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명나라)

 


1. 개요
2. 생애
2.1. 원 정부 시절
2.2. 주원장의 휘하에서
2.3. 명 건국 후
3. 성격
4. 높은 예지력
5. 제갈량과의 비교


1. 개요


[image]
劉基
(1311년 7월 1일 ~ 1375년 5월 16일)
원나라 말, 명나라 초의 인물. 는 백온(伯溫), 고향이 절강성의 청전이었던 까닭에 유청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달, 이선장과 함께 명나라의 개국 3대 공신으로, 명 태조 홍무제 주원장의 책사이다. 주원장이 '''"그대는 나의 장자방"'''이라고 평하였으며, 당대 사람들은 제갈공명과 비견되는 인물이라는 평을 하였다.

2. 생애



2.1. 원 정부 시절


23세에 원나라 진사시에 합격하면서 원나라의 관직을 제수받았다. 사실 원나라에서 그리 좋은 대접은 못받던 중국 남부 지역 출신인데다가, 가뭄에 콩나듯이 치러지던 원나라의 과거 시험에 합격했다는[1] 점에서 상당한 실력을 갖췄던 인물로 평가된다. '''특히 한족 차별이 매우 심했던 원나라의 그런 과거 시험에 옛 남송 지역의 선비가 합격한 것은 말 그대로 기적이다.'''[2]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낸 것은 해적 방국진이 발호하였을 때 원수 부도사(쉽게 설명하면 사령관 밑의 작전 참모)에 제수됐을 때이다. 이 때 유기는 각종 계책을 짜내서 방국진의 세력을 깎아내어 궁지에 몰아넣었다. 그러자 당황한 방국진은 원 조정에 뇌물을 바치고 귀순을 약조하면서 용서받았고 원 조정에서는 방국진에게 관직을 내렸다. 그러자 유기는 '방국진은 도적질하고 정부에 반항하던 자인데 왜 관직 주나'라고 꼬장꼬장 대들다가 높으신 분들의 미움을 사서 일반 행정직으로 좌천 당했고 결국 빡쳐서 관직 다 내팽개치고 낙향하였다. 이 와중에 죄인으로 몰리고 붙잡혀서 목이 날아갈 뻔 하기도 했는데 어찌어찌 잘 풀려서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당시 조정에서 유기를 아끼던 관리였던 탈탈첩목아가 그를 살리기 위해 그와 비슷하게 생긴 죄수를 처형한 후에 거짓 보고를 올려 살려줬다는 이야기가 있다.[3]
당시 홍건군의 일부를 이끌고 있던 주원장은 명망 높은 유기가 낙향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초빙하려 했으나, 당시 여기저기서 준동하던 도적 무리나 다름없다고 판단했기에 이에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포기하지 않고 여러 경로를 통해 자기 PR을 계속했고, 유기도 생각을 바꿔 주원장과 만나게 됐고 주원장의 밑으로 들어갔다. 이 때 시무 18조를 올려 주원장에게 천하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진언했는데 주원장이 크게 감명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2.2. 주원장의 휘하에서


당시 주원장이 이끌던 홍건군은 원나라 조정에 불만을 품은 민중들이 기반이 되는 세력이었다. 그 때문에 쌈질 잘하는 장수들은 많았을지 몰라도 전략적 식견이 높은 참모는 전무한 수준이었는데 이는 홍건군의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했다. 당시 주원장은 이선장의 보좌를 받고 있었지만 이선장은 군사(軍師)라기 보다는 내정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유기의 합류는 주원장의 세력에 엄청난 효과를 가져왔다. 실제 유기는 방국진 토벌 시기에서 활약한 진퉁 전략가였던 까닭에 주원장은 유기가 내놓는 의견을 귀담아 들었으며, 유기의 의견에 따라 군대를 움직였다.
당시 난징을 거점으로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주원장은 남부의 유력 군벌이었던 진우량, 장사성과 대립하고 있는 관계였다. 따라서 노선 잘못탔다가는 진우량과 장사성에게 다구리 맞고 박살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 대해서 유기는 강대한 진우량을 공격하면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이라 주장했다. 장사성은 틀림없이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지만 자기 세력 하나 건사하는 것도 버거워하는 인물이기에 알아서 자멸할 것이기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 평했다.
유기의 진언대로 진우량과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던 주원장은 이 사실을 간파한 진우량에게 선제 공격을 당하는 처지에 놓였다. 당시 진우량의 군세가 매우 강했기 때문에 주원장의 수하들은 모두 새파랗게 질려서 항복과 도주를 주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기만은 이 때 오히려 노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는데, 나중에 주원장이 따로 불러 의견을 청하자 항복과 도주를 주장한 제장들을 처형해야 된다고 주장하면서 "겉보기에 강한 세력이니 깊숙히 끌어들인 후 힘이 빠졌을 때 역습을 가하면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란 진언을 올렸다. 주원장 역시 유기의 의견이 옳다고 판단하여 작전을 펼쳤고 진우량의 침공을 무사히 격퇴시킬 수 있었다.
예상 외의 대승에 기뻐한 주원장은 유기에게 큰 포상을 내리려 하였으나 당장의 논공 행상보다는 기세를 몰아 진우량을 박살내야 된다고 주장했고 즉시 주원장은 병력을 이끌고 진우량과의 전면전에 돌입했다. 이후 계속되는 전투마다 시의적절한 계책을 내놓아 주원장이 진우량을 격파할 수 있도록 했고, 결국 파양호의 결전(파양호 대전)에서 진우량이 전사했고 그의 세력을 붕괴시키는데 일조했다.
그 이후 중국 남부의 판도는 유기의 예상과 일치했다. 장사성은 결국 자멸했고 나머지 반란군들도 강대한 주원장의 밑에 앞다퉈 복속해왔다. 이렇게 주원장은 중국 남부를 평정할 수 있었고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서달을 총대장으로 임명하여 북원을 공격, 중국에 한족 왕조를 복원시키기에 이르렀다.

2.3. 명 건국 후


명 건국 후에는 어사중승, 태사령 등을 역임하면서 명의 기틀을 닦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실권을 잡고 정치 전면에 나선 적은 없는 축에 속한다. 이에 대해서 주원장이 중용하려 하였으나 유기 본인이 워낙 권력이나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어서라고 묘사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보다는 다른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아무래도 나서려고 했지만 이선장이나 다른 총신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주원장에게는 탁월한 내정 참모인 이선장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개국 공신들은 대부분 회서 지방 출신이었는데 반해 유기는 절강성 출신이었다.[4] 게다가 전장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했다고 해도 특유의 성격 탓인지 자연스럽게 비주류파로 밀려났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주류 세력이던 회서 출신 귀족들의 독주를 견제하려고 했던 주원장은 유기를 중용하려 하였기에 매우 위험한 인물로 지목된 상태였으며 유형무형의 견제를 당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인데 굳이 유기가 전면에 나설 수 없었던 사정이란 분석이다.
어쨌든 회서 출신 귀족들과는 아웅다웅하는 사이였지만, 그들의 영수였던 이선장과는 서로의 능력을 인정하고 사적으로도 친분 관계를 계속 이어가고 있었다. 물론 사적으로 친했다는 거고 공적으로 까야되는 건 서로 까고 보는 사이였다.
한편 주원장은 전한 고조 유방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수많은 공신들을 숙청한 황제로도 유명한데[5] 유기만큼은 크게 처벌당한 기록은 없다. 당시 대립 구도상 유기에 대한 참소도 많이 들어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를 받아든 주원장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거나, 잠시 관직이나 녹봉을 박탈했을 뿐이고 그나마도 곧 관직과 농복을 다시 내려 옆에 두는 등 오히려 보호를 받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수준. 이는 주원장이 경계했던 것은 회서 출신 귀족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로 인해 회서 출신 귀족들로부터 더더욱 공격을 받았으며 이런 시궁창에서 벗어나고자 스스로 사직하여 낙향했는데, 오히려 더 큰 모함을 받아서 귀경 후에 죄를 청해야 됐을 정도였다고 한다. 여튼 지속된 공격으로 인해 말년에는 그나마도 없는 녹봉 싸그리 삭탈당해서 당장 끼니 걱정을 해야될 정도였다.
야인으로 지내던 와중에 병을 얻어 죽었는데 일설에는 독살당했다고 한다. 실제 유기의 와병 소식을 들은 주원장이 좌승상 호유용에게 시켜 실력있는 의사를 보내 진맥을 받을 수 있도록 했는데 문제는 이 의사가 다녀간 이후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숨을 거두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호유용이 일부러 독살했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그 외에 주원장이 호유용에게 넌지시 독살을 지시했다는 견해도 있고, 주원장은 순수한 의도에서 이야기를 한건데 호유용이 확대 해석하여 독살했다는 견해도 있는 등 병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이 다수이다.[6]
말년이 참 안습한 편이다. 토사구팽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명나라의 개국 공신 중에 말년이 안습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이선장처럼 대놓고 죽였다는 게 티가 안 난다는 점이 어떻게 보면 다행이다.
여담으로 유기가 죽었을 때 그와 대립하고 있던 귀족들은 너무 기뻐서 축배를 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심지어는 고인드립도 서슴치 않았는데 일부 기록에는 유기의 관이 운구되는데 그 위에 폭죽을 터뜨려가며 즐거워했다고도 한다. 당연히 이 소식을 들은 주원장은 진노했다고 하며 당장은 침묵을 지켰지만 회서 귀족들을 대거 숙청할 때 배로 되돌려줬다고 한다.

3. 성격


강직하고 사심없는 성격으로 묘사되어 있다. 특히, 주원장이 공을 세워서 포상 좀 하려고 하면 본인은 안 받으려고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면모는 명나라 개국 공신의 논공 행상에서도 볼 수 있다. 당시 많은 공신들이 수천 석의 녹봉에 높은 작위와 관직을 제수받았는데도 모자라다고 찡얼거리다가 주원장에게 걸려 쳐맞기 일쑤였는데 유기는 고작 240석의 녹봉과 백작 정도의 작위에 머물렀음에도 큰 불평 불만이 없었다고 한다. 야사에는 유기가 직접 찾아와서 따지는 모습을 보려고 일부러 낮은 관직과 녹봉을 내렸는데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삐진 주원장이 오히려 유기를 불러다가 지금 나하고 장난하는 거냐고 따지기도 했단다.
그 외에도 주원장이 유기를 내정 분야의 높은 관직을 내리려고 했을 때 옆에서 보좌하던 이선장이 '''"백온은 내정에 관해서는 능력이 부족합니다."'''라는 의견을 내놓았던 적이 있었다. 나중에 주원장은 유기와 만난 자리에서 그 자리의 적임자 한 명 추천해달라고 하면서 이선장의 견해를 슬쩍 들려줬는데 오히려 그 사실을 인정하여 주원장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주려던 자리가 꽤 높은 자리였고 만날 때마다 넌지시 "네가 원하면 언제든지 제수하겠다"고 이야기했으나 본인이 계속 사양했다고 한다.
주원장 앞에서도 직언을 하면 했지 절대 사탕 발림을 안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아첨꾼들을 싫어했던 주원장이 굉장히 아꼈으며, 뭔가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들은 후에도 좋은 말만 계속 늘어놓는 신하들의 의견은 참고만 하고 유기를 따로 불러 구체적인 조언을 구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대체로 이 자리에서 들은 의견을 채택하거나 자신의 견해에 덧붙이는 식으로 국정을 펼쳐 나갔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주원장의 심기를 거스를만한 발언은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완곡하게 돌려서 한 축에 속하는데, 공신들 때려잡던 시기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세술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한 한 일화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천자가 된 주원장이 낚시를 떠났는데, 물고기를 하나도 낚지 못해 심통이 났다. 심심해진 주원장은 옆에 있던 유기에게 지금의 상황을 시로 써보라고 명했다. 물고기 하나 못 낚고 있는 상황을 주저리주저리 쓰면 주원장이 불쾌해할 것이 뻔한 상황인데, 현명하게도 유기는 이렇게 풀어내어 황제의 칭찬을 받았다.

"천 길 못 속에 있는 물고기는 도통 나오지 못하니, 이는 '''감히 천자를 뵐 수 없기 때문'''일세."

굽혀야 되는 시점은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옳다고 판단한 것을 주장할 때에는 황제고 뭐고 없는 꼬장꼬장한 양반이었다고 한다. 실제 이것 때문에 원 시절에 좌천당하고 목이 날아갈 뻔 했다.
일례로 주원장이 중국을 통일한 후 도읍지 남경에서 수도 정도를 고려할 때 봉양(鳳陽) 임호(臨濠)[7]가 앞에는 회하와 뒤에는 양자강을 끼고 있어 도읍지로 알맞다고 하면서 제2의 수도인 중도(中都)를 건설하려 하자 유기가 중도는 황제의 고향이지만 수도의 요지가 아니라고 끝끝내 간언하여 결국은 중도에서 무산되었다. 만일 주원장의 천도가 이루어졌다면 중국의 중심부는 남경이나 북경이 아니라 안휘성이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주원장에게 동쪽에 위치한 조선의 정치적 상황이 나아지고 군대의 힘을 기르면 언제라도 요동을 넘볼 수 있을 것이니 방비를 해야된다고 진언한 인물이기도 하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명사 유기 열전에는 이런 내용이 없고, 결정적으로 그는 1375년에 사망한 인물로 1392년에 건국된 조선과 1398년 사망할 때까지 요동정벌에 집착한 정도전을 의식해 이런 발언을 할 처지가 아니다.

4. 높은 예지력


'''천문학주역에도 능하였다고 하며, 실제 명리학 분야에서는 굵직한 이름을 남긴 인물이다.''' 당시 전해져오던 육효점을 집대성하여 완성시킨 인물로 알려져 초로 주석을 단 인물이란 의견이 더 지배적이다. 유기가 단 주석은 현재도 전해지고 있다. 일례로 《적천수천미》라는 책이 전해지는데 이 책은 명리학 4대 보전에 들어가는 아주 중요한 책이다. 이 책은 청나라 진사 출신 심효첨이 1848년 주석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원전과 주석에다 다시 자신의 주석을 달아 출판하였다. 《적천수》라는 책은 사주명리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데 《明史》 권 98 '志' 제74 〈藝文〉 3에 보면 "劉基三命奇談滴天髓一卷"이라는 문구가 있다. 유기가 주석한 것은 사실이고 그 원문도 유기가 썼다고 주장하는 의견도 매우 높다. 민국시대 유명한 사주명리학자였던 서낙오가 대표적이다.
실제 명리학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일화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진우량과 파양호에서 대전을 벌이고 있던 시기에 유기가 갑자기 당장 다른 로 옮겨타야 된다고 주원장에게 진언을 하였는데, 평소와는 다르게 다급히 독촉하는 형국이었다. 결국 주원장이 그 의견을 쫓아 다른 배로 옮겼는데, 그 순간 '''원래 타고 있던 배가 불붙은 에 맞아 파괴되었다'''.

당시 주변 지형이나 날짜, 주변 분위기를 점치고 주원장의 위기를 예측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참고로 '''이건 명나라 정사에 남아있는 기록'''이다. 그 외에 중국이나 세계의 미래에 대한 예언을 남겼다고도 전해진다.
또다른 예로, 파자(破字)에 능해 주원장이 파자점을 보았다고 한다. 그 때 주원장은 '순(順)'이라는 글자를 골랐는데, 유기는 그것을 보고 '順은 三+百+六이니 명은 306년 가겠다'고 예언했다. 주원장이 '603년일 수도 있지 않냐'고 항변했지만 유기는 한 번 나온 결과는 번복할 수 없다고 말렸다나. 명나라는 274년 뒤 이자성에게 멸망하는데, 공교롭게도 이자성이 내세운 국호가 '''순(順)'''이었다. 그리고 주원장이 난징을 점령하고 오왕에 즉위한 게 1356년이고, 남명이 망한 해가 1662년인데 이 사이가 딱 306년이다.[8] 그리고 명나라가 세워진 1368년에서 주원장이 얘기한 603년 뒤인 1971년은, 유엔 총회에서 '''중화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에게 권리를 상실한 해다.

5. 제갈량과의 비교


제갈량과 비유한 평가 때문인지 야사에서 유기는 제갈공명과 자주 엮이며 제갈공명 앞에서 데꿀멍하는 모습이 많다. [9]
전설에 따르면 유기는 평소 "옛적 제갈량은 삼국 중에 가장 작은 촉땅 만을 움켜쥔 채로 천하를 평정하지 못하였으나 오늘날의 나는 천자를 도와 천하를 평정하였으니 내가 제갈량보다 낫다."라는 말을 하며 자주 제갈량을 폄하하였다. 이후 유기가 벼슬을 내려놓고 중국을 유람하던 도중 옛 촉한 지역인 성도 주변으로 가게 되었는데 날이 어두워 어느 절에 묵게 되었다. 이윽고 새벽이 되었는데 스님들을 제외하고 그 어떤 생물도 살 수 없는 절간에 웬 수탉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는 민가와는 거리가 먼 고적한 산중의 절이었다.
그리하여 이에 궁금증을 품은 유기가 주지스님에게 "웬 절간에 닭울음 소리입니까?"라고 묻자 주지스님이 대답하기를 "옛적 제갈무후께서 우리 절에 하루 묵으시면서 이를 기념하여 흙으로 을 한 마리 빚어주셨는데 새벽녘이 되면 신기하게 울음소리를 내어 아침을 알려줍니다."[10]라 대답하였다. 이에 평소 제갈량을 무시하던 유기가 "그러면 나도 한 마리 빚어주겠소."라고 말하고 흙으로 닭을 빚자 유기가 빚은 닭은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 주변을 시끄럽게 했다.
이에 화가 난 유기가 제갈량이 빚은 닭을 던져서 깨자 닭 안에서 "모년 모월 모일에 유기가 나의 닭을 깰 것이다."(某年某月某日 劉基破土鷄)라고 적힌 종이가 나왔다. 이에 유기는 짐짓 놀랐으나 애써 태연한 척 절을 나와 성도로 향했다. 이로써 유기는 제갈량에 대한 평가를 조금 달리했으나 역시 제갈량을 자신의 아래라 생각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이후 성도에 도착한 유기가 제갈량을 모신 사당인 무후사(武侯祠)를 지나게 되었는데 무후사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말을 타고 있는 자는 말에서 내려 고삐를 잡고 가고 걸어 지나가는 자들도 두 손을 공손히 하여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유심히 보자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었다. 그러나 유기는 자신이 제갈량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말에서 내리지 않고 그냥 지나갔는데 하마비 앞에 다다르자 말의 발이 움직이지 않는 것 아닌가?
그래서 유기는 말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고 어떻게 해도 말이 발을 움직이지 못하자 땅을 파보니 다음과 같은 글귀의 쪽지가 나왔다. '''"때를 만나면 하늘도 도와주어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만 운을 만나지 못하면 아무리 영웅의 계책이라도 들어맞지 않는 법이라오."'''
그리하여 유기는 자신의 생각을 뉘우치고 제갈량에게 사죄하고자 제갈량의 사당으로 찾아갔으나 풍수지리적으로 아무리 봐도 그다지 터가 좋지 않은 곳이었다. 이에 유기가 "제갈 선생님께서는 다른 것은 모두 잘하셨으나 풍수는 잘 보지 못하셨구나."라고 생각하고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였다. 절을 하고 일어나려는데 이번엔 유기 자신의 무릎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 아닌가? 이에 놀란 유기가 좌우를 시켜 자신 무릎 아래의 땅을 파게 시키자 이번에도 어김없이 다음과 같은 글귀의 쪽지가 나왔다. "충신(忠臣)은 죽어서도 주군(主君)의 곁을 떠나지 않는 법이라오."[11]
이에 유기는 길게 탄식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제갈무후 같으신 분은 그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전무후무 제갈무후, 前無後無 諸葛武侯)

야사에서는 영 좋지 않지만 유백온 역시 병법, 정치, 문학, 사상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천재성을 보였다. 제갈량과 굳이 비교를 할 정도로의 인걸이라는 뜻. 사실 나관중삼국지연의에서 반대로 제갈량에 대한 연출을 유기에서 모티브로 삼았다고 한다. 특히 제갈량이 천기를 읽고 동남풍을 불어오는 등의 천문에 능한 부분은 확실히 유기에서 따왔다는 말이 있다. 물론 정확한 근거가 있는 얘기는 아니다.
일단 삼국연의 속 적벽대전의 모티브가 파양호 대전이라고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물론 실제 적벽대전도 화공으로 조조의 군대가 크게 상하여 조조가 물러나긴 했지만 실은 육상전의 요소가 더 컸고, 전염병 등의 요소도 컸다는 걸 생각하면.
김만중의 소설인 사씨남정기에도 첫 문장에서 주인공(유한림)의 조상으로 나온다. "명나라 가정(嘉靖) 연간, 금릉 순천부 땅에 유명한 가 있었는데, 성은 유(劉)요 이름은 현(炫)이라고 하였다. 그는 개국 공신인 유기(劉琦)의 자손이라...". 유효공선행록과 그 후속작 유씨삼대록의 주인공들도 유기의 후손이라는 설정. "대명 성화 연간의 성의백 유정경은 세대명문이니 개국공신 유백온의 후예오..."
[1] 원나라의 과거는 정기적으로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 몽골 황제가 내키는 대로 시행하였고, 그나마도 몽골인색목인에게 매우 유리하고 남송 지역 인사들에게는 매우 불리했다. 그래서 송나라 사대부들이 과거를 포기하고 소설이나 희곡 창작에 몰두하여 대중 문학이 융성했을 정도이다.[2] 중국 사극 드라마 주원장에선 주원장의 핵심관료 중에서 유일하게 진사벼슬을 한 것으로 나온다. 이는 주원장 이하 무장들이 그를 인정하는 원인이 된다. 나중에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이선장도 진사시험엔 낙방한 것으로 나온다.[3] 드라마 주원장에서 이 내용이 그대로 나온다. 관아에 잡혀와도 호기롭게 전병을 먹는 유기의 모습이 압권[4] 다른 이들로는 송렴, 섭침, 장일 등이 있다.[5] 사실 한고조는 후대에 공신 숙청이 부풀려 진 경우도 많고 죽인건 대부분 여후가 한 짓이기 때문에 주원장과 비교하기엔 좀 억울한 면도 있다.[6] 드라마 주원장의 경우 호유용 독살설을 채용했다. 호유용이 직접 어의와 함께 유기의 집에 방문하여 황명을 빙자해서 약을 내리는데, 이미 목숨을 내다버린 유기가 한방에 원샷하고선 다음날 사망하는 것으로 나온다.[7]안휘성 저주 봉양으로 다름아닌 주원장의 고향이다.[8] 아니면 유기를 불러들인 해가 1358년, 남명의 정무제까지 포함하면 1664년.[9] 이를 보면 예나 지금이나 제갈량의 위상은 가히 압도적이라 말할 수 있다.[10] 여담으로 촉한 당시에도 불교가 들어간 흔적이 있다. 사천성 낙산시 마호애묘(麻浩崖墓)에 바로 촉한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는 부처와 승려의 도상이 있는 것. 촉한에서도 불교와 민간신앙이 결합되는 형태로 수용되었던 증거라 본다. 단 지배층에까지 미친 흔적은 전혀 없다.[11] 실제로 제갈량의 사당은 유비의 무덤인 한소열묘(漢昭烈廟) 바로 옆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