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 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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뭄타즈 마할과 샤 자한.
1. 개요
2. 상세
3. 기타


1. 개요


무굴 제국의 5대 황제.
생애 : 1592년 1월 5일 ~ 1666년 1월 22일(만 74세)
재위기간 : 1628년 1월 19일 ~ 1658년 7월 31일
본명은 쿠람 시하브 웃 딘 무함마드이며 샤 자한이라는 이름은 칭호로 페르시아어로 '세계의 왕'이란 뜻이다. 부왕의 이름인 자한기르는 '세계의 정복자'. 북인도의 제국인데 페르시아어를 차용한 이유는 무굴 제국이, 페르시아어와 차가타이어가 공용어였던 티무르 제국의 계승 왕조이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업적들을 능가하는 , '타지마할'을 건축한 명성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2. 상세


원래 자한기르의 3번째 아들로 선황 자한기르가 노쇠하자 다른 경쟁자들을 제압하고 제위에 올랐으며, 제국의 통치 구조를 재편하고 데칸 지방에 원정하고 1635~36년 사이에 골콘다 왕국과 비자푸르 왕국이 제국에 복속하여 조공을 바치도록 만들었다.
1646~49년 사이에 아프가니스탄사마르칸트를 손에 넣기 위한 원정을 단행하였는데, 신통한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되려 이 전투에서 고전하고 아프가니스탄 불패신화에 기여하고 말았다.
30년의 통치 끝에 1657년에 그가 노쇠하여 병석에 눕게 되자 네 아들이 서로 왕위쟁탈전을 벌여, 결국 아우랑제브가 승리를 거두어 그의 형제들을 처형하고 이듬해 아버지를 유폐시키고 즉위한다. 아우랑제브는 아버지를 유폐시키고 나서 매우 박대했는데, 샤 자한이 아우랑제브에게 보낸 편지를 봐도 "먹을 건 짜고 가둬둔 별궁은 난방도 안 돼 춥구나, 이제 황제가 아니라고 해도 이렇게 애비를 박대하느냐?"라고 원망할 정도였다. 그나마 곁에서 큰딸 자하나라 공주가 돌봐줘서 겨우 생활할 수 있었다. 결국 샤 자한은 유폐된 지 8년 뒤인 1666년에 자하나라의 곁에서 코란의 구절을 암송하면서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의 나이 향년 74세. 사후 샤 자한의 장례는 간소하게 치루어진다.
아내 뭄타즈 마할과의 로맨스가 매우 유명하다. 원래 샤 자한과 뭄타즈 마할은 결혼하기 어려운 사이였다. 샤 자한의 정적인 계모 누르 자한이 뭄타즈 마할의 이모였기 때문이다. 가히 인도로미오와 줄리엣인 셈. 샤 자한은 그녀와의 결혼이 어렵자 페르시아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이기도 했으나, 결국 뭄타즈 마할을 잊지 못하고 그녀와 결혼했다. 그러나 1631년 뭄타즈 마할이 14번째 아이를 낳다가 사망하자, 크게 상심하여 아내의 묘당을 짓기 시작했다.[1] 수도 아그라의 야무나 강가의 택지를 골라 건축을 시작해 1648년 완공하였는데, 이 묘당의 건축 사업에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 제국의 재정을 압박했다. 보다 못한 신하들이 묘당 건축을 중지해 달라고 간언하는데도 무시하고 강행해 버렸다.
그 결과 재정이 파탄 난 것은 당연지사. '''그가 남긴 빚 때문에 아우랑제브는 그걸 갚느라''' 인두세를 부활시켜야 했고 [2], 이는 결국 힌두교도와 시크교도로 대표되는 비이슬람 교도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불씨가 되었다고(...) 이전에 서술되었지만 아들인 아우랑제브가 벌인 짓은 더 엄청난 삽질이었다. 바로 아우랑제브 당시 연세입은 약 3억 900만 루피에 달했고 그가 죽을 당시 아그라의 중앙 은행에는 2억 4000만 루피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타지마할을 지을 때 들어간 총 비용이 3200만 루피였다.
오히려 아우랑제브가 인두세를 부활한 것은 제위하고 무려 21년이나 지나서다. 샤 자한보단 아우랑제브가 시크교나 힌두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하고[3] 시크교 지도자인 구루를 생매장하는 짓을 벌여 분노한 이들 신도들의 엄청난 반란을 당해 이들과 기나긴 전쟁을 벌이면서 엄청난 국고 낭비가 이어진 것이다. 샤 자한이 벌인 것 이상으로 아들이 낭비하고 기나긴 내전에 휩쓸려 결국 이러한 애비 아우랑제브에게 똑같이 아들인 악바르가 '''할아버지보다 더한 재정 파탄자인 암군을 처벌한다는 명목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샤 자한도 타지마할 건축 이후 암군으로 나라 말아먹은 짓을 벌인 것은 맞다. 사실 시크교 탄압은 아우랑제브 이전에 샤 자한도 벌였고 샤 자한의 아버지인 자한기르도 벌이던 일이었다.

3. 기타


1961년 아서 C. 클라크가 그레이트베이시스리프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하다가 침몰선을 보고 거기에서 은주화를 발견하는데, 이 배가 샤 자한의 전설의 보물선이라는 소문이 퍼진다. 이 배는 타지마할을 장식하기 위한 수많은 보석들을 옮기다가 침몰해렸다고 사람들이 추측했다. 그의 친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해군이 샤 자한의 보물선을 찾았지만 보석에 손을 대지 않았다며 이 배가 샤 자한의 보물선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후 3년동안 발굴한 후 1964년에 자신이 발견한 배가 무굴 제국의 배가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배 안에는 100개의 주화만 있었지 보석이나 금괴는 없었고, 자신이 발견한 배가 샤 자한이 아니고 그의 아들인 아우랑제브의 배였다고 주장했다. 아서 C. 클라크는 뒤에 그레이프리트의 보물이라는 책을 출간해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그가 샤 자한의 보물을 빼돌려 거짓말을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부분은 2015년 9월 20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고려의 국왕인 공민왕과 비슷한 점이 여럿 있다. 집권 초창기에는 그럭저럭 국가를 잘 다스린 군주였으나 아내[4]를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엔 폐인이 되다시피 해서 암군이 되었다가 결국 한 사람은 축출, 폐위되어 쓸쓸한 최후를 맞았고, 또 한 사람은 암살당했다. 게다가 본인들의 치세가 끝난 이후에 왕조가 몰락하기 시작했다는 공통점 등도 있다. 또한, 지나칠 정도로 아내에 대한 추모 사업에 열중해서 이 자체로도 국력을 약화시킨 점도 공통점이다. 차이점이라면 샤 자한과 뭄타즈 마할은 많은 자녀들을 두었지만,[5]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는 어떤 자식도 두지 못했다.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의 등장인물 자한의 이름의 모티브가 된 걸로 추정된다.

[1] 뭄타즈 사후 샤 자한이 황후를 맞이하지 않았기에 황후의 역할은 샤 자한이 총애하는 큰딸 자하나라 베굼 공주가 대신했다.[2] 다만 후술되겠지만 인두세 부활은 이슬람 광신도인 아우랑제브가 인도 대륙의 급속한 이슬람화를 목적으로 한 것으로 봐야한다.[3] 1668년에서 1669년 사이에 아우랑제브는 제국법을 이슬람 율법에 가까이 바꾸고 힌두교 사원 건축 금지 및 음악, 춤, 음주를 규제하는 법을 제정한다. 그리고 악바르의 개혁정치 중 하나인 황제가 매일 군중에게 모습을 보이는 제도까지 폐지하면서 더욱 노골적인 이슬람화를 강요했다.[4] 샤 자한은 뭄타즈 마할,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5] 아버지 샤 자한을 유폐하고 황제로 즉위하는 패륜을 저지른 아우랑제브도 뭄타즈 마할의 소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