라와 선조의 어그로를 끌어 죽기 직전에 말렸다. 왜란 내내 선조와 반대파의 이순신 공격에 적극 변호하며 이순신이 압송되어 옥에 갇혀 있을 때에는 직접 옥으로 찾아가서 울분을 토하는가 하면[31] 칠천량 이후 선조가 직접 이순신을 거론하게 하여 복직에 힘을 써 주기도 했다.[32] 하지만 이순신이 부산포로의 출전을 보류하자 그를 몰아세우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고, 이순신이 수군만의 과거 시험을 선언하거나 명량 해전 직전 수군 폐지론이 거론될 때는 다른 중신들이 그러했듯 이순신의 선택을 우려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칠천량 이후 윤두수가 원균도 이억기도 죽고 없으니 남은건 오직 한 사람 뿐이라고 운을 띄우며 은근슬쩍 이순신을 거론하자 어찌 그 입으로 감히 이순신을 거명할 수 있냐면서 멱살을 잡는 등 인간적인 모습도 보여준다.[33]
드라마의 주인공 이순신과의 우정과는 별개로 영의정이자 도체찰사로서 명과의 교섭, 왜와의 담판, 전장 조율 등 여러 방면에서 유능한 면모를 발휘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마지막 회에서 출전하지 말라는 선전관(=선조)을 무시하고[34]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는 이순신을 변호하다 파직되며 은거해서 완성한 징비록을 파직되기 직전에 세자 광해군에게 넘긴다.[35]
KDX-III 세종대왕급 이지스 구축함 3번함인 DDG-993(서애 류성룡함)의 함명으로 결정되었다. 원래는 권율함으로 내정되었으나 권율에 대한 해군의 부정적 여론 때문에 상대적으로 이순신과 친분도 있는 류성룡이 함명이 된 것. 함명으로는 류성룡함으로 표기된다.류성룡: 전하! 차라리 소신 또한 죽여주시옵소서!!
선조: 끝까지 역도를 두호할 요량인가?
류성룡: 목숨을 버릴 각오로 나라를 지킨 자를 역도라 하고, 정사를 그르쳐 나라를 누란의 위기에 몰아넣은 자들을 충신이라고 한다면, 이 나라 조선에 내일은 없사옵니다, 전하!
선조: 영상!
류성룡: 참혹했던 지난 7년 간의 전란, 그 책임을 자복하고 벌을 청해야 할 자들은 모조리 이 편전 안에 모여있사옵니다!
(신하들이 술렁인다)
류성룡: 이 나라를 정쟁의 나라로 만든 자! 전란이 터졌음에도 백성들의 안위를 방기하고 도성을 내어 준 자!
윤두수: 말씀이 좀 지나치십니다, 영상?
류성룡: 권력을 위해서라면, 나라를 구한 장수조차도 음해하기를 주저치 않는 자..!! 먼저 그 자들에게 죄를 물어야 할 것이옵니다!
(선조의 응시)
류성룡: 전하, 신 류성룡. 지난 30년간 전하와 함께 했사옵니다. 하오나 그 세월은 전하를 섬기기 위함이 아니었사옵니다! 전하의 하늘이신, 이 나라 만백성을 섬기기 위함이었사옵니다! 백성을 두려워하며,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군왕은 명군이며, 백성을 자식처럼 여기며 그들의 곤궁과 아픔을 자신의 몫으로 여기며 스스로를 질책하는 것으로 정사를 도모하고자 하는 군왕은 성군이라 하였사옵니다! 이제는, 군왕으로부터 이 나라 만백성이 합심을하여 이 전란을 거두고 새 나라를 세워야 할 때이옵니다. 전하, 부디 높고 멀리 보시옵소서.
-불멸의 이순신 마지막화에서 선조에게 사직서를 올리며 마지막 충언을 남기는 대목[36]
게임 《임진록》 시리즈에는 조선군 영웅으로 등장. 조선군 시나리오에서는 조선군 총사령관이다. 문관 캐릭터로 장풍을 쏴 공격하며 주변 유닛들의 방어력을 올려주고 '현혹' 기술을 사용하여 적군 유닛을 아군으로 만들 수 있다. 처음 임진록2가 발매되었을 때에는 유일하게 적 공중 유닛을 격추시키는 아이템 '공중탄'을 유일하게 사용할 수 있었으나 패치가 되면서 다른 영웅들도 이를 쓸 수 있게 되어 엿을 먹었다. 2편의 확장판인 『조선의 반격』에서도 여전히 등장하지만 시나리오상으로나 존재감이 있고 게임상 운용은 잘 안하게 되는 편이다.[37]
게임 《천하제일상 거상》에도 영웅 유닛으로 등장하며 유생을 키우면 전직시킬 수 있다. 여기서는 어째 일러스트가 참 후덕하다.
특이하게 공중 공격이 가능하며, 용잡이할 때는 필수. 전용 특수 기술로 포박술이 있어 몹들의 움직임을 봉인할 수 있다. 예전에는 용병인 유생이 포박술을 쓰기 위해 필요한 고급 부채가 무지막지하게 비싸 싼 맛에 유성룡을 고용하는 유저들이 많았으나 고급 파초선의 가격이 점점 내려가며 유성룡의 사용 빈도도 줄었고 최근엔 포박술 없이도 2차 장수를 충분히 만들 수 있게 되면서 완전히 버려졌다. 선조의 영혼석으로 2차 전직도 할 수 있는데 그 대상이 다름아닌 '''미실'''. 드라마 선덕여왕의 그 미실이 맞다!
2015년 2월에는 류성룡을 주인공으로 하는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이 방영된다. 배우는 그것이 알고싶다로 유명한 김상중. 덕분에 그것이 알고 싶다 드립이 흥하고 있다. 징비록의 류성룡은 여기를 참조.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도 나오는데 여기선 '''아주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정 대감 역할인 "류승룡"의 반대 당파 수장으로 나오며 통신사가 일본을 갔다온 시점에서 선조에게 왜놈들이 쳐들어 올 리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옆에 있는 신하가 "진짜로 쳐들어 오면 어떡해요?"라고 하자 뜻밖에 "옵니다"라는 대답을 하는데 이유인 즉슨 "저놈들 당론이 온다는데 아니라고 해야지". 이후 왜란이 개전되고 상대 당파에게 책임을 추궁당하는데 이 때 대사가 좀 코믹하다.
보다못한 선조가 대책을 세우라고 다그치니 "육지는 권율, 바다는 이순신"을 제시한다. 상대 당파에서 "육지는 신립, 바다는 원균"을 외치며 대립하자 선조가 "육지는 신립, 바다는 이순신" 으로 타협안을 제시해서 찝찝하게 마무리. 이후 피난 종착지 가지고 또 싸우는 등 대접이 영 시원찮다. 극중에서 이름이 일체 언급되지 않으며 극을 주도하는 인물조차 아닌지라 류성룡임을 알아보는 시청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상대 당파 수장 (정철) : "대감! 안 온다 하지 않았소!"
류성룡 : "그때는 민심이 흉흉할까봐 그랬지"
상대 당파 수장 : "그래 이제 민심이 흉흉해졌소. 어떻게 할 거요?"
류성룡 : "막아야지"
상대 당파 수장 : "뭘로 막아! 일전에 율곡 선생이 십만 양병설 주장했을때 당신이 반대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