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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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짐은 한국 황제 폐하와 더불어 이 사태를 보고 한국을 들어서 일본 제국에 병합하여 이로써 시세의 요구에 응함이 부득이한 것이 있음을 생각하여 이에 영구히 한국을 제국에 병합케 한다. 한국 황제 폐하 및 그 황실 각원(各員)은 병합 후라도 상당한 예우를 받을 것이며,[2]
민중은 직접 짐의 위무 아래에서 그 강복(康福)을 증진할 것이며, 산업 및 무역은 평온한 통치 아래에서 현저한 발달을 보이기에 이를 것이니, 동양의 평화가 이에 의하여 더욱 그 기초를 공고하게 함이 짐이 믿어 의심치 아니하는 바이다."--
'''일본 메이지 덴노의 조서''', 1910년 '''8월 29일'''.
황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짐(朕)이 부덕(否德)으로 간대(艱大)한 업을 이어받아 임어(臨御)한 이후 오늘에 이르도록 정령을 유신(維新)하는 것에 관하여 누차 도모하고 갖추어 시험하여 힘씀이 이르지 않은 것이 아니로되, 원래 허약한 것이 쌓여서 고질이 되고 피폐가 극도에 이르러 시일 간에 만회할 시책을 행할 가망이 없으니 한밤중에 우려함에 선후책(善後策)이 망연하다. 이를 맡아서 지리(支離)함이 더욱 심해지면 끝내는 저절로 수습할 수 없는 데 이를 것이니 차라리 대임(大任)을 남에게 맡겨서 완전하게 할 방법과 혁신할 공효(功效)를 얻게 함만 못하다. 그러므로 짐이 이에 결연히 내성(內省)하고 확연히 스스로 결단을 내려 이에 한국의 통치권을 종전부터 친근하게 믿고 의지하던 이웃 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여 밖으로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역(八域)의 민생을 보전하게 하니 그대들 대소 신민들은 국세(國勢)와 시의(時宜)를 깊이 살펴서 번거롭게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각각 그 직업에 안주하여 일본 제국의 문명한 새 정치에 복종하여 행복을 함께 받으라.
짐의 오늘의 이 조치는 그대들 민중을 잊음이 아니라 참으로 그대들 민중을 구원하려고 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들 신민들은 짐의 이 뜻을 능히 헤아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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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희 4년 8월 29일 월요 맑음 / 음력 경술년 7월 25일 병인일
경 조동희(趙同熙) 진(進)
기주관 김천수(金天洙) 진 이용구(李龍九) 진
전제관 김유성(金裕成)도서과(圖書課) 진 윤희구(尹喜求) 진
주사 조병억(趙秉億) 진 조성흡(趙性翕) 진 정낙붕(鄭樂鵬) 진 장석준(張錫駿) 진
임금이 창덕궁에 있었다.
칙유(勅諭). 황제는 이르노라. 짐(朕)이 부덕(否德)으로 간대(艱大)한 왕업(王業)을 이어 받들어 임어(臨御)한 이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신 정령(維新政令)에 관하여 속히 도모하고 여러모로 시험하여 힘써온 것이 일찍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으되 줄곧 쌓여진 나약함이 고질을 이루고 피폐(疲弊)가 극도(極度)에 이르러 단시일 사이에 만회(挽回)할 조처를 바랄 수 없으니, 밤중에 우려(憂慮)가 되어 뒷갈망을 잘할 계책이 망연(茫然)한지라. 이대로 버려두어 더욱 지리하게 되면 결국에는 수습을 하지 못하는 데에 이르게 될 것이니, 차라리 대임(大任)을 남에게 위탁하여 완전할 방법과 혁신(革新)의 공효(功效)를 이루게 하는 것만 못하겠다. 짐이 이에 구연(瞿然)히 안으로 반성하고, 확연(確然)히 스스로 판단하여 이에 한국의 통치권(統治權)을 종전부터 친근하고 신임(信任)하던 이웃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께 양여(讓與)하여 밖으로 동양(東洋)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도 민생(民生)을 보전케 하노니, 오직 그대 대소 신민(大小臣民)들은 나라의 형편과 시기의 적절함을 깊이 살펴서 번거롭게 동요하지 말고, 각각 그 생업에 편안히 하며 일본 제국(日本帝國)의 문명 신정(文明新政)에 복종하여 모두 행복을 받도록 하라. 짐의 오늘 이 거조는 그대들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대들을 구활(救活)하자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 신민(臣民) 등은 짐의 이 뜻을 잘 체득하라.
내각 서기관장(內閣書記官長) 훈1등 한창수(韓昌洙)에게 특별히 태극장을 하사하였고, 장례원 악사장(掌禮院樂師長) 훈6등 백우용(白禹鏞)은 특별히 훈5등에 승서(陞敍)하여 팔괘장을 하사하였으며, 재무관(財務官) 훈5등 조재영(趙在榮)은 특별히 훈4등에 승서하여 팔괘장을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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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마지막 날 기사'''#, 이 기사를 작성한 이후 승정원은 바로 한국통감부에 의해 전격 폐지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달 뒤에 세워진다.
'''한일 병합''', 한일 합병 또는 경술국치(庚戌國恥)는 1910년(경술년) 8월 29일에 대한제국이 멸망하며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고 대한제국이 다스리던 한반도 지역이 일본 제국에 병합되어 식민지가 된 사건을 말한다.
조약명은 한일병합 조약이다. 외국 세력이 토착 권력을 몰아내고 한반도를 통치한 일제강점기의 공식적인 시작을 알리는 시점이다.
실제로는 1910년 8월 22일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일본 측에서 일주일 동안 발표를 안 하고 있다가, '''8월 29일'''에 순종황제 조칙 형태로 발표를 했다. 그러나 8월 29일 발표된 조칙에는 칙명지보(勅命之寶)[5] 라는 행정 결재에만 사용하던 옥새(玉璽)가 찍혀있었을 뿐, 대한제국의 국새(國璽)[6] 가 찍혀있지 않았고 순종황제의 서명조차 없었다. 이는 한일병합조약이 대한제국의 정식 조약이 될 수 없으며 따라서 '조약은 원천 무효'라는 주장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제2차) 한일 병합 조약은 대한제국이라는 나라가 일본령이 되었다고 '''공식적으로''' 선포한 사건이지[7] , 사실상 일본령으로 만들기 위한 '''실질적인 작업들은 이미 끝나 있었다.''' 일본은 중국(청나라),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함에 따라 일본의 한반도 장악에 방해가 되는 국제 세력들을 제거했고, 1904년 한일의정서를 시작으로 1905년 을사조약을 맺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또한 1907년 정미7조약으로 행정권 박탈 및 군대 해산, 1909년에는 기유각서로 사법권을 박탈, 이듬해 6월에는 경찰권까지 박탈하였다. 경술국치 즈음의 대한제국은 명목상으로만 독립국이었을 뿐, 사실상 일본의 일부나 다름 없었던 상태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후에는 한국의 국기인 태극기와 한국의 국가인 애국가도 금지되어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조선의 수도였던 한성(현 서울)이 경기도 경성부로 격하되면서 경기도 관할 지역으로 편입되었고 일본 제국의 일개 지방 도시로 격하된다.
이때부터 해방 전까지 한반도는 국제적으로 일본 제국의 식민지이자, 속령지였기 때문에 조선의 일본발음 '조센'을 따서 '''Chosen''' 이라고 불렸다. 다만, "Korea"라는 표현도 여전히 존재했다.#
2. 명칭과 관련해서
한국에서는 주로 '국권 피탈', '한일 합방', '한일 합병', '한일 병합', '한일 병탄', '경술국치', '경술왜란'[8] 등으로 부른다. '경술국치'는 '경술년에 일어난 나라의 치욕/수치'라는 의미로 국가적인 관점이 들어가 있으며, '경술왜란'은 '삼포왜란', '임진왜란'처럼 '경술년에 왜(倭)인(=일본인)들이 일으킨 난리'라는 적개심을 담은 느낌이 있다. 한국에서 이것을 합방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엄밀히 따지면 '합방'은 "동등한 자격으로 합친다"라는 의미가 있으므로 잘못된 것이라는 의견이 크다.
한국에서는 1990년도까지만 해도 “한일 합방”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게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일본의 압박으로 인해 이루어진 그 성격을 고려하여 "'''한일 강제 합방(韓日 強制 合邦)'''", "'''한일 강제 병탄(韓日 強制 竝呑)'''"등으로도 부르며, 일본이 한일 강제 합병의 불법성을 부정하는 경우가 많은 현재는 이쪽이 권장되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일한병합(日韓併合), 또는 한국 병합(韓国 併合), 일한합방(日韓合邦), 조선병합(朝鮮併合)이라고도 한다. 원래 일본은 '병탄(併呑)'이란 말을 쓸까도 했지만, 힘이 센 한쪽이 다른 쪽을 아울러 버린다는 의미가 한국인의 반발을 사서 저항을 불러 일으킬까 봐[9] '병합'이라는 신조어를 만든 것이다.(관련 내용 1,관련 내용 2). 현재 국어 사전에는 병합=합병 ≒ 합방이라고 되어 있다. 합병은 둘 이상의 단체, 조직, 국가를 합치는 것, 합방은 둘 이상의 국가를 합치는 것을 의미한다.
'병탄'은 표준국어대사전 기준으로는 "남의 재물이나 다른 나라의 영토를 한데 아울러서 제 것으로 만들다."라는 의미이나, 고려대한국어대사전은 "남의 재물이나 영토, 주권 따위를 강제로 제 것으로 만듦."으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강제로"라는 표현이다. 예문으로 "일본은 무력으로 한국의 병탄을 서둘렀다."를 제시한 건 덤.
한국의 주요 포털사이트인 네이버/다음의 한자사전에서도 '병탄(竝呑)'을 "「아울러 삼킨다」는 뜻으로,남의 재물(財物)ㆍ영토(領土)ㆍ주권(主權) 등(等)을 강제(强制)로 한데 아울러서 제 것으로 삼음"으로 정의하며 강제적인 느낌을 지닌 단어로 정의하고 있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어느 한국어 화자의 어감에도 '병탄'은 강제적인 느낌이 있다. 각주로 서술되었듯이 한자 '탄(呑)'자가 '삼킨다'라는 느낌이 있기에 더욱 그렇다.
조약 체결 당시의 일본어 공식명칭은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韓国併合ニ關スル條約)''''이다. 현재 일본 정부와 언론은 이 명칭에서 온 '한국병합'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3. 대한제국이 멸망하기까지의 과정
경술년(1910년) 8월 22일에 일본의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사이에 조인된 이 조약이 1주일이 경과된 이날 공표됨에 따라 순종황제의 조칙이 발표되어 '''8월 29일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한국인은 일본인이 되었다.''' '''그렇게 대한제국은 멸망한 것이다.'''
그래도 마지막 충신은 있어서, 학부 대신 이용직은 "이 같은 망국안에는 목이 달아나도 찬성할 수 없다"라고 반대하면서 뛰쳐나갔다.[10]
이때 일본에 협조한 매국노의 명단은 경술국적 문서로.
이미 마지막 통감이자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계획서를 가지고 입국했다고 한다. 이토 히로부미 생전에 이미 정해져 있던 것.
경술국치로 인하여 식민지화가 완성된 것이 사실이지만, 이 조약 하나만으로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아니다. 그 이전의 주변국들 간의 전쟁[11] , 여러 차례의 조약과 이권 침탈로 인해 이미 사실상 일본의 종속국이 된 상태에서, 경술국치는 그 이전의 조약들과는 달리 서류상 명의 이전의 성격이 강하다.
3.1. 경술국적
4. 한일병합조약
5. 기타
일본에서도 안중근의 의거가 워낙 유명한 고로,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합병 반대파였으며 안중근의 의거 때문에 대한 제국이 합병을 자초하였다는 의견이 있다. 실제로 안중근 의사가 일본 내 온건파의 대표와 같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면서 일본 내 과격파가 문자 그대로 '''과격하게''' 한반도를 침탈하는 동안 온건파가 제대로 이를 견제하지 못한 면이 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일본 내각은 이토 히로부미가 죽기 3개월 전인 1909년 7월에 이미 대한제국의 합병을 의결한 상태였다. 자세한 내용은 이토 히로부미 항목으로. 즉, 온건파는 '''온건하게 한국을 합병하자'''는 쪽이었지 '''합병하지 말자'''고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즉, 어차피 합병은 됐을 거라는 뜻이다. 물론 온건파들 힘이 컸으면 합병 시기가 좀 더 늦춰졌을 수는 있다. 그러나 오히려 온건파들이 득세했다면 일제에 호감을 가지는 조선인들이 늘어나 일제 강점기가 길어졌을 것이라고 보는 관점도 있다.
이위종의 아버지인 이범진은 주러 공사로 을사조약으로 대한 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된 이후에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남아 대한 제국의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적을 토벌할 수도 복수할 수도 없다는 깊은 절망에 빠져 자결하였다. 금산 군수로 <임꺽정>의 저자 벽초 홍명희의 아버지이기도 한 홍범식도 목을 매 자결하였으며[12] 그 외에도 <매천야록>의 저자 매천 황현 등 많은 선비들이 자결하였다. 그러나 을사조약과 정미 7조약 때와는 달리 현직 고위 관료 중 자결한 이는 없었다.
한편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냈다고 한다.# 이는 이미 을사 조약, 군대 해산, 고종 퇴위 등으로 나라가 망했다고 다들 체념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대조적으로 을사 조약 체결 시에는 온 나라가 뒤집혔고 백성들이 나라가 망했다고 공포에 떨며 울부짖었다는 유생들의 기록이 있다.
이 조약으로 인하여 35년간 식민지 지배를 당하고 결국 해방 후에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남북분단이라는 시련을 계속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다.
백범 김구의 생일이기도 한데, 1925년 나석주 의사가 자신의 옷을 저당으로 잡아 김구의 생일상을 차려주자 안 그래도 안 좋은 날이고, 어머니의 환갑잔치도 못 챙겨줬다는 죄책감 때문에 이후로는 생일잔치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2009년 9월 이명박 대통령이 2010년에는 경술국치 100년 '''기념'''으로 일본의 천황을 국내에 초대하고 싶다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당연히 기념이라는 단어를 쓴 것에 대해 논란이 일었는데, 사실 사전을 찾아보면 알겠지만 기념은 무언가를 축하하거나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게 아닌 '''뜻깊은 일을 다시 한 번 되새긴다'''라는 중립적인 단어이다. 쉽게 말하자면 '기억'의 강화 버전이라 할 수 있다. 당장 전쟁기념관이나 6.25 전쟁 OO주기 기념식 같은 명칭만 봐도 알 수 있고, 가톨릭 교회의 미사에서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한다는 표현을 쓴다. 하지만 사전에 기재된 설명이 화자들이 해당 단어를 실생활에서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충실히 반영하지 못하는 사례가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논쟁을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하기 힘들어 진다. 당장 '''현대 한국인들이 '기념'을 긍정적인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쓰는 비율이 압도적이다는 점'''을 고려하면 충분이 문제가 될 만한 단어 선택이라는 지적이다. 게다가 이게 덴노를 초대할 일인지도 의문.[13] 하여튼 이것 등으로 인해 코너에 몰렸다고 생각했는지 2012년에 이명박 대통령은 독도를 방문하고 천황의 사과 요구까지 하며 대일 강경 노선을 취하는데, 덕분에 한일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었던 걸 보면 새삼 격세지감이 드는 대목.
이와 별도로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3.1절에 경인대첩이 일어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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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이 사진을 경술국치가 일어난 날 경복궁 근정전에 걸린 일장기를 찍은 사진이라고 알고 있다. 한때 본 항목에도 그러한 설명과 함께 올라와 있었다. 하지만 이 사진은 '''경술국치 때 찍힌 사진이 아니다.'''# 링크된 글을 살펴보면 알겠지만 이 사진은 '''1915년 10월 1일 조선물산공진회 행사용으로 섭외한 비행기'''를 담은 사진이다. 동아일보가 '사진으로 보는 한국 백년'이란 책을 내면서 이 사진을 경술국치 때의 사진이라고 소개하고, 또 그 뒤로 비행기가 찍힌 부분을 잘라낸 사진이 여기저기 실리면서 오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것이다.[14]
한편 한일병합의 소식은 이웃국가인 청나라에도 상당한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청나라 주일공사인 왕대섭(汪大燮)은 일본의 한국 병합이 중국 만주 지역의 정세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면서 그에 대한 대비책 마련을 촉구하는 상주문을 제출하였다. 청나라 외무부에서도 만주 지역의 안전 문제, 특히 만주 거주 한국인 문제를 걱정하면서 길림순무(吉林巡撫) 진소상(陳昭常)에게 타전하여 장춘(長春) ・혼춘(渾春) ・연길(延吉) 각 지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한국 병합 반대 움직임에 각별히 경계 태세를 갖추도록 지시하였고, 심지어 연길 거주 한국인들의 병합 반대 행동을 엄중 단속해 줄 것에 관한 주청 일본 공사 이쥬인 히코 키치(伊集院彦吉)의 요청마저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15]
무엇보다 당시 청나라 황실은 '우리 역시 한국 황실처럼 되지 말란 법이 없다'라는 진지한 걱정을 하였다. 이미 당시 청나라 황실도 다 쓰러져 가는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선통제의 황태후인 효정경황후는 “삼한은 정말로 망하였다. 우리나라가 스스로 돌볼 겨를도 없으니 결코 상관할 수는 없지만 외국사람들이 우리의 변경 지역을 날로 노리고 있으니 반드시 조정의 신하들과 더불어 대비책을 잘 마련하여 추호의 손실도 없도록 해야 한다.”[16] 라고 말하며 앞날을 우려했다. 경술국치 직전 일본을 방문하고 있었던 재순(載洵.순친왕 재풍의 동생)은 청 정부 최고 권력기관인 군기처(軍機處)로 타전하여 한일합병 관련 소식을 보고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러한 황실의 우려는 바로 다음해인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면서 현실이 되었다.지금 알아본 데 의하면 일본인(日人)이 장차 우리에게 크게 불리한 대거동(大擧動)이 있을 것인즉 위급존망(危急存亡)이 간발(間髮)에 걸려 있다. 아국(我國)이 만약 서정(庶政)을 더 이상 개혁하지 않고 시급히 대비하지 않는다면 (한국의) 전철(覆轍)을 밟게 될 것으로 걱정되니 눈앞으로 다가온 화 때문에 두렵고 절박하기가 그지없다. 재순(載洵)은 (한국병합에 대한)견문(見聞)이 누구보다도 더 확실하기 때문에 죽음을 무릅쓰고 비밀리에 진언(陳言)하니 대신 상주(上奏)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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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淸宣統朝外交史料』 卷16, 18쪽.
6. 병탄 전후 일본의 움직임
6.1. 행정
일본은 1909년 7월의 각의에서 대한 제국 병합을 방침으로 잡은 이후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우선 건강상으로 골골거리던 통감 소네 아라스케를 대체해서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임명했으며 부통감직을 신설하여 야마가타 이사부로를 임명했다.
이들이 제일 먼저 준비한 것은 조선을 통치할 엘리트 관료들의 모집이었다. 한일 합방 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주권을 완전히 손아귀에 얻은 일본은 즉각 대한제국의 관청과 통감부 조직들을 개편하여 10월 1일 조선총독부를 설치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조직들을 흡수, 통합, 폐지시켰고 1,434명의 직원들을 해고했다.
한국인 고등관들을 모조리 해고했으며, 각 도 관찰사들도 6명만 남기고 모두 해고했다. 당연히 빈 자리는 일본인들이 차지했다. 이 중엔 전 대만 총독인 고마다 겐타로 밑에서 대만 통치에 관여했던 인물들이 많이 포함되었다. 이들의 실무 경력도 경력이었지만 고마다가 데라우치와 동향 사람이라 같은 파벌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후일 사이온지 긴모치에 의해 무능하단 이유로 내쫓긴 인물들로 인맥, 지연, 학연으로 등용시킨 무능한 인물들이 많았다. 이들 중 상당수가 고등문관시험을 치르지 않았다.
이후 야마모토 내각은 조선의 개발을 위해 감찰관으로 내무성 지방 국장 고바시 이치타를 파견했는데 그는 일본인 도장관들이 지극히 무능하고 상당수가 대장성 출신이라 이들 밑에선 조선이 개발되지 않을 것이라 혹평했다. 겨우 남은 한국인 장관들도 실질적으론 허수아비라서 밑의 내무부장, 재무부장이 모든 일을 담당했고 이에 괜히 한국인 장관들의 기분만 상할 판이니 한국인 도장관을 전폐하잔 주장도 나왔다.
6.2. 구 대한제국 황실
대한제국 황실은 황제국의 직위를 박탈당하고[17] 황제도 이왕(李王)이라는 봉호로 강등되었다. 일제에 적극 협력한 기존 지배층들은 조선 귀족령의 선포로 일본의 지배층에 포섭되었다. 일제는 자신들의 체제 선전과 조선인들의 복종을 이끌어내기 위해 고종과 순종을 이용했다. 특히 재위 시절 나라를 강탈당한 순종은 한국의 역대 군주 중에서 가장 많은 순행, 행행을 행해야 했다.[18]
물론 일제는 암묵적으로 고종과 순종을 이전처럼 일국의 군주로서는 대접을 해주었다. 일제는 경성에 주재하는 외교관들에게 고종과 순종을 알현하는 규칙을 만들었다. 1911년 정초와 고종의 탄신일에는 학생들이 대한문 앞에 모여 '황제 폐하 만세'를 외쳤는데, 원칙적으로 안되는 일이었지만 조선총독부는 이를 눈감아주었다. 또한 구황실에 막대한 세비도 지급되어 1911년만 해도 150만 엔의 생활비가 지급되었고, 고종과 순종에게 당구, 담배, 영화 등의 취미 생활을 제공하는가 하면 영친왕의 일본 생활에 대한 영상물을 찍어 보여주기도 했다. 영친왕도 일본에서 일본 귀족 예우를 받으며 살았다. 1919년에는 구황실 지급 세비를 180만 엔으로 증액시켰다.
1917년 함흥 순행은 눈여겨볼 만한데 이때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황제의 깃발들이 휘날리기도 해서 일부 일본인을 놀라게 했다. 순행을 하는 순종도 황제 복식을 갖추었다. 게다가 함흥 주민들도 순종의 함흥 방문이 조선왕조 임금으로서는 태조 이성계 사후 처음이었기 때문에 거의 환영 일색이었다. 그러나 순종이 일본 군함을 타고 도쿄를 방문했다는 사실은 당시 조선인들에게 여러모로 충격을 주었다.
고종과 순종부터 이왕의 작위와 봉록, 특혜를 거부하지 않자, 많은 구황족들도 대일 항전에 동참하지 않고 일제가 제공한 지위와 특혜에 안주하거나 몇몇은 적극적으로 일제에 부역하기도 했다. 그 결과 이왕가에 대한 배신감을 크게 느낀 조선인들은 '''왕정에 등을 돌렸다.''' 경술국치 직후엔 구 황실을 복원하자는 복벽주의 운동도 일어났지만, 일제의 탄압과 민중들의 무관심으로 인해 빠르게 줄어들었다.
그 결과 경술국치 이후 겨우 10년도 안된 1919년 3.1운동 민족 대표 33인 중에도 유학자나 기타 복벽주의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19] 같은 해 1919년에 성립된 임시정부 이름도 대한'''제국''' 임시정부가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였다.
임시정부 강령에서 구 황실을 우대한다는 조건이 있긴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우대하는 것이다 . 고종의 사망이 1919년 1월 21일인 것을 생각하면 당시 사람들의 조선 왕실에 대한 배신감과 실망감이 얼마나 컷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심지어 근왕의식이 강했던 유생들 사이에서도 고종의 사망 이후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에 대해 20세기판 예송논쟁이 벌어졌을 정도였다. 상복 반대파의 대표는 조긍섭으로 고종 무복설(無服說)을 주장하였는데, 간단히 말하면 망국의 책임이 있는 왕은 왕 대접을 해주면 안된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그 근거로 명나라가 망하자 자결한 숭정제를 들며 망국의 책임이 있는 군주라면 마땅히 자결해야 하는데, 그러기는커녕 일제로부터 '이태왕'이라는 작위까지 받았으니 고종을 위해 상복을 입는 건 일본의 신하임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으로 조긍섭은 최병심 등의 상복 찬성파들에게 맹렬한 공격을 받게 되고 제자에게도 절연당하는 등 많은 고초를 겪다가 결국 '고종은 일제로부터 독살당했으니 어쩔 수 없다'라는 이유로 한발 물러서 상복을 입게 된다.
이러한 자업자득으로 인해 가뜩이나 한국에선 대한제국 황실(조선 왕실)에 대한 이미지가 매우 나빴고, 대한민국 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정통성이 훼손될 것을 염려해 구 황족 입국을 철저하게 막았다. 황족이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거나 보탠 것도 없었는데 증거없는 소문은 나돌고 있어서 일제치하에서 독립하자마자 다시 나타나 제국의 부활을 선언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애시당초 이승만 본인이 민주주의 국가를 위한 첫걸음으로서 '제국'을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도 있었다. 이승만이 권력욕이 상당했고 실제로 독재를 저질렀으며 스스로를 '과인'이라고 부르는 등 구 조선-대한제국의 낡은 인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지만, 그조차도 대한민국이 '민주'''공화정''''이어야 한다는 의식은 확고했다.
결국 구 황족은 한반도에 상륙하지 못했으며, 이로서 구심점이 만들어질 여지조차 남기지 않아 황실 복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조선-대한제국을 떠난 현재의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확고해진 것이다. 이후 영친왕을 비롯한 해외 구황족의 귀국은 박정희가 정권을 잡고 나서야 가능해졌는데, 이것조차도 감사할 일로서 구황족이 그 이상, 즉 황족에게 돈을 내달라거나, 경복궁을 황족에게 제공하라거나... 하는 요구를 할 계제는 못되었다. 귀국조차도 세월이 흘러 구황실에 대한 한국 대중들의 악감정이 사그라들었기에 겨우 가능했던 일이었으니...
다만 당시의 대한제국 황실이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기도 했다. 고종의 비자금도 러시아와 일제에 의해 행방이 묘연해졌기에 독립군을 금전적으로 지원하는 것도 불가능했고, 일제가 주는 구황실 지원금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애초에 당시 한국의 선진 지식인들 대부분이 공화정을 선호하는 추세였기에 황실과는 대립 관계라 이들과 연대하는 것 역시 말이 안되었다. 대표적으로 1917년 발표한 대동단결선언만 봐도 "융희 황제가 삼보를 포기한 8월 29일은 우리 동지가 삼보를 계승한 날로서 황제권이 소멸한 때가 곧 민권이 발생한 날입니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