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독립운동가)

 


1. 부여군 출신 독립운동가, 李漢龜
2. 경주시 출신 독립운동가, 李韓久


1. 부여군 출신 독립운동가, 李漢龜


성명
이한구(李漢龜)
이명
이한구(李漢九)
생몰
1870년 10월 10일 ~ 1935년 5월 14일
출생지
충청도 임천군
(현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발산리)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이한구(李漢龜)는 1870년 10월 10일 충청도 임천군(현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발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6년 5월 17일 민종식홍주 의병진에 가담하여 선봉장 박영두(朴永斗)와 함께 유격장에 임명되었다. 소모장 이사성(李思聖)과 같이 임천·한산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고자 임천에 도착하였다가 체포되었다.
그해 11월 23일 평리원에서 내란죄로 유배형 10년형을 언도받았다.#
이후 출옥하였으나 옥고의 여독으로 1935년 5월 14일 별세하였다.
198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 경주시 출신 독립운동가, 李韓久


성명
이한구(李韓久)
초명
이경구(李暻久)

한유(漢有) 또는 경일(景日)

지포(芝圃) 또는 신성재(新省齋)
본관
여주 이씨[1]
생몰
1870년 9월 16일 ~ 1907년 9월 11일
출생지
경상도 안강현 양동
(현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양동마을)[2]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이한구(李韓久)는 1870년 9월 16일 경상도 안강현 양동(현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양동마을)에서 이언적의 12대손으로 태어났다. 이후 청하현 죽남면 지동(현 포항시 북구 죽장면 지동리)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1905년 11월에 을사조약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비분강개하여 의병대장 정용기와 더불어 의병을 일으킬 것을 상의하여 이듬해인 1906년 4월에 동대산(東大山)에서 동생 이순구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후 정용기 의병장이 신광면 우각리에서 적군에 의해 체포되자 휘하의 의병들을 인솔하고 주왕산으로 들어가 활약하고 있던 중 이경구(李景久)가 약곡(藥谷)에서 일본군과의 접전에 실패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의병진을 이끌고 약곡으로 나아가 이경구를 고무 격려하였다.
이어서 청하를 습격하고자 계획을 세우고 의병부대를 인솔하여 덕성리(德星里)를 거쳐 진격하던 중 돌연히 일본군이 공격을 단행함에 이를 맞아 의병들을 독려하며 격전을 펼쳐서 적군 수명을 사살하였다.
다음날 일본군이 북진(北陣)을 파하였기에 신태호(申泰浩)가 이를 추격하였으나 다시 패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듣고 이한구는 의병들에게 정용기는 체포되고 신태호는 패하였음을 들어 일본군에 대해 중과부적임을 주지시키고 훗일을 도모하자는 기약을 하고 의병진을 해산하였다.
1907년 석방되어 재기를 도모하고 있던 정용기와 더불어 재차 의병을 일으켜 청송의 신성(薪城)에 진영을 옮기던 중 밤중에 일본군이 잠입하여 파수병을 사살하고 의병진으로 돌진하니 적들과 맞서 치열하게 전투하여 적군 3명을 사살하였다.
또한 자양(紫陽)전투에서 일본군의 분파소장(分派所長)을 생포하고 일본군 3명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1907년 9월 11일 죽장면 입암리에서 교전하던 중 정용기 등과 함께 전사, 순국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 여강경주파 23세손 '''◯구(久)''' 秉(병)◯ ◯燁(엽) ◯榮(영) 時(시)◯ 항렬[2] 인근의 안계리·다산리와 함께 여주 이씨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