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달

 



'''명의 위국공'''
신규 책봉

'''서달'''

중산왕 추증
[image]
'''작위'''
위국공(魏國公)
'''왕호'''
중산왕(中山王)[1]
'''시호'''
무녕(武寧)
'''성씨'''
서(徐)
''''''
달(達)
''''''
천덕(天德)
'''생몰 기간'''
1332년 ~ 1385년
'''재위 기간'''
1370년 ~ 1385년[2]
1. 개요
2. 생애
3. 자녀들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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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나라 말, 명나라 초의 인물로 자는 천덕(天德).
유기, 이선장과 함께 명나라 3대 개국 공신으로 홍무제를 따르던 수많은 장수들 가운데 가장 높은 지위에 올랐다.

2. 생애


어린 시절 주원장과 동향으로 주덕흥, 탕화, 주원장과 함께 지주의 소를 치며 목동 노릇을 하였다. 지주의 송아지 일화를 보면 이때 무리의 리더는 주원장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22세때 홍건군에 가담하여 당시 곽자흥의 부장이었던 주원장의 수하가 되었다. 홍무제가 위기에 빠졌을 때 몇 차례 구해준 적이 있어서 홍무제와 돈독한 사이가 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후 전선의 최고 지휘관으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수많은 공훈을 세웠다.
홍무 2년, 홍무제의 지시에 따라 25만 대군을 이끌고 원나라로의 북벌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이 되었다. 서달은 북벌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원나라를 원주지인 몽골 고원으로 쫓아내버렸다. 기록에 따르면 초기 몽골 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룸을 불태웠으며, 더 나아가 시베리아의 동부 지역까지 진출했다고 한다. 남경에서 시베리아까지면 정말 엄청난 거리이다. 서달의 북벌은 원의 잔당 세력인 북원의 위세를 크게 약화시킴으로써 명 초기의 안정된 대외 환경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대승 소식에 크게 기뻐한 홍무제는 서달이 개선할 때 직접 도성 밖으로 나와 맞이하였으며, 큰 공을 세운 개선 장군이자 돈독한 친구로써 황제인 자신과 나란히 앉도록 하였을 정도로 환대하였다. 이후 홍무제의 넷째 아들인 주체[3]를 사위로 맞이하였으며, 녹봉 5천석을 받는 위국공에 봉해지는 등 최고의 영예를 누리게 된다.
서달이 세운 공이나 군에서의 영향력으로 보면 홍무제에게 큰 위험이 되는 인물이었다. 다만 서달이 자신의 공을 크게 내세우지 않았고 권력이나 재물에 대한 욕심을 보이지 않았던 까닭에 그런대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덕분에 수많은 공신들이 숙청되는 와중에서도 서달은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전장터에서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등창을 심하게 앓았다. 서달이 등창으로 심하게 고생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홍무제가 서달을 위로하면서 진귀한 약을 하사하였지만 결국 등창이 악화되어 숨을 거두고 만다.
홍무제는 공신이자 돈독한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며 중산왕에 봉하는 등 끝까지 예우를 잊지 않았다. 그리고 서달의 가문은 명 말까지 최고의 명문가 지위를 유지한다.
그런데 명말 어느 소설에서는 홍무제가 서달도 숙청했을 거란 야사를 집어넣었다. 숙청했는데 서씨가 어떻게 번창했냐 할 수 있겠지만, 해당 소설에서 말한 숙청 방식은 공식적인 처형이 아닌 자살 권유(조조가 순욱에게 그랬듯)다. 홍무제가 서달에게 내렸다는 진귀한 약이 많은 양의 술과 거위 고기인데, 이것이 등창에 상극이어서 병사를 유도했다는 것. 소설 작중에서 서달은 선물의 의미를 알고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온다. 물론 소설 속 이야기인데다, 정말 사실이었다 쳐도 증거가 남지 않을 간접적인 숙청이라[4] 증명할 길이 없다.
어쨌든, 공식적으로 서달에게 위해가 가해졌단 기록은 없다. 정사인 명사에는 서달이 홍무제가 내린 고기를 먹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이후 가문도 공신 가문으로 계속 번창했다. 3족에 5족까지 만들어서 씨를 말리는 홍무제 특성상 숙청을 하고도 가문이 번창할 리가 없다. 무엇보다, 등창 같은 종기는 면역력과 항생제가 중요하지 고기를 먹는다고 죽는 게 아니다(...).

3. 자녀들


정난의 변에서 서달의 자녀들은 굉장히 해괴한 운명을 맞이한다. 큰 딸[5]이 주체에게 시집갔는데 문제는 서달의 아들이자 그 서달의 큰 딸의 남동생인 서휘조가 그 주체와 제미산에서 맞붙어 전투를 떠서 이겼고 주체 휘하의 장수 이빈을 사살했다. 또 다른 아들이자 서휘조의 동생인 서증수는 일단 황제군 소속이었지만 주체와 내통하다 적발되어 참수당했다. 매형과 맞짱을 뜬 서휘조는 이후 매형이 최후의 승자가 되어 명나라 황제, 그 유명한 영락제가 [6] 되자 투항하라고 서휘조를 설득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그래도 서휘조가 서달의 아들이라 주체는 서휘조를 죽이지 않고 감옥에 넣기만 했다.
참고로 전설적인 명나라 시대 초창기 건국 무렵의 전세계 월클급의 국력을 보여주는 환관 정화의 대원정을 명령한 이가 바로 이 영락제 주체이다. 명목상의 이유는 해외에 친선 사절을 보내어 새로 건립된 명이라는 나라를 알리고 육방(六方)의 세계를 탐방하여 각종 신기한 문물들을 수집하고 연구한다고 하지만 조카와의 내전에서 조카가 끝내 죽지 않고 시체조차 발견되지 않아서 [7] 그 조카를 찾아내서 죽이기 위한 첩보대가 그 대규모 선단이었다는 설도 있다. 물론 기록상 자기 조카의 신변이 생존했는지 죽었는지마저도 확인조차 못한 것 같지만 영락제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정화를 시켜 탐험대를 전세계로 보낸다. [8]
요약하자면 누나는 주체의 마누라고 형은 주체와 맞서 싸운 장수인데 남동생은 또 주체와 내통하다 적발당해 죽었다는 게 상당히 해괴하다.[9] 옆 나라의 임금과 처남들을 숙청하는 것과 비슷하다. 조선 시대 태종의 장인인 민제와 같은 포지션인데 사위인 태종과 친했고 사위가 왕위를 올라 부귀영화 누렸지만 아들들이 매형을 도왔는데 사위의 숙청리스트에 올라 죽음을 당했다는 점이 비슷하다 서달의 아들들은 한명은 매형인 영락제에 내통하다 죽고 한명은 매형에게 대항하다가 누나인 황후 서씨의 탄원으로 목숨을 건졌다. 다만 서달은 사위인 영락제가 황제가 되기 전에 죽은 게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4. 기타


시대적으로 비슷한 김용의 소설 의천도룡기에도 잠시 등장한다. 장무기에게 무목유서를 받게 된다.
김혜린의 만화 비천무에도 등장하며, 여기서는 자하랑이 숙청당하면서 버려진 철기십조를 제압하고 그 대장이 되기도 한다.
코에이징기스칸 4에서 시나리오 4의 명나라 무장으로 등장한다. 오프닝 이벤트에도 등장하며, 능력치도 명나라 초기를 대표하는 명장답게 먼치킨. 전투치 90과 보병 적성 S등급의 소유자로 주체(영락제)와 함께 명나라 사기 장수진의 대표격이다.
오늘날 중국 난징에 있는 태평천국 역사박물관이 바로 서달의 옛 저택이었다. 정확히는 서달 저택의 정원 '서화원(西花园)'이었던 곳이다.
[1] 추증[2] 위국공[3] 훗날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가 되는 인물이다. 그리고 영락제와 서달의 장녀인 인효문황후 서씨에게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홍희제이다. 즉 서달은 홍희제의 외조부'''이기도 하다.[4] 겉으로는 선물을 내렸는데 우연히 병에 상극이었을 뿐이고, 공식 숙청도 아니니 서달 본인을 뺀 가문이 딱히 해를 입지도 않는다.[5] 인효문황후 [6] 말하자면 조선의 조카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의 상위호환 명나라 버젼, 게다가 그 시기도 엇비슷한 동시대로서 각각 중국과 한반도에 명나라와 조선이 건국된 건국 초기 시절이라는 점마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7] 일설에 의하면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고 중으로 변장하여 도망쳤다고 한다[8] 어차피 후반에 들어서는 본래의 목적보다 - 그 야사가 맞다면 - 차라리 다른 일석이조 일석삼조의 겸사 겸사 다른 목적과 이유가 터 컸을 테니까. 그 조카가 설마 남미와 아프리카까지 갔겠는가.[9] 일본의 세키가하라 때 가족끼리 편이 갈리거나 가문을 보존하기 위해 양다리를 걸친 경우가 있기는 하다. 사나다 가문의 노부시게, 유키무라가 대표적인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