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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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기록
3. 고고학적 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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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臨屯郡
중국의 전한 왕조가 위만조선을 1년여의 전쟁 끝에 멸망시킨 뒤 그 땅에 설치한 군현들(한사군) 중의 하나이다.

2. 기록


위만 조선 이전에는 고조선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임둔국이었다. 다른 군현들처럼 기원전 108년에 설치됐으나 그리 오래 가지도 못하고 기원전 82년에 폐지되고 현도군의 일부로 합쳤다. 인구가 원래 적은 곳이었고, 또 고조선 멸망 이후 이탈하는 인구도 있어서 별개의 군으로 유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현도군이 고구려의 압박으로 서쪽으로 밀려난 후에는 낙랑군의 부속구역인 동부도위가 그 자리에 설치되었다. 그 와중에 임둔군 아래 지배를 받던 세력들이 독립해 나가 옥저, 동예 등이 되었다. 4백 년 넘게 존속된 옆의 낙랑군과 비교하면 참으로 안습이라고 할 수 있다.
한서 무제기(武帝紀) 원봉(元封) 3년 여름[夏]조에 대하여 신찬(臣瓚)이 인용한 『무릉서(武陵書)』에 따르면, 현은 총 15개가 존재했고, 치소는 동이현(東暆縣)이었다. 그런데 이 무릉서라는 책의 저자로 알려진 사마상여(司馬相如, 기원전 179년~기원전 117년)는 무제가 임둔군과 진번군을 설치하기 약 9년 전에 이미 죽었기 때문에 신채호가 해당 구절의 신뢰도를 의심하였다.

신찬은 “『무릉서(武陵書)』에 따르면 '''임둔군의 치소는 동이현(東暆縣)이고 장안에서 6,138리를 간다. 15현이다.''' 진번군의 치소는 잡현이고 장안에서 7,640리를 간다. 15현이다.”라고 말하였다. 안사고는 “樂의 음은 낙이다. 浪의 음은 랑이다. 番의 음은 보와 안의 반절이다. 暆의 음은 익과 지의 반절이다. 霅의 음은 장과 갑의 반절이다.”라고 말하였다.

臣瓚曰, “茂陵書, '''臨屯郡治東暆縣, 去長安六千一百三十八里, 十五縣.''' 真番郡治霅縣, 去長安七千六百四十里, 十五縣.” 師古曰, “樂, 音洛. 浪, 音郎. 番, 音普安反. 暆, 音弋支反. 霅, 音丈甲反.”

한서 권6 무제기 원봉 3년 여름 조 주석

위치는 임둔군의 유적이 확실하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대략 진번군 동쪽인 현 함경남도 일대 또는 강원도 북부 쪽으로 보는 것이 대세이다.

한나라 무제(武帝) 원봉(元封) 2년에 장수를 보내어 우거(右渠)를 치고 사군(四郡)을 정할 때에, 임둔(臨芚)이라 하였다.

세종 실록 153권, 지리지 강원도 강릉 대도호부

세종실록지리지의 경우 임둔군의 위치를 강릉으로 비정했다.

3. 고고학적 근거?


1997년 중국 랴오닝성에서 ‘임둔 태수장’ 봉니(封泥)가 출토되었다. 봉니란 문서를 봉인할 때 진흙을 붙이고 그 위에 도장을 찍은 것을 말한다. 서양 중세를 다룬 영화에서 문서 두루마리에 촛농을 묻히고, 그것이 굳기 전에 인장(반지 겸용)으로 꾹 눌러 표시하는 것의 고대판이다. 이 봉니가 출토된 것을 두고 ‘임둔군의 위치가 이쪽으로 밝혀졌으므로 기타 한 군현과 고조선 위치까지도 다시 설정해야 한다’라는 주장이 있었고, 특히 환빠들이 이에 부화뇌동한 일이 있었으나, 이는 잘못 이해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낙랑군이 평양 지역에 존재했음이 확실한 상태에서 문헌들이 낙랑군의 동쪽에 임둔군이 있다고 전하고 있고, 랴오닝성 쪽엔 임둔군이 아니라 요동군이 설치되어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데, 겨우 봉니 한두 개 나왔다고 지금까지의 지명 비정을 모두 갈아엎을 수는 없다. 게다가 단순히 출토된 수가 적어서가 아니라, 봉니라는 물건 자체가 문서를 보내는 쪽과 받는 쪽 양쪽 모두에게 다 남아있을 수 있기에 위의 주장은 더욱 설득력이 떨어진다. 부산광역시 소인이 찍인 우편 봉투가 광주광역시에서 발견된다고 해도 ‘광주=부산’이 될 수는 없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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