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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李容稙
(1852 - 1932)
구한 말의 문신. 경술국치 당시 학부대신의 직위에 있으면서 병합 조약에 소극적으로나마 저항하였다.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치만(稚萬), 호는 강암(剛庵). 사과 승조(承祖)의 아들이며, 을사조약 때 분사(憤死)한 조병세(趙秉世)의 사위이다.
2. 생애
경술국치 당시 내각 회의에서 유일하게 반대 의견을 견지하다가 일본의 수해를 위문하는 특파 사절 명목으로 파견되어 사실상 쫓겨났던 전력이 있으며, 한일 합병이 결정된 어전 회의 당일에는 자택에 칩거하였다.[1] 내각 회의 당시 자리를 박차며 이완용에게 '''"칼침 맞으려거든 당신만 맞으시오. 난 그러고 싶지 않소."'''라고 했다. (그리고 이완용은 인력거를 타고 가다 이재명 의사에게 정말로 칼빵을 맞았다. 죽지는 않았지만 그 후유증으로 생긴 폐렴 때문에 죽을 때까지 고생했고, 결국 그 폐렴이 직접적인 사인이 되었다. [2] )
하지만 그가 조약을 반대한 것만을 가지고 그가 반일주의자였다거나 독립운동가라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는 일본이 조직한 친일 어용 유림 조직인 공자교회(孔子敎會)[3] 에서 활동하기도 했으며, 경술국치 이후에도 적극적으로 일본에 통치에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일제가 내려준 자작 작위를 받아들였고 성균관 부제학의 자리를 수락한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소극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지지했던 것은 확실하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김윤식과 함께 일본에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가 작위를 박탈당했다. 덕분에 “선항일 후친일은 처벌하나 선친일 후항일은 처벌하지 않는다”라는 이유로 친일인명사전에서 김윤식과 함께 제외된다. 친일'파'이긴 하지만 친일'반민족행위자'는 아닌 경우.
3. 관련 문서
4. 둘러보기
[1] 이완용이 그에게 어전 회의가 있다는 걸 일부러 알리지 않았다는 말도 있다.[2] 당시 이완용이 중상을 입고 받은 그 수술이 '''한국 외과 수술 1호'''였다. 집도의가 일본인이었는데, 후일 회고하기를 "외과술이 10년만 늦었어도 완용은 죽었다."라고...[3] “反儒 매국의 공자교 - 이토가 뒷돈 대주며 親日 전위 부대로 이용”, 《종교신문》, 2004년 3월 18일 작성. 2008년 5월 29일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