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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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濊)''' 또는 '''동예'''(東濊)는 기원전 3세기부터 3세기까지 오늘날 원산[1] 부근의 함경남도 남부에서 강원도 강릉시 지역까지 동해안 영동 지역에 걸친 영역에 퍼져 있던 부족사회 집단이다.
2. 역사
강릉 이남으로도 동해안을 따라, 가장 남쪽으로는 포항시 신광면 마조리에서 출토된 '진솔선예백장(晋率善濊伯長)인'[2] 유물로 미루어보아서 신라가 발원한 경주시에서 그리 멀지 않은 포항까지 일정 수의 예인이 진출해 있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북으로는 고구려와 옥저, 남으로는 진한에 접하였다. 위만조선 멸망 후 전한에 의해 세워진 한사군 중 임둔군의 일부가 현도군과 합쳐졌고 이 중 7현을 낙랑군이 담당하였으나, 후에 한사군이 폐지된 뒤 7현이 독립하면서 부조현은 옥저로, 나머지 6현은 동예로 귀속되었다. 한사군에 의한 점령 시절 통치 제도의 변화가 나타났으며, 남쪽의 실직국 등 주변국을 공격하기도 하는 등 그럭저럭 지내다가 후한 말 시기에 멸망하였다.
옥저와는 달리 동예의 멸망에 관해서는 기록은 없으나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고구려에 복속된 뒤에도 한동안은 주류 고구려인과는 구별되는 정체성을 유지했는지, 한참 뒤인 6세기에 일어난 사건인 독성산성 전투 때도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할 때 동예인 병사 6천 명을 동원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백제 본기 성왕조에 나온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북명(北溟)을 동예로 추정하기도 하는데, 이곳 출신의 고구려 장수로 괴유[3] 가 있으며 여씨 용사라는 장사가 있었다고 전래된다.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에서는 백제와 신라 건국 초창기부터 '말갈'이라는 세력과 충돌하는 기사가 여러 번 등장하는데, 이 부분에 등장하는 말갈이 만주에 사는 진짜 말갈족이 아니라 동예 계통 집단을 말하는 게 아니냐는 연구가 조선 후기 정약용 때부터 현대까지 제기되고 있다. 이들에 대해서는 위말갈 문서 참조.
3. 멸망 가설
3.1. 고구려 복속설
그 당시 강자로 부상하던 고구려가 옥저를 복속시킨 후에 공격했고, 이에 따라 동예가 멸망했다는 것이다. 57년 태조왕에 의해 옥저가 고구려의 속국이 되었고, 244년 - 245년경 고구려에 의한 직접 지배가 실시되었으므로, 이때 옥저와 비슷한 위치에서 고구려에 조공하던 동예는 마찬가지로 고구려에 의한 직접 지배를 받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3.2. 자연 멸망설
동예는 왕권이 한 곳으로 모아지지 않은 느슨한 연맹 왕국 체제였다. 이에 따라 내부 분열이나 내부에서의 혼란, 반란 등의 이유로 멸망했다는 설이다.
이 설이 맞더라도 어찌되었든 잔존 세력들은 차후에 고구려에 복속되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5세기 광개토대왕 때 동예를 병합했다고도 하는데, 늦어도 4세기 말에는 이미 이 지역이 이미 고구려의 영역이었다.
3.3. 기타 요인설
북방의 유목 민족과 같은 다른 소수 민족들의 침략을 받아 멸망했다는 설이다. 정확히는 유목민족보다는 고구려, 고구려의 병사로 파견되기도 했던 말갈 일부부족(고구려에 복속되거나 친고구려 세력 등)들의 침입이라고 점점 쇠퇴해졌다고 봐야 가깝다.
4. 문화
동해안에 해안을 끼고 위치한 까닭에 해산물이 풍부하며[4] , 그 외에도 단궁(박달나무로 만든 활)[5] , 과하마(키 작은 조랑말), 반어피(물범 가죽)[6] 등이 특산물이다. 그리고 산악 지형이 대부분인데도 불구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농경이 발달했다고 한다. 제천 행사로는 10월의 무천(舞天)이 있었으며, 씨족 사회의 관습이 엄격히 남아 남의 마을을 침범하면 재물로서 보상하는 책화[7] , 같은 부족 사람끼리는 혼인하지 않는 족외혼의 풍습이 남아있었다. 민족은 예족 또는 예맥족으로, 역사서에는 그냥 '예'라고만 나와있다. 삼국사기 원삼국시대 관련 기록에서 강원도 지방에 말갈이 자주 출몰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말갈족도 있는 다민족 국가였을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8] 그냥 '예'였던 나라 이름을 민족 이름과 구별하기 위해 현대의 역사가들이 '동' 자를 붙였고, 그게 국사 교육에까지 그대로 적용되었다. 위키백과에서는 동예와 예가 구분되어 나온다(예를 들면, 강원도 북부는 동예로 표기되고, 강원도 남부는 '예'로 표기). 사실 예(동예)도 지역별로 여러 부족들이 연맹된 사회이다보니 여러 부족들로도 나뉘어졌다. 다만 동옥저, 남옥저, 북옥저로 구분되었던 옥저와는 달리 예인의 경우 여러 부족들로 나누어지되 나누어진 지역마다 동예 등의 명칭으로 불렸는지 확실하지 않은데다가(우선 옛 사료기록에 따르면 '東濊'라는 언급이 없고, 오늘날 부르는 명칭인 동예로 간략하게 구분하여 표기한 정도에 가깝다), 서예나 북예, 남예는 없었다. 물론 이것과는 별도로 압록강 중상류, 두만강 상류 등 한반도 북부 내륙 일대에 수많은 예족들도 있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동예인들은 3장 길이의 긴 창을 여럿이서 들고 싸웠다고 한다. 동양의 길이 단위에서 1장은 10척이고, 한국의 삼국시대에 보통 척은 1척이 23cm인 후한척을 사용했으니 3장이라고 하면 약 6.9미터가 된다. 이 정도 길이면 굉장히 긴 길이인데, 장창으로 유명한 고대 그리스의 마케도니아 군사들이 사용했던 사리사나 중세 유럽의 스페인 테르시오나 스위스 용병대가 사용했던 파이크 및 전국시대 일본 보병인 아시가루들이 사용했던 야리보다 더 길다. 헌데 보통 장창은 한 명이서 들게 마련인데, 그걸 여럿이서 들었다는 구절을 놓고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의견이 분분하다. 일설에 의하면 창이 너무 길고 무거워서 혼자서는 들기 어려워서 두 명 이상이 들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5. 문제 출제 유형 및 사료
대군장이 없고, 한 대 이후로 후, 읍군, 삼로 등의 관직이 있어서 하호(下戶)를 통치하였다(대통령 없이 시 도지사만 있었단 이야기).[9] '풍속은 산천을 중요시하여 산과 내마다 구분이 있어 함부로 들어가지 않았고 고구려에 복속되었다'는 표현이 나오면 동예다. 약간 지엽적으로 출제될 경우 특산물인 반어피, 과하마, 단궁이 고구려나 부여 특산물이라고 치사하게 말바꾸기 형식으로 출제된 적이 있다. 동예의 무천 행사(10월)를 제천이나 영고로 표현해서 오답형으로 종종 출제된다. 옥저와 마찬가지로 동예는 연맹 왕국이 아니라 군장 국가라고 보는 것이 맞는다. 대군장이 없다고 직접적으로 제시된 떡밥도 있으며, 조금 어렵게 출제될 경우 나올 수도 있으니 군장 국가임을 인식하자. 연맹 왕국은 부여, 고구려다(둘 다 5각 체계. 부여 - 5가, 고구려 - 5가 >> 5부).
2016년 계리직 공무원 한국사 시험에서는 '식구가 죽으면 살던 집을 헐어 버렸다'는 지문이 동예의 특징으로 제시되었다.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중에서는 지학사 교과서가 다루는 내용이다.
6. 관련 문서
[1] 현재 원산은 북한의 행정 구역 개편으로 인해 강원도에 속해있다.[2] 보물 560호. 신라본기 남해 차차웅 기사에는 북명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濊王)의 도장을 발견해 바쳤다는데, 이때 등장하는 북명이란 지명을 예족의 일부로 보기도 한다.[3] 괴유는 북명 출신인데, 북명의 위치 비정이 매우 힘들어 단순히 동예 출신으로 단정짓기엔 오류가 있다.[4] 삼국사기를 보면 동해에서 고구려에 공물로 고래의 눈알을 바쳤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데, 그 동해가 바로 동예로 추정된다.[5] 다만 한국의 전통 활을 복원하는 연구가들의 말에 의하면 박달나무는 탄성이 적어서 활로 만들어도 화살이 멀리 나가지 못해서 사실 활을 만드는 데는 그다지 좋은 재료가 아니라고 한다.[6] 일설에 의하면 관구검이 이끄는 위나라 군대가 고구려를 침략했을 무렵에 고구려 장수 유유가 음식을 가져가서 위나라 군대한테 바치고 거짓 항복했다가 위나라 장수를 죽였다는 구절을 놓고, 사실 유유가 가져간 건 음식이 아니라 이 반어피 같은 동물 모피라고 한다. 음식은 쉽게 상하고 식으면 맛이 없기 때문에, 먼 거리를 가는데 음식을 같이 가져가기는 거의 불가능한 반면 동물 모피는 상하지 않는 데다가 중국인들이 무척 탐내는 물건이었으니 유유는 위나라 장수한테 동물 모피를 뇌물로 바치는 척하면서 거기에 숨겨둔 단검을 꺼내 위나라 장수를 죽였다는 것이다.[7] 가축이나 노예를 주로 보상 대상으로 삼았다.[8] 단, 말갈이라는 명칭은 6세기 후반~7세기 전반 수나라를 다룬 정사인 수서에서 처음 등장하기 때문에, 강원도의 말갈족은 숙신계가 아닌 가짜 말갈(위말갈), 즉 동예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강원도의 원삼국시대 유적이나 유물의 형태는 퉁구스보단 백제나 마한과 유사하다.[9] 옥저와 동예의 통치 체제는 '후'의 존재로 구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