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영(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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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초대 부통령.
대한제국 초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김홍집의 사위이며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의 직계 11대손이다. 국회의원 이종찬과 이종걸의 작은할아버지이다.
2. 생애
6형제 중 5남으로 태어났으며 당시 조선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부호 집안 출신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구한 말에는 평안남도 관찰사[2] , 한성고등법원 판사 등 여러 고위직을 맡았다. 1910년 국권 피탈 후 일제의 회유를 뿌리치고 넷째 형 이회영 등 6형제와 함께 전 재산을 팔고 만주로 이주했다.[3]
이후 만주에 신흥 강습소를 설립해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이 풀리지 않자 상하이로 떠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에 참여했다. 이 때 6형제는 엄청난 생활고를 겪었고 광복 때까지 유일하게 살아있었던 이시영을 제외한 다른 형제들은 모두 광복을 보지 못한 채 고문사, 병사(病死), 객사(客死), 아사(餓死)했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 10대 부호에서 나라를 잃고 백사 이항복의 후손인 명망 높은 6형제들의 소문을 들은 나랏사람들이 이들을 찾은 것이고 겨레이자 독립운동의 인적 자원들을 끌어안아 거점으로 쓸 토지, 척박한 땅에서 실패한 농사로 인해 먹을 것을 사는 등 단순한 운영과 준비만으로 10대 부호조차 파산에 이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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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 전 상하이 공항에서 찍은 사진이다. 오른쪽에 눈물을 닦고 있는 중절모를 쓴 노인이 성재 이시영. 가운데 안경을 쓴 인물은 김구이며 김구 옆 여인은 김구의 며느리이자(김구의 장남 김인의 아내) 안중근의 조카인 안미생, 앞줄 가운데 태극기를 든 소년이 종손인 이종찬 국회의원이다.
1945년 8.15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즈음에 이승만은 이시영을 부통령에 낙점했는데 이를 두고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은 의견이 조정되지 않았다. 이승만은 한국민주당 당수 김성수를 불러 이시영을 부통령에 앉히겠다고 밝혔고 김성수도 이에 동의해 1948년 7월 20일 초대 부통령에 당선됐다. 한편 이승만이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일부 재산의 환급을 제안했으나 이때 이시영은 재산을 찾겠다고 독립운동한게 아니라며 거절하였다.
1950년 6.25 전쟁 발발 후 부산으로 피난해[4] 있던 중에 국민방위군 사건을 지켜보면서 이승만 정부에 실망하여 부통령직을 사임했다. 제2대 대통령 선거에 민주국민당 후보로 입후보했으나 낙선했다.[5] 1953년 4월 17일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서울특별시 정릉에 묻혔다가 뒤에 수유리 북한산 기슭으로 이장됐다. 북한산 둘레길 2구간 순례길을 돌면 묘소에 참배할 수 있다.
3. 대중매체에서
- 1979년작 KBS-TV <일요사극 맥> '벼랑 위의 파수병(2부작)'에선 배우 이신재가 연기했다.
- 1981년작 MBC 드라마 <제1공화국>에서는 성우 겸 배우 이도련이 연기했으며, 1989년작 특집드라마 <백범일지>에서도 같은 배역을 맡았다.
- 1995년작 KBS 대하드라마 <김구>에서는 배우 이대로가 연기했다.
- 2009년작 KBS1 특집드라마 <자유인 이회영>에선 배우 조영진이 연기했다.
4. 기타
- 남산공원에는 백범 김구 동상의 바로 곁에 그의 동상도 세워져 있다.
- 경희대학교의 전신인 신흥초급대학의 설립자이다. 만주의 신흥무관학교를 이은 이름이었으나 설립 과정에서 재정 문제와 설립 인가 등의 문제로 난항을 겪던 중 6.25 전쟁이 터져 더욱 힘들어지다가 1951년 5월 18일 재단의 부채 1,500만원을 떠안는다는 조건으로 조영식에게 팔렸다. 경희대학교가 이 날을 개교 기념일로 삼았다는 것을 보면 이전의 역사를 계승하고자 하는 의지는 없어 보인다. 학교 이름조차 1960년에 촌스럽다는 이유로 현재의 경희대학교로 개명한 점도 그렇다.
[1] 도로명주소 미발급.[2] 오늘날의 도지사. 흔히 말하는 '평안 감사'라는 자리.[3] 이 때 판 돈이 당시 소 값으로 13,000마리에 달한다고 한다. 지금이야 소 1마리에 1학기 등록금 내기도 아슬아슬하다지만 당시에는 소 있는 집이 부잣집이었다. 전형적인 농업 사회였던 당시에 소의 가치는 지금보다 몇 배 위였다. 사실 30년 전까지만 해도 소 1마리 팔면 농촌에서 대학 1년 등록금 정도는 충분했다. 당시 대학의 별명이 괜히 '우골탑'이 아니었으며 소를 팔아서 대학에 갔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소값이 고기값밖에 안남은 현 시세로 쳐도 13,000마리라는 숫자는 충분히 부자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수치다. 간단하게 현재 소 시세를 약 500만원으로 잡아서 계산하면 약 650억의 재산을 보유했었다는 소리인데 이것도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만주로 이주할 때 절반 이하로 후려쳐서 재산을 급매한 결과다. 제값을 다 받았다면 그야말로 대인이 아닐 수 없다.[4] 이회영의 손자이자 이시영의 조카손자인 정치인 이종찬의 회고에 따르면 처음에 이시영이 피난을 거부하고 서울에 머무르려 했는데 6월 28일 새벽에 독립운동 시절 동지였던 북한 김두봉의 특사가 몰래 찾아와 "이승만이 서울을 버리고 도망갔으니 부통령 선생께서 지금 대한민국 대통령직을 승계하신 거 아닙니까? 김일성 수상이 정상 회담을 원하니 저랑 같이 갑시다."라고 했고 제안을 거절한 후 위기감을 느껴 피난을 나왔다. 직후 북한군이 서울에 입성했는데 대부분의 국회의원과 각료들은 전날에 이미 피난을 갔는데 이시영은 그 사실을 알고도 무모하게 저 때까지 남아있다가 하마터면 북한에 끌려가 이용당할 뻔했다.[5] 제2대 대통령 선거는 1952년에 시행됐으므로 설령 이승만을 누르고 대통령이 됐더라도 1953년에 사망해서 임기는 1년도 못 채웠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