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한기르

 


1. 개요
2. 상세
3. 주의사항


1. 개요


무굴 제국의 4대 황제로 본명은 미르자 누르웃딘 베이그 모함마드 칸 살림(Mirza Nur-ud-din Beig Mohammad Khan Salim). 제호인 자한기르는 '세계의 정복자'라는 뜻이다.
생애 : 1569년 8월 31일 ~ 1627년 10월 28일(만 58세)
재위기간 : 1605년 10월 15일 ~ 1627년 10월 28일

2. 상세


악바르 대제의 3남으로 두 형이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않아 어린 나이로 사망하였기 때문에 실질적인 장남이었다. 자한기르는 무굴 제국의 황제들 중 처음으로 인도 출신의 어머니를 둔 황제로 그의 어머니 마리암 웃 자마니는 자이푸르의 공주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티무르의 후손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능력은 뛰어난 자한기르였는데 1594년 아버지의 명으로 오르차의 군주 비르 싱 데오를 공격해 오르차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사이는 그리 좋지 못했다. 1600년 악바르가 아프가니스탄으로 원정을 나간 사이 자한기르는 알라하바드에서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 놀란 악바르는 원정을 중지하고 수도 아그라로 돌아와 반란을 진압했고 그 후 3년 동안은 영지인 알라하바드에서 방탕한 생활을 이어가 아버지의 속을 썩였다. 악바르는 주정뱅이에 아편 중독자인 자한기르를 후계자 자리에서 내쫓을 것도 고려하였지만 1603년 아버지와 화해하고 자한기르는 악바르의 임종 때까지 아버지의 곁을 지켰다.
1605년 10월 27일 악바르가 세상을 떠나자 자한기르를 포함한 악바르의 다섯 아들들이 왕위 계승을 두고 내전을 벌였으나 악바르가 사망할 때 아버지의 곁을 지킨 자한기르가 먼저 선수를 쳐 황제 자리에 오르면서 정통성을 확보했고 다른 4명의 경쟁자들을 상대로 해 승리하면서 황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1606년에는 장남 후스라우 미르자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를 격파하고 장남의 눈을 뽑아버린 후 아그라 성에 유폐하면서 자신의 왕위를 노리는 마지막 시도를 분쇄하였다. 이후 자한기르는 자신의 후계자로 3남 샤하브웃딘 무함마드 쿠람을 정했다.
자한기르는 황제 자리에 오르면서 "정의"를 자신의 모토로 내세웠고 실제로도 이를 지켰다. 반란 주체가 자신의 자식이든 아니든, 무슬림이든 힌두교도이든 간에 제국의 권위와 자한기르의 "정의"를 모독하는 모든 반란 시도들은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분쇄당했으며 아버지 악바르가 이룩한 문화적 업적들은 여전히 번영하였다. 그와 동시에 아메드나가르, 비자푸르, 골콘다 등 제국의 적들을 격파하고 영토를 넓혔으며 예술의 후원자를 자처하면서 그의 시대에 무굴 제국의 독특한 회화 양식이 확실히 자리잡게 되었다. 독실한 무슬림으로서 이슬람을 보호할 것을 선언하였고 이슬람을 국시로 삼은 자한기르였지만 다른 종교에 상당히 관대한 면모를 보였다. 무슬림은 이슬람 법으로, 힌두교도는 힌두교 법으로 다스렸으며 범죄와 관련된 경우 공통의 법으로 다스렸다. 때문에 자한기르는 제국의 신민들에게 각자의 신앙에 걸맞는 "정의"를 가져다 주었으며 이를 통해 무굴 제국을 이루는 두 기둥인 무슬림과 힌도교도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시크교를 지원한 악바르 대제와 달리 자한기르는 시크교에 대해서는 부정적 태도를 취했는데, 시크교의 구루(영적 지도자)인 아르준이 장남 미르자 후스라우의 반란 당시 그를 축복했다는 까닭에서였다. 그러나 아르준은 그의 반란을 축복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고, 다만 종교적인 관용에 의해 "앞으로 일이 잘 될 것"이라고 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자한기르는 아르준이 반란에 직접 관여했다고 생각한 듯하다. 또한 자한기르가 남긴 기록을 보면 이미 그 전부터 아르준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부분이 남아 있다.

몇 년간 저절로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내가 [구루 아르준의] 이 헛된 짓거리에 마침표를 찍거나 아니면 구루 아르준이 이슬람의 무리로 귀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 Memoirs of Jahangir(자한기르 회고록, Tuzuk-i-Jehangiri)

일부다처제를 허용하는 이슬람답게 자한기르는 여러 명의 배우자를 두었다. 자한기르의 배우자들 중에서 가장 독보적인 인지도를 자랑하는 인물은 바로 '누르 자한(Nur Jahan)'이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한 메르운니사(Mehr-un-Nisaa)'로 원래는 자한기르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전투 중에 전사한 귀족의 아내였는데 이 귀족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자한기르가 자신의 아내를 노렸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반란을 진압하고 메르운니사를 아그라로 데려 온 자한기르는 1611년 그녀와 결혼하고 '누르 자한'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누르 자한은 권력욕이 대단한 여성이었고 결국 누르 자한은 양아들이자 자한기르의 후계자인 3남 쿠람과 대립할 수 밖에 없었다.[1]
압둘 아지즈의 연구에 의하면 자한기르 때 국고에 쌓인 금이 7톤, 은이 1116톤, 다이아몬드가 80파운드(500만캐럿 이상), 루비와 에메랄드가 각 100파운드(각 650만캐럿 이상), 진주가 600파운드, 그 외 각종 보석이 무진장했다고 하니 그 당시 무굴 제국이 굉장히 부유한 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종종 무굴 제국의 부유함은 프랑스와 페르시아를 합한 것보다 더 굉장하다고 불릴 정도였다고 한다.

3. 주의사항






[1] 웃기게도 샤 자한의 왕비이자 가장 사랑했던 여성인 뭄타즈 마할은 누르 자한의 조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