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기(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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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의병장.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1862년 12월 13일 경상도 영천군 자양면 검단동(현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 검단마을)에서 부친 정환직과 모친 여강 이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연일 정씨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 파조 정습명(鄭襲明)의 26대손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조직해 영천성을 탈환한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11대손이다.
그는 어렸을 때 집안 형편이 어려워 공부를 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따라 각지를 떠돌았다. 1876년 15살의 나이로 친척들이 살고 있는 김산군 파미면 봉계동(현 김천시 봉산면 예지리)로 이사해 그곳에서 10년간 지낸 뒤 다시 영천군 자양면을 거쳐 청하현 죽북면 현내동 창리(현 포항시 북구 죽장면 현내리 창리마을)로 이사했다. 그는 그곳에서 이한구(독립운동가)#s-2, 정순기(鄭純基), 손영각과 깊은 우정을 다졌다.
1887년 부친이 관직에 오르자, 정용기는 상경해 부친을 곁에서 모셨다. 그러던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본에게 넘어가자, 정용기는 이에 분노해 내부대신 이지용을 탄핵하는 <통곡조한국민(痛哭弔韓國民)>을 발표했고, 을사조약 체결 후 자결한 민영환을 추도하는 <혈죽가(血竹歌)>를 집필했다.
2.2. 을사의병
1905년 음력 12월 5일, 고종은 당시 시종관을 맡고 있던 정환직을 불러 "경은 화천(華泉)의 물을 아는가?”[2] 라고 말한 뒤 ‘짐망(朕望, 짐은 바라노라)’이라는 두 글자가 적힌 밀지를 내렸다. 정환직은 이를 받들고 주변의 감시를 피해 자택으로으로 돌아갔다.
정환직은 곧바로 정용기를 불러 밀지를 내보이며 의병을 일으키는 문제를 논의했다. 정용기는 자신도 의병에 가담하겠다고 했지만, 정환직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고향으로 내려가 가문을 보전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정용기가 끝내 고집을 꺾지 않자, 정환직은 결국 승낙하고 의병을 일으킬 준비에 착수했다. 두 사람은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강원도 강릉으로 북상한 후 다시 서울로 들어가 일본군과 간신들을 몰아내고 황실을 지키기로 했다.
이후 정환직과 정용기는 영남 일대를 돌며 동지들을 규합했다. 정용기는 1905년 12월 10일 영남으로 내려간 뒤 친구 이한구, 정순기, 손영각을 만나 모든 것을 의논하고 계획했다. 이윽고 1906년 1월 영천창의소를 설치한 그는 고종의 밀지를 의병장들에게 보이고는 통문과 격려문 등 각종 선전문을 지어 각지에 배포했으며, 의병을 진압하려는 각지의 초토관들에게 경고문을 발송해 나라를 위해 함께 해줄 것을 호소했다.
1906년 2월, 영남 일대에서 모인 1,000여 명의 병사들이 정용기를 대장으로 추대했다. 그는 처음에는 사양했지만 사람들이 굳이 권하자 마침내 승낙했다. 그는 대장에 오른 뒤 의병진 명칭을 산남의진(山南義陣)으로 정하고 부대를 편성했다. 산남의진은 정환직을 총수로, 정용기를 대장으로 삼고, 충군, 참모장, 소모장, 도총장, 선봉장, 후봉장, 좌영장, 우영장, 연습장, 도포장, 좌익장, 우익장, 좌포장, 우포장, 장영집사, 군문집사 등 16개 부서로 나누어 편성했다. 각 부 장령은 본영의 지휘에 따라 각기 50~100명의 소부대를 지휘했다.
이렇게 의병을 갖춘 정용기는 1906년 3월 15일 북상을 개시해 신돌석의 의병대와 합세하려 했다. 그러던 1906년 4월 28일, 경주진위대 병사들이 그를 찾아와 부친 정환직이 서울에서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는 아버지를 석방시키기 위해 경주로 가서 경주진위대장 참령 신석호(申奭鎬)와 논의하기로 했다. 이에 중군장 이한구가 동행하겠다고 나섰지만, 그는 "뒷일을 그대에게 맡기겠다."는 말을 남기고 홀로 떠났다.
그러나 이것은 함정이었다. 정용기는 경주에 이르자마자 경주진위대에게 체포되었고 대구경무소에 구금되었다. 이때 정환직은 영남 일대를 돌며 동지를 모았고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군자금으로 고종의 하사금 5만냥과 전 참찬 허위로부터 받은 2만냥을 확보한 뒤 무기와 군수품을 구입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어떻게든 아들을 구하기 위해 석방운동을 벌였고, 정용기는 4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 사이 산남의진은 대장을 잃은 여파로 병사들이 상당수 떠나버려서 해산되었다.
2.3. 정미의병과 최후
정용기는 석방된 뒤 고문의 후유증으로 한동안 요양 생활을 했지만, 1906년 12월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여기에 가담해 영천군 국채보상단연회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단연회 통문을 발표하고 영천 일대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다. 통문의 주요 내용은 일본에 진 외채 1,300만원을 우리 2천만 동포가 담배를 끊고 한 달에 20전씩 석 달만 모으면 갚을 수 있다는 것, 영천지역에서도 서로 서로 전하여 한 사람도 빠지지 않도록 할 것, 일본에 진 빚을 갚지 못하면 나라는 망하고 백성은 노예가 될 것, 나라가 없으면 몸 또한 망하고 나라가 흥하면 몸은 죽어도 영광일 것 등이었다.
그러다가 부친으로부터 의병을 다시 일으키라는 지시를 받고 영천군 단연회 회장 직을 자양면 용산리 원각마을의 유학자 이태일(李泰一)에게 넘긴 정용기는 의병을 일으킬 준비에 착수했다. 그는 옛 부장들을 만나 의논한 뒤 4월 초순부터 의병 모집에 착수했다. 1907년 4월 중순 신남의진을 재건한 정용기는 대장에 취임했다. 부친 정환직도 서울에서 내려와 의진의 여러 부장들을 만나고 그해 5월에 관동 지방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돌아갔다.
1907년 7월, 정용기는 본진 300명을 2대로 나누어 제 1대는 죽장에서 천령을 넘고, 제 2대는 신광에서 여령을 넘어 청하읍을 공격하게 했다. 본진이 7월 17일 청하읍을 공격하자, 청하읍 수비대는 동해로 퇴각했다. 이후 정용기는 읍내에 들어가 창고의 무기들을 몰수하고 분파소와 건물 등을 불태운 뒤 미처 도주하지 못한 한인 순사 1명을 처단했다. 이후 천령으로 돌아와 몰수한 무기 가운데 불필요한 것들을 천령 산속에 숨겨뒀다.
얼마 후, 일본군 대부대가 포항으로 들어왔다는 척후병의 보고를 접수한 정용기는 장령들과 의논한 뒤 일본군을 피하기로 결정하고 죽장으로 이동했다. 그는 죽장에서 주변 지역을 돌며 무기와 탄약을 보충한 뒤 북상하기로 하고 청송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비가 와서 길이 끊기자 영천군 신녕면 방면으로 나아갔다. 이후 영천 화북면 자천을 거쳐 청송 일대로 들어간 그는 일본군이 영천에서 본군을 추격해 북상하고 있다는 보고를 접했다. 이에 그는 곧바로 본진을 2대로 나누어 영천 화북에서 청송 현서로 넘어가는 고개 마루에 매복시켰다.
그러나 일본군이 나타나지 않자, 그는 군사를 거두어 청송 현서면 벌전으로 나아가 의성읍을 공격하려 했지만 기밀이 누설되자 청송군 안덕면으로 이동했다. 8월 14일 청송 안덕면 신성에 도착한 그는 신돌석 부대로부터 청송군 일대에 일본군이 도사리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본진을 3대로 나누어 주요 지점마다 매복시켰다. 얼마 후 일본군 보병 제14연대 제12중대 1개 소대 30명이 신성에 들어오자, 그는 의병대를 이끌고 이들을 요격했다. 일본군은 몇 시간 동안 전투를 치르다가 현동 추강 뒷산으로 퇴각했고, 의병대 측은 부장 이치옥(李致玉)이 전사했다.
정용기는 일본군을 추격해 일본군이 숨은 산을 포위했지만 갑자기 큰 비바람이 몰아치자 포위망을 풀고 퇴각했다. 이후 그는 청하군 죽장면 절골 개흥사에 진을 쳤고, 8월 18일 부친이 파견한 강릉 의병부대와 합세했다. 또 이날 우포장 김일언이 죽장면 침곡에서 일본군 척후병 1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에 해볼만 하다고 판단한 그는 8월 19일 흥해군 기계면 운주산의 안국사로 진을 옮기고 포항을 공격하려 했지만, 포항에 일본군이 많아서 쉽게 공격할 수 없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포기했다.
8월 24일, 일본군 영천수비대가 한국인 보조원인 영천관포를 앞세워 자양으로 들어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정용기는 자양으로 150명의 병력을 파견해 일본군 1명과 영천관포들을 사로잡았다. 영천관포들은 동포들이었기에 타일러 보냈지만 일본군 1명은 참수했다. 이후 그는 군사 300명을 이끌고 청하읍을 공격해 적 1명을 사살하고 분파소 및 관계 건물을 소각한 뒤 천령으로 회군했다. 이동할 때는 농민이나 상인 등으로 위장해 일본군의 추적을 따돌렸다.
8월 29일, 정용기는 관동으로의 북상 및 각지의 의병대와의 연락을 위해 의병들을 경상북도 각지에 파견한 뒤, 자신은 본진 병력 150여 명을 이끌고 청하군 죽장에서 이동했다. 그러던 중 일본군이 입암에 진을 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그는 9월 1일 새벽에 입암을 공격하기로 하고 매복을 했다. 그러나 도중에 정보가 누설되고 말았고, 일본군은 매복한 산남의진을 역으로 급습했다. 정용기는 온 힘을 다해 맞섰지만 끝내 대패하고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 좌영장 권규섭 등 수십 명의 장령들과 함께 전사했다.
부친 정환직은 아들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잔여 병력을 수습한 뒤 1907년 9월 산남의진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그는 게릴라전을 벌이며 일본군을 괴롭혔지만 1907년 11월 6일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일본군으로부터 귀순할 것을 권유했지만 끝내 거부했고, 1907년 11월 16일 청하면 각전 남쪽 교외에서 총살형에 처해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정용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또한 부친 정환직은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