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다처제

 


1. 설명
2. 기원
3. 실태 및 사례
3.1. 이슬람권
3.1.1. 아랍 에미리트
3.1.2. 모로코
3.1.3. 사우디아라비아
3.2. 비이슬람권 아프리카
3.3. 유대교와 팔레스타인
3.4. 그 외 지역
4. 한국의 경우
4.1. 전근대
4.2. 근대
5. 여권
6. 환상과 현실
6.1. 경제적 측면
6.1.1. 세금 문제
6.2. 아내들 간의 평등 문제
6.3. 성비 문제
6.4. 체력 및 정력적 문제
6.5. 여성들의 입장
7. 현대 사회에서의 부활 가능성
8. 동물들의 경우
9. 각종 매체


1. 설명


一夫多妻制, Polygyny.[1]
남성이 여러 명의 여성을 아내로 두는 결혼 형태.
일처다부제의 반대이다.

2. 기원


본래 인류는 일부다처제 형식의 생활을 하는 종이었다.신분이 낮은 하층민은 일부일처제를 하지만 상류층은 일부다처제를 따르고 있었다.
생물학적으로, 인간과 근연종인 고릴라침팬지는 알파 수컷 및 알파 수컷과 가까운 참모 수컷이 후세대 개체의 85%의 아비인 것으로 나타났다. 인간 역시 분자생물학하플로그룹을 통해 분석한 바로는 인간은 사자와 비슷하게 하렘을 형성하고, 젊은 수컷이 늙은 수컷을 죽이고 그 하렘을 탈취하는 방식으로 번식했다는 정황이 강하게 보인다. 언어 역시 부계 유전자인 Y염색체를 따라 빠르게 전파되었다는 흔적이 나타난다. 다만 사자와 완전히 똑같지는 않게, 수컷들이 무리를 지어 이동했다. 알파 및 참모 수컷이 대부분의 암컷을 차지하고 유전자를 남겨 후손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인간과 진화적으로 가까운 종들이 일부다처제라는 것은, 인간도 본래는 일부다처제라는 이론에 대한 근거가 될 수 있다.
사회적으로는 수렵 채집 시대에는 뛰어난 사냥꾼이나 족장의 경우 여러 명의 아내를 가질 수 있었고, 문명이 발현된 이후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거의 모든 시대의 지배자들은 못 해도 수 명, 심한 경우 수천 명에 달하는 하렘을 유지했다. 한국만 해도 수백 명의 후궁을 거느렸던 왕들은 물론이고, 양반들에게도 이 일상적이었고, 혼인하지 않고 여자 노비와 관계하여 자식을 낳는 경우도 있었다.
기독교가 도입된 이후 유럽 지역에서는 일부일처제가 주류였으나, 종교개혁 시기에 구약성경의 사례를 들며 일부다처제를 부활시키자고 주장하던 세력이 일부 있긴 했다. 뮌스터에서는 반란을 일으켜 도시를 점거한 재세례파가 일부다처제를 법적으로 공인하고 실제 시행하기까지 했는데, 이들이 진압된 뒤로는 최소한 주류 사회에서 일부다처제가 주장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했다.
한때 뉘른베르크에서 30년 전쟁의 여파로 성비가 무너지자 일부다처제를 인정했다는 설이 나돌아 영미권 웹에서도 쉽게 검색되지만 학자들은 이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다. 이 뉘른베르크 칙령에 대한 설은 19세기에 처음으로 나왔는데, 이 최초 주장자가 근거로 했다고 주장하는 프랑코니아 회의록이란 게 존재 자체가 의심되고 있기 때문. 한때 한국 인터넷에서는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일부다처제를 권장했다는 낭설이 바로 이곳 나무위키의 이 문서에서 유포되고 있었는데 전혀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이슬람권은 일부다처제가 7세기 아랍에서 빈발했던 전쟁과 각종 사고로 가장이 죽은 경우, 가족의 아이들과 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한 목적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래서 입양을 허가하지 않는 나라가 많다.
이렇게 인류의 보편적인 제도였던 일부다처제였지만 현대에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최소한 명시적으로는 사라졌는데, 민주주의의 보급으로 권력이 다수의 손에 넘어간 까닭이 크다. 소수의 권력자들에게 이득이 집중되는 일부다처제는 존속에 대한 명확한 근거가 있어도 살아남을까 말까인데, 일부일처제 문서에서 알 수 있듯이 일부일처제가 일부다처제에 비해 여러 장점을 가지고 있어 민주주의를 이룩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큰 마찰 없이 폐지되었다.

3. 실태 및 사례


현대에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사라진 형태로 몇몇 국가에만 남아 있다. 일부다처제를 시행하는 나라들 분포도
일반적인 이미지는 중동의 이슬람을 믿는 국가들이나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불교국가인 미얀마스리랑카, 기독교 인구가 많거나 대부분인 탄자니아, 우간다, 잠비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 아프리카 나라들과 인도 등도 일부다처제를 인정 내지 관습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이슬람권에서는 기니, 보스니아, 아제르바이잔, 알바니아, 터키튀니지만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다만 여기도 시골로 가면 볼 수 있으나, 정부기관이 알면 단속거리라고 한다.
이혼이 일상적인 국가들, 특히 미국에서는 사람들이 이혼을 통해 약한 형태의 일부다처제를 이룬다는 주장도 있다. 능력이 있는 남자는 한 번 이혼하고 나서도 다시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는 일이 통계적으로 더 많기 때문. 물론 마이너한 주장이고 엄밀히 정의하면 일부다처제가 아니다.

3.1. 이슬람권


쿠란에 따르면 4명까지 두는 것을 허용한다고 하나 그보다 많이 두는 경우도 있다. 되려 초기 이슬람에서 아내를 4명까지 둔다고 하자 당시 귀족들이나 부자들은 '겨우 4명이냐?'라며 불만이 가득했는데 당시 아랍에서는 수십여명의 아내를 둔 경우가 흔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는 '''거친 사막환경에서 남자들이 전쟁으로 경제살리느라 픽픽 죽어나가는''' 시대였기에 아무도 그당시에는 토를 달지 않았다. 이슬람권의 초창기 일부다처제는 전쟁으로 미망인이 돼서 먹고 살 길이 도저히 없던 과부들을 거둬서 먹고 살게끔 할려고 했던 의도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슬람권이라고 해도 다 같은건 아닌지라 "4명? 닥쳐, 내 마음대로 결혼할거야!"라는 식으로 살고 있는 사람도 있다. 2016년 나이지리아에 사는 모하메드 벨로 아부바카르(무려 92세!)는 나이지리아 현지 매체인 '뱅가드'와 인터뷰에서 "아주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으며 죽는 순간까지 이 성업을 계속 이어갈 것"이라고 앞으로도 계속 아내를 늘려갈 것임을 밝혔다. 그는 무려 '''아내는 97명이지만, 이혼한 아내 10명을 포함하면 결혼식만 107번 치렀다'''. 슬하 자식은 185명이다. 무슬림이라고 하지만 이슬람율법은 4명의 아내까지 두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탓에 2008년 이슬람 지역교구로부터 4명의 아내를 두고 나머지 아내와는 이혼하라는 명령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대부분 아내들이 자의로 결혼했다는 탄원을 올리면서 무마됐다. 물론, 나이지리아 이슬람 성직자들은 여전히 비난하면서 93명의 아내를 포기하고 율법대로 4명만 남겨두라고 반발하고 있다.
90년대에는 카자흐스탄에선 사이비 이슬람 신교 단체가 쿠란에선 아내를 4명만 두라고 했으니 그 다음 숫자부터는 다르게 여긴다면서 '''5번째 딸을 아내로 받아들여도 된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다가 당연히 근친상간으로 쿠란을 모독한다는 기존 이슬람계의 반발을 샀고 정부가 직접 나서서 박살낸 적도 있다. 특히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무슬림 국가들은 거의 1세기를 공산주의 하 소련의 가맹국으로 살아온 만큼 보다 세속적이고 개방적일텐데 저딴 개소리가 통할지도 의문이다.
물론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문 경우이고 아내가 많은만큼 돈도 많이 들어, 대부분 많아도 2명 정도만 둔다고 한다. '''천하의 만수르도 아내가 2명뿐이다.'''[2] 그리고 그것도 드물어서 대부분의 이슬람 가정에서는 한 아내만 둔다. 수니파의 경우 4명 이상을 두진 않지만 시아파의 경우엔 조혼에 5명 이상을 넘겨 국제적 문제를 많이 일으킨다. 참고로, 말하자면 이슬람교는 일부다처제를 '허용'한다는 것일뿐이고 '권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슬람 율법(샤리아)에 의하면, 남성은 결혼을 원하는 여성에게 일정 이상의 자금을 주어야만 한다. 샤리아적 관점에서 결혼은 '신성한 계약관계'이며 '''반드시''' 신랑과 신부 본인의 자발적인 동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슬람의 결혼은 결혼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신부측에게 지참금을 지급함으로써 유효화된다.
또한, 쿠란에는 신부의 지참금은 오로지 신부만의 것으로 남편이나 신부측 집안 사람들이 맘대로 운용할 수 없도록 되어있다. 남편과 아내의 사유재산권이 독립되어 있는 것이다.[3] 결과적으로 아내가 많아진다는 것은 그 지출비용이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고로 지참금은 남편의 3~4년치 연봉에 해당되는 현금 혹은 현물을 일시불로 지급하는 것이 관례인데, 아내가 4명이라고 치면 최대 16년치 연봉을 일시불로 지급해야 한다. 한마디로 이슬람권에서 율법상 보장된 권리를 막을 수는 없으니 실질적으로 못 하게 한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아랍권에서는 지참금을 아낄려고 외국여자랑 결혼하는 경우도 많다.
더욱이 여러명의 아내를 둘 경우, 남편은 '모든 아내들을 평등하게 사랑하고 평등하게 대우할 율법상의 의무'를 가지게 된다. 만약 아내들 중 누구 하나만을 편애하거나 반대로 누구 하나만을 홀대하거나 했다고 아내들이 느낄 경우 이는 명백한 이혼사유이며, 남편측 과실이기 때문에 엄청난 위자료를 물어줘야 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람 감정이라는게 딱딱 계량되는 것이 아니기에 이는 지키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쿠란에는 '''"장담하건대, 이거 절대 못 지킨다. 그러니까 아예 하지마라!"'''라고 쓰여 있다. 그러니 율법상으로 허용된다 하더라도 모든 남성이 여러 아내와 결혼한 것은 아니게 되며 일부남성들이나 여러명의 아내를 둔다. 북아프리카 지역의 실제 통계를 보면, 1907년 이집트에서는 6%의 남성이 두 명 이상의 아내와 결혼했는데, 이 비율은 20세기 후반이 되면 2.8%(1992)까지 떨어졌다. 참고로 인근의 알제리는 1.0%(1998), 모로코는 1.1%(1994). #
무슬림들의 일부다처제에 대한 인식은 지역마다 크게 갈렸는데, 보스니아(85%)나 터키(73%), 카자흐스탄(62%) 등 동유럽과 중앙아시아권의 무슬림들은 "부도덕하다"라고 응답한 비율이 압도적이었으나, 니제르(87%), 세네갈(86%) 등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는 일부다처제에 대해서 도덕적으로 용납 가능하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요르단이나 이집트 등 중동권에서는 찬성이 반대보다 높았으나, "도덕과 상관없는 문제다"라는 응답의 비율이 높은 편이었다. 성별로 봤을 땐 남성이 여성보다 일부다처제에 긍정적이었으며, 그 격차는 파키스탄에서는 29%p에 달했다. #
세계 최대 이슬람국가인 인도네시아와 옆나라 말레이시아는 일부다처제제에 대한 여론이 부정적인편이 더 높다.

3.1.1. 아랍 에미리트


아랍 에미리트에선 미국인 여성과 결혼한 현지인 남편이 동의도 없이 2번째 아내를 맞으려 했다가 친형들에게 두들겨 맞고 친가에서 2번째 결혼은 없었던 일로 만든 바 있다고 한다.
첫째 아내의 동의 없이 마음대로 둘째 아내를 맞이하는 것은 무효이기도 하지만, 남편이 결혼할 때 쿠란을 들고 나와서 알라에게 가문의 명예를 걸고 일부일처를 약속하는 비디오를 남겼는데, 이 상태에서 둘째 아내를 들이면 '''알라에 대고 가문의 이름을 건 약속을 어긴 것'''이 되니 이슬람권에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문의 명예'와 '알라에게 한 맹세'를 한꺼번에 건드린 꼴이기 때문. 그 남편은 첫째 부인 이전에 자기 형들에게 신나게 두들겨맞고 2번째 결혼을 무효로 하고, 상대 집안에 결혼 무효 보상금을 따로 내줘야 했다.
이것도 모자라서 자기 잘못이라고 온 동네에 알리고 다녀야 했는데, 갑자기 결혼이 깨졌으니 혹시 둘째 아내가 될 뻔 했던 여자 쪽에 문제가 있었을지 모른다는 루머라도 퍼지면 여자 쪽 앞길이 막히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입소문이 엄청 퍼져 신나게 까이며 아주 개망신을 두둑히 당했기에 남편은 다시는 2번째 아내 들인다는 말조차 꺼내지 않고 있단다. 그 미국인 아내는 20년도 넘은 일이지만 지금도 그걸 이야기하면서 남편을 놀린다고 했다. 무슬림이라고 무턱대고 일부다처를 할 수 있다는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무슬림은 한 아내와만 평생 지낸다. 두 아내를 둔 어떤 중동인은 집안의 결정으로 '''두 아내'''를 두었는데, 부인이 한 명도 아닌 '''½''' 명이면 좋겠다고 한숨을 쉬었다. 일부일처라도 마누라 등쌀에 돌아버릴 것 같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2명은 오죽할까.

3.1.2. 모로코


모로코는 일부다처제를 금지하진 않았지만 굉장히 까다롭게 허용했다. 모로코에서 법적으로 2번째 아내를 들이자면 첫 번째 아내에게 허락을 받은 다음에 법정에서 최종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남편의 수입 여부, 첫번째 아내를 협박했는지 여부 같은 걸 법정에서 자세하게 조사한 다음에서야 허락한다. 그런데 이게 1년 이상이 걸리고 당연히 돈이나 여러 모로 깨지니, 웬만한 부자 아니라면 어림도 없다. 당연히 아내가 3번째 아내를 받아들일때도 똑같이 이 모든 과정을 기존 두 아내를 상대로 되풀이한 다음 역시 법원 허가를 받아야 하기에, 모로코에선 일부다처제는 정말 부자거나 권력이 빵빵한 사람이 아니라면 구경하기도 힘들다고 한다.
덤으로, 부자이더라도 왕실 눈치를 봐서 그냥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 국왕인 무함마드 6세부터 귀족이나 명문가 딸이 아닌 여성과 결혼하면서 공식적으로 "알라 앞에서 맹세하거늘 짐은 오로지 그녀만을 아내로 받아들일뿐이다." 라고 선언하면서 현재까지도 아내를 한 사람을 두고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눈치가 보일 법하다. 게다가 왕이 대놓고 알라 앞에서 맹세했다고 하니, 상처하지 않는 한 그녀만을 아내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한 왕족은 "폐하께서도 알라의 이름을 들고 맹세하셨는데 다른 왕족이 눈치없이 아내를 여럿 두면 아무래도 그렇지 않느냐"며 그래서 자신도 아내를 하나만 두고 있다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3.1.3. 사우디아라비아


사우디아라비아 파이잘 왕이라든지 여럿 왕들이 아내를 수십여명 두었는데, 물론 공식적으로 어디까지나 4명까지만 허용하기에 많은 아내들 위자료를 두둑히 주고 이혼한 다음에야 새 아내를 받아들인 것이다.
현대의 사건 사례로는, 두 아내를 둔 어느 부자가 3번째 아내를 두 아내 몰래 맞이하려다가 두 아내가 이걸 알고 유리컵과 병으로 남편 얼굴을 까서 수십바늘을 꿰매게 한 실화까지 있다. 이 두 아내의 친정집도 꽤 부자였으며 사우디 법원은 '''남편의 잘못을 탓하며 두 아내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남존여비 사상이 하늘을 찌르는 동네인데도! 그 밖에 파키스탄에서도 아내가 거부하는데도 새로운 아내를 계속 맞이하려고 강요하는 남편에게 아내가 손톱으로 얼굴을 할퀴어 피투성이로 만들어버리고 역시 무죄로 판결난 실화도 있다. 그 만큼 일부다처제는 매우 민감한 사항이라는 것이다.

3.2. 비이슬람권 아프리카


위에서도 설명했지만, 아프리카에선 이슬람이 아니라도 일부다처제를 인정하는 나라가 많다. 그 예로 남아공 대통령(2009년 취임)인 제이콥 주마는 2012년 시점에서 아내가 넷이다[4]. 2010년엔 부인이 3명이었는데, 이 때 영부인 자리에 아내 셋을 모두 데리고 나왔다. 남아공에선 이슬람은 극소수이며 주마도 공식적으로 기독교인이라 법적으로는 일부다처제가 인정되지 않는데, 관습법적으로는 허용되기에 큰 문제로 삼지 않는 듯하다.
이처럼 아프리카 여러 부족들은 부자이거나 족장같은 권력자는 아내를 무한으로 둘 수 있기에 자이르(현재의 콩고 민주 공화국)에 있던 바쿠바 족 자치구역, 자칭 쿠바 왕국(Kuba kingdom) 왕이던 르켕 왕이 현대에 보기 드물게 진짜 하렘을 이룩한 적이 있는데, 60년대만 해도 르켕 왕은 아내를 무려 '''800명'''씩이나 둔 적까지 있다. 그는 식민지 시절에는 벨기에 측이 그냥 얌전히 바쿠바족을 다스리며 대들지 않으면 매달 돈도 두둑히 주고 당신의 왕권을 인정하겠다고 두면서 절대적인 왕권을 행사했다. 아들딸이 무려 2천명이 넘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벨기에로부터 이 나라가 독립한 60년대 들어서 자이르 정부가 이건 해도 너무하다고 그 부족마을로 가서 지나친 일부다처제를 금지하던 일[5]도 있었다.
지금은 저렇게 하진 못해도 여전히 엄청나게 아내를 두는 경우가 있는데, 2000년대 중반에 케냐에서 마사이족 마을로 간 한국인 아내와 프랑스인 남편[6]은 아내를 30명이 넘게 둔 마을 촌장을 봤다고 한다. 한술 더 떠 촌장의 아들들도 각자 아내를 10여명씩 두고 있는데 그나마 촌장인 아버지[7]가 가진 아내의 수를 넘기면 안된다는 법칙이 있다고 한다. 물론 여기도 거저 아무나 아내를 저렇게 가지는 게 아니다. 주로 를 비롯한 가축이나 생필품을 지참금으로 아내의 집안에 내줘야 하는데, 아내의 외모와 여러가지를 따져서 지급할 지참금이 달라진다고 한다.
여행자가 "보통 아내에게 주는 소가 몇 마리냐"고 묻자, "마지막에 맞이한 아내는 꽤 미인인데 소 30마리를 주었다"고 한다. 참고로 그 마을 보통 서민들은 소를 보통 몇 마리 수준으로 기르고 있었고, 촌장의 집안은 2천 마리가 넘는 소를 가지고 있었단다. 즉 여기도 지참금이 부족하면 마법사 되는 셈. 아니면 남자 여러명이 지참금을 구해 한 명의 여자에게 가든지.
이태석 세례자 요한 신부가 지내던 남수단도 마찬가지라서 남수단 다수 기독교인들도 이슬람을 욕하더라도 일부다처제는 욕하지 않고 당연시하고 있으며, 이는 이슬람 교리가 아닌 전통풍습이라고 여긴다고 한다. 덕분에 부족장이나 잘 사는 부자들은 아내를 여럿 데리고 있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 아내들 역시 지참금으로 팔려나온 신세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3.3. 유대교와 팔레스타인


성경의 구약에서도 일부다처제는 흔히 찾아볼 수 있는데 일단 솔로몬만 해도 아내가 700명에 첩 300명을 데리고 있었다. 다만 이건 솔로몬이 행했던 외교정책의 일환이기도 하다. 전쟁으로 영토를 넓히기보다는 이웃 나라의 왕족 및 귀족들과 사돈관계를 맺음으로서 그들을 자신의 속국에 가깝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듯 구약성경에 묘사된 고대 유대교 시절에는 이스라엘 지방에서도 일부다처제가 있었고, 중세 때도 일부일처제와 일부다처제가 섞여 유지되다가, 서기 11세기에 프랑스의 대 랍비인 게르솜 유다가 유대교에 일부일처제를 도입하자는 교리를 공표한 이래로 대다수의 주류 유대교에서는 정통파 진보파를 가리지 않고 일부일처제가 확립되었다.
다만 이런 동네도 전쟁에 휘말리고 남성이 감소하면 오히려 제도가 사라지거나 약화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팔레스타인의 경우 여성이 간통을 해도 어지간해서는 경멸 정도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8] 남성이 극히 부족하고 여성이 이거 저거 해야만 가정이 유지되는 상황에서 여성들의 요구를 무시하다가는 공동체가 망하기 때문이다[9].
성비 문제가 극단적으로 차이가 나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대부분은 위너들을 위한 정책 or 여성을 위한 정책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 이유로, 여성은 좀 더 좋은 조건의 남성을 '선택'할 수있고 '선택'받지 못한 남성들은 자연히 도태되기 때문. 물론 선택받지 못한 남자들이 반대로 선택의 여지가 없는(예: 출산이 불가능하다거나) 여자 하나를 데리고 사는 일처다부를 받아들이는 수도 있다.

3.4. 그 외 지역


홍콩에서는 1970년대까지 중국인들에 한해서 합법이었다.
티베트와 같은 지방, 특히 유명한 저서 <오래 된 미래>에서도 나온 라다크에선 일부다처제와 일처다부제를 모두 허용하기도 한다.
말레이시아에서는 두 부인 사이에서 시달리던 부자 남성이 자살을 시도하다 실패한 일이 있었다. 유언장 내용은 두 부인 중 누구도 장례식에 못 나타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살 실패 후 병원에서는 두 부인에게 연락해 남편 데리고 가라고 했다나.
부탄도 왕족은 일부다처제를 허용한다. 단 현 부탄국왕인 지그메 케사르 남기엘 왕축은 평생 왕비제선 페마만 바라보고 살겠다고 선언해서 당분간 일부다처제를 볼 일을 없을 듯하다. 오히려 선대 국왕인 지그메 싱계 왕축이 위엄이 넘치는 일화가 있는데, 이분은 왕비가 4명이다. 그냥 4명도 아니라 이 4명 모두 다 '''자매다!!'''이유는 선대 국왕은 결혼 전에 4자매 중에 제일 맏언니를 사랑했고 결혼하려고 했는데[10], 문제가 있었으니... 저 맏언니가 '''자신의 여동생 3명도 함께 아내로 안 받아들이면 자기도 결혼 안 하겠다고 난리를 피워''' 결국 그 고집에 져서 어쩔 수 없이 4명을 한꺼번에 아내로 맞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나머지 3명의 아내들과도 사이가 좋고 사랑해서 현재까지도 별다른 문제는 없다.
초기 몰몬교는 일부다처를 허용했으나, 1879년 미국 연방 대법원의 일부다처제 금지 판결 이후 폐지되었다. 일부다처제가 폐지되기 이전에 쓰여진 소설인 셜록 홈즈 시리즈의 주홍색 연구[스포일러]쥘 베른80일간의 세계일주[11]에서 관련 내용이 등장한다. 미국근본주의 몰몬교 지도자이자 아동 성범죄자 워렌 제프스는 대저택 하나에서 50여명의 부인을 거느리고 있었다.# 즉, 근본주의 몰몬교도일 수록 일부다처제에 긍정적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이런 이들을 다룬 미국 드라마 빅러브의 주인공은 일부일처제를 주류 몰몬교가 받아들였다는 것도 비판할 정도로 종교원리주의자로 이단에 가까운 소수파이다. 이유는 조셉 스미스 가 일부다처제 하라고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국의 경우, 법적으로는 일부일처제지만, 의외로 하류층 남자가 부인을 여러 명 두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당연히 하렘을 이룩한다기보다는 육아 지원을 최대한 더 많이 받기 위해서라고. 전형적인 정책의 부작용이 낳은 결과이다.

4. 한국의 경우



4.1. 전근대


한국의 경우에도 과거에는 지위가 높을 수록 많은 여자를 얻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고려 때까지만 해도 왕이 아닌 사람들은 '정실'을 1명 두었기 때문에[12], 엄밀하게 말하면 '일부일처다첩제' 혹은 줄여서 '처첩제' 정도가 된다. 그런데 원래 일부다처제에서 '첫 번째 아내'는 특별한 위상을 가지기에,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다만 남녀평등이 이루어진 현대에 '일부다처제'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가 너무 부정적이기에, '한국은 일부다처제가 아니었다!'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지만, 진화론적인 관점에서도, 그리고 이하에 서술된 근본 문제점에 있어서도 별 차이는 없다.[13]
한국에서는 '정실'이 여럿 있기가 힘든 구조였는데, 우선 전통적으로 처가와 사위 간 연대가 강했다. 부부별성이라는 것에서도 알 수 있는데, 장인어른의 파워가 강했다는 의미다. 결혼 후 여자가 출가외인이 되는 것은 최근 300년 정도 일이고, 그 전엔 천 년도 넘게 차라리 데릴사위제에 가까웠다. 중국이나 중동 등등이 일단 결혼하면 딸은 거의 인연이 끊기다시피 하고 시집가서 남편이 죽으면 끈 떨어진 나룻배가 되는 것과 다르다. 남자 입장에선 결혼하면 최소 몇 년은 처가에서 살고, 이게 길어져서 처부모 3년상 모시는 일도 허다했다. 장인어른이 고위관직에 있으면 사위 자격으로 음서의 혜택을 볼 수도 있고, 재산상으로도 본가에서 물려받는 재산 못지않게 (아들 딸 구분없이 균분상속하므로) 처가 부모가 돌아가시면 아내를 통해 상속받는 재산도 비중이 컸다. 이런 상황에서 '정실'이 여럿이 되기는 힘들다. 상식적으로 일단 결혼하면 'OO가의 사위'란 정체성이 상당히 중요해지는 상황에서 동등한 정실부인을 다시 맞이한다는 건 상상하기 힘든 거다.
그러나 여성의 권한이 커서 위와 같이 된 것이 아니기에, 은 있었다. 즉 장가든 후 메인 주거지가 처가가 되는 건 맞는데, 실질적으로 여자는 친정에서 계속 살고, 남자는 처가와 본가를 오가면서 산다. 이 대표적인 표본이 서울강릉을 오락가락했던 신사임당의 남편 이원수 같은 사람[14]. 그리고 흔히 이럴 때 본가 근처에는 첩을 두고 사는 것이 조선 중기 이후 상류층 남자의 생활상이었다. 소위 현지처(...)의 전통은 긴 역사 면면한 셈이다.
고려 말 충렬왕 때, 오랜 여몽전쟁으로 남녀 성비가 무너졌다든지 원래 해동 땅은 음기가 세다든지(...) 하는 이유를 들면서 박유의 건의로 일부다처제를 시행하려 했으나 무산되었다. 제안을 한 대신 박유를 두고 도성 여인들이 "을 두자는 자가 저 요망한 늙은이다!!!!"라며 손가락질하면서 욕했다든지, 그 소식을 들은 여인들이 남편과의 동침을 거부하는 시위를 했다고도 고려사에 전한다. 그런데 고려 말에는 왕이 아닌 경우에도 일부다처를 한 경우가 확인된다. 특히 호족 출신으로 중앙에 진출한 사람의 경우 경처와 향처라 하여 고향과 개경에 처를 따로 두었다.[15] 종래에는 이를 고려 시대 전반의 풍습으로 확대시켰으나, 지금은 전란이 계속되어 남녀성비가 무너진 고려 말엽의 일시적인 현상으로 보는 것이 주류이다. 사실 이성계중혼을 한 대표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저 관습이 고려시대의 일반적 관습이겠거니라고 생각한 것도 크다.

‘전조(前朝)의 말엽에 대소 원인(大小員人)이 경외(京外)에 양처(兩妻)를 함께 둔 자도 있고, 다시 장가들고서 도로 선처(先妻)와 합한 자도 있으며, 먼저 취첩(娶妾)하고 뒤에 취처(娶妻) 한 자도 있고, 먼저 취처하고 뒤에 취첩한 자도 있으며, 또 일시(一時)에 삼처(三妻)를 함께 둔 자도 있어서, 그가 죽은 뒤에 자식들이 서로 적자(嫡子)를 다투게 되니 쟁송(爭訟)이 다단(多端)하였으나, 그 때에는 처(妻)를 두고 취처(娶妻)함을 금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태종실록 태종 17년 2월 23일

당장 조선왕조실록에 해당 부분이 언급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는데, 시기를 고려시대 말기의 혼란상으로 제한하고 있을 뿐 아니라, 양처를 두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없었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맥락상으로 다처를 허용했다는 것이 아니라 법으로 금지해야 할 필요를 못 느낄 정도로 일부일처가 당연했다는 이야기이다. 게다가 경처와 향처 부분이 고려 말이라는 증거가 하나 더 있는데, 중혼의 결과 양처, 혹은 심하게 3처까지 둔 사람이 나오면서, 그 자손들이 모두 적자가 되었다. 이 부분은 조선시대에 일부일처 다첩제가 되면서 누가 첩이 될 것인가가 문제가 되었다는 것은 나중 일이고, 당장 고려 말부터 '''재산분할 관련으로 소송으로 시작된다'''. 본관이 있는 향처의 자손들이 더 높은 위치에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경처는 개경에 거주하는 유력인사들과 정략 결혼을 한 사례가 많은 것이다. 이 때문에 경처의 지위가 오히려 높았고, 이에 대해서 향처의 자손들이 반발하는 양상이었다. 사실상 왕자의 난도 조선이라는 나라를 유산으로 둔 유산싸움인 것이다.
조선 태종 이후로 왕도 한 명의 왕비만 둘 수 있게 되면서 일부일처다첩제가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 아직도 남았다고 한다. 조선 중순, 숙종 때 제주도 부유층들은 일부다처제를 그대로 유지하여 당시 제주목사이자 청백리로도 유명한 이형상이 금지시킬 정도였다.

4.2. 근대


그러다 구한말, 개화기 이후 처첩제도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이후 일제와 미군정은 처첩제를 한국의 특수한 풍습으로 인정하여 을 두는 것을 허락했지만,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 수립되고 대한민국 헌법이 개정되는 과정에서 모두 금지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말 그대로 아내남편이 1명씩만 있는 일부일처제만 인정한다. 특히 박정희 정부에서 본격적으로 공무원 축첩 근절에 칼을 빼들었고 축첩이 적발된 공무원은 가차없이 잘라버렸었다. 대한민국 국군 간부들의 경우 일부다처제, 내지는 축첩행위를 하면 '''현역부적합심사 대상이 된다.'''[16]
90년대 후반 토요미스테리 극장에 소개된 사례에 따르면, 6.25 전쟁실향민 남자가 피난 도중에 부인과 아이를 잃고 몇년 후에 재혼을 했는데, 죽었다고 생각했던 부인과 아이를 다시 만났다. 처음엔 기뻐하다가 이내 난감한 상황에 빠지고 두 집 살림을 하다가 결국은 들통났다. 이것도 황당한 경위로 들통나게 되는데, 남한 쪽 부인과 북한 쪽 부인의 팬티 취향이 달랐던지라 두 집을 오갈 때마다 필연적으로 팬티를 갈아입어야 했다. 그러다가 하루는 급한 김에 골목길에서 팬티를 갈아입게 되었는데 마침 순찰중이던 경찰에게 걸려서 풍기문란죄로 잡혀가는 바람에 두 집 살림이 들통났던 것.[17] 어찌어찌 해서 두 부인과 자식들을 끼고 살게 되지만, 틈만 나면 마누라들이 머리 끄댕이 잡고 싸워서 문제였다. 그러다 대폿집 마담과 바람이 났는데(...), 이 사실을 알고 분노한 부인들이 남편과 마담 둘 다 쥐어 팼다.
남들의 부러움을 받았지만, 본인은 죽을 때까지 '''"하나도 안 좋아..."'''라고 했다고.[18] 얼마나 시달렸는지, 심지어 죽은 이유도[19] 두 명의 부인이 화투를 치다 싸움이 붙은 것을 말리던 와중에 풍으로 세상을 떠난 것. 심지어 죽은 뒤에도 자신의 옆에 묻힌 부인들이 싸우는 바람에 결국 자식들 꿈에 유령으로 나타나서는 마누라들 무덤과 좀 떨어진 위치에 무덤을 이장해 달라고 하소연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식들은 아버지의 부탁을 들어드리고자 이장을 결정했는데, 두 어머니의 무덤과 떨어진 위치에 '''어느 한 쪽으로 1mm라도 치우치지 않도록''' 하느라 상당히 애를 먹었다는 이야기.[20]
덧붙이자면, 이 에피소드의 제목이 참 적절하게도 '''"아버지는 DMZ"'''였다. 재혼한 일은 어쩔 수 없지만 마담과 바람 핀 건 죽도록 맞아도 모자란 일이라 실드조차 불가능하다.
무한도전 명수는 12살에서 12살로 돌아간 멤버들이 각자 자기 집에 뭐 있다, 뭐 있다 자랑을 늘어놓는 와중에 우리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다, 우리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다 이렇게 가족 자랑으로 이어졌는데, 이 굉장히 담담하게 "'''우리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두 분이셨어'''"라는 멘트를 날려서 멤버들 입을 다물게 하기도 했다. [21] 길의 말로는 어떤 할머니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어린 마음에 고민이 많이 되었다고... [22] 특별히 부끄럽다거나 숨길 생각은 없는지 나중에 무한상사 뮤지컬편에서도 한 번 더 써먹는다. #

5. 여권


결국 '''부유층 남성은 여러 명, 중산층은 1~2명, 하위층은 아예 한 명과도 결혼하지 못할 수 있다.''' 즉 일부다처제 사회에서 아내의 수는 '''남편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일단 어떤 사회가 일부다처제를 시행한다고 치면, 그 사회는 곧바로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안정시킬 방법부터 고민하게 된다. 여러 아내, 그리고 그들의 배다른 자식들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집안이 풍비박산날 수 있기 때문.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때문에 적지 않은 문화권에서 다양한 시도가 있어 왔다. 다음은 그 중 몇몇 방법을 열거한 것이다.
  • 자매 가 아닌 공동 아내들은 거처를 분리시키되, 자매인 아내들은 함께 지낼 수 있게 한다.
  • 각 아내들은 모두 부부관계와 경제권, 재산의 소유권에 대해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 가장 연장자인 아내가 가정 내에서 특별한 권위 또는 특권을 갖는 것을 인정한다.
    • 이와 함께, 어린 아내를 편애하지 않게 하는 관습이 동시에 시도될 수 있다.[23]
그러나 정책적 관점에서 볼 때 어찌되었건 간에, 일부다처제가 남아있는 나라들, 근대화가 덜 이루어진 국가들에서 여권을 제대로 보장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각 부인을 공평하게 사랑하라는 계율[24]은 그저 계율에 지나지 않으며, 무엇보다 배우자가 '다수'가 됨에 따라 상대방에 대한 배려 역시 상당히 떨어진다. 배우자를 다수 거느리는 경우 각 아내를 '스테이터스'나 '재산'으로 볼 수는 있을지언정 인격적인 동반자나 반려로 여기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일부다처제 등에 대해 관대한 나라들 가운데에서는 아직도 성폭행을 당한 여성은 자살하는 것이 불문율이 되어 있는 등 고대 종교 악습을 간직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정확히 일부다처제와 연관 있다고 말하기 어려우나, 여권 경시 풍조 자체와 무관하지 않다.

6. 환상과 현실


암사자 "무리들"을 피하는 숫사자.
뭐 옛날이든 현재든 일부다처제가 존재하기는 해서 그렇다 치지만 은근히 기록이 많은 덕분에 에로게 등에서는 남자의 로망으로 포장되어 나오고 오덕뿐만 아니라 뭇 남성들중에도 이를 동경하는 사람이 많지만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도 않고 영원한 장밋빛이 펼쳐지는 것도 아니다.''' 실제 허용이 되는 나라에서도 처를 여럿 두는 것이 가능한 경우는 드물다. 있다고 해도 보통 권력층이나 부유층 정도나 가능할 뿐.

6.1. 경제적 측면


부모에게서 독립하여 사회 진출을 생각 하거나 경험한 사람 이라면 알 수 있겠지만, 한국의 일반 가정 기준으로 1처에 자식 둘만 딸려도 가장은 자신의 덕질에 들일 금액을 가급적 줄이는 것부터 시작해. 온갖 부분에서 넉넉하게 돈을 쓰기도 힘들고 거의 대부분 뼈 빠지게 일을 해야 하고 가정의 불화를 일으키지 않도록 배려와 마음을 써야 하는 당연한 일이 있는데 여기에 처가 넷에 1인당 자식을 2명만 둔다고 생각 해보자. 부양가족이 단숨에 12명이 된다. 게다가 그 12명이 각각 3명씩 거주할 수 있는 집을 도합 4채 지어야 한다. 감당할 자신이 있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애초에 감당할 수 있는 사람도 그 부를 자수성가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거나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잘난 집의 자녀의 배우자가 되길 꿈꾸지 배우자를 여러 명 두는 쓸데없는 짓은 안 할 것이다. 대부분은 부모의 증여, 유산으로 부를 이룩하기 때문에 당연히 젊은 시절은 정략결혼으로 살 것이고, 부모의 눈에 흙이 들어간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보통 배우자를 여러 명 둔 사람이 노인인 경우가 많다.
일부다처제도 시대와 상황에 따라 모습이 다를 수 밖에 없겠지만 대체로 아내들 간의 충돌을 막기 위해 아무리 사정이 안 좋아도 집은 무조건 따로 마련해 주는 게 보편적이다.
따라서 이런 일부다처제를 허용하는 국가에서도 아내를 여럿 맞이 한다는 건, 한 마디로 부의 상징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꾸란에서도 '정 할거면 이런 특수한 상황이라면 이까지 해도 되겠지만, 대신 모든 아내에게 같은 대우를 해 줘야 하고 누구도 차별해서는 안 된다. '''떫으면 그냥 하지 마라.''' '라고 적혀 있다.[25] 즉, 중동식의 일부다처제는 이슬람 율법이 권장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중동 풍습 때문에 대놓고 금지는 못하지만, 지양할 풍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또한 기존 아내의 허락[26]을 받아야 하고 신 앞에서 차별 안하겠다는 확언을 해야 한다. 물론 근대화가 잘 이뤄지지 않은 국가일 경우에는 앞서 서술한 것처럼 형해화된 계율로 다루는 경우가 많으며, 이 경우 여성의 인권은 시궁창에 처박힌다. 하지만 이런 나라들도 부자거나 권력자 아니라면 일부다처제는 이 항목 여러 예시에서 보듯이 어림도 없다.
다른 이야기지만, 한국에서 외국인, 외국인 노동자를 주로 돕던 한국인 목사가 쓴 책에 이런 예시도 나왔었다. 방글라데시인 노동자에 대해 쓴 글인데 그 외노자는 종교야 이슬람이지만 한국 교회에 나와 종교적 토론도 하고 목사와 이야기도 자주 하며 목사나 교인들이랑 사이도 좋았다. 한국말도 잘하고 적응 잘하던 사람이지만 공장일을 하다가 크게 다쳐 그야말로 죽을뻔했다. 병원비는 자신이 좀 벌어둔 돈을 통해 썼지만 이젠 일도 못하고 조국으도 돌아가자면 나나 아내와 다섯 아이들이 다 굶어죽는다고 그가 슬퍼하자 목사와 교인들이 열심히 나서서 돈도 모아주고 해서 수천만원이나 되는 돈을 모아 다 줬다고 한다. 무척 기뻐하면서 그 노동자는 이 돈이면 조국에서 그 10배가 넘는 값어치이니 가게를 해서라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다고 했다. 헌데....감동적인 이야기에 초를 치던 게 ...그 노동자는 '''그래, 먹고 살 걱정도 없어지고 여유롭게 되었으니 조국에 가서 두번째 아내도 맞이해야겠어요'''라고 말하는 통에 다들 무안해졌다고. 물론, 모아둔 돈이 현지에서 꽤 큰 돈이라 둘째 아내를 맞이할 경제력이 된 셈이지만 졸지에 일부다처제를 후원해준 셈이기도 하니 목사나 교인들 기분은 꺼림칙했을 듯 하다.
간혹 두 번째로 맞은 부인이 남편의 가정에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는 케이스도 있다.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과거에는 밥집을 운영하는 여자가 손님으로 온 남성과 눈이 맞는 경우가 있었는데, 밥집을 운영해서 번 돈으로 본처 자식들까지 부양한 사례도 간혹 있었다고.
내전으로 성비가 파괴된 에리트리아에서는 젊은 남성에게 강제로 일부이처를 강요하려다가 '''남성들의 반발로''' 취소된 적이 있다. 한 여자와 그에 딸린 애들 먹여 살리기도 벅찬 상황에서 우리보고 죽으라는 말이냐, 이건 '''총맞아 죽냐 처자 먹여살리다 등골휘어 죽냐''' 선택하라는 말이냐는 항의에서였다고.

6.1.1. 세금 문제


그리고 세금도 대폭 늘어난다. 실제로 한국 여행전문가가 정말 힘들게 이집트아내가 둘인 부유한 사업가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이런 건 좀처럼 어려운 일인데, 일부다처제를 허용하는 이슬람권 나라들에선 외국인들이 취재하는 것을 이슬람 모독으로 연결한다고 기분 나빠하기에 외국 언론이나 여러가지 취재가 자세히 된 게 거의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아내를 2명 두자 세무소 직원이 와서 그만큼 수입을 인정받으시니 '''세금이 늘어난다'''고 정식 통보까지 하더란다. 뿐만 아니다. 이집트에도 여성부가 있고, 여성부 직원이 와서 두 아내를 만나는 자리에서 "남편이 한 아내를 차별한다면 이를 알리라"고 신신당부까지 했는데, 이는 이혼 사유가 되기 때문. 그 사업가도 '''아내가 둘인 것에 환상 가지지 말라'''고 쓴소릴 하는데, 그게 절대로 배부른 투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집트는 '''결혼한 사람들이 아직도 아이를 네다섯씩 가지는 경우가 많고, 아내가 여러명일 경우에도 마찬가지인지라 해마다 인구가 200만씩 늘어나는 골치아픈 상황'''임을 감안해야한다.
참고로 이집트는 그나마 이슬람권 내에서는 그럭저럭 여권이 존중되는 나라다. 사실 세속의 전통이 오래 된 상황에서 가난한 이슬람 국가일 경우 여성들의 인권을 어느 정도는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 애시당초 열악한 여성 인권 자체가 남편이 갑인 동네여야 가능한 거니까. 중동에서 여권이 상대적으로 높은 나라들은 대체로 석유가 안 나온다. 여성도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이 때문. 자원부국인 사우디카타르에서는 여성은 경제 활동에 참여할 기회도, 그럴 이유도 없다. 거꾸로 자원부국이 아닌, 아라비아 반도에서 가장 작은 나라인 바레인은 여성 공무원 비중이 가장 높고 여자들도 밖에서 나가 일하도록 정부에서 배려한다. 그래서인지 바레인은 아라비아 반도에 들어간 나라에서 드물게 돼지고기을 먹을 수 있는 이슬람권 국가 중 하나다.

6.2. 아내들 간의 평등 문제


해외 출장 가서 사오는 선물도 반드시 2개를 같은 것을 사줘야 한단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는 속담처럼 하나라도 다르면 서로가 상대 쪽 선물이 더 좋게 여길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기 때문이다.
한국 어느 스튜어디스가 쓴 책자에서도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아랍권 한 나라에서 아내를 둘 데리고 있던 한 현지인 남성이, 면세점에서 똑같은 고급 기념품을 구입하길 원했는데 하나밖에 없어 난감해하던 걸 본 적이 있다고 한다. "다른 걸 사시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자 그 남성은 "안돼! 두 아내에게 공평하게 대하자면 같은 것으로 사줘야 한단 말이오!"라고 고집을 부렸다고 한다. 그래도 사정을 이야기하자 마지못해 아내 둘에게 그럼 같은 값으로 둘이 원하는 걸 고르라고 하여 최대한 비슷한 값으로 두 사람이 원하던 걸 고르고 나서야 비로소 그 남성도 미소를 보이며 수고했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6.3. 성비 문제


게다가 일부다처제의 또다른 문제점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 것은 바로 일부다처제를 공식적으로 허가하고 시행을 할시 남자들도 일처다부를 시행하지 않는 이상[27] '''결혼을 못하는 남자들'''이 당연히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남성의 사망률이 여성의 사망률에 비해 매우 높았기에[28]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으나 남녀의 사망률이 그렇게 크게 차이나지 않게 된 현대에는 사정이 달라진 것. 가뜩이나 남녀의 보편적인 성비는 자연적으로 남자 쪽이 조금 더 많이 태어나는데[29], 이런 상황에서 한 남자가 4명, 아니 2명의 여성과 결혼을 한다고 쳐도 어딘가의 어떤 남자 둘, 셋 이상이 결혼을 할 기회와 상대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즉 이 때문에 남성들이 불만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31]
MBC 뉴스데스크로도 바로 이집트 같은 경우가 보도되기까지 했다. 외국 기자들 카메라 앞에서 나온 이집트 남성들은 소리를 꽥꽥 지르면서 화를 내기까지 했다. "돈많은 자들은 아내를 넷이나 두는데, 우린 아내 하나 두기도 벅차다!" 그래서 외국 여성에게 치근거리면서 치한 짓까지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간혹 운 좋게 하나 걸려서 결혼하면 비 이슬람 신자인 외국 여자들은 지참금을 요구하지 않고, 태어난 아이는 어차피 무슬림이고, 이들 입장에선 땡잡은 셈이다. 다만 이건 로또와 같은 확률이고, 되려 여자 관광객 자칫 잘못 건드리다가 경찰이나 사복경찰에게 걸려 작살나기 십상이다. 쿠웨이트,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사우디, 바레인 등 걸프만 산유국들처럼 부유한 국가에 주거하는 총각이라면 인도나 파키스탄, 타지키스탄, 인도네시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즈스탄,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예멘, 팔레스타인 등 다양한 가난한 나라에서 온 여자들과 결혼해서 지참금을 아낄수도 있지만[32] 이집트나 레바논, 요르단, 알제리, 튀니지, 이란, 이라크 같이 썩 부유한 나라가 아닌 국가에서 살면 언감생신일수밖에 없고 몇년간~십몇년 넘게 고생하며 지참금을 모으는것밖에 답이 없기는 하다. 또한 이들나라는 청년실업률이 30~40%대는 기본적으로 찍을 정도로 매우 높은 상황이다보니 지참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고생이 필요하고 그렇지못한다면 지참금을 부모한테 손을 버리거나 빚을져야되는데 이것도 부모가 가난하면 어림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결혼적령기가 넘어서도 결혼하지 못하는 노총각들이 넘쳐날수밖에 없고 사회적으로 골칫덩어리이다.
해외 여행자들이 이런 치근남들을 피하고자 반지를 낀다든지 유부녀로 위장하고 들어온다고 반지를 끼거나 남자들을 데리고 와 남편이라고 말해도 결혼사진 보여달라며 치근거리는 이집트 남성들도 있다. 그런데 실제로 한국인 신혼 부부가 이집트 여행을 갔다가, 이런 치근거리던 호텔 종업원을 만난 적이 있다. 빡돈 남편이 멱살잡고 '내가 남편인데, 어디 경찰서 가자.'라고 분노하자 종업원이 굽신거리며 빌었는데, 그 호텔 사장이 와서 사정을 듣더니 죄송하다면서 그 사죄로 하루 식비를 받지않았다고 한다.[33] 그대신 그 직원은 사장이 알아서 처리한다고 하더니만 그는 며칠 동안 보이지 않았다. 이 내외가 그 호텔에서 나올 때 그 치근거리던 종업원이 얼굴이 퉁퉁 부은 채로 지나가는 걸 봤는데 다른 직원이 말하길, 사장이 뜨거운 불벼락을 내려 그 직원의 정신상태를 정상으로 돌려놓았다고 한다. 이럴 경우엔 경찰도 사장의 손을 들어준다면서. 이처럼 일부다처제가 가능한 지역에서 이런 일이 꽤 자주 벌어지는데 이런 남성들은 가난하고 지참금이 없어 도저히 결혼하지 못하고 그나마 만만한 외국여성에게 이런 치한 짓을 많이 저질러 이런 원인도 일부다처제가 원인 중 하나 아니냐는 지적도 많다. 인도방글라데시터키에서도 종종 벌어지는 일인데, 이러다가 걸리면 경찰이 제대로 반 죽여놓는다.[34]
위에 나온 나라 가운데 여성이 엄청 불평등한 나라인 파키스탄도, 부자거나 하다못해 그 지역에서 그나마 제법 힘이 있는 수준의 권력자가 아니라면 아내를 여러명을 두는것은 극히 어렵다. 파키스탄을 여행한 한국인 여행자의 책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파키스탄에서 길을 잃어서 정말 외딴 마을에서 묵게 되었는데, 이 외딴 마을은 찢어지게 가난한 집들 투성이였고, 한국의 중산층 수준 정도의 촌장이 그나마 마을에서 가장 부자였다. 그리고 촌장은 아내가 셋이었고 마을 사람들 상당수는 노총각이었다고 한다. 위에 밑에서 2가지 사례는 국내에서 책으로 나온 여행자들의 해외 여행기 책자에서 나온 것이다.
현재는 그런 일은 없지만 과거 부족국가 시절에는 이에 대한 성비를 맞추기 위해 고의로 전쟁을 일으켜서 결혼을 하지 않은 남성 병사들을 어떻게든 전사시켜가면서 성비를 일부다처제의 기준에 맞게 맞춰나가기도 했다. 만약 전쟁에서 이기면 영토도 넓힐 수 있으니 꿩 먹고 알 먹고라는 발상인 것이다.

6.4. 체력 및 정력적 문제


부부간의 원만한 성생활은 혼인 관계에 있어 매우 중요한데, 일부다처제가 되면 남자쪽의 체력 소모가 단순 계산상으로도 최소한 2배 이상 심해지게 된다. 한국이 일부다처제는 아니지만, 대법원 판결에서도 성생활을 혼인의 주요한 요소중 하나로 판단했을 정도로 꽤나 중요한 문제이다..(2010므1140) 특히 일부다처제는 인정하지만 반드시 모든 부인을 동등하게 대할 것을 명시한 이슬람교권에서는 이것이 의무가 된다. 한 여자와 하는 순간 나머지 여자들과는 동등하게 대해야 하는 것 때문에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해야하는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6.5. 여성들의 입장


대부분 '''자국내에서는''' 부정적이다. 여초 현상이 극심하다는 체첸에서조차 일부다처제 도입은 결국 여성들의 극렬한 반대로 실행되지 않았을 정도. 고려에서도 박유가 인구 격감과 여초 현상을 이유로 일부일처 그만두자고 했다가 오만 욕을 다 먹었다는 일화가 있다.
무슬림 여성들도 일부다처제에 긍정적이지는 않은데, 한국인 대학생들이 전세계 대학을 찾아가서 자매결연하고 현지 대학생과 여러 이야기를 나눈 걸 쓴 <캠퍼스 로드>라는 책에 나온 일화에 따르면 이러하다. 이란 테헤란 대학교에서 남녀 학생들과 대화하다가 일부다처제 이야기가 나오자 남학생들은 "돈만 있다면 꿈꿀 수 있지(…)"라는 반응을 보인 반면, 여학생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심지어 어떤 여학생은 이런 말을 한 남학생에게 화를 내면서 욕설까지 했다고 한다. 사실 남자든 여자든 성별을 불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첩이나 여려명의 남편 중 하나가 되고 싶어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해외에서의 일부다처제를 시행하는 경우는 긍정적이다. 낮은 신분의 여성일 경우 이라도 승강혼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여자 노비일 경우 양반의 자식을 낳았다는 이유로 물건처럼 거래되지 않았다.[35]
그리고 단지 부정적이라고만 하기에는 복잡한 사정이 많다. 일례로 유럽 난민 사태 때는 요르단인의 아내가 되면 그 인척들까지 요르단 국적을 주기에, 몸만 챙겨 피난온 난민들이 요르단 국적 취득을 위해 일부다처의 형태로라도 결혼을 희망한 일이 있다. 현지인에게 일부다처제를 하자면 여러 사항들을 깐깐하게 점검해야 하지만, 돈도 시간도 법적 지위도 부족한 난민들은 지참금이고 뭐고 딸아이를 팔아넘기려고 든 것이다.
지리적인 요건이라든지 환경에 따라 여성들이 오히려 권장하기도 한다. 국경없는 의사회 소속 의사이자 만화가인 프랑스인 에마뉘엘 기베르와 프레데릭 르메르시에가 1980년대 소련과 전쟁중이던 아프가니스탄 산악을 의료차 들렀을 때를 그린 평화의 사진가(한국에서는 세미콜론을 통해 정발되었다.)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아프가니스탄에 간 프랑스 여성 의사가 험한 산가를 어렵게 가서 거기 사람들을 의료봉사하면서 거기 사는 비슷한 나이를 가진 여인을 만나 친하게 지냈다. 3년 뒤에 그 곳에 다시 가보니 그녀에게 낯선 젊은 여자가 곁에 있기에 "친척인가요?"라고 물어보니 "내 남편의 둘째 아내에요."라고 웃으며 말하는 거 아닌가? 놀란 프랑스 여성이 "그리도 금실좋던 부부였는데 왜 둘째 아내를 맞이했나요??"라고 물었는데 그 첫째 아내가 말하길, "내가 둘째 아내를 빨리 맞이하라고 남편에게 말했죠. 그러자 '''남편은 뭔 헛소리야? 난 그럴 마음도 없고 당신이면 충분해. 뭐하러? 라며 거부했죠. 그 마음은 기뻤지만 그래도 내가 1년 넘게 끈질기게 설득하여 남편이 백기들고 2번째 아내를 맞이했어요'''." 라며 웃으며 자랑하듯이 말했다고 한다(...).
다만 이 경우에는 산골 마을이라 여성이 좀처럼 없고 그나마 있는 다른 여성들도 나이가 훨씬 많아서, 이 첫째 아내가 외로움을 못 견뎌서 친구 겸 식구로 받아들이고자 남편에게 1년이나 설득했던 거였다. 그래서,프랑스 여성에게 이야기할 때도 그 여성은 "여보, 당신을 위해서 둘째 아내를 맞이하라는 게 아니에요, 바로 저를 위해서 맞이하라는 거에요. 예. 부탁이에요. 제발."이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그 프랑스 여성은 동료인 이 책 지은이들에'프랑스에서라면 별 미친 소리같지만 여기에선 이런 게 정상일 수도 있는 현실이지'라고 이야기했다. 물론 이 남편은 그 지역에서 꽤 부자였기에 양과 말이 100 마리가 넘고 큰 농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척박한 곳에서 가축을 몇십마리 가지는 것도 엄청난데 이 정도라면 부자였던 터라, 아내가 저렇게 새 아내를 맞이하라고 할 여유가 있었다.
파라과이도 일부다처제를 한 바 있다. 옛날에 삼국동맹전쟁에서 대패하면서 파라과이 남자들이 거의 다 죽거나 상대 국가로 끌려가 노예 신세가 되면서 극소수밖에 안 남은 형국인지라 이 당시 파라과이 여성들에게 선택의 여지란 없었다. 전국민의 92% 상당이 여자이니 결혼을 하려면 일부다처제로 가든가 아니면 평생 미혼으로 살다 죽든가 해야 했다. 파라과이는 이때, 너무나도 다급해서 그동안 사람으로 안 보던 밀림 속 원주민 남자들에게 가서 이제 도시로 와서 파라과이인으로 받아둘테니 다 같이 살자고 요청할 정도였다. 심지어, 돈벌려고 와 일하던 인도인 외노자들에게까지 돌아가지 말고 남아서 파라과이인으로 귀화해 살아달라고 요청하고 이들에게도 당연히 일부다처제를 허용한다고 유혹할 판국[36]이었다.
파라과이 여자들은 이게 싫으면 이웃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로 가서 그쪽 남자와 결혼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알다시피 이때, 파라과이는 이 두 나라와 치열하게 싸워 패한 전쟁 패전국이다. 당연히 파라과이 여자들에 대해 첩실도 아닌 일개 창녀 수준이나 성노리개 수준으로 인식될 터에 이웃 나라들에 가봐야 좋을 거 하나도 없었다. 자국은 '''전국의 남성들이 다 죽거나 끌려가 없어진 상황'''인지라 금수저가 존재해도 여기도 극소수 중의 극소수이니 이런 금수저들에게 선택받는 것도 보통 여성은 불가능했다. 이러니 대다수 여성들은 정말로 선택의 여지따위 없었다.
이래서 파라과이는 어쩔 수 없이 일부다처제를 1950년까지 시행해야만 했다. 이런 극한상황인데도 일부다처제가 싫다면 그냥 평생 결혼을 안하고 살아야 했다. 그런데...당시 시대상으로도 여성이 벌어먹기도 무척 힘든 시대이고 파라과이는 전쟁으로 박살난 상황에 여자들이 일할 곳도 정말 없었다. 부숴진 집 철거나 복구공사 위해서라도 남자가 많이 필요한 와중이라 여자들이 독신으로 살자면 이런 힘든 일을 스스로 해야했다. 게다가 여자들이 군대도 가야하고 총칼 잡고 또 모를 이웃 나라들의 침략도 대비해야 하고....이러다보니, 독신 여성들도 결코 살기 좋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파라과이 정부는 아이를 하나라도 더 낳고 인구를 늘려야하는데 독신 고집하면 여자들은 군대도 가고 힘든 일을 맡아야 한다라고 강요했는데 이것도 어쩔 수 없었다. 정부로서도 아이를 낳은 여자들은 적어도 군대로 보내지 말거나 특혜라도 줄 수 밖에. 이러니, 독신 여자들은 울며겨자먹기로 군대가서 언제 쳐들어올지 모를 주변 나라들 상황에 불안해하고[37]힘든 노동도 같이 해야하기에 도중에 포기하고 첩실이라도 좋으니 결혼하겠다고 하던 여성들도 많았다...게다가 이 당시 파라과이에선 여자를 대상으로 벌인 강간조차도 넘어가는 일도 많았는데 피해 여성 상당수가 독신 여성이었다.
모리 카오루의 신부 이야기에도 유사한 사례가 나온다. 여성은 외간 사람과 얼굴도 마주할 수 없는 풍습 탓에 다른 사람과 교류도 못 하고 하루 종일 집에서만 '''너무 너무 너무''' 외롭게 지내던 여인이, 목욕탕에서 만나 친해진 친구가 남편과 사별한 뒤 재혼도 못 할 처지가 되자 자신의 남편에게 부탁하여 둘째 부인으로 맞이하게 한다.
한국의 경우에도 있다. 궁금한 이야기 Y에 나온 사연인데, 본처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자신의 친구를 남편에게 소개해 첩으로 살 수 있게 했다고 한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두 번째 부인이 첫 번째 부인의 자녀들을 부양하는 사례도 있었다. 그런 이유로 첫 번째 부인이 두 번째 부인을 환영하기도 했다.
2012년 8월 나이지리아에선 아내가 5명인 어느 사내가 6번째 아내를 들이자[38], 아내 모두가 분노하여 다같이 칼을 들고 남편을 위협해서 묶어두고 1명씩 성관계를 가진 다음에 찔러 죽이고 달아난 사건까지 벌어졌다고 국내에서도 보도되었다. 그러나 이는 틀린 정보로 보인다. 위에 5명의 부인들에게 강간당하고 복상사한 기사가 와전된 듯 하다. 살인죄냐, 강제 성관계 중에 이뤄진 사망사고냐에 따라 처벌 수위가 엄청나게 다르다.[39]

7. 현대 사회에서의 부활 가능성


몇몇 남학생들이 일부다처제가 없어져서 슬퍼하던데, 일부다처제가 없어진 건 다 너네를 위해서야. '''일부다처제가 시행되면 다들 송중기의 백 번째 부인이 되고 싶어 하지, 너네의 첫 번째 부인이 되고 싶진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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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고등학교 한국사 교사(....)의 2017년 발언#

20세기 말 이후로 애정관계가 복잡해지면서 일부다처제나 일처다부제를 허용하자는 말이 있다. 간혹 더 개방적인 사람들은 다처다부제를 허용하자는 말을 하기도 한다. 실제로도 두 여자가 한 남자와 결혼하기를 원하거나 반대로 두 남자가 한 여자와 결혼하기를 원하는 경우가 아주 드물지만 나오기도 한다.
개인주의가 강화되는 선진국에서는, 혼외자의 권리가 혼내자와 거의 같이 취급되게 되고 사실상 관계의 권리도 강화되는 흐름을 거치면서 점차 결혼제도의 지위가 변하고 있다. 결혼을 했을 경우 얻는어떤 배타적인 이득이 비혼이나 혼외 관계에 대한 인권적 배려를 강화하면서 전에 비해 줄어들었다.
실상 양성평등 문제만 봐도, 과거 일부다처제(사실 일처다부제도 마찬가지)가 여성을 상속 도구로 전락시키고 양성평등을 파괴했다고는 하지만, 이것은 과거의 이야기일 뿐, 현대의 일부일처제 합법화 운동의 명분에 대한 제대로 된 반박은 되지 못한다. 애초에 이런 문제는 전근대 사회에서의 약자의 권리 부재라는 측면에서 살펴봐야 한다. 일부일처제가 쭉 유지되어온 문화권에서도 상대적으로 덜하긴 해도 성 차별이 심각한 경우가 많았다. 현대에 일부다처제나 일처다부제의 필요성이 급갑했다는 논리 역시 현대 일부일처제가 보편적인 '현상'을 설명해줄 뿐, 일부다처제 역시 당사자들의 동의가 있다면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은 되지 못한다.
이 때문에 미국 등 동성혼 합법화를 거친 나라에서는 마찬가지로 일부다처제 합법화 운동이 일어나고 있기도 하다. 특히 유타 주의 경우 동성혼 금지와 일부다처제 금지에 모두 위헌 판결을 내리는 위엄 넘치는 행동을 했다(...). 다만 유타주의 특수성은 좀 생각할 필요가 있는게, 유타주는 애초에 몰몬교에서 개척했다가 미국에 흡수된 주로 현재에도 몰몬교도가 가장 많은 주이다. 동성혼 허용이 나온 것도 몰몬교가 다른 기독교에 비해서는 동성애에 너그럽기 때문이고, 일부다처제는 더한 것이 애초에 몰몬교는 일부다처제를 허용했던 종교다. 미국 정부와 협상하는 과정에서 일부다처제를 포기한 것이 현재의 몰몬교다.
사실 일부다처제는 윤리적 문제를 떠나서 일부일처에 비해 너무 비효율적이라(특히 성비가 고른편인 인간에게 있어서) 합법화한다면 몇몇 능력있는 남성들의 취미성 제도가 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양성평등의 문제도 발생하지만, 일부다처제의 가장 큰 문제는 사회적 문제이다. 국가적으로 허용하면 사회적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섣불리 허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본 것과 같이 과거에 비해 결혼 제도의 지위가 낮아지고 혼외자가 혼내자와 거의 비슷하게 취급받아지는데 굳이 당사자간 합의 하의 일부다처제를 허용할지 여부를 따져야 하냐는 반론도 있다. 실제로 양육 복지가 잘 된 국가에서는 하류층이 일부다처를 실행하는 경우가 많다.
폴리아모리도 참고할 것.

8. 동물들의 경우


포유류의 경우 90% 이상이 일부다처제, 대규모 떼를 형성하는 물고기들이 다부다처형이다. 포유류의 경우 다부다처형은 흔히 난교형이라고도 하는데, 점박이하이에나가 대표적. 조류의 경우 90%는 사회적 일부일처제를 유지하나 다른 상대와도 성적 관계를 갖고 10% 정도는 부성불일치이다.
종종 오해되는 점으로, 문명발생 이후 일부다처제 사회에서는 가부장제의 영향으로 남성이 서로 다른 집안의 여러 여성들을 외부에서 들여와 자신의 가문에 합류시켜 거느리는 게 대부분이었으나, 동물들의 경우 다수의 암컷을 중심으로 집단을 형성하고 소수의 수컷이 외부에서 들어와 무리의 암컷들과 짝짓기를 하는 일이 흔하다. 코끼리, 범고래, 보노보 등이 대표적이다. 한편 다수의 수컷이 무리를 구성하고 소수의 암컷이 외부에서 합류하는, 가부장제의 인간 사회와 거의 똑같은 동물도 있다. 고릴라, 아프리카들개, 침팬지 등.
다만 사자 같은 몇몇 동물은 암컷이 사회를 형성하는 모계사회임에도 수컷이 눌러앉아 무리를 지키는 대신 먹이를 빼앗는 깡패짓(?)을 하는 등 반쯤 거느리는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9. 각종 매체



일종의 환상이라 그런지 미디어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하렘물 참조. 예를 들어 카니발 판타즘의 경우 주인공이 히로인들과 그야말로 문어발 데이트 약속을 잡았는데 이것도 일부다처제라 하면 일부다처제. 살아남기 위해 별의별 꼼수를 동원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이후 발각되면서 말 그대로 작살이 났다.
빠삐용은 두 아내를 거느리고 그것도 자매덮밥을 했지만 따로 집을 지어준 게 아니라 옆에 동굴을 파고 살았다. csi 라스베가스에서도 일부다처제 부부사건을 다룰 때 한 집에서 지내고 그것도 한방에 침대 2개가 있는 예를 보여준다. <맹수와 사냥꾼>에서도 천막 하나 안에서 부인 3명을 거느리고 사는 몽골인이 등장한다.
스탠라 큐브릭의 고전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는 핵전쟁 이후 인구 복원을 위해 일처다부제를 실시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자 남자 정치인들이 좋아하는 것이 블랙코미디적인 연출로 나온다. 이의 영향인지 2010년대 일본 서브컬쳐계에서는 2010년대부터 일본의 초저출산률 및 인구 감소를 핑계로 근미래에 정부에서 일부다처제나 출산의무제를 도입한다는 설정을 꽤 자주 차용하고 있다. 물론 일처다부제는 없다(...)
기동전사 건담 철혈의 오펀스에서 나제 터빈이 전함급으로 실현한다.
은하영웅전설 6에서 립슈타트 전역 시나리오에서[40] 귀족들의 연합인 립슈타트 연맹이 멸망하게 되었을 때 브라운슈바이크 공작과 리텐하임 후작이 확률적으로 자기 딸을 라인하르트의 아내로 바칠 테니 목숨만 살려달라고 하는데, 둘 다 들어주면 라인하르트의 아내가 황녀로만 둘이 되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물론 원작 스토리에서는 그딴 거 없고 리텐하임 후작은 부하의 배신으로 저승길, 브라운슈바이크는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했지만 결국 음독자살했다. 은하제국 황제는 후궁을 합법적으로 수백 단위로 들일 수 있었다. 로엔그람 왕조를 연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은 정식 황후 외의 다른 여자에게는 눈길을 돌리지 않았지만.....
인간은 아니지만 몬스터 헌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비룡종 몬스터인 리오레우스리오레이아[41]의 경우 몬스터헌터 월드 이전 작품들의 무대가 되는 현대륙에서는 일부일처제로 살아가지만 월드의 무대가 되는 신대륙에서는 일부다처제로 살아간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수컷이 다수의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는 형태가 아닌 암컷인 리오레이아들이 수컷인 리오레우스의 본처 자리를 두고 치열하게 경쟁하여 승리한 개체가 리오레우스와 함께 고대수의 숲에서 살고 패배한 개체들은 개밋둑의 황야로 쫓겨난다고 한다. 이렇게 쫓겨난 개체들은 혼자서 육아를 부담[42]해야하기 때문에 고대수의 숲에 서식하는 개체에 비해 성격이 사납다고 한다.
[1] 이 문서의 이전 버전에서는 Polygamy라고 적혀있었다. 하지만 polygamy(한국어 위키백과에서는 복혼으로 옮겼다.)는 한 사람이 여러 배우자를 갖는 모든 결혼 형태의 총칭이므로 일부다처제(polygyny), 일처다부제(polyandry), 다부다처제(이건 때에 따라 영어 번역이 다르다), 집단혼(group marriage), 그리고 기존 배우자와 이혼하거나 사별해서 재혼을 통해서 새로운 배우자를 맞게 되는 것(serial monogamy)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2] 다만 이 경우는 돈 문제 보다는 이슬람식 일부다처제의 빡빡함 때문일 수도 있다. 그도 그럴게 이슬람식 일부다처제는 기본적으로 모든 아내들을 평등하게 대할 것을 명시하고 있고 이것을 지키는건 어렵다. 게다가 아내를 더 맞으려면 '''기존 아내들의 동의가 필요하다.''' 때문에 단순히 돈 때문이 아닐 수 있다.[3] 물론 대부분의 법들이 그렇지만, 그 법을 해석하는 인간들의 정신상태에 따라 법의 본래 취지는 훼손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지참금을 받은 신부가 친정에 그 돈을 증여하는 형식으로 빼앗기기도 한다. 어린 딸을 '''팔아서''' 지참금으로 가계빚을 해결하는 아프가니스탄의 사례를 보자! 그 밖에도 친정이 지참금으로 살아가는 건 뭐 이슬람이 아닌 인도 힌두교 및 동남아 불교 지역(기독교로 개종해도 이 인식은 여전하다고 한다)에서도 엄청 자주 있는 일이다.[4] 참고로 그에겐 사별한 부인과 예전에 이혼한 전(前) 부인이 있다. 그래서 현재의 아내의 숫자보다 결혼 횟수가 더 많다.[5] 군대로 밀어붙여서 협박하듯이 없애려다가 부족이 저항하면 양 측 피해가 클테니 아내들에게 자발적으로 뜻을 밝히자고 합의를 봤다. 르켕 왕은 400명으로 줄이겠다고 한발 물러났으나 결국 700명이 넘은 아내들이 이혼하고 싶다고 뜻을 밝혔고 결국 자이르군이 나서서 억지로 그녀들을 이혼시켰다. 르켕 왕은 분개했으나 그래도 10% 정도 남았다고 하는데 그것도 엄청나다. 참고로 60년대 당시 그의 나이는 70대였으며 이 쿠바 왕조라고 불리던 바쿠바족 지역 인구가 5만명이었는데 이 중 무려 2천여명이 그의 자식이었으니...[6] <미애와 루이의 버스 여행>이란 책자.[7] 그것도 당시 나이가 84살이었고, 마지막에 맞이한 아내는 19살이었다.[8] 예외는 이스라엘 혹은 친이스라엘 매국노가 간통 상대였을 경우.[9] 탈무드를 보면 유대교에 대해서 하레디같은 꼴통들만 생각하던 사람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을 줄 법한 진보적인 내용들이 꽤 많이 나오는데, 그 중 하나가 여성에 대한 부분이다. 가령, 부인의 동의 없는 성관계는 강간으로 간주한다던가, 전쟁 등으로 인해 성비가 심하게 불균등해진 상황에도 여성에게 피임을 허용한다던가 하는 내용이 그것이다.[10] 물론 이분도 아들처럼 한 사람만 바라보고 살겠다는 얘기를 했다.[스포일러] 중요한 살인 동기다.[11] 주인공 일행이 유타 주를 지나가고 있을 때 부부싸움 끝에 도망쳐 온 남편이 헐레벌떡 기차로 도망쳤고, 파스파르투가 '대체 아내가 몇 명이길래 그렇게 도망칠까' 싶어 물어보자 그 남자는 "고작 한 명이지만, 한 명도 지긋지긋했다"고 답한다.[12] 유교 경전에선 왕은 1처에 9첩, 대부(=벼슬아치 정도)는 1처 2첩, 선비는 1처 1첩. 즉 '''왕은 10명, 대부는 3명, 선비는 2명의 여자'''를 둘 수 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고려 때까지만 해도 정치적인 이유로 왕은 여러 명의 왕비를 둘 수 있었다.[13] 애초에 처첩제는 일부다처제가 아니라는 주장은, 일부다처제의 사전적 정의를 무시한 채 처라는 단어를 문자적으로만 해석해서 나온 결과물이다.[14] 근데 이원수는 이런 상황에서 아내 신사임당에게 갑이 되기는 커녕, 아내가 눈을 감는 날까지 내내 을의 위치에 있어야만 했다(...). 그 이유가 이원수의 장인이자, 신사임당의 친정아버지인 신명화강릉시 지역의 명문가 출신의 대부호였고, 그런 그가 차녀 신사임당을 너무나도 사랑한 탓에 딸이 사위에게 눌려 지내는 꼴은 못 보겠다면서 일부러 한미한 집안 출신의 무능력자 노총각과 결혼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원수는 아내 신사임당이 죽은 뒤에나 첩을 들일 수 있었고, 아내의 생전에는 셔터맨 생활이나 해야했다. 어찌나 그가 신사임당에게 눌려 살았는지, 아들인 이율곡은 아버지가 첩을 들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겠다면서 아버지를 쌩깐 일도 있었다(...). [15] 대표적인 경우가 조선 태조 이성계다. 고려 말 그는 중앙정계에 진출한 후 함경도의 본가에 아내 신의왕후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개성 유력자의 딸인 신덕왕후와 결혼해서 살았다.[16] 이종국 육군 준장이 첩과 짜고 전처의 딸을 '''굶겨 죽인''' '하늘집 유아학대사건' 이후 첩을 둔 군간부에 대대적인 숙청이 이뤄졌다.[17] 이 에피소드에서 경찰 역으로 특별출연한 사람이 80년대 후반에 활동한 듀오 그룹 '도시의 아이들'의 멤버 출신으로 후에 솔로로 독립해 가요 선녀와 나무꾼으로 잘 알려진 가수 김창남이다. 여담으로 김창남은 특별출연 외에 본인이 실제로 겪었던 한 불치병 소녀와의 인연에 얽힌 이야기를 제보하기도 했다.[18] 안습한 일화 하나만 소개하자면 남편이 나이가 들어 정력이 딸리게 되자 부인들이 경쟁적으로 부자이중탕과 십전대보탕을 구해 남편에게 먹였는데 하필 그 약들이 같이 먹으면 안 되는 약이라 고열에 시달려 며칠을 앓았고, 후유증으로 대머리(...)가 되었다.[19] 1990년 6월 25일이었는데, 심지어 일요일이었다.[20] 이렇다보니 작업 시간이 거의 한밤중까지 계속되는 바람에, 인부들이 대체 이게 뭐하자는 거냐며 볼멘소리를 했을 정도였다.[21] 노홍철은 "니가 이겼다"며 말문을 닫았고, 유재석은 "이걸 어떻게 얘기를 해야 되냐..."며 난감해 했으며 박명수는 "그때는 그게 유행이었어. 암암리에 그런 게 인정이 됐어"라고 수습했다. 길이 1978년생이므로 길의 할아버지 연배면 1910년대생 정도로 일제강점기 시대에 청년기를 보냈을 것이며, 정부 수립(1948년)은 고사하고 해방(1945년)되기도 전에 결혼했을 테니 축첩이 사회적으로 그렇게 흠 잡힐 일까지는 아니었다고 할 수도 있다.[22] 여기에 대한 박명수의 대답은 "'''용돈 많이 주는 할머니가 짱이야'''"[23] 예를 들자면, 남편이 장거리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의무적으로 최고령 아내의 방에서 묵게 하는 관습 등이 있다. 이렇게 해서라도 아내들 간의 분쟁과 알력을 방지하려는 것.[24] 물론 일부다처제를 최대한 막기 위해서 만든 계율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과거의 사람들조차도 일부다처제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다.[25] 정확하게 말하면 "너희들은 결코 많은 아내들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이다. 이므란(가족)장을 읽어보자. 한마디로 일부다처제 하지 말라는 소리다.[26] 아내의 집안이 권력자거나 부유층이라면 더더욱 어려워진다.[27] 일부일처제 국가가 일부다처제를 실행하는 순간, 일처다부제도 자연스럽게 허용될 수밖에 없다. 물론 남편이 늘어난다고 한 여성이 낳을 수 있는 아이의 수가 비례해서 느는게 아닌지라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시행된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일부다처제와는 달리 일처다부제가 대대적으로 시행된 예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28] 전근대기에는 전쟁을 비롯해 들짐승을 사냥, 퇴치하는 일이나 위험한 노동 등도 거의 남성들이 했다보니 남성들의 사망률이 여성들의 사망률보다 압도적으로 높을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중세까지도 잔다르크같이 굉장히 특이한 사례가 아닌 이상 여군은 존재하기 힘들었고 그 결과 전쟁터에서 남자들이 기본 10,000 단위로 죽어나갔다. 이에 일부다처제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29] 약 104~106:100 정도 된다. 물론 남자들은 많이 태어나는 만큼 또 쉽게 죽어나가는 편이다. 하지만 2007년도 경에 나온 외국의 조사 프로그램에 따르면, 전세계적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4천만명 정도 더 많다고 한다.[30] 역으로 여성들의 권력이나 경제적 자립도가 높을수록 여성들은 일부일처나 아예 다부일처제나 독신을 더 선호하는 경향성이 높아진다. 남편의 권력과 재력에 의존할 이유가 상대적으로 낮아지기 때문.[31] 보통 일부다처제가 가능한 남성들의 경우 재력이나 권력, 혹은 둘 다가 갖춰진 '''기득권층'''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이를 갖추지 못한 비기득권층 남성들은 자연히 결혼 시장에서 도태된다. 여성들의 경우에도 좀더 잘 사는 삶을 선호할 경우 아내가 여럿임을 감안하고도 경제력이 보장되어보이는 일부다처제 가정에 들어가길 선호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30][32] 다만 이들나라에서도 지참금을 아낄려는 목적으로 외국여자랑 결혼하는것은 자국 노처녀의 증가를 불러일으킬수있다는 이유로 제한 하고있어서 무조건 쉬운일은 아니기는하다.[33] 경찰에게 가는 것보단 이게 훨씬 싸게 먹히기 때문. 물론 종업원을 확실하게 매장시킬 수 있지만 대신 경찰이 올 것이고, 숙박시설이 영업금지를 한동안 당할 수도 있다. 당연히 피해가 훨씬 크니까 하루 식비 안 받고, 종업원도 적당히 두들겨 준 뒤 그냥 용서하는 게 싸게 먹히는 셈. 사실 종업원 입장에서도 성범죄자로 빨간줄 긋고 신상 공개되는 것보다 그냥 처맞고 넘어가는 것이 낫다. 종종 해외여행 블로그나 책자에서도 이런 숙박시설에서 벌어진 사건사고로 경찰에게 신고하면 며칠에서 길면 1달까지 영업정지당한 경우가 간혹 나오는데, 사장에게는 엄청난 피해가 되는 셈이다.[34] 해외여행 기행책자라든지 블로그에서 꽤 종종 보인다. 외국 여성에게 성추행을 저지르다가 걸렸는데 경찰이 정말 죽어라 구타한다. 피해자인 외국 여성이나 지인들이 처음에는 잘한다 하다가 나중에는 정말로 때려죽이는 분위기에 기겁하고 됐다고 말리는 일까지 있다. 한 한국인 여행자가 인도에서 목격했는데 피투성이로 기절한 가해자를 아예 죽이려는지 계속 구타하여 피해자인 백인여성이나 그 친구들이 경찰들을 잡고 필사적으로 이제 됐다며 그만하라고 말렸다고 한다. 이 여행자는 누가 봐도 저 성추행범, 몇달 병원 가던지 후유증이 장난아니라고 후기로 썼다...[35] 홍길동이 자신의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던 건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안 팔았기 때문이다.[36] 파라과이와 사정이 다르고 일부다처제랑 관계없으나. 근대 포르투갈이 인구가 크게 줄자 비슷한 일이 있었다. 외노자나 심지어 아프리카에서 팔려온 흑인 노예까지 해방시켜서 포르투갈 민간인으로 살게하여 가정을 이뤄 인구를 늘리게 했던 일.[37] 아이러니 하게도 3국 동맹 당사자나 그와 주변국들은 파라과이를 내버려뒀다. 남자 다죽고 여자만 남은 동네 쳐들어가봐야 얻을것도 없고 오히려 "여자상대로 님 뭐하는짓?"소리나 들을게 뻔하니. [38] 무슬림인지 그리스도교 신자인지는 불명이지만 아내 수를 보면 둘 다 아닐 가능성이 크다.[39] 이슬람 샤리아에서도 고의살인이 아니라 사고 등으로 인한 사망, 즉 폭행치사 같은 경우는 사형에 처하지 않음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대신 폭행치사로 구속된 뒤 피해자가 용서하거나 법원이 판결한 바에 따라 배상금을 지급할 때까지 갇혀 있어야 한다.[40] 은하제국 황제였던 프리드리히 4세가 후계자 없이 죽었기 때문에 황위 계승과 관련된 내전이 벌어졌다. 이때 황위를 계승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셋이었는데, 은하제국 우주함대 사령장관인 라인하르트를 위시한 군부는 오래전 암살당한 황태자의 외아들 에르빈 요제프 2세를 지지하며, 귀족세력은 두 패로 나뉘어서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딸이자 황제의 외손녀인 중 하나인 엘리자베트 폰 브라운슈바이크의 계승을 지지하거나, 리텐하임 후작의 딸이자 죽은 황제의 또다른 외손녀인 자비네 폰 리텐하임의 즉위를 원하는 세력으로 갈려 벌어진 내전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귀족측의 완패 및 라인하르트의 정권 장악의 기반이 된다.[41] 둘은 같은 종으로 리오레우스가 수컷, 리오레이아가 암컷이다. 꿩을 수컷을 장끼, 암컷을 까투리라 부르는 것과 비슷한 사례라고 보면 된다.[42] 리오레우스와 리오레이아는 기본적으로 새끼를 공동육아하는 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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