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선역 전투

 


'''동선역 전투
洞仙驛 戰鬪'''

'''시기'''
고종 19년(1231년) 9월 13일 ~ 14일
'''장소'''

고려, 동선역 (현 황해도 봉산군 동선면)
'''원인'''
몽골의 1차 침입.
'''교전국'''
고려 [image]

'''지휘관'''
채송년(蔡松年)
대집성(大集成)
이자성(李子晟)
이승자(李承子)
노탄(盧坦)
이지무(李之茂)
이인식(李仁式)

'''병력'''
3,000명 + 숫자 불명의 3군 병력[1]
10,000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몽골과의 야전에서 거둔 첫 승리.
'''영향'''
몽골군 안주까지 퇴각 후, 고려군과 재결전.
1. 개요
2. 진행 과정
3. 몽골과의 전면전
4.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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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여몽전쟁 당시 몽골의 병력과 고려의 중앙군이 야전에서 맞붙었던 전투. 훗날 전세계를 휩쓴 몽골군이 공성전에서 패배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어도 야전에서 패배하는 경우는 꽤 드물었기 때문에 역사 상에서도 대단한 전투임은 분명하다.[2] 동선령(洞仙嶺) 전투[3] 라고 불리기도 한다.

2. 진행 과정


1231년 8월, 몽골의 오고타이 칸은 부원수 살리타이에게 명해 8개군 3만명의 병력을 투입시켜 고려를 치게 했다. 당시 20여만명의 몽골군의 주력은 금나라로 진격한 상태였고, 고려를 침공한 3만의 기병은 혹시나 있을지 모를 후방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보낸 병력이었다.[4]
3만명의 몽골 병력은 8월 11월에 함신진, 8월 29일 철주산성을 차례로 함락시키며 서서히 남진을 시도했다. 살리타이는 병력을 자신이 직접 이끄는 본대 1만, 개성을 향하는 남로군 1만, 후방 지역을 정리하는 역할인 북로군 1만으로 각각 나누어, 북로군 1만은 귀주성으로 보내고, 본대는 안주에 머물게 하며, 남로군 1만은 개경으로 남하시켰다.
9월, 황해도의 황주와 봉산이 함락되었고 이에 고려 조정은 중앙군인 3군을 출격시키게 된다.[5] 몽골군과 고려의 중앙군이 야전에서 처음으로 맞붙는 장소는 바로 교통의 요지 동선역[6]이였다.
[image]
몽골의 1차 침입 전황도.
[7]

3. 몽골과의 전면전


사실, 북방에 적이 쳐들어왔을때 고려가 취하던 기본 전략은 적을 지치게 만든 후에 중앙군을 출격시켜서 결정적인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적을 패퇴시키는 것이었다. 이 전략을 사용해서 성공시킨 대표적인 예가 귀주대첩이었고, 고려는 그 때의 영광을 잊지 않고 있었기에 이번에도 똑같은 전략을 시도한 것이었다. 이미 안주와 평양 등의 성에서 저항하며 시간을 끌었고, 몽골군이 개경 근처에 접근했을 때 고려의 강력한 한방을 보여 주겠다는게 고려 조정의 생각이었다.
9월 9일 고려 조정은 대장군 채송년을 북계병마사에 임명해 몽골군의 남진을 저지하도록 지시하고, 9월 13일 고려의 중앙군 3군은 봉산 북쪽 10리의 동선역에 도착했다. 동선역에는 중군을, 북쪽의 두이봉과 마산에는 좌군을 배치했고, 사인관 일대는 우군이 점령해 진을 쳐 몽골군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해질녘 동선역(洞仙驛)에 진을 쳤는데, 척후가 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보고했으므로 3군이 안장을 풀어놓고 쉬고 있었다. 이 때 어떤 사람이 산에 올라가서 “몽고군이 온다!”고 소리치자 군사들이 크게 놀라 모두 도망가 버렸다. 몽고 군사 8천여 명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이자성 및 장군 이승자(李承子)·노탄(盧坦) 등 대여섯 명이 목숨을 걸고 항전하였다.

고려사》이자성 열전

몽골군은 이와 같은 진형을 파악하고 8천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두이봉과 마산에 진을 쳤던 좌군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했고, 이에 고려군은 강력히 저항했다. 상장군 이자성, 장군 이승자, 장군 노탄 등의 지휘부가 선두에 서서 직접 진두 지휘 했으며 이중 이자성은 화살에, 노탄은 창에 찔려 말에 떨어져 병사들이 이들의 목숨을 구해주었다.(子晟中流矢 坦中槊墜馬 有兵救之 僅免)
 
이러한 접전 속에서 동선령에 주둔 중이던 고려의 중군과 사인관 일대의 우군이 몽골군의 후미를 공격했고, 결과적으로 고려의 3군이 모두 합세하자 몽골군은 약간 주춤하다가 다시 전투에 임했다. 이 때 마산(馬山)[8]의 초적(草賊)[9] 우두머리 두 명이 활을 쏴 몽골군을 쏘는 족족 맞춰 떨어뜨리자 몽골은 기세가 꺾여 퇴각했다.
몽골군이 물러난 후, 고려군은 몽골군이 재정비한 후 머지않아 또 다시 공격할 것이라 판단하고 목책과 장애물 등을 설치해 임시 요새를 건설했다. 그리고 이 판단은 아주 정확했다. 바로 다음날인 14일, 몽골군은 하루만에 다시 쳐들어왔고 본격전인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몽골군은 목책을 불태우고 고려군의 진지로 돌입했으나,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던 고려군이 강력히 맞서 싸우자 몽골은 더이상 공격했다가는 자신들의 피해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안주로 퇴각했다.

4. 이후


이 전투에서 패퇴한 몽골군은 안주의 안북성까지 후퇴했고 고려군은 이를 맹렬히 추격했다. 하지만 안북성(안주)에서 고려의 주력 3군의 병력 절반 이상이 궤멸 당하면서 오히려 역관광당한 채 처참한 결말을 맞고 만다. 자세한 것은 안북성 전투 항목 참조.
덕분에 몽골군은 큰 방해 없이 개경으로 돌격할 수 있었고, 결국 개경이 포위되자 고려는 하는 수 없이 회안공 왕정을 보내 몽골과 강화를 맺게 되었다.

[1] 이때 출전한 고려 3군의 수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으며 중간에 초적(도둑떼) 3,000명이 합류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있다.(다만 이 초적의 합류도 사실이 아닐수 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역대 고려의 중앙군이 출전했을 때 동원된 병력들을 감안한다면 1만 ~ 2만 정도의 병력으로 추정.[2] 만약 바로 직후의 전투인 안북성 전투에서 승리, 아니 지연전만이라도 제대로 했더라면 이 전투의 평가는 매우 좋았을 것이다. 분명 동선역 싸움에서 고려군이 승기를 잡음으로써 몽골군을 수도인 개경 근처에서 몰아낸다는 고려의 핵심적인 목표를 이뤘고, 고려가 잠시나마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게 되었지만, 안북성에서 대집성의 뻘짓으로 전멸에 가까운 처참한 패배를 당하는 바람에 전황이 몽골 쪽으로 제대로 기울고 말았다. 그 결과 주춤해 있었던 몽골군은 다시 개경으로 돌격할 수 있었고, 결국 개경이 포위되자 고려는 몽골과 강화를 맺음으로써 황급히 전쟁을 끝냈고, 이 전투의 승리는 높이 평가되지 못하게 되었다.[3] 참고로 병자호란때도 동선령 전투가 있었다. 그나마 김자점이 밥값했던 전투 중에 한 개가 바로 이것, 이때도 역시 승리해서 지연전을 했지만, 토산전투 이후 짱 박혀있는 김자점 때문에 한양이 곧바로 털리게 된다.[4] 당시 고려는 형식상으로나마 금나라에게 신하의 나라였다. 자세한 것은 금나라 항목 참조.[5] 고려의 중앙군 편제는 중군(中軍), 좌군(左軍), 우군(右軍)으로 총 3개 편대로 나뉘게 된다. 그래서 고려와 관련된 기록에 중앙군을 3군으로 표현하는데 전군(前軍), 후군(後軍)을 추가해 오군(五軍)으로 편성하기도 했다. 《고려사》 권81, 병제, 병제, 오군에 그 내용이 보인다.[6] 현재의 황해도 봉산군 동선령[7] 사진의 귀주성 전투 종료일시는 오타다. 원래는 1232년 1월이다.[8] 경기도 파주군 마산리[9] 몰락 농민들이 뭉쳐 도둑 집단으로 커진 것을 말한다. 참고로 이 마산의 초적은, 우두머리 두 명이 부하 3천을 이끌고 몽골군에 맞서 고려군과 함께 싸울 것을 최우에게 요청해 승낙을 받음으로써 관군과 합세해 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