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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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李善長 (1314 ~ 1390)
원나라말 명나라초의 인물로 서달, 유기와 함께 명의 3대 개국공신으로 꼽힌다.
2. 생애
주원장이 곽자흥의 휘하에서 활약하던 시절 처음 만났으며, 그의 식견을 높이 산 주원장의 첫 번째 책사로 임명된다. 다만 군사(軍師)로써의 역량보다는 행정 및 정치참모 역량이 더 높았다. 초한지로 치자면 소하 포지션에 있는 인물.
그러한 공로를 높이사서 명나라 건국과 동시에 한국공에 봉해졌으며, 초대 승상으로 중서우승상에 기용되어 명나라 내정조직을 개편하고 행정업무를 담당하여 새로 개국한 명나라의 안정에 큰 공로를 세웠다.
다만 주원장은 이선장을 계속 기용하면서도 크게 신뢰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로는 곽자흥이 던진 출세떡밥에 잠시 주원장을 버리고 곽자흥을 따랐는데, 주원장이 다시 세력을 회복하자 박쥐처럼 돌아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만 이는 야사같은 데서 언급되는 내용이기에 진실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주원장이 이선장을 경계했던 가장 큰 이유는 당시 개국공신들의 최대 일파였던 회서파 귀족의 거두로써 상당한 파벌을 형성하고 있었던 점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행정관료로써 유능하고 공직에 있는 동안 특별히 흠잡을만한 실책이나 비리를 저지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이가 연로하여 정계에서 퇴직을 할 때까지 승상자리를 지켰다. 이후 이선장이 전면에 나선 적은 없지만 정계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자신의 직계 제자나 다름없는 좌승상 호유용과 다른 귀족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호유용 일파를 비롯한 이선장의 직계파벌이 대역죄 혐의로 투옥되어 처형당할 때 이선장 역시 대역죄인 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었지만, 홍무제 주원장은 이선장이 연로한 인물이고 대명 최고의 개국공신이라는 이유로 연좌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훗날 재조사에서 이선장의 직계가족이 호유용의 사건에 개입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어 결국 숙청당했다.
명망높은 개국공신이고, 상당히 연로한 인물이라는 이유에서 자결의 기회를 주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일설에는 그딴거 없이 그냥 처형했다는 이야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