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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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저 (沃沮)'''
'''매구루''' | '''치구루'''
고구려의 조공국[1]
[image]
▲옥저와 주변국 지도
'''존속기간'''
기원전 3세기 ~ 244년(기원후 3세기)
(기원전 8세기)[2]
'''위치'''
함경도일대
간도
연해주
'''군주'''
군장 (읍군, 삼로)
'''종족'''
예맥[3]
'''언어'''
고대 한국어
'''사건'''
남옥저 위만에 의해 복속
한사군 편입
북옥저 주몽에 의해 복속
동옥저 태조왕에 의해 복속[4]
'''성립 이전'''
부족사회
'''멸망 이후'''
?[5]
1. 개요
2. 역사
2.1. 개요
2.2. 이견
2.3. 위치
2.4. 풍속
2.5. 멸망
3. 기타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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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옥저'''(沃沮)는 기원전 3세기부터[6] 1세기까지 함경도에서 연변 조선족 자치주 남쪽, 연해주에 이르는 광범위한 영역에 퍼져 있던 부족 국가 집단이다. 남옥저, 동옥저, 북옥저가 존재했다. 남옥저의 경우, 삼국지와 후한서의 동이전에서 북옥저의 위치에 대해서 언급할 때 한 번 언급되는 것이 다라서, 그래서 남옥저를 동옥저와 동일한 집단으로 보기도 하고, 별개의 집단으로 보기도 한다. 기원전 3세기경 북옥저와 남옥저가 성립된 것으로 추정한다.
환단고기는 서옥저도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역사서와 교차검증되는 바가 없다.

2. 역사



2.1. 개요


고조선한나라에 의해 합병된 뒤 세워진 한사군 임둔군의 일부가 현도군과 합쳐졌고 이 중 7현을 낙랑군이 담당하였으나, 후에 한사군이 폐지된 뒤 7현이 독립하면서 부조현은 옥저로, 나머지 6현은 동예로 귀속되었다. 두만강 유역과 함흥 평야가 이들의 영역이었기에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을 생산'''했고, 영역이 동해 바다 연안에 있어 해산물이 풍부하여 주변국에 조공하였다. 가장 가까운 강국 고구려에 주로 조공하였으나, 남쪽으로 신라에도 말을 바치며 친선을 시도한 기록이 있다.
북옥저는 치구루(置構婁, 동옥저전), 매구(買溝, 관구검전), 미구루(味仇婁, 광개토왕비) 등으로도 불렸으며, 그 중심지는 훈춘(琿春) 일대로 추정된다. '구루'는 '골', '홀'처럼 성(城)을 뜻하며, 곧 치구루나 매구루가 고구려의 책성(柵城)이다.

2.2. 이견


옥저에 대하여 학계에는 두 가지의 의견이 있는데, 하나는 3옥저설(남옥저, 북옥저, 동옥저)이고 나머지 하나는 2옥저설(남옥저, 북옥저)이다. 4세기 후 옥저는 동예처럼 고구려의 간접 지배를 받아 형식적으로나마 존속했으나, 대외적으론 고구려의 내지로 인식되면서 사라진 세력이 되었다. 어차피 중세 시대까지도 조선 왕조 이전에는 지방 수령이 그 고을 토호를 쓰는 게 일반적이었음을 생각하면 이미 고구려에 편입되었다고 봐도 될 것이다. 중국 정사후한서삼국지에는 동옥저(東沃沮)로 기록되어 있다. 고고학에서는 기원전 8세기 무렵 연해주 남부 내륙과 동해안 지역(함경도 포함)에 등장한 얀콥스키 문화와, 얀콥스키 문화 이후 연해주 남부, 수분하 유역, 동북한 지역에 위치한 단결 문화 / 크로우노프카 문화를 옥저로 비정한다.
최씨낙랑국 미스테리와 관련하여, 최씨낙랑국의 정체를 조선과 낙랑군에 복속하였던 옥저의 일파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7]

2.3. 위치


동옥저는 함경도에 존재하였으며 아래로는 동예에 닿았다고 한다. 북옥저는 북간도와 연해주 남부 지방에 있었다. 처음에는 남옥저와 붙어있었으나 후에 떨어졌고 동옥저와도 붙은 적이 있다고 되어있다. 남옥저는 함경남도와 강원도 일대에 존재했다. 서옥저는 위치를 알수없다.

2.4. 풍속


한국사 교과의 고대사 파트에서 신랑과 신부가 어릴 때 약혼을 한 뒤, 신부가 신랑 집에서 일을 하다가 신랑이 신부 집에 예물을 건네고 정식으로 혼례를 올리는 민며느리 제도와 시신을 산에 안치해두었다가 뼈를 추스려가는 골장제 풍속과 관련하여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옥저가 언제 고구려에게 흡수되었는지 알 수 없다. 혼인, 장례, 특산품, 정치 제도가 옥저에 대한 문제로 출제된다.

2.5. 멸망


가장 먼저 동옥저는 56년 고구려 태조대왕에 의하여 정벌당했다.[8] 논란이 많은 남옥저는 기원전 2세기에 위만조선에 복속된다. 이후에는 현도군으로 들어갔다. 일부 자료에서는 남옥저가 260년에 백제의 공격을 받고 멸망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북옥저는 기원전 28년 고구려 동명성왕에 의해 멸망했다고 되어있으나 이후에도 몇몇 기록이 있다. 244년 위나라 관구검의 침입을 받고[9] 고구려에 귀속되었다.(멸망은 아니다.) 285년 북부여 왕가가 모용선비에 쫓겨 북옥저로 피난을 오고 이 때 북옥저가 동부여로 바뀌어 성립한다고 하는것이 정설이다.

3. 기타


  • 일설에는 여진족의 일부인 와지가 이들의 후손이라 한다.
  • 마종기 시인의 시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에도 주제로 등장한다.
  • 얀콥스키 문화의 기원전 8세기 ~ 5세기 유적인 페스차느이 유적, 말라야포두세치카 유적에서 주조철부를 비롯한 철기가 발굴되었고, 얀콥스키 문화의 가장 늦은 시기인 기원전 5세기 ~ 3세기 무렵으로 추정되는 바라바시-3 유적에서 제철 시설이 발굴되어 고조선의 영역으로 비정되는 동만주 ~ 서북한 지역에 비하여 더 이른 시기에 철기 사용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10]
  • 얀콥스키 문화 이후 크로우노프카 문화의 유적에서는 한민족에서 가장 오래된 온돌이 발견된다. 한반도로 온돌을 보급한 민족으로 추정된다. 온돌과 관련하여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옥저인들의 유적지에서는 반드시 온돌의 흔적이 발견되는 반면, 옥저인들의 이웃인 읍루인들의 유적지에서는 온돌의 흔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옥저인과 읍루인은 서로 다른 계통의 민족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 옥저는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등 전통행사가 없었는데, 고구려에 일찍이 복속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동예와 고구려와는 혈통이 같은 민족이나 다름없다보니, 행사도 이들과 같거나 비슷했을 걸로 추정된다.
  • 해리포터도 옥저 사람이라는 유머가 있다. ##[11]
  • 옥저인들은 그들의 영토에서 나는 모피들을[12] 중국인들한테 파는 대가로 중국인들이 주는 화폐를 받았다. 그래서 오늘날 옥저의 영토였던 함경도 일대에서 발굴되는 옥저인들의 유적지에서는 중국 전국시대 위나라의 동전이나 전한오수전 같은 중국 화폐들이 나온다. 옥저인들이 중국 화폐들을 들여와서 상거래에 사용했으리라고 추정된다.[13] 또한 옥저인들의 유적지에서는 중국 전국시대 인상여가 만든 창 같은 청동기 무기들도 출토된다.

4. 관련 문서



[1] "其土迫小,介於大國之間,遂臣屬句驪。" 《후한서》(5세기), 〈제85권〉 중.[2] 고고학으로 확인했을 경우.[3] 삼한, 여진[4] 신라와 함께 조공도 하기도 했다.[5] 고구려로 다수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6] 그러나 고고학적인 발굴 결과에 의하면 옥저인들의 유적지와 유물들은 이미 기원전 4세기부터 그 흔적이 드러나 있기 때문에, 옥저의 역사는 기원전 3세기보다 더 오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7] 당대 고구려와 낙랑군의 위치상 최리가 있을 만한 가장 적절한 장소가 과거에는 옥저로서 독립적인 국가였고, 이후 고조선과 낙랑군 치하에서 지리적 위치를 이용해 반독립적 형태의 국가로서 낙랑군의 위세만을 빌어 쓴 소국이었을 가능성 제시.[8] 동서남북 네 옥저 중 유일하게 멸망년대의 논란이 없다.[9] 이때 위나라 군대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사로잡힌 옥저인들의 수가 3천 명에 달했으며, 옥저의 모든 마을들이 위나라 군대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기록되었다.[10] (동아시아 고대 철기 문화 연구, 2012. 05. 04, 국립 문화재 연구소 고고연구실).[11] 스크린샷 맨 하단 주목. 해리포터의 자막장난인데 이것 덕분에 민며느리제와 옥저의 인지도가 높아진듯 하다.[12] 아마 담비나 호랑이, 표범 같은 동물들의 가죽이었을 것이다.[13] 왜 옥저인들이 스스로 화폐를 만들어서 사용하지 않았느냐 하면, 화폐 즉 돈은 단순히 만들어낸다고 곧바로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 돈의 가치를 인정해야 비로소 상거래에 사용이 가능한 신용 도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제적인 공신력이 미비한 옥저 자체의 화폐보다는 이미 동아시아에서 오늘날 미국 같은 초강대국인 중국의 화폐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더 상거래에 유리하다. 비슷한 이유로 일본 전국시대 오와리 지방의 영주인 오다 노부나가 또한 중국 명나라의 동전인 영락전을 그대로 들여와 사용했고, 심지어 자기 군대의 군기에 영락전 3개를 그려넣을 만큼 영락전을 중요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