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1881)
1896년 을미사변이 일어나 각지에서 민중들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또한 15세의 어린 나이로 총을 메고 의병에 참가했으나 의병진이 해산되자 산으로 들어갔다.
그 후 1905년 겨울, 정용기·이한구 등이 경주의 동대산(東大山)에서 의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알고는, 동지를 이끌고 그 의병진에 가담하여 당초 초장(哨長)의 직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고군분투한 공이 인정되어 좌영장(左領將)에 발탁되었다.
1907년에는 남석문(南錫文)·정순기(鄭純基) 등과 더불어 청송·영덕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던 중 남석문은 체포당하여 처형되었고 이석은 중도에 되돌아와 화를 면했다.
또한 같은 해 정용기 의병대장이 입암(立岩)에서 전사하니 그의 부친 정환직이 뒤를 이어 의병을 통솔하게 되자, 그는 중군(中軍)이 되어 분전하였다.
그러던 중 정환직 대장마저 청하 지방에서 체포당해 처형되자 의병진은 그 주장(主將)을 모두 잃게 되었다. 이때 그는 자신의 나이가 아직 어린 것을 이유로 주장의 자리에 오르지 않고 또다른 주장(主將)을 구하고자 하였다.
그 후 장기로 진격, 그곳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20여 명을 사살하였으며, 청하에서는 적 4명을 격살(擊殺)한 뒤 의병을 이끌고 울산을 향해 진군하던 중 매복 중이던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크게 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패한 뒤 훗날 다시 의병을 일으킬 것을 기약, 의병진을 해산시키고 고향으로 내려가 삼유산(三踰山)아래 도평촌(道坪村)[1] 에 은거하고 있던 중 1909년 2월에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그는 이후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탈옥에 성공, 도주하였으나 다시 체포당해 같은 달 14일 순국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