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더스하우젠 전투
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58년 7월 23일 프랑스군과 헤센군이 하노버의 잔더스하우젠에서 맞붙은 전투. 프랑스군이 승리를 거뒀으며, 이 때문에 크레펠트 전투 승리 후 라인강을 넘어 프랑스 영토로 쳐들어가려던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의 계획이 중단되었다.
2. 배경
1758년 6월,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의 지휘하에 라인 강의 서쪽 지역에서 프랑스군을 밀어붙였고 6월 23일 크레펠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브로이 공작 빅토르 프랑수아의 지휘를 받고 있는 프랑스군 분견대가 라인강 동쪽 지역에 위치해 연합군 보급선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해 7월, 브로이 공작은 적의 보급선을 차단해 프랑스 본토가 연합군에게 짓밟히지 않게 하기 위해 헤센으로 진격했다.
3. 양측의 전력
3.1. 프랑스군
- 사령관: 브로이 공작 빅토르 프랑수아
- 병력: 8,500명
3.2. 헤센군
- 사령관: 이센부르크 왕자 프린츠
- 병력: 6,500명
4. 전투 경과
7월 23일, 아침, 이센부르크 왕자 프린츠 휘하의 헤센 분견대는 프랑스군이 자신들 쪽으로 진군해오고 있다는 첩보를 접했다. 이에 그들은 철수를 결정하고 카셀 근처에 위치한 숙영지를 정리한 뒤 오전 11시에 행군을 시작했다. 이때 그들은 카셀 교외 근처에 일부 부대를 배치해 베텐하우젠 마을에 주둔하고 있던 예거 부대의 퇴각을 지원하게 했다. 그 후 브로이 공작은 보병대와 척탄병들을 파견해 카셀 교외를 점령하고 군대를 더욱 진군하게 했다. 그날 정오, 보병대는 즉시 읍내로 진입해 카셀을 장악했다. 이후 브로이 공작은 보병대와 척탄병들을 교외로 내보내고 전 병력을 베텐하우젠과 잔더스하우젠 사이에 전개했다. 그러면서도 2개 보병 대대를 카셀 마을에 주둔시키고 또다른 보병 대대를 잔더스하우젠으로 보냈다.
한편 이센부르크 왕자는 민덴으로 향하는 도로로 진군했다. 그 후 그는 잔더스하우젠에 입성해 적의 공세로부터 방어 태세를 갖추기로 했다. 이곳 근처엔 가파른 고원이 있어서 수비하기에 용이했다. 왕자는 우측면을 풀다 방면의 가파른 비탈에 배치하고 좌측면은 능선 위의 엘렌바흐 숲에 배치했으며 고지에 소규모 병력을 배치했다. 그의 군대는 주로 민병대, 비정규 보병대, 그리고 몇몇 정규 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민병대와 비정규 부대는 자신이 전부터 보유하고 있던 소총으로 무장한 경험 많은 사냥꾼들이었다. 한편 이센부르크 왕자는 모든 기병대를 좌익에 배치해 평원에 진입한 프랑스군을 상대하게 했다.
오후 3시, 모든 프랑스 부대가 배치를 완료하자, 브로이 공작은 공세를 개시했다. 그는 두 개의 포병 여단 중 열개 대포들을 숲에 배치하고 헤센 기병대를 향해 발사하게 했다. 한편 스위스 여단장 발드너와 디스바흐는 로얄 듀스-퐁스 보병여단 3개중대와 4개의 대포와 함께 엘렌바흐 숲에서 하노버 예거 부대와 격돌했다. 헤센 기병대는 프랑스 포병대의 포화에 대응하여 프랑스 보병대를 공격하기 위해 전진했다. 이를 목격한 브로이 공작은 디즈바흐 보병대와 로열 듀스-퐁스 보병여단 1개 대대를 후방에 배치해 발드너 보병대와 로열 발비에르 보병대를 지원하게 했다.
그 후 브로이 공작은 라우그리브 장군 휘하의 기병연대를 보병 전선에 투입해 우측에서 생긴 간격을 뚫고 전진시켰다. 헤센 기병대는 프랑스 기병대가 보병 앞으로 전진하는 것을 보자 프랑스군 좌익을 향해 우측으로 이동했다. 브로이 공작은 즉각 좌측에 있는 드래곤 부대를 투입해 이들의 움직임을 견제하게 하고 좌익 보병대를 전진시키게 했다. 이들의 움직임은 헤센 기병대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얼마 후 라우그리브 장군 휘하의 기병 연대가 적 기병대를 공격했으나 격파당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 우익의 보병대 좌측면은 기병대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바로 이 순간, 이센부르크 왕자는 헤센 부대의 우익과 중앙의 보병대에게 진군을 명령했다. 이에 이들 부대는 재빨리 프랑스군 좌익으로 진군했다. 프랑스군 좌익을 결성한 보병부대를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이들이 가파른 비탈에 몸을 숨긴 채 총격을 퍼부은 반면 프랑스군은 탁 트인 평원에 서 있어서 고스란히 총격 세례를 맞아야 했다. 결국 프랑스 좌익 부대는 어쩔 수 없이 후방으로 물러났고 헤센군은 가파른 비탈길을 따라 진군해 프랑스군 후방으로 향하려 했다. 브로이 공작은 이들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 일부 기병대대와 드래곤 몇개 분대를 투입했다. 그러나 헤센 보병대대는 이들 기병대를 손쉽게 격파했다.
하지만 브로이 공작은 곧 적 민병대가 대열을 제대로 갖추지 않고 무질서하게 뒤엉켜 있는 것을 목격했다. 이에 그는 제1선의 보병부대에게 적을 향해 행진하라고 명령했다. 프랑스 보병대는 적을 향해 질서정연하게 진군한 뒤 총검을 앞세워 공격을 퍼부었다. 헤센군은 이에 맞서 싸웠으나 훈련이 덜 되어서 조직적인 저항을 하지 못했고, 결국 중앙 대열이 허물어지기 직전에 몰렸다. 이에 이센부르크 왕자는 퇴각 명령을 내렸다. 약 300명의 헤센인들은 강을 통해 탈출하다가 몇 명이 익사했고, 나머지 헤센 군단은 렌트웨르하겐으로 질서정연하게 후퇴했다. 오후 7시, 브로이 공작은 헤센군을 추격하기 위해 700명의 기병대를 투입했으나 도중에 중단했다. 이로서 잔더스하우젠 전투는 막을 내렸다.
5. 결과
프랑스군은 이 전투에서 677명의 사망자와 1,385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반면 헤센군의 손실은 56명의 전사자와 162명의 부상자, 250명의 포로였다. 프랑스군은 그 후 며칠 동안 헤센군 2천 명과 대포 15문을 추가로 포획했다. 이 포로들은 대부분 전투 후 버려진 민병대였다. 연합군 총사령관 페르디난트는 적의 이같은 행동을 목격하고 보급로가 위태롭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구나 8월 5일 미어 전투까지 치르면서 연합군이 이용하던 다리까지 위험해지자, 페르디난트는 마침내 8월 8일에 라인강을 건너 하노버로 귀환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서 프랑스는 본토가 연합군에게 짓밟힐 위기에서 벗어났다.