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성(고려)

 


1. 개요
2. 벼슬에 오르기까지
3.1. 1차 침입
3.2. 이통의 봉기
3.3. 충주 관노 2차 반란
3.4. 용문창 습격사건
3.5. 동경의 난
4. 이후


1. 개요


李子晟 (? ~ 1251)
고려의 무신. 본격 반란 진압왕.(...) 여몽전쟁 당시 전투보다 반란진압 경험이 더 많다.

2. 벼슬에 오르기까지


본관은 우봉(牛峰)이며 아버지인 병부상서 이공정(李公靖)[1]과 함께 무신정권 당시 무신 관료로 출세한다. 성품이 곧고 용감했으며 활을 잘 쏘았다고 한다. 여몽전쟁 이전의 기록은 거의 없고 "여러 차례 종군하고 공을 세우고 거듭 승진해 상장군이 되었다.(屢從軍有功 累遷上將軍)"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3. 여몽전쟁



3.1. 1차 침입


여몽전쟁에서 살리타이가 이끄는 본군+남로군 2만 명이 개성을 향해 내려오자 고종은 그에게 고려 3군을 지휘하도록 명했고 이에 채송년 등과 함께 9월 13일 동선역에 도착해 진을 쌓게 했다. 13일 야간의 몽고군의 기습공격을 시작으로 전투가 시작되었고 이틀에 걸친 전투에서 화살에 맞는 등 상처를 입었지만 결국 고려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3.2. 이통의 봉기


1232년, 2차 침입때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자 이를 반대하는 이통(李通)의 봉기[2]가 개성에서 일어났다. 고종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이자성과 조염경, 최근등을 보내 이들을 토벌케 했다. 이자성이 이끌던 진압군은 승천부(昇天府)[3]의 동교(東郊)에서 첫번째 교전을 벌였는데 이에 승리하였다.
별장(別將) 이보(李甫)와 정복수(鄭福綏)에게 야별초(夜別抄)를 주어 개성에 먼저 가 성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 이보가 개성에 도착해 관군을 무찌르고 온 거니까 문을 열어달라고 하자 문지기가 문을 열어줬다. . 이보와 정복수가 들어가 문지기를 죽이고 이통의 집으로 가 이통을 잡아 죽였다.

3.3. 충주 관노 2차 반란


1232년 승려 우본(牛本)이 일으킨 충주 관노의 2차 반란[4]이 일어나자 왕은 이자성을 또다시 3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토벌을 명했다. 이자성이 이끌던 3군이 달천(達川)에 도달하자 노비의 병사 몇 명이 강 건너편에서 "우리가 주도자 모가지를 딴 후 항복할게요."라고 하자 이자성이 "그렇게만 하면 너네 살려줌"이라고 했다.
얼마후 그들은 성에 들어가 우본의 목을 따왔고 관군은 이틈을타 성을 차지해 잔당들을 모두 처형했다.

3.4. 용문창 습격사건


1233년, 4월. 군량의 비축과 공급을 맡고 있던 용문창(龍門倉)을 거복(居卜)과 왕심(往心)이 습격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은 초적들을 이끌고 개경의 서문인 선의문 밖에 위치한 용문창을 습격해 곡식을 약탈했는데 왕이 이를 진압하기 위해 이자성에게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로 삼고 이를 토벌토록 했다.
다만 이때 거복과 왕심이 습격한 것은 정부의 탓이 더 큰데, 백성들이 먹을 게 없어 굶어가는 상황에 닥치자 이를 나눠주기 위해 습격한 것이었다. 이를 진압하던 이자성의 입장도 답답했을 듯.

3.5. 동경의 난


1233년, 경주에서 그 지역 사람인 최산(崔山)과 이유(李儒)가 경주의 토호세력과 농민군을 합친 대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반정부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의 원인은 최씨정권이래 경주의 지역의 세가 약해졌고 강화천도 이후 불만이 증폭되었기 때문이었다.
또다시 왕은 이자성을 파견, 군사를 거느리고 영주성(永州城)[5]에서 진을 치고 적을 맞이했는데 적들은 이자성의 군사들이 밤낮을 안 가리고 와서 지쳤을 것으로 판단해 피로한 틈을 타 공격하려고 영주의 남쪽에 집결했다. 관군 한 명이 성에 올라가 살펴본 후 이자성에게 "우리 X 빠지게 와서 애들 지쳐있고 쟤들은 쌩쌩하니 싸우면 우리 못 이김요. 좀 쉬다 싸우면 안 될까요?"라고 하자 이자성이 "행군하고 잠깐 쉰다고 너네 피로감이 사라지디? 오히려 빡세게 굴려야 한다."며 문을 열고 적을 향해 돌진했다. 그결과 적을 대파해 시체가 수십 리에 걸쳐 널리게 되었고, 최산 등 수십 명을 처형한 후 "협박받고 참가한 사람들에겐 죄를 묻지 말아라"는 명령을 내려 백성들에게 큰 환호를 받았다고 한다.

4. 이후


子晟自平東京後 將士日集其門 恐爲權貴所忌 謝疾杜門 人稱知幾。

동경을 평정한 뒤로 장사들이 날마다 자신의 집으로 모여들자 이자성은 권귀(權貴)들로부터 시기를 받을까 우려하여 병을 핑계로 두문불출하니 사람들이 앞을 내다볼 줄 안다고 칭찬하였다. - 《고려사》이자성 열전

 
동경을 평정한 후 다시 강화도로 돌아왔지만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웃대가리들이 해코지할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아예 나가질 않았다고 한다.
이렇듯 반란진압 최종병기는 고종 38년인 1251년에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를 지내다 죽었고 왕이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

[1] 혹은 李公正이라 한다.[2] 어사대의 조예 이통이 최이의 독단적인 강화 천도에 반발해 경기지역의 몰락 농민들과 개경의 노비들을 모아 일으킨 반란. 이들은 개성을 지키기 위해 경기지역의 초적(도적)떼와 승려들과 연합해 3군을 조작했다.[3] 지금의 개성 직할시 개풍군[4] 1차 반란이 일어나 진압했으나 개성으로의 천도가 일어나자 이에 대해 반발로 또다시 일어났다.[5] 지금의 경북 영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