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굴 제국

 



'''무굴 제국'''
'''شاهان گورکانی'''
(페르시아어)
''Shāhān-e Gūrkānī''
'''مغلیہ سلطنت''' (우르두어)
''Mug̱liyah Salṭanat''
'''मुग़ल साम्राज्य''' (힌디어)
''Muġal Sāmrājya''
[image]
[image]
국기
국장
[image]
1526년 ~ 1857년
위치
남부 일부를 제외한 인도 반도 전체,
페르시아 동부
면적
4,000,000㎢ (1690)
수도
아그라 (1526–1540, 1555–1571, 1598–1648)
파테푸르 시크리[1] (1571–1585)
라호르 (1586–1598)
델리 (1648–1857)
정치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파디샤
주요 황제
바부르
악바르
샤 자한
아우랑제브
언어
페르시아어(궁정어, 공용어)
차가타이어[2]
아랍어(종교어)
힌두스탄어 외 다수
종족
인도인
(차가타이 튀르크인, 비하르인, 펀자브인,
벵골인, 구자라트인, 라자스탄인, 마라티인
아삼인 및 드라비다 여러 종족 등)[3]
인구
158,400,000명(1700년 추정치)
종교
수니파(국교)[4], 힌두교, 시크교
주요사건
1526년 건국
1632–1653년 타지마할 건립
1857년 세포이 항쟁
1858년 멸망
통화
루피
성립 이전
티무르 제국, 로디 왕조, 데칸 술탄국
메와르 왕조[5], 벵갈 술탄국[6]
멸망 이후
영국령 인도
1. 개요
2. 역대 황제
3. 역사
3.1. 초기
3.2. 전성기
3.2.2. 자한기르와 샤 자한
3.3. 정체기 : 아우랑제브[7]
3.4. 쇠퇴 멸망기
4. 문화

  • 템플릿 이미지 출처[8]
언어별 명칭
페르시아어
شاهان گورکانی (Shāhān-e Gūrkānī)
/گورکانیان (Gūrkāniyān) / هندوستان (Hendustân)
우르두어
مغلیہ سلطنت (Mug̱liyah Salṭanat) / ہندوستان (Hindustān)
힌디어
'मुग़ल साम्राज्य (Muġal Sāmrājya) / भारत (Bhārat)
영어
Mughal Empire / India
한자
莫臥爾 / 應帝亞[9]
[clearfix]

1. 개요


Mughal Empire[10](1526~1857)
1857년 영국에 의해 멸망당할 때까지 인도에 존재하던 이슬람 왕조.
주요 영토는 인도 지역이나 발원지는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동부(안디잔, 페르가나) 및 아프가니스탄이며, 티무르 제국의 잔존 세력이 세운 국가이다. 인도 영토는 이들이 나중에 정복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초창기에는 고토 회복 북벌전을 시도하기도 했다. 즉 같은 시대의 오스만 제국이나 청나라처럼 지배층은 소수의 외부 세력인 나라. 그 때문에 몇몇 서적에서는 이를 두고 제2차 티무르 제국이란 표현을 쓰기도 한다.
왕조의 정식 명칭은 티무르 왕조와 같은 구르카니 혹은 구르칸으로 어원은 부마를 뜻하는 몽골어 귀르겐(güregen)에서 유래했다. 이유는 무굴 제국의 전신인 티무르 제국이 자신들의 정통성을 몽골 제국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티무르의 5대손인 바부르 대에 와서는 몽골 제국이란 이미 한 세기 이상 과거의 이야기였기에 몽골 제국과의 연관성을 찾는 움직임은 줄고, 그 대신 몽골 제국에 못지않은 대제국을 세운 티무르의 후계임을 강조하였으며, 영토의 상당 부분이 인도였기에 자국을 힌두스탄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강역으로는 데칸 고원을 넘긴 했지만 남인도의 완전한 복속에는 실패하고, 북인도와 중부 인도를 차지하는 데에 그쳤다. 또한 그마저도 상대적으로 소수인 무슬림들이 다수의 비 무슬림[11]들을 지배하는 방식이였기에 존립 내내 각처의 크고 작은 반란이 일어났다.
동시대에 명나라청나라가 무굴 제국의 북동쪽으로 영토를 뻗었는데, 만약 두 국가가 붙었다면 그야말로 '''아시아 전쟁사 중 세기의 대결'''이었겠지만, 그 영토 사이에 거대한 히말라야 산맥이 사이에 있어 별다른 영토분쟁 없이 그냥 무역만 하고 지냈다.[12] 전기 무굴의 전성기였던 악바르 1세-자한기르-샤 자한-아우랑제브 시대와 청의 전성기였던 강희제-옹정제-건륭제 시대의 차이가 있어서 두 제국 모두 전성기일 때 전쟁할 수는 없었다.[13] 무굴 제국이 한창 전성기일 때는 명나라가 쇠해가는 시절이었고 청나라가 흥하던 때에는 무굴 제국이 골골거렸으니. 사실 인류 역사상 중국인도가 처음으로 직접적으로 맞붙었던 때는 바로 현대의 중국-인도 국경분쟁이다.
무굴 제국은 몽골 제국과의 혈연성을 스스로 자처하고 있었고 실제로 튀르크-몽골 계열의 조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직접적인 연계성은 떨어지는 편이다. 다만 시조 바부르의 5대조인 티무르는 차가타이 계통이었으며, 티무르 제국몽골 제국의 정치적 전통 아래에 있었다. 실제로 티무르 제국의 명목상 군주 ''의 칭호를 취하고 있었고, 여타 다른 몽골 계승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칸'은 오로지 몽골의 황금씨족(칭기즈 칸의 직계 남자 후손들)만이 될 수 있었다. 그런 까닭에 '티무르' 제국에서 티무르는 '칸'이 되지 못했으며 티무르의 정치적 지위와 그 정당성은 칭기스 일족(황금씨족)의 부마(사위, güregen)라는 점에서만 인정받을 수 있었다. 다만 티무르는 이슬람의 지도자를 뜻하는 '아미르(amir)'로 불리며, 사실상의 군주로 군림했다.

2. 역대 황제




3. 역사



3.1. 초기


첫번째 황제 바부르[14]티무르의 자손이자[15] 모계로 칭기즈 칸황금씨족 혈통[16] 을 잇는 인물로 본래 페르가나 지방을 지배하던 군주였는데, 티무르 왕조의 내전과 우즈베크족의 침입으로 인해 중앙아시아에서 모든 것을 잃고 도망치다가 1504년, 카불을 점령했다. 바부르는 이후에도 중앙아시아, 특히 사마르칸트에 대한 재진출을 시도했으나, 우즈베크인들에게 패배해 번번히 실패했다. 이후 바부르는 인도로 시선을 돌렸는데, 바부르는 과거 티무르가 인도 델리 근처까지 점령했었고[17] 자신은 티무르의 후손이므로 자신이 인도를 지배해야 할 정당한 군주라고 주장하며 인도를 침공했다. 결국 1526년, 파니파트 전투에서 로디 왕조에 맞서 대승을 거두고 지배권을 장악했다. 로디 왕조는 힌두교도 주민들을 잔학무도하게 박해했기 때문에 힌두교도 주민들은 새로운 정복자들을 환영하였고, 바부르는 금요 설교를 '힌두스탄의 황제'로서 진행하는 데 성공했다. 이 때 즈음하여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크인들은 정치적 혼란기를 맞이했는데, 바부르는 이를 이용하기 위해 후마윤과 군대를 파견했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4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이에도 불구하고 무굴제국의 상황은 열악했다. 심지어 바부르의 후계자인 후마윤(1530~1556)은 재위 9년 만에 아프가니스탄의 군벌에게 패배해 이웃한 페르시아로 거점을 옮겨야 할 정도였다(1540). 후마윤은 사파비 왕조의 힘을 빌려 15년 만에 겨우겨우 인도로 돌아왔으나,[18] 1년을 다 못 채우고 사고[19]로 죽었다. 안습.

3.2. 전성기


[image]
바부르 사망 시점(1525)의 강역(남색 실선)
악바르 1세 사망 시점(1605)의 강역(노란색)
아우랑제브 사망 시점(1707)의 강역(주황색)

3.2.1. '''악바르 1세''' 시기


1세 (1542~1605, 재위 1556~1605). 흔히 악바르 대제라고 부른다.
하지만 무굴은 바로 이 대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열세 살에 즉위해 근 50년간을 재위한 3대 황제악바르 대제명군이었기 때문이다.[20] 그는 피지배 민족에 대해 종교적 관용을 보였다.
그 종교적 관용이 어느 정도였냐면 본인은 물론 지배계층 및, 황족들이 이슬람교를 믿고 있음에도 이슬람교 전통의 지즈야, 곧 타 종교인들에게만 거둬들이는 인두세도 폐지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하고, 본인 자신도 힌두교인인 라지푸트 출신의 공주[21]와 결혼했으며, 힌두교계 학자와 신하들도 이슬람계와 아무 차별없이 등용하고 신임했다.[22]
그리고 그때까지 땅 없이 떠돌아다니기 일쑤던 시크교도에게도 힘을 실어주어 안정된 정착생활을 할 수 있게도 만들어주었다. 1580년대 이래 악바르의 지배에 놓인 시점 이래 시크교가 자리잡은 펀자브 지방은 지금까지도 가장 큰 시크교의 성역이 되었다.
물론, 이러한 조치를 모두가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무슬림들은 발끈했지만 황제는 '''그딴 거 신경 안 썼다.''' 1580년엔 동생인 무함마드 하킴을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악바르도 고생을 좀 했지만 이 반란 진압 이후로 악바르는 확고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고 완벽하게 자신의 뜻대로 국가를 통치하게 된다.
악바르는 치세 중 단순히 종교적 관용만을 베푼 것이 아니라 종교적 토론 또한 즐겼다. 아예 궐내에서 악바르가 지켜보는 가운데 각 종교 대표 논객들이 나와서 자신들의 논리대로 상대를 비난하거나, 동조하거나 등등의 견해 차를 보이며 치열한 입싸움을 벌였고, 악바르는 그 논쟁을 지켜보길 즐거워했다. 그야말로 관대한 키배 매니아.
이 종교 논쟁 중의 일화 2가지만 소개하자면..
1.한 시크교도는 악바르에게 토론 중 이런 진언을 올린 바가 있었다.

"출생도 신분도 아무 소용 없습니다. 행동이 사람을 만들고 사람을 허뭅니다. 종교를 가지고 사람을 우려먹는 건 신성모독입니다. 연민이나 자기비판에 의해서가 아니라 물로 죄를 씻어낸다든가 여자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을 열등한 존재라고 비하하는 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2. 델리에서 악바르 황제와 그의 종교 토론을 본 한 포르투갈신부는 이런 글을 썼다.

"무신론자가 흔히 저지르는 잘못을 그 왕도 범하고 있다. 이성신앙의 밑에다 두기를 한사코 거부하고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서는 문제를 불완전한 이성으로 처리하면서 자기만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여담이고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사실 악바르는 심지어 자신이 직접 종파를 창시하기도 했다.[23] 처음부터 끝까지 악바르 자신만을 섬기는 종교라 묻혔지만(...)[24] [25]
여하튼 이 악바르 치세를 기점으로 행정적 체계[26] 또한 갖춤으로써 비로소 안정기를 지나 팽창기에 들어선다. 학자들은 악바르의 치세를 기점으로 하여 인도의 군벌 국가가 제국으로 탈바꿈했다고 평가한다. 현재의 방글라데시인 벵골 지역이 인도에 귀속된 것도 바로 이 시기(1576년).
그의 시기 무굴 제국은 강대국으로 급부상했으며, 이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임진왜란이 터지고 명나라의 힘이 기울어가던 시점이었다. 그 당시 무굴 제국과 명 제국을 비교해보는 것도 흥밋거리 중 하나. [27]
서양에서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가 악바르의 동시대였는데, 엘리자베스 1세 이후 영국에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문명을 날리고 있었다면, 악바르 때 인도에서는 툴시다스라는 시성이 활동하고 있었다. [28]
오스만 제국은 이 무렵 쉴레이만 대제 치하에서 역시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악바르와 쉴레이만은 서로 편지를 주고 받거나 사절을 보내는 등의 교류를 하였으며, 악바르 시대에 인도에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 포르투갈에 맞서는 문제에 대해 함께 논의하기도 했다. 자기 직계 조상이 오스만에게 한짓을 생각하면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다.

3.2.2. 자한기르와 샤 자한


[image]
악바르 대제의 뒤를 이은 4대 자한기르 역시 수완가였다. 자한기르는 무굴 제국의 황제들 중 처음으로 인도 귀족의 어머니를 두었고, 인도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티무르의 후손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인식하고 있었다.[29] 하지만 자한기르의 시대에 시크교와 무굴 제국 정부의 사이가 나빠졌는데 자한기르가 시크교의 구루(영적 지도자)인 아르준이 장남의 반란을 도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한기르는 아르준을 처형했다. 아르준이 반란에 가담했냐는 사실의 진위 여부를 떠나서 이는 시크교와의 우호관계에 상당히 악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시크교와의 갈등은 종교적이라기보다도 정치적인 문제였고, 자한기르 본인은 아버지처럼 타 종교에 우호적인 편이어서 관용 정책을 지속해나갔다.
압둘 아지즈의 연구에 의하면 자한기르 때 국고에 쌓인 금이 7톤, 은이 1116톤, 다이아몬드가 80파운드(500만캐럿 이상), 루비와 에메랄드가 각 100파운드(각 650만캐럿 이상), 진주가 600파운드, 그 외 각종 보석이 무진장했다고 하니 그 당시 무굴 제국이 굉장히 부유한 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종종 무굴 제국의 부유함은 프랑스와 페르시아를 합한 것보다 더 굉장하다고 불릴 정도였다고 한다.
[image] [image]
샤 자한(1592~1666, 왼쪽)과 뭄타즈 마할(오른쪽)
셋째 아들로 계승한 5대 샤 자한(샤 자한 1세, 본명 샤하붓딘 무함마드 후람, 재위 1627~1658)도 '세계의 왕'이란 칭호를 받을만큼 나름대로 훌륭한 군주였다. 관용 정책을 유지하고 영토 확장을 계속해 무굴 제국을 당대 최대의 제국으로 넓힌 것도 업적. # 샤 자한 시대의 강역, 지도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칸다하르와 카불도 당시 무굴 제국의 영역이었다. 칸다하르는 끝내 샤자한 후반기에 페르시아에게 뺐기고 말지만... 제국의 당대 영토는 300만 제곱킬로미터에 이를 정도라고 한다. 남쪽의 골콘다와 비자푸르도 샤자한에 굴복하여 조공을 바치는 신세였다. 이 두 국가는 이후 아우랑제브가 치열한 전쟁 끝에 합병해버린다.
당시 무굴 제국의 보병은 90만 명이 넘었고, 기병은 18만 5천 명에 이르렀으며, 1년 세입은 악바르 시절의 2배가 넘을 정도였다. 악바르 시절의 1년 세입이 영국 파운드화로 1750만 파운드 정도였는데, 샤자한 시절의 1년 세입은 3770만 파운드 이상이었다고 한다. 알람기르의 시절에는 3860만 파운드 이상이다!'''
하지만 무지막지한 '''애처가'''였던지라 셋째 황후 뭄타즈 마할이 14번째 아이를 낳다가 죽자, 국력을 소진시켜 가면서 그 유명한 '''무덤 타지마할'''을 지어버렸다.[30] 지금이야 인도의 관광수입을 높이는 세계유산으로 침이 마르도록 찬양을 받지만 당시 건설을 위해 동원되고 희생당한 백성들 입장에선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샤자한 당시 연 세입은 3억 180만 루피 정도였는데, 타지마할 공사에 22년 동안 총 3200만 루피가 소요되었다. 연간 약 145만 루피 정도가 들어간 셈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딴 수도 샤 자한 나바드를 델리에 짓고, 붉은 궁성에 디와니앰과 디와니하스를 지었으며, 카슈미르에 777개의 정원을 짓는다든지 하는 온갖 계획을 동시에 진행시켰다. 참고로 붉은 궁성 공사에는 총 6000만 루피가 소요되었다.

3.3. 정체기 : 아우랑제브[31]


[image]
결국 샤 자한은 타지마할 축조로 인해 민심을 잃은 것을 빌미로 마흔 살의 아들인 아우랑제브쿠데타에 의해 축출, 유폐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아우랑제브 역시 뭄타즈 마할의 셋째 아들이었지만 사실 어머니 장례식한다고 백성들 등골 빼먹는 격이니 나름대로 쿠데타의 명분은 있었다. 이렇게 6대 황제가 된 아우랑제브 황제(1618~1707, 재위 1659~1707)는 꽤나 야심만만하고 호전적인 군주였던지라 즉위 직후 바로 정복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 때 계획했던 아그라에서 델리로의 천도를 완수했으며, 그 결과 인도 역사상 최대 판도의 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명목상으로는 스리랑카를 제외한 남인도까지 거의 다 밀어버린 것으로 판단할 정도. "무굴의 영역은 카불에서 코모린 (지금의 타밀나두 주 카니아쿠마리)까지"라는 이야기가 종종 불릴 정도였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영토 면적에 국한된 것이었다. 그 반대로 사회, 문화,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제국은 퇴보를 걷기 시작했는데 이유는 재위 20년을 넘기면서 이슬람였던 그가 힌두교도, 시크교도 국민들에게 철저한 불관용 정책을 실시했기 때문. 그러나 그는 오로지 영토를 제일 크게 넓혔다는 이유만으로 무굴 제국 황제들 중 제일 유명해져 버렸다.[32] 긴 재위(48년) 내내 팽창정책을 구사했으나 내치에서 퇴보를 시작했다는 점에서는 그가 죽고 난 직후 태어난 청나라건륭제나 동시대 프랑스루이 14세와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다.
아우랑제브 시대의 온갖 퇴보는 결국 제국의 붕괴로 이어졌다. 특히 아우랑제브의 강압에 반발한 힌두교도들이 결성한 마라타 동맹의 반란으로 제국은 분열을 맞았으며, 시크교 역시 탄압당하며 그들의 구루가 아우랑제브에게 처형당한 이래 무굴 제국에 반발했다. 게다가 아우랑제브가 분노해 남부 고원의 마라타 게릴라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자, 이번엔 시크교도들이 많은 북부가 그들의 반란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더구나 아우랑제브는 선대 황제들과 달리 후사 문제를 제대로 수습해놓지 못한 채 데칸 고원의 전쟁터에서 죽었기 때문에 그의 사후 국정 역시 극심한 혼란 국면에 빠져들었다.[33] 결국 잘했던 20년보다 말아먹은 30년이 더 부각되는 안습한 인물.
[image]
바하두르 샤 1세 (1643 ~ 1712, 재위 1707 ~ 1712)[34]
아우랑제브가 후사를 정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사망한 이후 그의 세 명의 아들들이 서로 황위를 차지하려 다투다가 그 중에서 둘째 아들인 무아잠이 형제들을 몰아내고 바하두르 샤 1세(Bahadur shah I)로 즉위한다. 바하두르 샤 1세는 아버지가 만든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많은 애를 썼다. 그는 마라타 동맹과 라지푸트의 저항을 잠시 잠재우고 시크교도들의 공격을 막아내는 등 무굴 제국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많은 공헌을 했다. 또한 그는 아버지 아우랑제브와 달리 힌두 귀족들과 라자들에게 친화적인 정책을 취하여 이교도들의 무굴 제국 교화에 많은 신경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바하두르 샤 1세는 즉위할 때부터 이미 나이가 63세의 고령이었기에 제국을 오랫동안 통치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결국 재위 5년 만에 사망한다.

3.4. 쇠퇴 멸망기


바하두르 샤 1세가 사망한 뒤 황위를 둘러싼 암투는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고 제국의 쇠락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끝없는 분쟁 속에서 황제들이 잇따라 교체되면서 제국은 황제권이 약화되고 궁정 귀족들의 세력이 날로 커져만 간다. 이러한 황위 분쟁은 1719년 13대 황제 무함마드 샤가 즉위하면서 어느 정도 안정화가 된다. 하지만 이미 무굴 제국이 쇠퇴하는 것은 막을 수 없는 흐름이었다. 제국의 개혁파 재상(니잠 울물크)이었던 튀르크계 데칸 총독 카마루딘 칸이 무굴 궁정의 타락상에 실망하고, 개혁을 포기한 채로 영지 하이데라바드로 내려가 아사프 자흐 1세로 독립한 것(1724)[35]을 시작으로, 아와드 나와브 사아다트 알리 칸(1724), 벵골 나와브 슈자웃딘 무함마드 칸(1727) 등 독자 세력을 갖춘 지방 총독들에 의해 제국의 주요 지역이 사실상 독립국으로 변한 것이다.[36] 특히 제국 재정의 절반을 담당하던 벵골, 군사적으로 강성한 하이데라바드 등이 독립함으로써 무굴 제국은 급격히 약화되어 갔다.
마라타 동맹과의 오랜 대립에서는 차츰 수세에 몰려, 1737년에는 마라타에 델리를 공격받고 말와 지역을 뺏기게 된다. 거기다 1739년에는 페르시아 아프샤르 왕조의 전투 기계 나디르 샤가 델리 근처에서 무함마드 샤의 무굴 제국군을 대파하고, 델리로 입성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 약탈하여, 무굴 제국은 실질적으로는 한 번 망했다. 실질적인 행정력이 미치는 지역이 수도인 델리밖에 없는, 그야말로 말기의 동주신성로마제국, 후삼국시대 후기의 신라 같은 처지가 되어, 과거 무굴 산하의 일개 지역이었던 아와드 세력이나 심지어 과거의 적이었던 마라타 동맹[37]에 빌붙어 작위와 징세권을 바치고 보호받는 신세로 전락한다. 인도 각지는 마라타 동맹 등 힌두계 왕국들과 이슬람계 술탄국인 마이소르 왕국[38], 하이데라바드 왕국 등이 나누어 접수한다. 그러자 이 틈을 노린 영국은 1757년의 플라시 전투(7년 전쟁의 인도 전역)에서 벵골-프랑스 연합군에 승리한 이래 동인도 회사를 내세워 소왕국들을 회유·정복하면서 인도를 야금야금 먹어치웠다.[39] 마라타 동맹마이소르 왕국은 둘 다 영국에게 대항하였으나 실패하고 18세기 말(마이소르) 내지 19세기 초(마라타)까지는 투항하고 만다.
과거의 보호자 아와드가 마라타와의 대립으로 약화되고 다른 보호자 마라타는 내우외환에 빠져 있었던 1772-1782년 간에는 황제 샤 알람 2세와 무굴의 마지막 군사 영웅 미르자 나자프 칸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무굴 제국이 마지막으로 짧은 군사적 부흥기를 맞는다. 이때 무굴은 어느 정도 군사적 근대화와 북인도에서의 세력과 권위 회복에 성공하나, 이마저도 미르자 나자프 칸의 사후 무굴군 내부 파벌 투쟁과 마라타의 재개입으로 물거품이 되고 다시 무굴은 마라타의 보호국으로 돌아간다.
제2차 영국-마라타 전쟁의 와중에 수도 델리가 영국에 점령되어(1803) 완벽하게 영국의 꼭두각시가 된 19세기에도 무굴 제국은 명목상으로나마 50여 년간이나 존속할 수 있었지만(영국의 보호국 처지이기는 하나 번왕국으로 취급되지 않았으며, 명목상 다른 번왕국 위에 있는 위치로서 황제의 권위를 인정받았다), 마지막 황제 바하두르 샤 2세세포이 항쟁을 뒤에서 지원하자 영국은 세포이 항쟁을 진압하고 포로가 된 바하두르 샤 2세를 폐위하여 추방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무굴 제국은 멸망한다(1857년). 그렇게 인도 최후의 왕조인 무굴 제국은 330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문제는 330년 중 거의 150년이 혼미한 상태였다는 것이지만...
이렇게 무굴 제국을 없애고 나머지 남인도 및 스리랑카, 심지어 버마까지 병합한 영국은 전 인도를 아우르는 단일 거대 식민지인 '''인도 제국'''을 1877년 수립하기에 이른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4. 문화


무굴 제국 시기 인도의 문화는 다양한 방면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시대에 형성된 건축, 미술, 문학, 음악 등은 오늘날까지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런 부분에 있어 무굴 제국 시대는 이전 굽타 왕조 이후 북인도 문화의 제 2의 정통 시대라 볼 수가 있다. 이 시대의 문화적 특성은 전통의 힌두교 문화와 튀르크 – 페르시아 문화의 융합이라고 할 수가 있다. 사마르칸트에 있던 티무르의 후손들의 궁전은 서아시아중앙아시아의 문화 중심지로 발전하였는데, 이러한 문화적 배경에서 자라온 바부르는 인도에 정착한 후 당시 다양한 인종과 신앙 속에서 제각기 발전해 온 인도 문화를 하나의 기준을 가지고 새롭게 정립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무굴 제국민들은 건축분야에서 아주 돋보였는데, 그들은 수많은 성과 왕궁, 문, 공공건물, 모스크, 저수 탱크 등을 세운다. 바부르는 특히나 정원을 좋아하여 아그라라호르 지역에 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었다. 이러한 정원들 가운데 카슈미르의 니샤트 바그, 라호르의 샬리마르, 펀자브의 핀조레 정원 등은 오늘날에도 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성과 같은 거대한 건축물들은 악바르 시대에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악바르 때에는 붉은 사람으로 만들어진 유명한 아그라 성과 파테푸르시크리의 성, 그리고 샤 자한 때 이르러 완성된 델리의 붉은 요새는 현대에 와서도 많은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내고 있는 대표적인 건축물들이다.
[image]
인도 델리에 있는 붉은 요새
악바르는 자신의 라지푸트족 출신의 후궁들을 위하여 구자라트 양식을 도입하기도 하고 페르시아의 양식을 본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페르시아의 양식은 후에 무굴 제국의 중요한 건축 양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샤 자한 때에는 섬세한 힌두 장식과 조형미가 더해져서 웅장하면서도 세련된 이슬람 건축물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그중 대표적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나 타지마할이다. 하지만 위에 샤 자한 항목에서도 나와 있듯이 이는 무척이나 돈이 많이 들어가기도 했거니와 백성들의 피로감도 상당하다는 부정적 모습들도 보여졌다.
자한기르샤 자한 시기에는 이러한 건축물들 말고도 다른 부분에서도 두각을 보였는데, 이들은 튀르크어페르시아어에 관심이 많았고 덕분에 많은 문학작품들과 역사서 또한 페르시아어로 기록되는 일이 많았다. 그 외 산스크리트어와 같은 힌두 작품들도 이들 언어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페르시아의 천문학철학을 받아들여 무굴 제국 내의 학문과 접합시키기도 하였다. 이 외에 예술 분야, 의복, 예절 등에서도 페르시아의 것을 모범으로 삼았다.
이 시기의 공예품들은 일반적인 백성들과는 거리가 먼 상류층들의 사치품들이 발달해 나갔다. 주로 금, 은, 보석 등으로 장식한 무기와 장신구, 섬세한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진 그릇 등이 대표적이다. 질 좋고 화려한 비단벵골 지방의 고급 면직물도 이들의 사치품이었다. 음악에서도 음의 높낮이와 빠르기가 강조되었는데, 인도의 전통악기로 알려져 있는 시타르와 타블라도 이것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의복으로는 페르시아의 스카프, 파자마 등이 유행하였으며, 인도의 전통음식들과 서아시아의 음식들이 어우러진 새로운 형태의 음식들이 탄생하기도 하였다.
[1] 오늘날에는 아그라의 일부.[2] 초기 한정.[3] 단, 관념적인 인도인의 개념은 이미 기원전부터 제시되어 왔으나 공통의 민족정체성을 가진 인도 민족의 확립은 근대화 이후의 일이다.[4] 악바르 시대 한정으로 여러 종교의 공존과 혼합이 인정됨.[5] 라지푸트족 정권[6] 카라니 왕조[7] 알람기르 1세라고도 한다[8] https://ko.m.wikipedia.org/wiki/무굴_제국#/media/파일:Imperial_Seal_of_the_Mughal_Empire.svg, https://ko.m.wikipedia.org/wiki/무굴_제국#/media/파일:Mughal_Empire_(orthographic_projection).svg[9] 인디아의 음차. 산해여지전도(山海輿地全圖, 1609) 표기[10] mogul 혹은 moghul이라고 쓰기도 하는데 해당 단어는 남아시아의 "거부", "장자"라는 의미로 쓰이기에 mughal이라는 표기를 주로 사용한다.[11] 힌두교도, 시크교도, 자이나교도 등등.[12] 사실 히말라야 뿐만이 아니라 중화 지역 자체가 티베트 고원, 타림 분지, 쿤룬 산맥, 톈산 산맥, 준가르 분지, 몽골 고원과 같은 험준한 지형으로 온통 둘러쌓여서 대국의 침략을 받을 일이 매우 적었다. 몽골 제국을 제외하고는 딱 두 번 서역과 군사적 갈등이 있었는데 첫번째가 아바스 왕조와의 탈라스 전투인데, 당나라가 패배했다. 그리고 두번째는 티무르 제국티무르몽골 제국의 복수를 하겠다고 영락제명나라 원정을 대대적으로 준비한 적이 있는데, 원정길 도중 급사하는 일이 있었다.[13] 다만 아우랑제브강희제의 치세는 대략 일치한다.[14] 호랑이를 뜻하는 페르시아어가 babr인데, 여기서 파생된 이름이다.[15] 티무르의 셋째 아들 미란 샤의 자손이다.[16] 모계로 모굴리스탄의 유누스 칸의 자손인데 그는 징기스칸의 둘째인 차가타이 계통이다.[17] 물론 티무르제국은 무굴제국 전성기처럼 인도 거의 전체를 정복하진 못했고 북인도 일부였다. 바부르는 어떤 의미론 청출어람.[18] 후마윤은 이 와중에도 사마르칸트에 대한 집념을 못 버리고 중앙아시아로 갔다가 우즈베크족에게 털리고 인도로 갔다(...)[19] '''도서관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 그리고 후마윤의 할아버지 곧 초대황제 바부르의 아버지는 바부르가 열한 살 때 벼랑에서 새랑 같이 놀다가 실수로 헛디뎌 떨어져 죽었다.(.....)[20] 묘하게 청나라강희제와 서로 연상되는 부분이 많은 명군이다.[21] 이름이 '조다'로 알려져있지만, 그 밖에 다른 여러가지 이름이 있다. 인도 영화 '조다 악바르'는 이 공주와 악바르 사이의 이야기이다. 영화에서는 조다 공주가 잘랄루딘 무함마드(악바르의 본명)의 유일한 부인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악바르에게 부인이 36명이나(!) 있었다.[22] 바부르, 후마윤과 함께 인도로 온 기존 무굴 제국의 지배층, 즉 중앙 아시아 출신의 튀르크인들을 견제하기 위함이라 추측된다. 튀르크인들이 중앙 집권 체제와 왕권 강화를 아주 싫어했던 것은 이 시절도 여전했던 모양이다.[23] 본문에는 이것(= 딘 일라히)이 하나의 확실한 종교라 서술되어 있었지만, 사실 소수설이다. 다수설은 악바르가 단지 이슬람의 (이단적인) 종파를 만들었다는 것. 악바르가 만든 종파는 악바르를 (준)성인으로 칭송했다. 이는 악바르가 그 자신의 신민들에게 그 자신에 대한, 더 나아가 무굴 황실 그 자체에 대한 충성에 신성성을 더해주기 위함이라 추측된다. 그에 대한 일례로 악바르의 사후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자한기르는 딘 일라히의 주장 대부분은 폐기했지만 왕권의 강화에 도움이 되는 부분은 모두 남겼다. 또, 종교적 경직성으로 많은 비난을 받는 아우랑제브도 왕권의 강화에 도움이 된다면 악바르의 이단적 주장을 실행에 옮기는데 망설이지 않았다. 후일 무굴 제국이 영국에 대항하는 저항에 지도자로 추대된 것 역시 악바르의 종파가 남긴 영향이라 평가된다.[24] 이 종교/종파가 지나치게 악바르의 후빨을 한 탓에, 악바르의 이와 같은 행위를 노망이 아닌가 하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이 종교/종파를 악바르가 선포했을 때 악바르의 나이는 고작 40살에 지나지 않았는데![25] 추가하자면 악바르가 이 종교를 창시한 목적은 위에 나온 바와 같이 힌두, 이슬람, 시크, 자이나 등 당시 인도 아대륙에 존재하던 여러 종교들을 통합하는 것에 있었다. 각 종교의 좋은 점(본인의 생각에)들을 짬뽕하여 만든 것이 바로 악바르의 종파였다.[26] 재미있는 것은 무굴 제국의 행정 체계는 사실 후마윤을 인도 바깥으로 추방했던 셰르 칸 수리의 체계에 기반하고 있다.[27] 무굴 제국에 악바르라는 희대의 명군이 있었다면, 명 제국에는 만력제라는 희대의 암군이 있었다...[28] 툴시다스의 주저 '''람차리트마나스'''는 산스크리트 서사시 라마야나를 힌디어의 방언인 아와디어로 개작한 것으로 북인도에서 가장 인기있는 경전이자 서사시 중 하나로, 2010년도 기준 단일출판사 누적 판매량이 7천만 부 정도였다. 단테의 신곡이나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과도 견줄 만한 작품임에 틀림없으나, 외부적인 인지도는 발미키의 원본 '라마야나'에도 훨씬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 유감.[29] 그래서 외국의 사신들이 자한기르에게 티무르와 관련된 유물을 선물로 주거나, 유물을 미끼로 우호 관계를 맺으려고 했단다.[30] 하지만 이 타지마할 덕에 세계사적으로 무굴 제국의 문화적 가치가 드높아지게 되었다.[31] 알람기르 1세라고도 한다[32] 아우랑제브 또한 죽기 직전 '나는 전쟁을 너무나도 좋아했다.'라며 후회했다.[33] 아이러니하게도 데칸은 아우랑제브가 최초로 부왕을 지냈던 봉지였다.[34] 무굴 제국의 마지막 위대한 황제[35] 이 과정에서 중앙에서 파견된 새 데칸 총독과 전투가 벌어졌는데(샤카르 케다 전투), 카마루딘 칸이 승리한다.[36] 이보다 이른 1713년에 카르나타카 나와브사아다툴라 칸 역시 명목상 무굴의 종주권만 인정하는 세습 체제를 구축해 떨어져나가 있었다.[37] 구체적으로는 그 가운데 신데 가문 세력[38] 하이다르 알리가 왕위를 찬탈하기 이전에는 힌두 왕국이었다.[39] 플라시 전투 이후 영국 동인도회사의 약탈적 이윤추구에 반발한 벵골 나와브 미르 카심은 아와드 나와브 슈자 웃다울라(당시 무굴 제국 대재상이자 사실상 무굴 제국의 보호자), 무굴 황제 샤 알람 2세와 연합하여 벵골의 완전한 주권 회복을 위해 대대적으로 영국군을 공격하나(북사르 전투, 1764) 패배하고, 이후 벵골은 완벽히 영국 식민지나 다름없는 처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