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조선)

 



'''역임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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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조선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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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1919년 독립 청원서 제출로 인해 작위 박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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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B0B3B><colcolor=#ffde09> '''대한제국 중추원 의장
김윤식
金允植 | Kim Yun-sik'''
'''이름'''
김윤식 (金允植)
'''출생'''
1835년 (헌종 1)
경기도 광주부
(현 경기도 광주시)
'''사망'''
1922년 1월 22일 (향년 88세)
경성부 자택
(현 서울시 종로구 봉익동 자택)
'''묘소'''
경기도 남양주 평구리
'''직업'''
학자, 시인, 정치가
'''저서'''
《운양집》, 《임갑령고》
《천진담초》, 《음청사
속음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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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B0B3B><colcolor=#ffde09> '''본관'''
청풍 김씨 (淸風)
'''부모'''
부 : 김익태(金益泰)[9]
모 : 전주 이씨
'''배우자'''
윤씨
'''종교'''
유교 (성리학)
대종교
'''학력'''
한학 수학 (1874년, 증광시 병과)
'''자'''
순경 (洵卿)
'''호'''
운양 (雲養)
'''국적'''
[image] 조선
[image]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조선

'''붕당'''
'''온건개화파''']] (친청)}}}
'''작위'''
[박탈]
'''경력'''
외부대신
중추원 의장
[박탈]
초대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1. 개요
2. 일생
2.1. 일생 초기
2.2. 관직 생활
2.3. 김홍집 내각
2.4. 실각 및 유배 생활
2.5. 말년
3. 사망
4. 평가
5. 여담
6. 저서
7. 같이 보기

'''김윤식 초상화'''[1]
[clearfix]

1. 개요


불가불가(不可不可)

김윤식,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방조약[2]

구한말의 문장가이자 정치가. 자는 순경(洵卿), 호는 운양(雲養). 1835년 경기도 광주부 출신이다.
대표적인 친청파이자 온건개화파[3]로 김홍집 내각의 외부대신으로서 갑오개혁을 추진하기도 했지만 러일전쟁 직후부터 많은 친청/친러 개화파들이 그러했듯이 소극적인 친일 성향을 보이게 되며 경술국치 이후 조선귀족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s-4 부의장이 되는 등의 행보를 보이지만 1919년 3.1 운동이용직과 함께 독립청원서를 제출해 작위를 박탈당하고 옥고를 치뤘다.[4]

2. 일생



2.1. 일생 초기


1835년, 경기도 광주부 출신이다. 본관은 청풍. 효종영의정을 지냈고 대동법을 추진한 관료, 김육의 9세손이다. 아버지는 김익태로 이조판서좌찬성 등을 역임한 관료이고 어머니는 전주 이씨이다. 그가 8세가 되던 해에 부모님을 잃고 숙부인 청은군 익정의 집이 있는 양근에서 생활했다.
1850년, 그는 유신환(1801 ~ 1859)의 문하에 들어가 남정철, 민태호, 박홍수 등과 학문을 배웠다. 그가 30세가 되던 해에 진사시에 합격했지만 대과에서는 합격하지 못해 10여년 동안 학문에만 전념했다. 1859년 유신환이 사망하자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자 개화파의 시조로 꼽히는 박규수의 문하로 들어가 개화 사상을 배웠다. 그리고 1874년 40세의 나이로 증광시 병과에 합격해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2.2. 관직 생활


고종과 관료들의 모습 (1890년)
가운데가 고종, 왼쪽부터 이정로, 심상한, 김윤식, 김성근,
이용원, 김병익, 민종묵, 서정순, 이주영, 김영전
1880년대 당시 고종은 실질적으로 친정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고종은 명성황후여흥 민씨 세력을 신임했고 여흥 민씨 세력은 그를 등용했다. 1876년 황해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었고, 순천부사를 지냈으며 1881년 영선사로 청나라에 파견되어 양무운동으로 개화되던 청나라의 모습을 보고 돌아왔다. 이는 이후 김윤식의 정책에 영향을 주었다.
임오군란 당시에는 천진에 파견되어 있었다. 조선의 민씨 세력들로부터 반란이 일어났으니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라는 급보를 받은 김윤식은 이홍장위안스카이를 찾아 도움을 요청했다.[5] 그리고 그는 청나라 군대와 함께 귀국한 뒤 임오군란 진압에 개입하며 흥선대원군을 톈진으로 압송시키게 했다.
이후에는 강화유수, 공조판서, 예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며 동도서기론적인 정책들을 추진했고 통리기무아문의 여러 요직을 역임했다. 1884년 (고종 21) 러시아와의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1884년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이 갑신정변을 일으켰지만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끝나게 되며 실패하자 이는 그에게도 영향을 미쳤는데, 김윤식은 박영효의 아버지 박원양을 장사지낸 혐의와 흥선대원군을 청에서 조선으로 귀국시키려던 위안스카이와 동조했다는 혐의로 실각해 1886년 광주유수로 좌천되었다가 충청남도 면천으로 유배되었고 이후 김홍집 내각에 외부대신으로 합류하기 전까지 8년 동안 유배 생활을 지냈다.

2.3. 김홍집 내각


1894년 온건개화파 김홍집을 중심으로 갑오개혁이 실시되며 김홍집 내각의 외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김홍집 내각의 외부대신으로서 대한제국의 외교 정책을 담당했고 개화에 힘썼다.
1895년 청일전쟁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일본이 청나라에게서 요동(랴오둥) 반도를 할양받게 되자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3국이 삼국간섭을 통해 일본이 다롄을 러시아에 양도하도록 압박했고 결국 일본은 다롄을 양도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에 조선에서는 박정양, 이완용 등을 중심으로 한 친미/친러 성향의 내각이 수립하자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켜 정국을 반전시킨 후 김홍집, 조희연, 정병하 등을 중심으로 제4차 김홍집 내각이 수립해 그는 외부대신으로서 내각에 다시 합류했다.
다시 수립된 친일 내각은 단발령, 종두법 등을 시행했고 양력을 채용하는 등의 개혁 정책을 펼쳤지만 단발을 강요하는 등의 정책은 백성들의 반발이 매우 심했고 특히 을미사변으로 반일 감정이 극심해져 있던 상황에 김홍집 내각 자체가 일본의 지원을 받아 수립된 내각이었기에 백성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했다.
1896년에는 서재필 등과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에 참여하고 독립신문 발간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해산되며 실패로 끝이 났며 최익현을 비롯한 위정척사파들의 공세에 시달리게 되었다. 또한 김홍집 내각의 을미개혁 역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사건인 아관파천이 일어나고 친일 내각이 무너지며 을미개혁 역시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고종은 을미사변 직후 경복궁을 일본군과 친일 내각이 장악한 것에 대해 위협을 느끼고 있었고 1895년 임최수와 청안군, 이범진 등의 정동파 관료들,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 등의 도움을 받아 춘생문 사건을 일으켰으나 안경수가 김윤식에게 밀고했고 또 친위대장 이진호가 군부대신 서리 어윤중에게 밀고해 실패로 끝이 났지만 3개월 후 다시 이범진이윤용, 이완용의 정동파 관료들은 철저한 준비 끝에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시키는데 성공해 김홍집 내각은 붕괴하게 되었다.

2.4. 실각 및 유배 생활


당시 외부대신이었던 김윤식을 포함해 내각총리대신 김홍집, 내부대신 유길준, 군부대신 조희연, 탁지부대신 어윤중, 법부대신 장박(장석주), 농상공부대신 정병하 등이 면직 되고 역적으로 체포 명령이 떨어졌다. 체포된 김홍집정병하는 순검들에게 살해당했고 고향으로 도피했던 어윤중도 원한이 있던 향반 무리에 의해 살해당했다.
새롭게 출범한 김병시 내각은 반일 성향의 내각으로 김윤식을 을미사변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묵인한 죄로 강하게 탄핵했고 결국 1897년 제주도로 종신 유배형에 처해졌다. 1898년 12월 대표적인 위정척사파인 최익현은 김윤식과 유길준, 서재필 등을 사형할 것을 주장했다. 김윤식은 제주도에서 지도로 옮겨가며 11년 동안 유배 생활을 보냈다. 그나마 일진회가 김윤식 사면 운동에 앞장섰지만 큰 영향을 주진 못했다.
1907년, 이완용 내각이 들어서자 고령을 이유로 석방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73세.

2.5. 말년


'''조선귀족 자작 시절 모습'''[출처]
1908년 중추원#s-2 의장을 역임했고, 1910년 어진회의에서 한일 병합에 대한 안건에 '不可不可'라고 대답하였다.[6] 경술국치 직후 자작 작위와 5만원의 위로금을 받았다. 1910년 10월 1일부터 1912년 8월 9일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을 지냈고 1916년 박제순에 이어 경학원 대제학을 지냈다. 
1910년 10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으나, 1919년 독립 청원서를 제출해 3·1 운동에 참여한 혐의로 박탈당했다.  당시 김윤식은 하세가와 요시미치 총독에게 확실히 전달되도록 하기 위해서 계책을 세웠는데 케이크 상자에 서류를 넣고 손자를 통해서 총독에게 선물이라며 보냈다. 이용직과 함께 독립 청원서인 대일본장서(對日本長書)를 작성해 보냈다가 1919년 7월 17일 모든 작위를 박탈당하고 2개월간 투옥된 후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고령[7]을 이유로 집행유예 석방되었다.
이후에는 경학원 대제학에서 면직되고 조선귀족 자작 작위도 박탈당한 후 봉익동 자택에서 조용히 사망했다.

3. 사망


1922년 1월 22일, 일제강점기 경성부 종로구 봉익동에서 사망했다. 향년 88세. 김윤식은 “내 장의를 간소하게 거행하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던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은 사회장을 결정했다. 1월 24일 이를 위해 박영효이용직을 장례위원장과 부위원장으로 추대했다. 또 사회장위원회를 구성하고 업무를 나눠 진행하지만 1월 27일부터 김윤식 사회장을 반대하는 주장이 터져 나왔고 당시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사회혁명당조선공산당 등의 공산주의 세력이 김윤식의 사회장 반대를 주장했다. 조선 사회에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기지 못했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이자 조선귀족 자작이었던 김윤식의 장례식을 사회장으로 하는 것은 과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들은 1월 30일과 2월 1일 두 차례에 걸쳐 반대를 위한 강연회를 개최했다. 제1차 강연회의 주제는 김윤식의 사회장 반대였고 제2차 장연회 주제는 사회장을 주도한 자들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또한 반대한 사람들은 사회장을 주도한 자 모두를 민중의 적으로 규정하고 계급투쟁을 선언한 것이다.
결국 사회장위원회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운양의 사회장을 취소하게 된다. 박영효의 설명에 따르면 사회장을 강행해 반대운동이 더 격렬해지면 고인에 대한 도리가 아닐뿐더러 분쟁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김윤식의 장례식은 그가 사망한 지 2주 만인 2월 4일 1000여 명의 조객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졌다.

4. 평가


김윤식은 현재는 물론 당시에도 논쟁적인 인물이었다. 경술 국치 당시 의견과 독립 청원서를 근거로 민족주의자로 보고 김윤식의 장례식을 사회장으로 치르자는 세력과 김윤식이 총독부 내에서 귀족 작위를 받은 점과 총독부에서 근무한 점을 들어 반대하는 세력 간의 논란이 생겼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대일본장서 사건 또한 김윤식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강조하는 지점이 다르다. 친일파로 보는 입장에서는 대일본장서를 '일본 천황에게 독립을 청원한 문서'라고 보는 반면 민족주의자로 보는 관점에서는 '일본 의회에 조선의 독립을 요구한 문서'로 보고 있다.
비록 조선총독부 부의장이었고 조선귀족 자작이었지만 1919년 이용직과 함께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였고 3.1 운동에 동조한 점이 인정되어 친일인명사전에 실리지 않았고 또한 각종 친일파 명단에 실리지 않았다.

5. 여담


"하도 울적하여서 새파란 하늘 높이 올라갔다네
굽어보니 공자님 가르침의 이 나라에 조석연기 나는 굴뚝 몇몇이런가
돌아가려도 한땐들 마음 편히 쉴 곳 없어
아아, 고래고래 울부짖으며 풀어헤친 머리로 훌쩍 내려왔다네[8]

"

운양 김윤식

  • 조선 엔 지폐의 도안인 노인의 모델이라는 설이 있다.

6. 저서


  • 저서로는 음청사속음청사가 있다. 문집인 운양집은 2014년 번역이 되어 출판되기도 하였다.

7. 같이 보기









[1] 조선인의 모습을 많이 그린 것으로 유명한 영국의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Llizabeth Keith, 1897-1956)가 지은 "Old Korea 1920-1940"이라는 책에 수록된 초상화로 1919년 3.1운동 직후 엘리자베스 키스가 한국을 여행하던 중 미국 선교사 제임스 게일의 주선으로 김윤식과 만나 김윤식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이다.[2] 경술국치 때의 이 대답은 상당히 애매한 대답이었는데 '不可 不可'로 해석하면 절대로 안 되며 절대로 안 된다는 대답이지만 '不可不 可'로 해석하면 딱히 도리가 없으므로 해야 함이 되어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 당시 그의 입장을 찬성으로 볼 수도 있고 반대로 볼 수도 있다.[3] 한국사를 배울 때도 개화 사상의 대두 때 개화파 및 분파된 이후 온건개화파에 항상 이름이 나온다.[4] 3.1운동은 국내외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김윤식 등의 사례처럼 친일 행적을 보이던 이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김윤식 외에도 이용직이 독립청원서를 제출해 작위가 박탈당한 채 수감되었고, 이종건이 작위를 반납하려다 거부당하기도 했으며 또한 을사오적 중 한 사람인 권중현정미칠적 중 한 사람인 이재곤이 작위 반납을 시도했지만 이 역시도 거부당했다.[5] 때문에 김윤식이 갑신정변에 청나라를 끌여들였다는 의혹을 받고 있지만 김윤식의 요청 때문에 청나라가 개입한 것인지, 다른 역학적 요인 때문에 개입한 것인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출처] "이미지로 보는 한일병합사(映像が語る日韓併合史)"[6] 김윤식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이 반응을 해석하는데 약간의 차이가 있다. 김윤식을 친일파로 인식하는 입장에서는 '不可不 可(딱히 도리가 없으므로 해야 함)'라고 해석하여 김윤식이 병합에 찬성했다고 보는 반면, 민족주의자로 보는 입장에서는 '不可 不可(절대로 안 되며 절대로 안 됨)'로 해석하여 반대했다고 보고 있다.[7] 당시 85세[8] 欲乘飛艇上靑天
俯視齊州幾點烟
回棹終無休泊處
狂吟披髮下翩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